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약

주인공이 아닌 쪽의 이야기

내 삶의 이유는 너였어.

Dream by 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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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친 오락관 - 키워드 ‘동화’

오늘의 BGM :: Matryoshka - sacred play secret place

https://youtu.be/DSvksh6d21w?si=nCp9taoG31P0IGm_



네를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초라한 외톨이.

어린 시절 야기의 모습은 딱 그것이었다. 부모에겐 버림 받았어도 조부모의 품에서는 못다한 애정 받았으나, 또래 친구 하나 사귈 줄 모르고 바보같이 웃기만 하던 동네 떠돌이. 애는 참 착해, 근데 행색이 조금… 그렇지?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도 야기는 꿋꿋하게 미소를 유지했다. 그 시기의 여느 아이들이 동화 속 주인공을 꿈꿀 때, 야기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주인공이라 생각해본 적 없었다. 곰팡이의 악취가 살결에 밴, 헝클어진 부스스한 머릿결을 가진, 기대에 못 미치는 재능만 있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잘 팔리지도 않을 테니까. 자신을 꺼내줄 백마 탄 왕자님은 필요 없었다. 야기는 그래도 제 삶에 퍽 만족하는 편이었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왕자의 도움을 기대하느니 지금 자신을 사랑해주고 있는 사람들에게나 잘하자는 주의. 어찌됐건 자신에게는 다정한 조부모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

‘있었으니’ 말이다.

그가 내게 손을 뻦어준 그 날만큼은 너무도 강렬한 기억의 조각으로 남아있어. 어두컴컴한 철창 안을 환히 밝히며 빛을 등에 업고 들어오던 남자. 애달픈 시선으로 눈높이를 맞춰오던 자가 내민 커다란 손을, 결코 잊지 못 한다. 자신의 이야기에 주인공이 있다면 이런 자일 것임이 틀림없다고.

.

“야기는 이상형이 어떻게 돼?”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역시 다정한 사람일까? 예를 들면, 사사 같은!”

“엑, 사사 씨는 쿨한 이미지에 더 가깝지 않아?”

“뭐? 사사는 부드러운 느낌이지!”

야기는 바보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기와 시선을 마주했다. 내 말이 맞다느니, 너는 뭘 본 거냐며 옥신각신 투닥거리던 것은 우연히 사무실 복도를 지나가던 다나에 의해 종결되었다. “이것들아, 일 안 해?”

자리로 돌아간 야기는 펜을 빙빙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사사라는 존재는 누가 봐도 주인공에 걸맞는 따스한 인물이 아닌가. 야기는 사사의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이 좋았다. 누군가는 타락천사다, 별 볼일 없는 색이다 라며 허튼 소리를 늘어놨지만 적어도 야기의 시야에서 올려본 사사의 머리는 오색찬란한 빛을 머금은 따스한 흑색이었다. 눈매는 날카로우나 그 안에 놓인 검은 동공에 저 하나쯤을 거뜬히 담아줄 너른 거울이 보이는 것이 퍽 사랑스러웠다. 짧은 혀는 애교였으며, 눈썹 한 쌍 없는 것은 그의 잘난 외모 앞에 작은 흠조차 되지 못 할 것이다. 몸체만큼 커다랗고 짙은 색을 가진 그의 날개는 또 어떠한가? 이카로스는 태양을 쫓다 추락했지만, 사사의 날개에는 녹아내릴 밀랍이 없었다. 그가 하늘을 향해 발돋움 할 때 양 날개가 화려하게 펼쳐지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그의 뒷모습은 야기에게 있어선 꿈의 형상화였다. 그러니 야기는 사사를 우러러 볼 수 밖에 없었다.

본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함은 뛰어난 용모에 따스한 성품, 올곧은 신념과 그를 돋보이게 만드는 조연의 존재가 필수였다. 스푼의 외모담당, OK. 친절한 성격 OK. 신념? 있어보여, OK. 조연, 내가 있으니 OK. 손을 꼽아가며 세보아도 사사는 야기에게 있어 세상에서 하나뿐인 동화 속 멋진 주인공이었다. 그런 이가 자신의 삶을 바꿔 주었다는 사실이 영광일 정도로. 그래서 자신만큼은 주인공의 곁에서 이 사람의 앞날을 밝은 해피엔딩으로 만들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시엔 그 마음조차 독이 될 줄 몰랐던 거다.

내 이야기의 주인공은 늘 너였어, 사사.

네가 행복하길 바랐는데 나는 너에게 있어서도 한 장의 시련에 불과했던거야. 하지만, 정말로 내가 바란 건 이런 세상이 아니었거든.

.

.

펑!

약 냄새가 난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건물이 무너져간다. 삽시간에 번진 불길이 수많은 이들을 집어삼키려 든다. 화염의 파도가 남은 것들을 쓸어담는다. 야기.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아무리 잔해를 뒤집어 엎고 사람을 꺼내도, 그 배가 되는 이들이 고통에 울부짖었다. 화상 입어 살이 까지고 진물이 흐르는 손으로 땅을 파헤치면 축 늘어진 싸늘한 시신을 마주할 뿐이다. 다시금 사람을 부축한다. 시신을 포기한다. 누군가를 구출한다. 누군가를 외면한다. 반복한다.

야기는 끝내 주저 앉았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재난에. 패했다. 동화의 엔딩은 항상 권선징악이었고, 행복한 결말이었는데. 자신이 써내려갈 이야기에 희망이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주인공이 될 수 없고, 제 삶에 해피엔딩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적 없지만 그래도, 그래도 한 번쯤은…

“네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어줄게.”

악마의 속삭임은 천사의 말보다 달콤하다는 게 정말이던가. 백모래의 한마디는 야기에게 너무 달았다. 내가 바라는 세상, 내가 원하던 미래. 야기는 다시 한 번 제게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그가 아닌 다른 이의 것이다. 동화에 주인공이 있다면 악역도 존재하는 법. 야기는 그렇게 백모래를 따라간다.

사사, 나는 이제 너에게서 떠나보려고.

나의 주인공인 당신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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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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