심해로 돌아온 자들 2
순백의 천칭과 혼을 보는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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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의 냉기가 심해 바닥까지 닿았다. 어쩌면 그들이 내린 눈을 구경하러 다녀오는 과정에서 몸에 묻은 냉기가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벽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이들 중 추위를 느끼는 것은 베르니체뿐이었지만, 어쨌든 그들은 겨울을 만끽하고 있었다.
밖에 쌓인 눈을 뭉쳐 만든 눈사람에 보랭 마법을 걸어 형태가 변하지 않도록 한 것을 난로 위에 올려둔 휘틀로다이우스의 원형이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짓고 바닥에 앉았다. 그 눈사람은 창조 마법으로 만든 검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떤 이야기를 나눠 볼까?”
“지난번에 하다가 만 이야기, 들려주겠어? 엘리디부스 차례잖아.”
그의 말에 베르니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억을 되짚는 듯,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엘리디부스를 보았다.
“역시 크리스타리움에서 네가 아르버트의 육체를 써서 나타난 것부터 해야겠지? 아니면 제노스의 몸을 썼을 때인가?”
“네가 내기를 제안한 곳부터 시작해도 되겠지. 아르버트의 육체를 썼던 때가 맞겠군.”
“그런가? 그러면 거기서부터 하자.”
베르니체가 처음부터 엘리디부스를 아모로트로 데려오기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자신에게 적대적이었고, 대화할 의지도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그와 대화하고 싶다는 마음은 가득했다. 문제는 그를 만난 것이 사람들이 많은 장소라는 것이다.
자신이 아르버트라 주장하는 자는 베르니체와 새벽 일행이 제1세계의 일원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더니 언젠가는 돌아갈 자들이 아닌 제1세계의 사람들이 세계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모두가 ‘빛의 전사’가 될 수 있고, 그 또한 일개 모험가였다는 말을 하는 자를 보며 식은땀을 흘리던 베르니체는 성견의 방으로 돌아가자는 위리앙제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저 사람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갈게. 사람들이 많으니 나에게 해를 끼치지는 못할 거야. 먼저 가 있어.”
베르니체는 그 말을 듣자마자 에메트셀크 때처럼 두 사람만 비밀스러운 약속을 잡으면 곤란하다고 말하는 야슈톨라의 어깨를 잡아 뒤돌려 세우고 가볍게 밀었다. 브리안과 크레프히, 아라나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아마 ‘새벽’ 멤버들과 베르니체가 따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베르니체는 인파를 헤치고 지나가 아르버트를 자칭하는 자의 앞에 섰다. 그도 마침 이야기를 마쳤기 때문인지, 돌아서려다 그녀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잠깐 사람들한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긴 이야기는 아닐 거야.”
“좋다. 기꺼이 그러지.”
베르니체는 그를 크리스탈 타워로 들어가는 계단 앞으로 데려갔다. 사람들도 그들을 보고 있고, 계단 위에서 위병도 보고 있지만 작은 목소리로 나누는 대화라면 그들에게 들릴 리 없었다. 베르니체는 앞에 선 자에게 귀를 빌려달라고 말했다. 그는 순순히 몸을 숙여주었고, 베르니체는 그의 귀에 속삭였다.
“어차피 네가 엘리디부스인 거 다 알아. 오늘 밤에 템페스트의 주인 없는 유적에서 봐. 혼자서 기다릴 테니까. ……꼭 와줘야 해.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시간을 낼 수 없거든. 너도 바빠 보이고.”
귀에 속삭인 말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확인시키기 위해 은은한 미소와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 그녀는 몸을 돌려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가 정말 와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베르니체는 그가 와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 이후 그를 잠깐이나마 마주한 것은 라케티카 대삼림이었다. 눈치챈 것은 베르니체뿐이라고 생각했던지 여전히 아르버트를 흉내 내는 그를 보던 베르니체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 해, 엘리디부스. 눈치챈 건 나뿐만이 아니니까.”
“……뭐, 너희를 속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어.”
베르니체는 숨기지 않고 정체를 밝히는 그와 ‘새벽’ 멤버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는 “에메트셀크가 그들의 발자취를 맡긴다는 결말에 대해 생각해달라”는 말을 듣고는 그답지 않은 짓을 했다며 잘못된 견해를 가진 자가 있다면 바로잡는 것도 자신의 임무라고 말했다. 그 이후 이어진 말은 베르니체의 목을 타고 어떤 말들을 기어오르게 했다.
“애초에 불완전한 것들의 역사를 보란 말이야. 100년 전 아르버트에 관한 사실조차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있었잖아. 그리고 지금 주민들은 내 말 한마디에 태도가 돌변하고 있지. 에메트셀크에 관한 사실도 어차피 그렇게 되지 않겠어?”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을 거야.’
“그래, 너희들은 늘 그런 식이야……. 망각하고, 곡해하고, 그 작은 손으로 무엇 하나 붙잡지 못한 채 모조리 다 흘리고 있잖은가. 그런 존재가 우리의 무엇을 ‘기억하겠다’고 하는 거지? 우리는 ‘불완전한 것’인 너희와 화해할 생각도, 이해할 마음도 없어……. 그럴 필요도 없고.”
‘다시 한번 더 생각해 줘.’
하지만 베르니체는 끝내 그 말을 입으로 내지 못했다. 그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황망히 서 있던 베르니체는 곧 ‘새벽’의 의견을 따라 그들에게 다가가기로 했다. 물론 템페스트 아래에 있을 세 사람에게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좋지만, 엘리디부스와의 싸움을 앞둔 것만 같은 지금은 그들에게 어떠한 단서도 물어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살아있다는 것은 ‘새벽’은 물론, 가장 가까운 브리안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향하게 된 이데아 보관소에서는 베네스라는 자를 중심으로 한 이들이 하이델린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이 그녀를 감쌌다.
‘엘리디부스를…… 조디아크에게?’
그 혼란은 우선의 일이 해결되고 난 후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이미 조디아크에 대해 수없이 들었고, 그와 가장 가까운 것이 엘리디부스인 것 또한 안다. 그런데 엘리디부스가 핵으로 바쳐졌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멍하니 하늘을 보던 베르니체는 하늘이 검푸른 빛에 물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주인 없는 유적’을 향했다.
그곳에 엘리디부스는 없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인지, 올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벌써 기다리다가 떠난 것인지도 모른 채 가만히 그곳에 서 있던 베르니체는 유적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그 형태와 주변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아마 그곳은 옛 시대에는 어떤 건물의 꼭대기였을 것이다. 에메트셀크가 재현한 건물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으니, 아마 그녀에게 허락된 구역 너머 어딘가에 재현체가 있긴 할 것이다. 애나이더 아카데미아에서도 본 기억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다른 건물들만큼 높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주변에 흔히 널린 특이한 형태의 암초는 아마 옛 시대 아모로트의 도보였을 것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암초에서 드러난 건축물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렇게 눈을 감고 풍경을 그려보던 베르니체를 공상에서 끌어낸 것은 그녀가 기다리던 목소리였다.
“정말로 혼자 왔을 줄은 몰랐군. 할 말이란 게 뭐지?”
“나야말로 부른다고 해서 네가 이렇게 순순히 와줄 줄은 몰랐는데. ……비록 일부만 보인다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건축물이야. 그렇지?”
그 말을 들은 엘리디부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에게 있어서는 악몽이 떠오르는 풍경인 걸까. 하지만 베르니체는 그 표정을 보지 못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지금 그런 것을 배려하면 대화의 기회를 놓칠 터였다.
“우리는 대화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잖아. 너는 나중에 느긋하게 대화하자고 해놓고 찾아오지도 않고, 나를 부르지도 않았지. 그래서 내가 부른 거야. 넌 우리와 화해할 생각도, 우리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고 했지만…… 난 원하거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있으면 나도 마음 편히 말할 수 없고, 너도 방해는 원치 않을 거 같아서 정말 혼자 왔어.
엘리디부스, 네 말대로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세상을 구했던 영웅조차 시간이 지나면서 역적이 되었지. 이번에 내가 그들의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까지도 그랬을 거야. 그들을 위해 한 일이 어쩌다 보니 널 도운 결과가 됐지만, 뭐…… 상관은 없어. 네 덕분에 그 사람들의 누명도 더 빨리 벗겨진 거 같거든. 게다가 내가 바라던 대로 사람들이 스스로 일어서기까지 했으니 고마울 지경이지. 네 속셈이 어떻든 말이야.”
“그 웃음이 어디까지 갈지 지켜보도록 하지.”
“마음대로 해. 난 네가 네 시대의 이야기를 똑바로 전해줬으면 해. 에메트셀크와 기억하겠다고 약속했고, 나도 그 약속을 위해 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지만, 결국 내가 그 시대를 산 것은 아니라서 지금을 기준으로 판단하게 돼. 게다가 내가 죽고 나서 시간이 오래 흐르면 그 기록도 결국 변하고 말겠지. 당장 내가 남긴 기록에도 분명히 잘못된 게 있을 거야. 그런 것들을 바로잡아 줄 사람이 필요해. 또 혹시라도 먼 미래에 균형이 흐트러진다면, 그 흐름을 감지하고 바로잡을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도 필요하지.”
“화해라도 하자는 소리인가? 그럴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예상한 대답이었다. 베르니체는 어깨를 으쓱이고 다시 건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더없이 그리울 장소의 흔적에서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그의 분노를 건드릴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런 장소라서 자신을 속이려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기를 제안하려고, 어때, 흥미가 좀 동해?”
“내기라고?”
“만약 내가 지면 내 혼과 육체, 그리고 기억까지. 모두 네게 줄게. 하지만 네가 진다면, 네가 살아있다면 넌 네 시대의 이야기를 전하는 존재가, 세상의 균형과 흐름을 지켜보는 세상의 조정자가 되는 거야. 어때? 내 모든 걸 이용하면 새벽까지도 세계 통합에 이용할 수 있을 텐데. 불리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가 예상하지 못한 제안인지, 엘리디부스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눈이 가늘어졌다. 아마 그는 베르니체의 의중을 파악하려 애쓰는 중일 터였다. 유감스럽게도 베르니체는 그에게 숨긴 것이 없었다. 베르니체는 그가 생각에 잠긴 동안 검은 페가수스를 불러 그 갈기를 빗겨주며 다시 유적을 바라보았다. 에메트셀크도, 휘틀로다이우스도 그 건물이 어떤 용도였는지는 대답해 주지 않아 상상만 하던 것이다. 재현된 아모로트의 건물 대부분이 꼭대기가 평평했던 것을 생각하면, 장식이 있던 것은 대의사당을 포함해 그 시대의 종말을 재현한 환영 속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던 것 생각하면 아마 이 건물도 그런 중요한 기관일 수 있었다. 나중에 세 사람에게든 엘리디부스와 화해한 이후에든 고대인들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녀를 끌어낸 것은 엘리디부스였다.
“좋다. 받아들이지. 왜 내가 살아있을 것을 조건으로 달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백성석을 쓸 지경까지 간다면 넌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 난 내 전력을 다할 거야. 그러니 너도 그렇게 해줘, 엘리디부스.”
아르버트의 모습을 한 자는 코웃음을 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그 자리에 남아 페가수스와 둘이 건물을 바라보던 베르니체는 곧 페가수스의 등에 올라탔다. 빛나는 붉은 깃털이 돋아난 검은 날개가 빛나는 해저 도시를 향해 날갯짓했다. 이제 남은 것은 엘리디부스와 조디아크의 관계에 대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을 자를 알았다.
베르니체는 목걸이의 수정 장식을 감싸 쥐었다. 수정을 감싼 은장식이 손을 찔러 욱신거렸지만, 혼란을 가라앉히기에는 부족했다. 게다가 평소보다 긴 거리이기 때문인지, 대의사당은 좀처럼 가까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혼란과 초조함을 안고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건물 인근에 도달했을 때, 마침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을 본 베르니체는 그를 부르며 페가수스가 땅에 내려서기도 전에 뛰어내렸다.
“라하브레아!”
위에서 떨어지며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라하브레아가 손을 뻗자, 보이지 않는 손이 끌어안듯 그녀를 받아내더니 천천히 내려 라하브레아의 품에 안겨주었다. 라하브레아가 베르니체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무렵 라하브레아는 처음보다 많이 유했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들떠 이리 위험한 일을 벌이는지 들어볼까. 내게 곧장 올 정도라면 보통 일은 아니었을 테니.”
“이 정도 높이로는 다치지도 않는걸요. ……엘리디부스에 관해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에 관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라하브레아가 내려주며 한 말에 부정할 것은 없었다. 그를 붙잡은 날 내건 조건이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 했던 합의가 있었다.
“하지만 제가 알게 된 것에 대해서는 대답해 주기로 했잖아요.”
“……어쩔 수 없군. 무엇을 알아냈는지 한 번 들어볼까. 들어가지.”
황금빛 복도로 들어가는 그의 곁에서 엘리디부스를 마주쳤던 일과 애니드라스 아남네시스를 찾아간 일을 짧게 풀어놓고 나니 벌써 그의 사무실 앞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를 따라가 손님용 소파에 앉은 베르니체는 차를 내어주려는 그에게 고개를 저어 거절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엘리디부스가…… 조디아크의 핵이 되었다면서요? 그러면 당신들과 함께했던 그 사람은 누구예요?”
“……그래. 그것을 알아냈고, 확인하고 싶어서 내게 온 것인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네가 상대하는 이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네가 찾아야 할 답이로군.”
“그러면 이거라도 대답해 줘요. 제 원형이 정말 하이델린의 창조에 협력한 것이 맞나요? 아남네시스에서 본 기록에서는 그 사람이 중립을 유지하려는 것인지 그들의 제안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고 했어요.”
라하브레아는 그 말에 한동안 베르니체를 쳐다보았다. 살짝 벌어진 입을 통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던 것은 그도 마찬가지인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다시 입을 다물더니 고개를 돌렸다.
“이리스가 떠난 것은 엘리디부스가 12명의 결의를 받아들여 ‘별의 의지 창조 계획’을 진행하기로 했을 때였다. 엘리디부스를 제외한 13명 중 유일하게 반대하던 그 녀석은……. 엘리디부스의 결정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고 좌를 내려놓고 떠났지. 그리고 그 후 제대로 된 만남은 없었다. 내가 조디아크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불렀을 때도 대화라 할 만한 것은 하지도 못한 채 녀석이 떠났지. 하지만 하이델린이 창조되었을 때, 그것에게서 분명히 녀석의 에테르가 느껴졌어. 에테르를 빌려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녀석은 협력한 거야.”
“……그 에테르가 위장일 가능성은 없었나요?”
“설령 그것이 위장이라 한들, 14인 위원회로서 별의 미래를 위한다는 사명을 저버린 배신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너마저 증오하지 않도록 해주겠나. 너도 내게서 버려지고 싶지 않을 테니.”
가면 아래로 서늘하게 빛나는 호박색 눈을 보던 베르니체는 입을 다물었다. 분노를 억누르는 것인지, 아니면 슬픔을 억누르는 것일지 모를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에 앉은 베르니체는 그를 조용히 끌어안았다. 결국 그날은 의문만 남은 채 흘러갔다.
이후 엘리디부스를 다시 만난 것은 그와의 결전이 있던 때였다. 정확히 한다면, 산크레드와 위리앙제에게 생긴 이변에 야슈톨라가 걱정되어 찾아갔을 때. 그는 베르니체의 힘을 측정한다는 이유로 기절한 야슈톨라를 납치했고, 베르니체를 아모로트로 불러들였다. 그 도시에 두 원형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지 그곳의 환영을 하나하나 바꾸어 가며 베르니체의 여정을 되짚어 주던 그의 도착지는 아마 그가 자주 시간을 보냈을 대의사당이었다. 라하브레아의 존재를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가 되었기에, 베르니체는 어떻게든 그를 다른 장소로 데려가고 싶었다. 그리고 엄숙한 장소에서 싸움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엘리디부스. 네가 날 측정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아. 하지만 이곳에서는 안 돼. 엄숙한 장소였잖아.”
“그게 어떻다는 거지? 그래보았자 환영이다. 그리고 나는 내 사명을 위해 너를 이곳으로 데려왔지. 사명을 수행하던 장소에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이상한가?”
그는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온 모양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베르니체는 더욱더 그를 막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무기를 고쳐 쥐었다.
그곳에서의 길지 않은 싸움이 끝나고 나서는 탈출한 야슈톨라가 합류해 엘리디부스가 조디아크에게서 빠져나온 것을 알게 되었고, 엘리디부스는 계획의 이면을 보여주겠다며 떠났다.
그리고 짐을 가지러 간 야슈톨라를 기다리는 동안 별자리가 새겨진 크리스탈을 주우며 걷던 그녀는 휘틀로다이우스에게 자신이 주운 크리스탈에 관한 이야기와 그녀의 원형, 이리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녀의 마법이 담긴 크리스탈을 받았다. 그러고서는 어떤 이유에선지 깨어난 이리스의 부름에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엘리디부스를 막겠다는 약속을 나눈 후 깨어났고, 그대로 율모어로 돌아갔다가 제1세계를 덮은 종말의 환영과 쉴 틈 없이 소환되는 ‘빛의 전사’들의 환영을 상대해야 했다.
그 길을 나아가는 동안 수많은 이가 길을 열어주었고, 베르니체는 그들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새파란 수정탑에서 ‘빛의 전사’가 된 그와 마주했을 때, 크리스탈로부터 에메트셀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랫동안 이름만 듣거나, 그녀의 원형을 아모로트로 데려왔던 이의 이름으로 위장되었던 14번째 자리의 진짜 이름을.
– 그 생명이 다할 때까지 지상의 별들을 연결하려 했던, 친애하는 자의 기억을 여기에. 비록 지금은 천지에 가로막히고 서로 끊어진 마음이라 하더라도, 네가 손을 뻗어 끌어당긴다면 운명이 따르리라. 제14번째 좌, 그 이름, 아젬. –
아젬이 아젬이 된 이유였다는 술식으로 불러온 ‘별’과 함께 엘리디부스를 넘어선 베르니체는 결국 그에게 제안한 내기의 끝이 이런 결과인 것이 안타까웠다. 그의 시선으로 본 옛 시대를 알고 싶었지만 영영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결국 그 또한 사람들이 웃는 모습을 바라던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도. 14인 위원회의 크리스탈, 그중에서도 라하브레아와 이게요름의 것을 손에 쥔 그의 혼은 이내 산산이 부서져 하늘로 올라가다가 크리스탈 타워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베르니체가 그를 아모로트로 데려오게 된 이유였다. 라하브레아와 에메트셀크와 함께였음에도 혼자였고 서서히 자아가 무너져 간 그를 그 탑에 혼자 둘 수 없었다. 자신이 할 일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베르니체는 움직였다.
제1세계를 돌며 작별 인사를 하고, ‘새벽’ 멤버를 원초 세계로 귀환시키고 잠깐의 기쁨을 나눈 베르니체는 그들과 오래 머물지 않았다. 엘리디부스를 탑 지하에서 끌어내기 위해 ‘새벽’ 일원들에게는 피곤하다는 이유를 대며 슬쩍 빠져나와 아모로트로 향했고, 에메트셀크를 찾아갔다.
“엘…….”
“에메트셀크. 엘리디부스를 수정탑에서 꺼내야 해. 도와줘.”
– 모두를 구원할 수는 없어. 때로는 잃을 수밖에 없지. 그렇게 숱하게 겪었으면서도 너는 그 ‘상실’을 어떻게 해서든 거부하고 싶은 거니? 상대가 적인데도? –
엘리디부스와 어떻게 됐냐고 물어보려는 것 같던 이의 말을 자르고 그 말을 하는데, 내면 깊은 곳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것 같기도, 아니면 의식의 틈새에서 만난 원형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베르니체는 가슴의 통증을 느끼고 손을 얹으며 말했다.
“……때로는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걸 알아. 내 행동이 내가 바라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그 안에 혼자 두고 싶지 않아. 앞으로 얼마나 더 그 안에 혼자 있게 될지도 모르고, 그 시간 속에서 겨우 떠올린 소중한 사람들과 기억을 잊어버릴지도 몰라. 그러니 어떤 결과가 나온대도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보고 싶어. 도와줘.”
“질린다, 질려……. 나를 뭐든지 이루어 주는 이데아로 보고 있는 건 아니지? ……뭐, 그래도 흥미는 있으니 한 번 시도 해볼까.”
베르니체는 그것이 정말 흥미인지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에메트셀크가 실은 얼마나 상냥한지 알고 있었고, 그는 엘리디부스를 걱정했으니까. 게다가 그 행동으로 시작될 일을 책임질 것은 베르니체이기 때문에 자기 일도 아니겠다, 사고 한 번 치자는 생각으로 저지르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자신의 추측이었다.
그 생각을 알 턱 없는 에메트셀크 앞에 에테르의 흐름이 생겨났다. 뒤따라오든 나중에 걸어오든 알아서 하라며 그 안으로 먼저 사라진 이의 뒤를 따라가니 무수한 별이 드리운 밤하늘을 등진 수정공이 가장 먼저 보였다. 에메트셀크도 그의 혼이 떠난 빈 육신을 보나 싶더니 베르니체가 오자마자 에테르의 흐름을 없애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하고 짧은 말을 뱉는 그에게 찾았느냐고 물으니, 에메트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분명히 갇혀 있군. 근데…… 정말 괜찮겠어? 차라리 녀석을 저기다 가둬두는 게 네게는 더 안전할 텐데? 게다가 이 탑은 수정공의 마지막 카드였다며? 저 꼴이 되어가면서까지 봉인한 녀석을 풀어줘도 되는 거야?”
사실, 정말로 이것이 옳은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혼자 남는 것은 아무 소용 없으며, 혼자 남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뇌리에 박혀 이성 판단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자신 혼자서는 그 맑은 날도 어떤 의미가 없고, 혼자 남았기에 물러설 수 없었던 이. 그런 자가 다시 기회를 얻는다면, 그 기회를 버리려 할까.
하지만 베르니체는 그가 품은 그리움을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성실한 자이니, 자신과 한 내기를 저버릴 것 같지도 않았다.
“그 사람의 순수함을 믿어. ……게다가 저곳에 갇힌 이상 언제 다시 해방될지 알 수 없어. 그러니까…… 꺼내줘야 해. 조금이라도 일찍 동포들의 곁으로 보내려면, 그렇게 해야만 해. ……수정공, 그라하도 이해 해줄 거라 믿어…….”
“……나 참. 적까지 구원하려고 하는 영웅이라니,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좋아, 그럼, 어디 힘 좀 써볼까. 녀석을 떠올려. 그리고 부르는 거야. 그 시절의 너…… 아니지, 이리스를 동경했던 녀석이니 네 목소리에 반응할 거야.”
퉁명스레 말하면서도 손을 깍지 낀 채 팔을 쭉 펴 풀어주고 한쪽 손을 들어 올린 그가 다시 눈을 감았다. 베르니체는 뒤에 있는 수정공의 빈 육체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손에 쥔 아젬의 크리스탈을 보고 잠시 엘리디부스의 모습을, 그의 말들을 떠올렸다. 동포들을 사랑해서 다시 웃음을 되찾아 주고 싶었던 자. 오랜 집념과 망각.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무너져 간 위태로운 자. 에메트셀크와 라하브레아만큼이나 그녀로 인해 상처받아 잊어버렸을 자.
자신과 너무나도 닮은 그를.
“……엘리디부스.”
손에 쥔 크리스탈에서 열기가 느껴짐과 동시에 손가락이 맑게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앞에 에테르 한 덩어리가 나타났다. 그 속에서 잠든 듯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이에게 두 번째 핑거 스냅이 들리기 무섭게 새하얀 아씨엔 법의가 입혀지고 붉은 가면이 쓰였다. 베르니체는 성인의 모습인 그에게 달려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오는 몸을 받고, 끌어안았다. 에메트셀크가 천천히 곁으로 걸어오며 중얼거렸다.
“……저렇게 순수한 혼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엘리디부스. 눈 좀 떠 봐.”
“아……. 아젬……? 아니, 너는…… 이게 어떻게…….”
“일단 자리부터 옮기고 이야기해 줄게. 가자. 부탁해, 하데스.”
막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몽롱한 그를 제대로 품에 안은 채 에메트셀크를 보자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다시 한번 경쾌한 소리가 들리고, 세 사람을 감싼 풍경은 푸른 탑과 보라색 대지가 아니라 짙은 푸른빛을 품은 심해와 아름다운 환상 도시, 아모로트를 잇는 아코라의 탑으로 바뀌었다. 여전히 정신이 들지 않는 것인지 그대로 누워있던 엘리디부스가 상체를 일으키고 베르니체와 에메트셀크를 보았다.
“하……. 꿈을 꾸는 줄 알았군. 날 왜 되살렸지?”
“되살렸다기보다는……. 당신의 혼, 에테르를 크리스탈 타워에서 끌어냈다고 생각하는 쪽이 맞을 거야. ……크리스탈 타워는 에테르를 축적하는데, 당신의 혼이 거기에 빨려 들어가서…… 그곳에 가두어 둘 수는 없었어. 그래서 꺼내게 된 거야. ……당신이 그리워할 동포들에게 보내려면 그 탑에서 떨어진 곳에서 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두 번 죽이겠다는 건가? 하긴, 저지른 일에 비하면 자비롭군. 좋을 대로 해라.”
베르니체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그를 심판하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그의 행위에 대한 형벌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의 몫으로 그는 이미 한 번 죽었지 않았나. 그렇다고 해서 그를 용서할 생각도 없었다. 단지, 베르니체 스스로가 죽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만나게 해줄 사람이 있어. 일어설 수 있겠어?”
“만나게 해줄 사람?”
그의 목소리에 순간이나마 감정이 드러났다. 그러나 흐트러짐 없는 태도에 내심 감탄하며, 그녀는 두 사람과 함께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그녀는 대의사당을 바라보다가 곁에서 함께 걷는 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당신에게 라하브레아랑 이게요름은……. 어떤 존재였어? 마지막에 그 두 사람의 크리스탈을 쥐던데…….”
“……그냥 손에 잡혔을 뿐이야.”
“……그렇구나.”
엘리디부스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니체는 팔을 뒤로 돌려 뒷짐 진 채 걸으며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 말을 붙이고 싶었다.
“에메트셀크와 휘틀로다이우스에게 들었어. 널 아모로트에 데려온 게 아젬이었다고……. 혹시 기억해?”
“……글쎄. 잘 모르겠군. 그런 자가 누구인지도 몰라.”
“흐응……. 뭐, 이제 남은 건 시간뿐이니 천천히 떠올리라고.”
잠결에 베르니체를 그 사람으로 착각하고서는 인제 와서 모르는 척하는 그를 보며 어깨를 으쓱이는 에메트셀크의 말에 엘리디부스가 짧은 웃음을 흘렸다. 그것이 헛웃음인지, 자조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곤 잠시 뒤돌아 에메트셀크를 보았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네가 어디서 고대의 술식을 손에 넣었나 했더니, 죽은 줄 알았던 에메트셀크의 도움을 받았던 것인가. 어떻게 그를 네 편으로 휘어잡은 거지? 에메트셀크에게는 들을 이야기가 정말 많겠어.”
“난 내 판결의 결과를 받아들였을 뿐이야. 널 배신한 게 아니라고. 어때? 조정자로서 내 의견에 귀 기울여볼 생각은?”
“녀석과 한 내기를 저버릴 생각은 없다. 불멸자인 만큼 녀석이 생을 마칠 때까지 기다릴 여유도 있으니, 그동안 잠시 네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지.”
다시 침묵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당장은 적대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시간도 많겠다, 그동안 함께 지내다 보면 함께 돌려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무슨 말을 더 붙여야 할지 고민하던 그녀는 엘리디부스가 수정공에게서 빼앗은 술법을 기억해 냈다.
“엘리디부스. 부탁할 게 있어. 내기 결과의 연장선이야.”
“네가? 나에게?”
“크리스탈 타워에 봉인된 너를 굳이 이렇게 빼낸 이유는, 너를 별의 바다로 돌려보내기 위함이야. 그러니 네가 수정공에게서 빼앗은 술법을 절대 쓰지 않아 줬으면 해. 소환술은 물론, 혼과 기억을 옮기는 술법, 모두. 세계 통합도 포기해. 그게 다야.”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베르니체는 그 말을 듣고 고민 없이, 그러나 장난치듯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와 다시, 몇 번이고 싸우겠노라고. 그리고 계속,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현재의 영웅이지만, 달리 말하면 그 사람이 선택한 그녀의 대리자겠지. 여태까지의 난 그저 떠밀리듯 길을 걸었지만, 이제 내가 가야 할 방향은 명확해. 그 사람은 이전에도, 지금도 동포들의 등불이고 태양이니, 나는 남은 밤으로부터 그들을, 내가 사랑하는 세계를 지키고, 아직도 어둠 속에서 절규하는 세상을 비출 거야. 그리고, 마지막엔 아모로트에 있는 너희의 등불이 되어 별의 바다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것. 그게 내 일이야. 누구도 아파하지 않을 세상을 위해, 어둠 속에서 홀로 슬퍼하게 두지 않기 위해 아침을 가져올 거야.”
“……도구인 삶으로 그치겠다고?”
“음~ 아니. 모든 이들의 영웅이기를 선택한다는 쪽이 맞겠는데?”
고요함으로 가득 찬 도시에 유일하게 숨이 붙은 이의 맑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그녀는 짧은 웃음을 그치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서 춤을 추듯 돌며, 그의 앞을 막아서고는 그의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생기 없는 차가운 볼에 유일한 온기가 닿았다.
“그러니 내가 어둠을 밝히고 돌아오길 기다려 줘. 그럴 수 있지?”
“……아젬.”
“아, 하나 더. 난 그 사람이 아니야. 내게서 그 사람을 떠올리거나 보는 건 괜찮지만, 찾으려 하거나 동일시하지는 말아줘.”
그녀가 그를 데려간 곳은 대의사당이었다. 그렇게 격한 싸움을 했음에도 상처 하나 나지 않은 말끔한 복도를 지나 어떤 방 앞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그녀가 사랑하는 심연의 방이 코앞이었다. 베르니체가 손을 들어 그 무겁고 거대한 문을 세 번 두드렸다.
“들어오거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떨리는 목소리가 응하고, 베르니체는 입을 살짝 벌린 엘리디부스의 손을 잡고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매일 같은 내용의 서류를 반복해 읽던, 상냥하고도 현명한 금빛 불꽃이 그녀를 보았다가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존재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엘리디부스?”
“……당신보다 더 조디아크에게서 말끔하게 벗어난 엘리디부스죠. 내가 이겼어요, 라하브레아. ……말했죠? 난 당신들을 꺾을 거라고. ……그래도, 완전히 별의 바다로 보내고 싶어서, 그전까지만 여기 있게 할게요.”
“정말로…… 라하브레아인가?”
라하브레아는 그녀의 말을 듣고서 의도를 알아차린 것일지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나, 믿기지 않는다는 듯 휘청이며 걸어가는 엘리디부스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해 주었다. 얼마나 큰 싸움을 했으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냐며 소파로 데려가 앉히는 그의 손을 엘리디부스가 붙잡았다. 베르니체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고 미소 지은 채 그에게 말했다.
“……어리광 부려도 돼. 엘리디부스. 여기선 굳이 엘리디부스일 필요 없으니까.”
“난, 나는…… 내 오판으로 널 잃었다고 생각해서…….”
“……그래. 분명 죽은 몸이지. 어쩌다 이변이 일어나 이 죽은 도시에 서게 되었지만, 너까지 이런 몸으로 서게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군.”
“빛의 전사, 넌 대체 이들에게 무슨 짓을…….”
물기 어린 목소리가 건네는 질문에 그녀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에메트셀크를 보내고 휘틀로다이우스만 만나던 참에 어느 날 우연히 돌아온 에메트셀크를 마주친 것이고, 그들에게 라하브레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환영 도시에서나마 그리운 고향의 품에 안기기를 바라 가져온 가면에 깃들어 있던 그의 혼이 거품에 불과할지라도 육체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엘리디부스는 에메트셀크의 힘, 어쩌면 아젬의 소환술까지 사용해 가며 타워에 갇힌 혼을 끌어낸 것이니 엘리디부스를 제외하면 그녀가 바란 것도 마법을 부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쩌면.
“기적이겠지. 난 에메트셀크에게 너를 타워에서 끌어내달라고 부탁한 거 외에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렇지?”
“왜 자꾸 날 끼워 넣는 거야? 그래, 아무 짓도 안 했다, 안 했어. 여기서 유일하게 녀석이 의도하고 불러온 것은 너 하나뿐이야.”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이를 보며 웃었던 베르니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조디아크에게서 떼어냈다고 한들 결국 그들은 아씨엔이었다. 다시 그들이 세계 통합을 계획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며 셋 모두를 보았다.
“……또 덤벼들면 안 된다? 세계 통합도 안 돼.”
“그럴 의욕도 없다. 죽은 놈한테 움직일 거냐고 하지 마. 영감도 같은 생각인 거 같고, 엘리디부스는…… 뭐…… 적당히 회유해 보지.”
단순한 로브를 걸친 라하브레아를 끌어안고 손에는 가면을 든 채 얼굴을 어깨에 묻은 이를 보며 대답하는 에메트셀크에게, 베르니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원형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위험한 자들을 한데 모아두었지만, 에메트셀크의 말을 들으니 어째서인지 걱정되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된 후 엘리디부스는 한동안 아모로트의 거리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해서 대의사당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에메트셀크의 말로는 베르니체가 뭍으로 돌아간 직후 다시 기회를 노리자고 두 사람에게 제안했으나 두 사람이 그것을 거절하자 에메트셀크가 안내해 준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이후 그가 다시 방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은, 깨어난 아젬과 대화를 나눈 후라고 했다. 그 후로는 짧긴 해도 대화를 받아주고, 마주 앉아 있을 시간도 있었다. 여전히 적대적이고 매몰찼지만, 적어도 상대는 해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마지막으로 심해로 이끈 자는 휘틀로다이우스였다. 정확히 말하면 ‘진짜’ 휘틀로다이우스. 그를 아모로트로 데려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엘피스에서였다. 베르니체가 에메트셀크에게 14인 위원회에 들어간 이유를 물었을 때, 정작 그에게서는 듣지 못했지만, 카리브디스, 지금의 카누와가 비행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동안 휘틀로다이우스에게서 그 이유를 들을 때, 휘틀로다이우스는 아젬의 이야기도 함께 해주었다.
“정말 얼마나 유쾌한 친구들인지! 그 친구들의 바람을 이루는 것, 그게 내가 별에 할 수 있는 가장 큰 공헌이 아닐까, 해. 에메트셀크는 14인 위원회의 자리가 수명과도 같다고 했지……. 그렇다면 내 수명은 친구들의 수명과 같지 않을까 싶어.”
‘하지만 두 사람은…….’
베르니체는 그에게는 미래, 자신에게는 과거와 현재를 떠올렸다. 휘틀로다이우스는 최초의 별의 의지에 몸을 바치고 12,000년 동안 잠들어 있다가 조디아크가 소멸하고서야 별바다로 돌아갔고, 아젬은 위원회를 떠나 세계가 갈라진 후에도 별바다로 돌아가는 일 없이 물질계를 헤매다가 기억을 잃었다가 최근 기억해 낸 듯했다. 에메트셀크는 12,000년의 세월 동안 홀로 그들을 떠올리며 책임과 사명을 이행하다가 목숨을 잃었고, 어떤 가능성을 생각한 하이델린에 의해 조디아크의 힘은 깨끗하게 씻겨나간 채 템페스트의 아모로트로 돌아왔다.
‘결국 먼저 가는 건 휘틀로다이우스인가……. 되도록 함께하게 해주고 싶은데…….’
그러나 더 이상의 기적을 바랄 수는 없었다. 그 시점에서 휘틀로다이우스는 이미 별의 품으로 돌아갔으니, 엘리디부스처럼 끌어낸다 해도 형체를 지니고 있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미련은 미련으로 남기고, 그녀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큰 아픔을 마지막으로 한 채 떠나보냈다고 생각한 이를 다시 떠올리게 된 곳은 아이테리스에서 멀리 떨어진 우주 끝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길을 생각할 때였다. 자신의 힘이 깃든 아젬의 술식이라면 형태가 없는 자조차 형태를 부여해 불러올 수 있을 거라고 하던 하이델린의 말을 떠올리고, 별의 품으로 돌아가면 잊어버린 시간이 떠오를지 묻던 휘틀로다이우스를 떠올렸다. 창조 마법이라면 희생 없이 나아갈 수 있겠지만, 너무 쉽게 나아가려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울티마 툴레에 도착했을 때, 아마도 진짜 휘틀로다이우스가 자신을 본떠 만든 환영의 입을 빌려 에메트셀크와 함께 말했다. 나아가려고 하는 자가 있는 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법이니, 현 인류인 ‘새벽’이 끝내게 하겠다고.
그래서 부르기로 했고, 다행히 결과는 좋았다. 게다가 그 마음이 엘피스 꽃의 형태가 되어 남았다. 그것을 누군가가 꺾거나 불태우지 않는 한 우주가 끝나는 순간까지 그 자리에 피어 희망이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금 이별이 다가왔다.
“이봐, 작별 인사라도 하라고. 이 녀석을 돌려보내야겠으니.”
길이 열렸으니 가야 할 자는 가야 할 곳으로 가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들은 베르니체는 망설였다. 기껏 그에게 주어진 만남을 이렇게 보내기 아쉬웠다.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래도 이 여행의 시작에서 에메트셀크가 말했듯 만나면 헤어지는 법이니, 아쉬워도 나아가야 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다른 것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의 입을 억지로 움직여 목소리를 내는 듯도 했다.
“휘틀로다이우스. 나랑 같이 가자. 네게 새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에메트셀크가 만든 환영 도시도 말이지. ……그리고 두 사람의 수명이 네 수명일 거라며. 그럼 함께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지만, 당연히 거절당하리라 생각했다. 놀란 표정의 휘틀로다이우스를 보고 있자니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혹은 즐겁다는 듯 웃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쩔 수 없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렇게 할까? 게다가 에메트셀크만 너랑 같이 있는 건 조금 질투 나기도 하고, 너희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함께 돌아가는 것이 내 바람이니까 말이지.”
이야기가 끝나자, 휘틀로다이우스의 원형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렵 베르니체의 몸도 녹아 몸을 둘둘 둘렀던 담요를 반쯤 흘러내리게 둔 상태였다. 즐거운 표정을 지우지 않고 휘틀로다이우스의 원형이 말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된 거였구나. 사실 말이지, 내가 오게 된 날 말이지, 후후후……. 히슬로디는? 봤어?”
“응, 봤어. 아마 우리만 봤을 거야. 네가 내 원형…… 히슬로에게 같이 가자고 했을 때 말이지, 네 혼의 빛이 더 선명해지더라고. 그래서 그 사람도, 너도 내 원형과 함께하기를 바라는구나, 하고 물러나려 했던 거야.”
베르니체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도 별다른 질문 없이 수긍하고 넘어갔다. 엘리디부스와 맞설 때 받은 크리스탈로 인해 아젬이 깨어난 것을 알고 있었고, 휘틀로다이우스와 에메트셀크의 도움을 받아 답을 제시할 때부터 동료들을 불러올 때까지 함께 했으니까. 두 휘틀로다이우스를 바라보던 베르니체는 옆으로 쓰러지듯 누우며 곁에 있던 라하브레아의 무릎에 머리를 얹었다.
“새삼 많은 일이 있었다, 싶네. 앞으로는 이보다 더 많은 일이 벌어지겠지?”
“분명 그럴 거야. 오늘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모레가 더 즐겁겠지. 분명 힘든 일도 많겠지만, 그럴 땐 언제든 이곳으로 돌아와. 우리가 기다리고 있을게.”
분명 그리지 못했을 미래를 그리며 기대하는 이를 둘러싼 과거의 존재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누군가는 질색하고, 누군가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고, 누군가는 그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즐거워하듯, 벽난로 위의 눈사람이 누구도 몰래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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