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로 돌아온 자들 1
그림자와 명왕과 사제
FF14의 아씨엔 원형 및 고대인 × 빛의 전사(중원 휴런 여성) 드림글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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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맑은 날이었다. 모처럼 원초 세계의 림사 로민사에 있는 비스마르크를 찾은 베르니체와 고대인들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최근 들은 소문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체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들임에도 고대인들은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해 주었고, 베르니체는 눈을 빛내면서 그 이야기를 듣다가 주문하지 않은 파스타가 자리에 놓이자 고개를 들어 웨이터를 보았다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크레프히! 여긴 무슨 일이야? 이건 또 뭐고?”
“길드장 의뢰로 구한 재료를 전달하러 왔다가 돌아가려던 참에 네가 보이길래. 내가 만든 거니까 안심하고 먹어. 사실 재료만 있으면 저번에 유행했다던 연인 사망 정식을 해주고 싶었는데 말이지.”
그리 대답한 엘레젠은 본모습이 아닌 금발의 남성 모습으로 베르니체의 곁에 앉은 라하브레아를 보았다가 다시 베르니체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지금 라하브레아를 비롯한 고대인은 굳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상관없지만, 아마 그러지 않았더라도 초월하는 힘을 가진 그 엘레젠이라면 그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계속 말했다.
“어찌 됐든 잘 지내고 있으니 그런 짓은 하지 않는 게 맞다 싶어서.”
“연인 사망 정식이라니……. 근데 이건 갑자기 왜?”
“여기 직원 중 한 명이 널 무척 좋아하는 모양이던데, 내가 널 알아보니까 잘 아냐면서 점심을 안 먹었다고 식사를 내주고 싶다고 해서. 그런데 너, 네가 직접 한 게 아니면 안 먹잖아. 아니면 내가 만들었거나. 이번에도 그런 모양이던데.”
그 말대로 지금 베르니체가 고대인들과 먹고 있는 것은 재료와 주방을 빌려 그녀가 만든 것이었다. 대답 대신 머쓱한 미소만 지으니 가만히 보던 이는 링크셸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는 최소한 밥은 챙기고 다니라며 손을 가볍게 들어 인사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조용히 대화를 들으며 그가 내어준 음식을 먹던 에메트셀크가 말했다.
“저 녀석이 이전에 내가 ‘있던 곳’에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말이지.”
“맛있지?”
“무리해서라도 이슈가르드를 먼저 갔어야 했나 싶을 정도로?”
짓궂은 미소를 지었던 에메트셀크는 다시 파스타를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고개를 저었던 베르니체는 묵묵히 파스타를 먹고 있는 라하브레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때요? 그동안 그 사람이 만든 다과류는 먹었지만, 식사는 처음인 것 같은데.”
“……흠. 나쁘지 않군. 개인적으로는 네가 만들어 주던 게 내 입에 더 맞다만.”
“아~ 또 시작이네. 둘이 사이좋은 건 알겠는데, 누가 보고 있으면 좀 자중하라고.”
“뭘 그래, 보기 좋은데. 참, 베르니체. 내 그림자나 에메트셀크에게도 대략 들었지만 네게 직접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괜찮아?”
“응? 어떤 건데?”
그의 질문은 템페스트의 아모로트가 어떻게 하다가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가였다. 처음에는 창조하게 된 계기인가 싶어 그것은 에메트셀크에게 묻는 것이 맞지 않냐고 물으니,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궁금한 건 살아남은 세 사람, 그리고 그저 도시의 거품일 뿐이었을 내 그림자가 네 인력에 끌려와 주변에 있게 된 이유야. 분명 너도 그들을 끌어당겼다고 생각해서. 이왕 듣는 김에 둘이 연인이 됐을 때랑 첫 키스 이야기도 듣고 싶은걸! 남의 연애 이야기는 재미있거든.”
진지하다가 갑자기 장난스러워지는 그의 목소리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생각에 잠겼던 베르니체는 이내 미소를 짓고 포크를 들어 파스타 면을 감았다.
“그럼, 일단 먹고 돌아가자. 긴 이야기가 될 테니까.”
그들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에메트셀크를 만나기 훨씬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토토라크 감옥에 실프족 족장이 잡혀갔다는 말에 그를 구하러 갔다가 만난 아씨엔 라하브레아의 말이 계기였으니까. 베르니체는 그에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는 늘 그의 말만 하고 사라졌지. 엘리디부스 또한 그랬다. 그녀의 실력을 보고 싶었다며 적을 불러내고, 쓰러뜨리며 쫓아갔을 때는 별과 세계,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라는 알 수 없는 말만 하고 사라졌지. 나중에 느긋하게 이야기하자고 한 이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하이델린’은 알데나드 소대륙에서 이 행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 별에 위기가 닥치면 별은 스스로의 의지로 ‘어둠의 존재’로부터 별을 구할 ‘빛의 전사’를 탄생시키고는 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이 별을 좀먹는 존재라면 거짓을 말하는 쪽은 어느 쪽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토토라크 감옥과 돌방패 경계 초소, 그리고 마도성 프라이토리움을 넘어 마과학 연구소에서까지 베르니체가 그와 대화를 바란 이유였다. 그의 말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사람들의 미래를 구할 길을 찾고 싶었다. 더 이상 누군가가 아픈 미래는 바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는 마과학 연구소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힘이 다한 와중 토르당에게 흡수당했고, 남은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가면뿐이었다. 그의 마지막을 두 눈으로 지켜본 그녀는 분명 적임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과 그토록 바라던 진실에는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틈날 때마다 신화가 아닌 진실을 찾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애써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 질문에 답을 준 것은 결국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둘 여유가 없을 만큼 몰려있을 때 만난 아씨엔, 에메트셀크였다. 그는 제1세계의 여행에서 어느 순간 나타나 아씨엔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질문에 답해주며 곁에 있었고,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키타나 신굴에서 세계와 하이델린, 그리고 조디아크의 진실을 듣고 나니 그 말들이 이해되었다. 베르니체는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고개를 푹 숙였다가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후련함을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아하하! 그랬구나, 그런 거였어! 그래서 그런 말을……!”
“뭐야, 고작 그 정도의 빛을 담고 미쳐버린 건가?”
“아니야. 고마워, 에메트셀크. 정말로……! 이제 모든 게 이해됐어. 맞아……. 그래. 그렇다면 아더가 진행된다면 모든 게 너희가 알던 올바른 형태로 돌아가게 되는 거야.”
베르니체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새벽의 일원과 브리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메트셀크의 표정이 순간적이나마 일그러졌지만, 베르니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맑은 미소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얼어붙어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게 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있어. 그리고 앞으로도 희생되겠지. 이대로 계속된다면 너랑 나랑은 결코 같은 목표를 향해 걸을 수 없어.”
“……뭐, 아직 내가 이야기한 것은 한 단면일 뿐이야. 기회가 있다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넌 내게 관심이 많잖아?”
“그럼, 많지. 나는 너희 아씨엔을 정말 알고 싶거든. 왜 그런 일들을 벌이는 건지 말이야. 그러니…….”
베르니체는 천천히 그에게 걸어가 옷을 잡고 끌어당겨 그의 몸을 낮추게 했다. 분명 버틸 수 있었을 텐데도 버티지 않고 순순히 끌려온 그의 귀에 베르니체가 조용히 속삭였다.
“오늘 밤이 지난 새벽 2시. 크리스타리움 밖에서 봐. 묻고 싶은 게 많거든. 사람이 없는 장소를 찾아둘 테니, 너라면 날 찾아올 수 있지?”
“이거…… 의외로 아주 대담한 영웅님이시군그래. 좋아. 자, 그럼 나는 이만 가 볼 테니 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라고.”
베르니체가 옷을 놓아주자, 입꼬리를 비틀어 웃은 에메트셀크가 떠났다. 그가 먼저 사라지고 나서야 곁에 있는 이들이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었지만, 베르니체는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는 않았다. 그저 “무슨 상상을 하든 내가 너희에게서 등 돌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그가 사라진 길을 따라 앞선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깊은 새벽, 수정공이 내어준 방에서 검은색 잠옷 차림으로 휴식을 취하던 베르니체는 시간이 되자 미리 창가 아래에 불러두었던 페가수스를 타고 레크산 성 남쪽 낭떠러지 중간에 걸친 땅에서 그를 기다렸다. 혹시라도 누가 따라왔을까 싶어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그림자 속에 앉아있던 베르니체는 머잖아 뒤에서 기척이 느껴지자 뒤돌았고, 그대로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 하얀 셔츠를 가로지르는 붉은 천과 검은 자켓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런 옷을 입는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에메트셀크. 너랑 내가 이렇게 포옹으로 인사를 나눌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이런. 잘 시간도 줄여서 부름에 답해줬는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 그보다 정말 혼자 올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이렇게 은밀한 곳까지 남자를 불러내서 단둘이 있자고 할 줄이야. 더군다나 이런 차림새로 말이지.”
“뭘 기대하는 거야? 자는 척하다가 나왔으니 가벼운 차림인 건 당연하잖아.”
밖에서 하는 취미가 없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라며, 베르니체의 몸을 한 번 훑어본 에메트셀크가 허리를 안고 있는 그대로 손가락을 튕겨 두꺼운 담요를 만들어 주었다. 설마 무기까지 안 들고 왔을 줄 몰랐다는 그의 말에 그녀가 답했다.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에 무기는 필요하지 않아. 더군다나 협력 관계를 맺자고 한 건 너니까 날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보다 놓을 생각은 없어?”
“적과 만나겠다고 몰래 나오느라 제대로 입지 못한 영웅을 체온으로 데워주는 것도 협력 중 하나 아니겠어?”
“그럼 아예 이러고 있을까?”
괜히 물러서기 싫어 그를 끌어안는 것으로 맞수를 두니, 에메트셀크는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 무엇이 궁금하냐고. 베르니체는 그제야 자신이 알고 싶었던 것을 물었고, 에메트셀크는 성실하게 답해주었다.
그런 은밀한 만남은 한두 번 더 있었지만, 아씨엔–옛 인간과 ‘새벽’–현 인류의 골짜기는 끝내 그 차이를 극복할 길을 찾아낼 수 없었다.
에메트셀크와의 결전에서 승리한 날 벌어진 파티에서 조용히 빠져나온 그녀는 심해의 도시에 다시 방문했다. 떨어뜨린 것이 있기라도 한 듯 방문했던 곳을 모두 꼼꼼히 둘러보던 그녀가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하데스와 결전을 치른 장소였다.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갓 밝은 아침의 분홍빛 하늘과 달리 뼈대만 남은 도시의 환영을 보던 베르니체는 이내 아모로트에 올 때부터 들고 있던 니메이아 백합 꽃다발을 중앙에 내려두었다.
에메트셀크는 ‘우리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했지만, 자신은 정확히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래를 거머쥐어 희망을 보내고자 한 마음? 이것은 조금 달랐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내려가야 했다. 에메트셀크는 왜 그런 각오를 했더라?
‘에메트셀크는 조디아크에 희생된 혼들을 되찾기 위해 세계를 통합해 왔고…… 죽음을 건 싸움을 했었지.’
그를 쓰러뜨렸다고 생각했을 때, 에메트셀크는 말했다. 그의 몸이 사라지면 그들의 기억과 집념, 희망과 절망, 그리고 1만 2천 년이 지나서도 가슴을 불사르던 울분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그래서 자신의 걸음을 그곳에서 멈출 수 없었기에 혼에 균열이 난 상태에서도 다시 맞서려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기억하라 한 것은 그 시대에 찾아온 절망과 별을 구하고자 했던 이들의 희생과 바람이 아닐까. 그리고 그들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들에 관한 기억이 아닐까.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무릎을 감싸 안은 채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던 베르니체는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몸을 틀어 보았다. 도시의 환영 중 하나처럼 보이는, 그러나 어딘가 친숙한 존재가 그곳에 서 있었다.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으로 단어들이 들려왔다.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걸까. 에메트셀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너는 너의 좋은 결과를 끌어낸 것 같은데.”
“휘틀로다이우스…….”
“응, 맞아. 알아봐 줘서 기쁜걸. 옆자리 비어 있지? 앉아도 돼?”
고개를 끄덕이자, 도시의 그림자는 베르니체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네가 얻어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기라도 한 거야?”
“그게, 잘 모르겠어요. 결과만 보면 분명히 좋은 게 맞아요. 그런데…… 에메트셀크가 마지막에 ‘기억하라’고 한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모르겠어요. 살아있었다는 걸 기억하라지만, 그 단어 그대로 의미하는 것이 전부는 아닐 거잖아요.”
“너는 그의 마음도 온전히 지고 가고 싶은 걸까. 그가 들으면 기뻐할 거야. 하지만 당사자가 아니라면 그 마음은 온전히 알기 힘들지. 그의 잡념이 새겨진 나조차도 짐작할 수밖에 없어. 그래도 이 도시를 좀 더 돌아다니다 보면 그가 사랑한 것들을, 지키려던 마음을 좀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이곳은 그의 그리움으로 지어진 도시니까.”
그의 말대로였다. 잠시 폐허를 바라보던 베르니체는 고개를 끄덕이고 상냥한 도시의 거품을 바라보았다.
“괜찮다면, 당신에게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될까요?”
“글쎄. 그러고 싶어도 나는 이 도시를 채우는 거품 중 하나라서 언제 사라지고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걸.”
“……제 에테르로 당신을 보강하기에는 너무 초라하겠죠?”
“으음, 잘 모르겠어. 하지만 보강이라니, 정말 재미있게 들리는걸! 도시의 주인인 에메트셀크도 이제 없으니, 우리에게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거야. 자, 받아. 에테르 밧줄이야. 도시를 돌아다니는 커버스 두 마리만 잡아다 주겠어? 부족한 네 에테르를 보강할 수 있을 거야. 그동안 나는 창조물 관리국으로 돌아가서 네가 들어올 수 있도록 손을 써 둘게. 물론 건물 하나를 통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창문 하나쯤은 열 수 있을지도 모르거든.”
휘틀로다이우스는 그 말만을 남기고 베르니체가 잠깐 에테르 밧줄에 눈을 돌린 사이 사라졌다. 다른 도시들의 거품들처럼 사라져 버린 것일지, 아니면 어떤 방법으로 돌아간 것인지. 멍하니 그 자리를 보던 베르니체는 그의 말을 이행하기 위해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그림자와 베르니체의 작은 일탈은 성공했다. 휘틀로다이우스의 그림자는 언제 사라지고 생겨날지 기대하는 즐거움은 사라졌지만, 그보다 더 즐거운 그녀의 방문이라는 일과가 생겼다며 기뻐했다.
“그러고 보니 네 새로운 이름을 묻지 않았는걸. 새롭고도 그리운 네 이름을 알려줄 수 있을까?”
“베르니체 이레네예요. 베르니체라고 불러주세요.”
“그럼, 베르니체. 편하게 대해 줘. 네게 나는 낯선 존재겠지만, 내게 너는 제법 그리웠던 사람이었거든.”
그렇게 베르니체는 휘틀로다이우스의 기억—비록 에메트셀크의 미화나 ‘만약’이 섞인 기억이라 해도—을 되짚으며 에메트셀크가 사랑했던 과거를, 그와 휘틀로다이우스의 소중한 존재였던 ‘그 사람’에 대하여 차근차근 알아갔다.
그리고 다른 거품들과 눈앞에 있는 이의 가면이 다르게 생긴 것을 알았고, 모습을 가린 후드 아래로 보이는 하얀 피부와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가면 아래의 짙은 남빛 눈을 알게 되었다. 그는 에메트셀크와 정반대의 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 일상에 변칙이 생긴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갑작스레 이야기를 멈추고 대의사당을 빤히 바라보던 휘틀로다이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베르니체를 바라보았다.
“친구, 당분간 아모로트에 찾아오지 않을 수 있을까? 도시에 작은 변화가 생긴 것 같아서 한 번 확인해 봐야 할 것 같거든.”
“심각한 거야?”
“심각하다면 심각한 것이고,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 근황이 궁금해지면 찾아오더라도 오후 5시 이전에 오도록 해. 그 이후에는 조금 곤란할지도 몰라서.”
그리고 휘틀로다이우스는 다음에 보자며 그의 사무실을 급히 떠났다. 자세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허공을 향해 뻗은 손을 쥐며 내린 베르니체는 에테르의 흐름에 올라타 크리스타리움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다시 아모로트를 찾은 것은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오후 5시 이전에 일정이 비는 일이 드물어 겨우 시간을 내어 찾은 마카렌세스 광장으로부터 날아올라 창조물 관리국에 닿았던 그녀는 휘틀로다이우스가 평소처럼 반겨주자, 페가수스를 보내고 늘 앉는 자리에 앉았다.
“지난번 그 일은 어떻게 됐어?”
“아직 해결되진 않았는데, 대강 파악했어. 이 시간에는 확실히 안전해.”
“안전……? 근처에 떠돌던 마물이라도 들어온 거야? 아니면 아르케오타니아가…….”
“둘 다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도시에는 어떤 위협도 하지 않을 존재거든. 다만 너에게는 조금 다를 수도 있어서 만나는 일이 없도록 할 생각이야.”
그와 에메트셀크의 친구이자 자신의 원형에게 적대적이었던 인물이라도 되는 것일까. 베르니체는 잠시 그의 평온한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좋아, 그럼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네 녀석이 왜 여기에……?”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보아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고, 휘틀로다이우스가 베르니체의 뒤로 가서 그녀를 가려주었다.
“어라, 에메트셀크잖아? 여기는 어쩐 일이야?”
“휘틀로다이우스, 비켜. 뒤에 있는 녀석과 이야기 좀 해야겠으니.”
“저 아이랑 아는 사이야? 견학을 온 모양인데, 창조물 관리국에 관심을 보여서 땡땡이를 좀 치고 있었어. 근데 회의 중 아니었어?”
다시 한번 비키라는 말을 들어서야 베르니체는 몸을 움직여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분명 거대한 몸과 다른 이들과 같은 로브지만, 붉은 가면과 후드 아래로 삐져나온 하얀 머리카락, 그리고 가면 아래의 타오르는 태양 같은 금안은 틀림없이 자신이 아는 자였다.
“에메트셀크……?”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넌 여기에 있으면 안 되잖아!”
“그건 내가 할 말인걸…….”
아무리 보아도 믿기지 않아 눈을 깜빡이던 베르니체는 곧 그에게 달려가 그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반가운 마음을 감추기란 어려웠다.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기뻐.”
“다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분명, 그리고 너는 분명……!”
“이렇게 됐으니 굳이 모르는 척할 필요는 없겠네. 실은 말이지, 둘의 싸움이 끝나고 나서 베르니체가 네가 ‘기억하라’고 한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일지 알고 싶어서 이 도시를 찾았어. 그래서 내가 우리 시대의 이야기와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 거고. 후후, 눈을 보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알겠는걸! 맞아. 이 도시에 있던 ‘쓸데없는 거품’은 바로 나야.”
휘틀로다이우스의 즐거움이 가득한 말에 에메트셀크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리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의 몸이 줄어들고 베르니체는 그의 다리가 아닌 등을 안고 있었고, 온기도, 냉기도 없는 손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귓가에 불만과 한심함이 섞인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내가 적이라는 사실은 잊어버린 거냐?”
“마지막 판정의 결과를 뒤집으려고?”
“……이렇게 된 이상 시간도 많아졌으니, 다시 너희 인류가 한심해지면 재판정해도 되겠지.”
적어도 당장은 적대하지 않겠다는 말을 덧붙인 그를 보며 웃은 베르니체는 그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이 앉아있던 손님용 소파로 끌고 갔다. 휘틀로다이우스가 옛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했으니, 사실 여부는 잠시 잊고 그의 이야기를 함께 듣자는 말을 들은 에메트셀크는 현 인류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가구들을 보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거대한 가구들이 작아지며 현 인류의 수준에 맞춰졌고, 휘틀로다이우스의 몸 또한 작아졌다. 휘틀로다이우스가 제 몸을 내려다보며 감탄하는 것을 본 베르니체는 에메트셀크를 보았다.
“고마워.”
“됐어. 어차피 찾아올 거라면 네 녀석한테 맞추는 게 나아.”
“방이 무척 넓어졌는걸! 저쪽에 칸막이랑 침대를 놔도 될 것 같아.”
“그럴 에테르는 있고?”
“물론 에메트셀크가 해줘야지! 설마 나를 소파에서 계속 재우려고?”
몸이 너무 뻐근하다며 우는 시늉을 하는 휘틀로다이우스를 보며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짓던 에메트셀크는 베르니체가 슬쩍 소매를 잡자 곧장 “안 돼.”라며 선을 그었고, “정말……?”이라며 시무룩해지는 모습을 보더니 앓는 소리를 내고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사무실이야. 전에 쓰던 거주구에 방을 만들어 줄 테니, 기다려 봐.”
“역시 에메트셀크라니까! 이왕 만드는 거 넉넉히 부탁할게.”
휘틀로다이우스의 뻔뻔한 부탁에 한숨을 내쉰 에메트셀크는 잠시 사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그리고 휘틀로다이우스의 방 한쪽에 소형 에테라이트를 만들어 내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불러내서 귀찮게 할 것 같아서 미리 만들어 주는 거니까 성가시게 하지 마.”
“고마워, 에메트셀크! 역시 너뿐이라니까! 참, 베르니체. 일이 이렇게 됐으니, 너도 언제든지 와. 네가 올 시간이 되면 나랑 에메트셀크는 언제든 마중하러 갈게!”
그 작은 변화는 이윽고 아모로트의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베르니체가 뭍에서의 일상이 끝나고 마카렌세스 광장에 오면 늘 오후 8시였기에 휘틀로다이우스와 에메트셀크—물론 그는 거의 억지로 끌려온 것이지만—가 기다리고 있고, 베르니체를 데리고 창조물 관리국의 국장실로 가서 옛 인간과 옛 인간의 그림자가 현 인류에게 옛 시대의 풍경을 이야기 해주는 것.
누군가에게는 아주 오래전 으레 그리했던 풍경이었다.
다시금 그곳에 변화가 생긴 것은 좀 지난 후였다. 베르니체는 가장 먼저 만났고 그녀에게 호기심을 주었던 라하브레아의 이야기를 듣고 에메트셀크가 끌어안고 있던 책임과 집념, 희망과 절망을 생각했다.
14인 위원회의 의장, 그리고 ‘별의 의지’ 창조 계획의 구상자이자 책임자. 자신이 이끌어야 할 이들을 제물로 바친 이는 어떤 심정으로 그런 선택을 내렸을까. 그 말을 들은 휘틀로다이우스와 에메트셀크가 대답했다.
“라하브레아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별의 미래를 위하는 사람이었어. 정말 아무런 감정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별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후회도 망설임도 없었을 거야. 그도 그럴게, 두 번이나 그 계획을 진행했고 세 번째를 진행하려 했잖아.”
“게다가 그 노친네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감정을 뒤로하고 자신조차도 불태우는 사람이었어. 그래서 감히 우리가 추측할 수 없지.”
“그렇구나…….”
그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베르니체는 잠시 책상 위에 놓인 잔을 보다가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에메트셀크. 혹시 이곳에서 열리지 않는 문들은 전부 구현이 되지 않은 거야?”
“뭐, 그렇지. 하지만 일부는 구현해 두고 막아둔 거야. 어차피 들어갈 이유가 없으니까.”
“그럼 라하브레아의 방은…….”
“대의사당에 의장실 정도는 만들어 뒀어. 하지만 뭘 알아낼 수는 없을 거다. 그곳은 늘 서류와 보고서의 산이 있어서 내용을 모르거든.”
그것이 아모로트에 다시 한번 변화를 불러온 계기였다. 그다음 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라하브레아의 가면을 들고 아모로트를 일찍 찾아온 베르니체는 휘틀로다이우스의 사무실로 들어가는 유리창을 두드렸다. 평소보다 이른 방문에 그녀와 키를 맞추지도 못한 채 어리둥절하면서도 반가운 표정으로 창문을 연 그가 잠시 상황을 파악하듯 말없이 베르니체를 보다가 눈을 휘며 웃었다.
“어서 와, 친구. 오늘은 일찍 왔구나. 음? 그건…… 라하브레아의 가면 같은데.”
“안녕, 휘틀로다이우스. 이건 좀 사연이 있어서. 에메트셀크는?”
“이 시간에는 늘 자고 있지. 넌 늘 오후 8시가 돼야 우릴 만나러 오잖아. 그나저나 오늘 일찍 찾아와 준 건 그 가면 때문일까?”
베르니체는 그림자에게 그것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었다. 라하브레아와의 첫 만남부터 그의 최후까지. 그리고 이후의 심정, 모든 것을 털어놓고 복잡한 심경을 깊은숨과 토해낸 그녀는 책상 위에 앉으며 가면을 그와 휘틀로다이우스 사이에 내려놓았다.
“그래서 이 가면을 이 도시에 두고 싶어. 비록 환영일지라도, 언젠가 흩어질 도시라 해도 에메트셀크가 있는 한 계속 존재할 테니까 그리웠을 고향의 그림자에서 평온하기를 바라면서. 만약 이 도시가 사라질 때가 다가온다면, 에메트셀크나 네게 맡길게. 에테르로 돌려보내든, 이대로 해구 깊은 곳으로 가라앉게 하든.”
“옛 동포인 우리에게 그를 추모하는 마지막 순서를 맡기고 싶은 거로구나. 좋아, 그렇다면 기꺼이 받아들여야지. 그럼, 그가 그 시절 사용하던 방으로 가자. 에메트셀크가 나한테도 문을 열 수 있도록 해줬거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고대인의 그림자가 가면 아래로 미소를 짓고서 나긋하게 말했다. 그럼 아래에서 보자. 다정한 이에게 고개를 끄덕인 베르니체는 다시 페가수스를 불러 땅으로 내려가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고, 거대한 친구는 그녀와 걸음을 맞추어 거리를 걸어갔다. 그날 있었던 일을, 늘 변하는 일상을 이야기하던 그녀는 대의사당에 와서야 페가수스의 등에서 내려 그를 돌려보내고 휘틀로다이우스의 곁에 섰다. 그림자의 안내를 따라 아름답고도 절제된 공간을 가로질러 간 곳은 휘틀로다이우스의 국장실에 채워진 이데아만큼이나 종이 뭉치가 가득하되 깔끔하게 정리된 공간이었다. 넓기도 훨씬 넓은 것이 확실히 의장이 사용하는 공간이란 것이 다가왔다.
허나, 그 안의 공기는 서늘한 것이 어딘가 마음을 쿡쿡 찔러왔다.
“서늘하네. 쓸쓸하다고 해야 하나.”
“……그럼, 조금만 따뜻하게 해볼까.”
그림자가 손을 허공으로 뻗고, 에메트셀크로부터 받았던 마력을 내보냈다. 그 에테르들이 허공에 모여 서로 얽히고설키다 휘틀로다이우스의 핑거 스냅에 맞추어 순식간에 자리 잡더니, 빛과 주인 잃은 가구만 쓸쓸하게 자리했던 방에 온기가 가득 채워졌다.
“아. ……좋다, 응. 라하브레아도 분명 기뻐하겠지.”
“분명히. 그 사람이라면 쓸데없는 일을 했다는 말이 먼저 나오겠지만. 저 책상에 올려둬.”
그의 손끝이 향한 곳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고급스러운 책상이었다. 분명 창조마법으로 만들어졌을 것인데도 자연스러운 나뭇결을 따라 손끝으로 쓸던 베르니체는 이내 책상 가운데에 라하브레아의 가면을 올려두고 등을 돌렸다.
‘정말 그다운 방이야. ……이야기만 들어보았지만. 왠지.’
“에메트셀크한테 가자. 깨워서 괴롭혀 줘야지.”
“오, 찬성이야. 정말 즐겁…….”
베르니체는 찬성하며 미소 짓던 휘틀로다이우스의 눈길이 자신의 등 뒤를 향하는 것을 보았다. 자신과는 다른 푸른 눈동자가 웬일로 서늘하게 빛나며 노려보는 곳을 함께 보아도 자신이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휘틀로다이우스?”
“응? 아, 미안. 저기, 오늘은 그냥 돌아가야겠어. 생각해 보니 에메트셀크가 오늘은 너라도 방해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했거든.”
무언가 잘못되었다. 모험가의 직감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이미 휘틀로다이우스의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별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와 에메트셀크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은밀히 뒤쫓겠지만 휘틀로다이우스도, 에메트셀크도 혼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이들이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휘틀로다이우스를 보던 베르니체는 그를 지나쳤다. 고집 피운다고 해서 쉽게 들어줄 사람이 아닌 것을 그간의 만남을 통해 알고 있었다.
“꼭 말해줘야 해. 아무리 위험해도 난 괜찮으니까. 오히려 이곳이 파괴되는 게 더 슬퍼.”
“……그럴게, 친구. 미안해. 위험한 일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건 진심이야.”
그녀는 평소처럼 잔잔한 미소만 지었다. 거대한 친구에게 다가가 몸을 숙여 달라 청하고, 눈높이를 맞춘 이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떨어진 베르니체는 어렴풋이 느껴지는 원초 세계로의 에테르에 몸을 실었다.
그로 며칠이나 지났을까. 제1세계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하다가 콜루시아 섬 해안가에서 쉬던 그녀는 마침 마주친 온도족에게 아르케오타니아의 재출몰을 전달받고 흑풍해 바닥으로 가 다시 제압한 후 아모로트의 환상으로 눈을 돌렸다. 여느 때처럼 수면에서 내려온 에메랄드색 빛이 어둠에 묻힌 건물들을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라하브레아의 가면을 둔 후로 일이 많아서 가 보지를 못했네. 이유도 들을 겸 찾아가 볼까…….’
주위를 날며 상황을 살피던 검은 페가수스가 휘파람 소리를 듣고 내려와 몸을 낮추었다. 베르니체는 그의 등에 몸을 실었고, “아모로트로 가자”고 속삭였다. 그 말을 알아들은 페가수스가 옛 시대 건물의 옥상을 달려 허공으로 향했고, 몸이 허공에 떠오른 순간 붉은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날았다.
심해의 공기를 가르며 옛 도시의 환영을 가로지른 페가수스는 익숙하게 창조물 관리국으로 향했고, 베르니체도 그곳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문득 시야 구석에 비친 이질감에 잠시 페가수스를 멈추게 하고 고개를 그곳으로 돌렸다.
닫혀 있어야 할 대의사당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근처에 사람이 없다면 절대 열리지 않는 그 문을 어리둥절하게 보던 베르니체는 페가수스의 목을 두드려 그곳으로 방향을 틀었고, 거리가 가까워지며 그곳에 서 있는 것이 휘틀로다이우스 혹은 에메트셀크라는 것을 짐작했다. 깜짝 놀라게 해줄 생각으로 거리를 두고 페가수스를 착지시킨 후 발소리를 죽여 걸어간 베르니체는 그의 몸에 손을 대려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두 개의 실루엣이 더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그의 너머를 보았다.
둘 다 로브를 쓰고 있었지만, 베르니체가 있는 곳에서 얼굴이 보이는 자의 가면은 그녀가 소중히 간직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라하브레아?”
“아, 베르니체. 언제 온 걸까. 이야기가 좀 긴데……. 우선 우리는 나가서…….”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분명 도시에 없었잖아.”
본격적으로 모험을 시작했을 때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신을 얕보고 마물을 이용해 쓰러뜨리려 했던 자. 동료의 정신에 있는 빈틈에 새어 들어가 그를 지배했던 자. 쓰러뜨렸다고 생각했으나 돌아왔던 자. ……체스판 위에 놓인 말로 보던 인간에게 속아 야만신을 이루는 에테르의 일부가 되었던 이. 먼 시간을 돌아 다른 이의 입을 통해 과거와 걸어온 길을 알게 된, 어떤 시대의 지도자이자 영웅이었던 이.
그를 인지한 순간부터 이유를 알 수 없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으니, 에메트셀크 때 그리했듯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휘틀로다이우스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가져온 가면에 의장의 혼 일부가 깃들어 있었어. 아마 가면에 수없이 새겨졌을 집념에 얽매여 깃들었다가 이 도시의 풍경에 반응해서 빠져나와 환영에 깃든 모양이야. 게다가 창조마법의 정점에 오른 자가 임명되는 좌에 있었던 만큼 일부밖에 없는 혼이라도 창조물의 구조를 파악하는 일은 쉬운 일이었겠지. 그 창조물에 있는 에메트셀크의 마력을 이용해 설계를 깨트리고 이 도시에서 지내고 있었어. 그리고 어떤 시대의 기억을 지니고 있을지 알아보느라 찾아오지 않길 바랐는데…… 찾아올 줄은 몰랐네. 아무튼 이야기를 들어보니 너와 만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
“왜?”
“아씨엔으로서의 기억이 아직은 좀 더 강한 모양이야. 에메트셀크가 돌려보낼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앗!”
돌려보내서는 안 됐다. 자신은 그가 알고 싶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으며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나아갔고, 무엇이 그를 강하게 했는지.
순간적으로 큰 소리를 낸 휘틀로다이우스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자신을 보았다.
베르니체가 멈춘 곳은 에메트셀크의 곁이었다. 도시의 환영들처럼 거대한 몸으로 서 있던 그의 곁에 라하브레아가 있었다. 그가 위험한 상대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알고 싶었던 이를 만났기 때문인지 심장은 더욱 크게 뛰었다.
“……라하브레아. 날 알아보겠어요?”
“네가 낄 자리가 아니야. 저리 빠져.”
“라하브레아의 혼을 이곳에 오게 한 건 어찌 보면 나야. 그러니 아주 무관하지는 않잖아. 난 이 사람을 알고 싶어.”
“비웃기라도 할 생각인가?”
베르니체의 말에 오랫동안 듣지 못한 목소리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굳은 입가와 몸에서 피어오르는 어둠이 그가 아씨엔 라하브레아가 맞다는 것을 확신하게 했다.
“아니에요. ……당신에게까지 정을 바랄 생각은 없어요. 당신은…… 이 도시의 지도자 중에서도 중요한 사람이었잖아요. 이 도시의 역할을 누구보다 많이 짊어졌던 사람이었던 만큼 당신을 막아선 나를 증오한다는 걸 알아요. 그래도…… 당신도 이 도시에 있어 주면 안 될까요? 당신을 알고 싶어요. 에메트셀크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래도 당신과 직접 대화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단 말이에요.”
라하브레아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굳이 답이라 한다면, 그에게서 피어오르는 어둠이 더 짙어진 것이 대답이라면 대답이었다. 그런데도 베르니체는 물러서지 않았다.
“부탁해요. 전 당신들이 지키려던 이 별을 지키고, 기억해야 할 것들을 기억하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들을 알아야 해요. 저는 영영 당신들과 같은 감정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걸요.”
“지금……. 나를 기만하려 드는 건가? 패배했다고 방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와 에메트셀크에게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엘리디부스를 상대할 수 있을 약점이라도 찾을 모양인데…… 큰 오산이다.”
“제가 관심을 가지는 건 당신이에요. 게다가 당신은 인간을 과소평가했고, 그 결과가 마과학 연구소에서의 일이 아니었나요? ……제가 만약 당신의 기준에 미흡하다면, 그때는 다시 적이 되어도 괜찮아요.”
그가 자신을 지켜보는 동안 여러 계략을 세울 수 있을 테고, 이전과 달리 냉정함까지 되찾았으니 가장 어려운 적이 될 수도 있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그를 알고 싶었다. 애초에 에메트셀크와의 협력도 그 위험을 감수한 것이었으니, 두 번이라고 못 할 건 없는 것이다.
라하브레아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어떤 계산을 마친 것인지 가면과 후드를 벗었다. 마치 석양이 비치는 호박 보석으로 한 가닥씩 자아낸 것 같은 머리카락은 어깨를 넘어 등에 닿았고, 그중 일부에는 마치 염색이라도 한 것처럼 어둠이 물들어 있었다. 불신과 비웃음이 함께 비치는 눈동자는 황금을 녹인 것 같았다.
“그럼 확실히 하지. 네가 알고 싶은 것은 누구지? 옛 시대를 이끌던 14인 위원회의 라하브레아인가? 아니면 이 시대에 재앙을 불러오던 심연의 사제인가? 네 선택에 따라 하나의 모습은 사라질 것이다.”
“둘 다예요. 14인 위원회의 라하브레아는 당신들의 시대, 감정과 마음, 집념을 최대한 본래의 형태로 기억하기 위해서, 심연의 사제는 내가 당신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기 위해서.“
“하, 네게 독이 될지도 모를 기억을 스스로 남겨두겠다는 건가?”
“당신이라는 사람을 전부 알고 싶으니까요. 제게 정을 달라고는 안 할게요. 정말이에요.”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감정을 알 수 없었다. 거절한다면 이젠 정말로 붙잡을 방법이 없어 초조해졌지만 애써 태연한 척을 하니,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이 갈라지기 이전, 나는 많은 학자를 이끌었지. 애석하게도 그들의 탐구심이 내 즐거움의 일부였다고 한다면 믿겠나?”
“그 말은…….”
“어차피 힘조차 돌아오지 않은 상황이니…… 힘을 되찾을 때까지 네 요구를 들어주며 때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게다가 탐구하고자 하는 이를 내치기에는 이 도시는 나를 잔혹한 그리움에 젖게 하는군. 아주 잠깐의 유흥이라면 나쁘지 않겠어.”
에메트셀크처럼 단순한 형태였던 로브는 아씨엔의 것이 되었다. 몸을 낮춰온 그가 클로 장식 끝으로 베르니체의 턱을 들어 올렸다.
“어디 한 번 실컷 파헤쳐 보아라. 네가 바란다면 나의 과거를 낱낱이 이야기 해줄 테니.”
덩치 차이 때문일까.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숨이 막혀 반응조차 할 수 없음에도 몸을 일으킨 그는 관심 없다는 듯 방 한 곳의 문을 열었다. 베르니체가 그의 가면을 두었던 방이었다.
“나는 이곳에 있겠다. 알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찾아오도록. 보이지 않으면 아카데미아의 학술원으로 와라.”
그렇게 라하브레아가 심해 도시에 머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베르니체는 그를 만나러 가서 어떤 것도 묻지 않았고, 그저 어떤 행동을 반복하는 그에게 가끔 눈길을 주며 손님용 소파에서 책을 읽거나 소소하고 들려주어도 별 상관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대부분이 책을 읽는 것이었고, 이야기를 들려주더라도 할 말이 떨어지면 다시 책을 읽었다.
그런 행동이 의아했던지, 결국 먼저 질문을 한 것은 라하브레아였다.
“나를 알고 싶다 하지 않았나? 그렇게 지켜보거나 일방적으로 이야기해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없을 텐데.”
“……네, 그렇죠. 하지만 당신이 하는 그 행동으로 당신의 생각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걸 방해하면서까지 제 호기심을 채우고 싶지도 않고요.”
베르니체는 책을 테이블에 내려두고 그에게 걸어가 펜을 든 채 책상에 놓인 그의 손을 스치며 감싸듯 손을 겹쳤다. 그녀의 손이 움직이는 길을 따라 붉은 에테르가 라하브레아의 손을 감싸며 검은 장갑이 되었고, 은빛의 클로가 되었다.
“이 도시의 파노라마를 벗어난 세 사람 중 당신만이 누군가 보지 않고 있음에도 당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이행하고 있죠. ……그래서 당신을 찾아오는 것은 일상이 끝나는 늦은 밤이나 새벽임에도 당신은 무언가를 반복하고 있고요.”
“그것이 무슨 상관이지?”
“……들었어요. 당신은 또다시 별의 의지 창조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고.”
“그것이 내가 그날 하던 일이니 당연하지 않나.”
베르니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책상에 놓인 종이 중 하나를 눈으로 훑었다. 비록 읽을 수는 없지만, 그곳에 있는 수치들은 휘틀로다이우스와 에메트셀크가 보여준 것과 분명히 달랐다.
– 굳이 이런 번거로운 일을 반복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도 늘 대답은 같아. 그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 뿐이라고 하지. 의장 아니랄까 봐 성실하단 말이야. 하지만 그건 분명 핑계야.
– 그러니 기회가 되면 네가 직접 물어봐라. 왜 ‘별의 의지 창조 계획’을 계속해서 검토하고, 술식을 다시 세우는 건지. 이건 이제 우리에게 의미가 없어.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수습할 수 없는 희생들이라고. 영감은 또 자신을 깎아내고 있다. 나처럼 원형 그대로 돌아왔으면 모르겠지만, 영감은 조각난 상태야. 전보다 더 빨리 무너지고 말겠지. 나와 휘틀로다이우스야 상관없지만 넌 아닐 테니까 말해주는 거야.
두 사람은 라하브레아가 보낸 서류를 보여주며 그렇게 말했다. 베르니체는 자신이 감싼 손에 들린 검은 깃펜을 보다가 조심스레 그의 손에서 빼내 펜대에 올려두고 말했다.
“당신은 이 계획을 실행하기 직전까지도 검토했다죠. ……이렇게까지 과할 정도로 반복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걸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세계를, 인간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이해하는걸요.”
“나는 내게 주어진 역할을 이행할 뿐이다. 그러나 이 도시는 너를 위해 준비되었던 거대한 기계 장치지. 그러니 진실에 다가가려는 널 위해 일을 멈추는 것 또한 나에게 주어진 일이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주어진 역할을 이행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당신은 같은 계산을 반복했을 테니까. 게다가 에메트셀크는 이 도시에 당신이 행해야만 하는 역할을 주지 않았는걸요.”
그리고 베르니체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감쌌다. 체온이 없어 차가운 피부가 느껴졌다.
“당신이 무언가를 잊고 싶다면 방해하기는 쉬운 일이에요. 밖으로 끌고 나가 거리를 거닐고, 아코라의 탑을 올라 노르브란트 사면에 있는 그 시대의 유적을 보여줄 수도 있어요. 그것도 아니라면 학술원의 다른 장소를 보여달라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신은 이유가 있어서 당신을 깎아내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다른 수식을 써가며 이 연구를 다시 이어가는 게 아닌가요?”
“……그렇게 짐작한 이유는?”
가면 아래로 무덤덤한 금빛 시선과 마주한 베르니체는 조심스레 손을 더 올려 그의 가면을 살짝 들었다가 포기하고 손을 내렸다. 아무리 그의 표정을 보며 대화하고 싶다 하더라도 자신의 행동이 옛 인류에게는 큰 무례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 행동에서 그녀의 의중을 눈치챘는지, 라하브레아가 손을 들어 가면과 후드를 벗었다. 베르니체는 금빛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보다가 무심결에 그의 눈 밑을 엄지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말했다.
“감히 당신 처지에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내가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해본 적이 있어요. 당신은 희생자를 어떻게든 최소화하고 싶어서 계산하고, 또 계산했다고. ……만약 통합에 성공해서…… 모두가 긴 잠에서 깨어나 다시 별을 관리하다가 또 별의 이치가 흐트러지면……. 그때도 별의 의지를 창조할 것을 예상하고 그 희생을 최소화할 방법을 찾는 건가요?”
“제법 영리하군. 이 술식은 불완전하다. 그대로 두면 언젠가 별의 에테르가 말라버리게 될 수도 있지. 그러니 시간이 생긴 지금, 완전한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 술식을 네게 넘겨주도록 하지. 네가 엘리디부스에게 패하는 순간 그에게 건네든, 네가 불완전한 것들에게 물려주든 상관없어.”
“어느 쪽이든 그 희생이 반복되면 언젠가는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될 거예요.”
라하브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가만히 바라보던 베르니체는 그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다시 손을 겹쳐 잡았다.
“꼭 그 방법뿐이었나요? 종말에 관해 더 듣고 싶어요. 14인 위원회를 떠난 그 사람은 어떻게 했는지 알고 있다면 더욱. 휘틀로다이우스와 에메트셀크는 모른다고만 할 뿐, 제게 아무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거든요.”
“……밤이 짧겠군. 내일 일정은 어떻게 되지?”
“당신이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면, 기꺼이 비울 거예요. 일단 선약은 없거든요.”
라하브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베르니체를 손님용 테이블로 이끌었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그날을 시작으로, 베르니체는 라하브레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시선에서 본 아모로트와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 그 이야기에는 14인 위원회의 라하브레아로서의 책임감과 자부심, 그리고 신념이 있었고, 서서히 베르니체에게 스며들었다.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동경은 오랫동안 품었던 호기심과 맞물려 베르니체를 깊은 곳에서부터 태웠다. 애써 그 감정을 감추기 위해 애써 이야기를 그에 관한 것이 아닌 쪽으로 돌려보려 했지만, 결국 관심사는 그가 되었다. 그가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말할 때마다 베르니체는 그의 표정과 목소리, 단어를 새겼다.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 때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의 사소한 일상이 궁금해 그것을 물어보고 싶다가도 포기했다.
그 감정을 어떻게 통제해야 할지도 모른 채 잠들기 전까지 그와 밤을 보내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된 지 한참 되었을 때 베르니체는 그를 피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얼굴만 비치고 돌아오거나, 아예 찾지 않는 일도 많았다. 그리고 그런 어설픈 도망은 긴 세월을 살아온 노련한 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반복되는 아카데미아의 소동을 제압하고 잠시 환상 생물 창조장에 앉아 멍하니 도시를 바라보던 베르니체는 뒤에서 들린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가 라하브레아의 모습을 발견하고 허둥지둥 일어섰다.
“아, 라하브레아. 마침 잠시 보러 가려던 차였는데 잘됐네요.”
“도망치려던 것이겠지.”
비웃음이 가득한 어조에 베르니체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천천히 다가와 베르니체 앞에서 체형을 현 인류에게 맞추고 베르니체의 턱을 잡았다. 엄지에 달린 클로가 연한 볼을 찔렀다.
“그래, 내게 가졌던 흥미는 전부 떨어졌나 보지? 네 탐구심은 고작 그것이 끝이었나?”
“……저는, 그저…….”
“그저?”
가까우니 거리를 조금 물러나 달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고 시선을 피할 때마다 라하브레아는 고개를 억지로 틀어 자신을 보도록 했다. 어디로 가든 결국 시선은 그에게 돌아갔고, 베르니체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냥 당신을 보면 기분이 이상해서 그래요. 가라앉으면 다시 찾아갈게요. 그러니까…….”
“기분이 이상하다고? 적이었던 자와 마주 앉아 다정한 담소를 나누는 것은 에메트셀크와도 마찬가지일 텐데.”
“당신은 달라요.”
“아하, 연기조차 힘들고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끔찍했나? 그렇다면 네가 나를 찾을 때까지 눈앞에서 사라져 주지.”
“그런 게 아니에요!”
그의 기척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눈을 뜨며 그의 로브를 붙잡자, 그가 가만히 베르니체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심장이 날뛰듯 박동했고, 베르니체는 멍하니 붉은 가면 아래로 보이는 금빛 눈을 보다가 다시 시선을 피하고 우물쭈물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어요. 14인 위원회의 의장으로서도, 아씨엔으로서도…… 그렇게 당신이 인정할 만큼 현명하고 강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지금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서…….”
“……뭐?”
소중한 이들을 눈앞에서 잃었을 때와는 다른 비참함이 몸을 끌어내렸다. 자신은 그로 모자라서 그와 함께 다니던 이게요름까지 죽음으로 내몰았는데, 이 감정을 감히 품어도 되는 것인가. 답은 ‘아니오’였다. 아직 말하지도 않은 감정을 꾹꾹 눌러 삼킨 베르니체는 고개를 힘겹게 저었다.
“몰라도 돼요. 하지만 당신이 싫어서 피해 다니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예요.”
“……좋아서 피해 다닌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아나.”
“……가도 될까요?”
다시 그가 베르니체의 턱을 짚어 그를 보도록 고개를 틀었다. 그동안 자신이 베르니체의 의문에 답해줬으니, 이번에는 그녀가 그리 해야겠다며 싸늘하게 말하는 그를 바라보던 베르니체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처참한 심정과 함께, 그리고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거나 별바다로 돌아가겠다는 말만은 하지 않길 바라는 간절함을 담아 말했다.
“당신 곁에서 당신을 더 알고 싶어요. 14인 위원회도, 아씨엔도 아닌 당신이 알고 싶어요. 당신을 좋아해요, 라하브레아.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당신이 저를 좋아해 줄 것은 더더욱 바라지도 않을게요. 그냥 옆에서 당신을 지켜보며 알아가게만 해줘요.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턱을 붙잡았던 그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고, 베르니체는 얼굴이 터질 것 같은 열감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라도 하듯, 혹은 숨은 뜻을 찾기라도 하듯 한참을 대답하지 않던 그가 어이없다는 듯 짧은 웃음을 뱉더니 베르니체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의 목소리에서 흥미가 가득 묻어났다.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어. 영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자가 세계에 재앙을 불러오던 자들의 수장을 사랑하게 됐다고? 참으로 우습구나. 자, 그래……. 그렇다면 나도 답해줘야겠지.”
분명 긍정적인 대답이 아닐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기대감을 품었다. 살짝 눈을 떠 그를 올려다보니 그가 가면과 후드를 벗고 베르니체를 끌어안았다.
“네가 스스로 이 어둠에 몸을 던졌으니, 나는 너를 내 곁에 가두어 너를 빛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베르니체는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한참을 노력해야 했다. 민망함이 극에 달하다 못해 결국 환청을 듣게 된 것일까. 하지만 그 반응을 무시라도 하듯, 라하브레아는 베르니체의 손을 끌어가 제 목에 걸린 검은 수정 목걸이를 건드렸다.
“이 목걸이는 내 소망과 집념, 목표를 향한 증표였지. 그러니 너 또한 너의 소망과 집념, 목표를 잊지 않도록 나와 같은 것을 주마. 그와 동시에 이 목걸이는 네가 나의 것이라는 증명도 될 테다.”
베르니체의 목을 불티들이 휘감았다가 라하브레아의 것과 같은, 가죽끈에 은과 투명한 수정으로 장식한 목걸이로 변했다. 투명한 수정은 이내 푸른빛이 되었고, 그것을 보던 라하브레아가 미소 지었다.
“잘 어울리는군.”
“고마워요, 라하브레아. 절대 내 소망과 목표를 잊지 않고, 소중하게 다룰게요.”
그 말에 라하브레아가 베르니체의 허리를 더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훨씬 더 가까워졌고, 베르니체가 그에게 심장 소리가 들릴 것 같다는 걱정도 하던 중 라하브레아가 귓가에 속삭였다.
“베르니체, 나의 창염. 네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기분이 어떻지?”
“기뻐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어요.”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을 만끽하며 몽롱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의미 모를 기쁨이 묻어났다.
“그래? 그렇다면 이로써 엘리디부스 또한 승기를 잡을 수 있겠지. 네가 스스로 나의 덫에 들어왔으니, 놓아달라 애원한들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온 힘을 다해서라도 당신들에게서 세계를 지켜낼 거니까.”
그의 품에 온몸을 맡긴 채로도 단호히 대답하는 말에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리고 그가 속삭였다. 그것이 마지막 반항이 될지 어떨지 지켜보겠다, 고. 그리고 그의 입술이 조금 전 클로에 찔려 핏방울이 맺힌 볼에 내려앉았다.
“헤에,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그래서, 첫 키스는 언제 했어?”
“그거 진짜 진지하게 물은 거야?”
“그럼, 당연하지! 모든 연애 사정의 하이라이트인걸!”
휘틀로다이우스–원형이 눈을 빛내며 한 말에 베르니체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곁에 앉아 헛기침하는 라하브레아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처음 입을 맞춘 것은 고백한 날이었다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베르니체에게 엘리디부스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무래도 라하브레아 또한 같은 마음이었나 보군. 지금 들었으니 별 감흥이 없는 것이지, 내가 이곳에 온 직후에 들었으면 배신감이 크게 들었을지도 모르겠어.”
그의 말대로였다. 안 그래도 처음 돌아오고 베르니체가 없는 사이 다시 기회를 노리자는 제안을 거절당하고 한동안 그들을 찾지 않았던 엘리디부스였다면 배신자 취급을 했을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라하브레아가 어떤 면에서 그녀에게 끌렸을지 흥미로워하는 것이 전부였다.
정말, 어쩌다가 서로가 서로에게 홀려버린 걸까. 그런 생각에 잠깐 미소를 지었던 베르니체는 말을 이으려 했다.
“다음은 엘리디부스지? 엘리디부스는…….”
“아아, 그건 다음에 들을게. 시간도 늦었고, 너도 졸려 보여.”
베르니체는 휘틀로다이우스–원형의 말에 사무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림사 로민사에서 돌아온 후로 이것 외에도 다른 이야기를 했던 터라, 많은 시간이 흘러 밤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침 졸렸던 것도 사실이기에, 베르니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어깨를 끌어안는 라하브레아의 품에 기대었다.
“그럼 나 자러 갈게. 내일 봐.”
고대인들에게 밤 인사를 건네고 밤 인사를 받고 나서야 그의 그림자에 감싸여 이동된 곳은 라하브레아의 방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웠고, 잠시 이야기를 속삭이다가 도시에 내려앉은 밤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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