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송연] 토끼와 호랑이와 주먹밥 이야기
첫업로드: 2021.10.31. 포스타입
옛~날 옛적,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대략 1800년 전쯤? 아니, 아무튼 옛날에요. 산속에는 회색 털에 하늘색 동그란 눈동자를 가진 작고 귀여운 토끼가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회색 토끼에겐 부양해야 할 자기 자신이 있었기에 매일매일 부지런히 움직였어요.
혼자 살면 잔소리 할 동물이 없으니 여유를 가져도 되는 거 아니냐고요? 전혀요! 세대주이자 유일한 세대원인 토끼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도 돈을 벌어다 주지도, 청소와 빨래와 밥을 해주지도 않는답니다. 1묘(卯) 가구의 현실이란 그런 거예요.
해가 뜨면 토끼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세수를 하고 이를 닦는답니다. 제대로 된 양치는 치과 정기검진만큼이나 중요하거든요. 둘 중 하나라도 빼먹는다면 나중엔 치아 하나에 백만 원이 들 수 있어요. (과장이 아니에요!) 어쨌든, 그날의 끼니를 위해 주먹밥을 만들어 넉넉히 챙기면 나갈 준비는 끝이랍니다.
집을 나선 토끼는 가장 먼저 떡공장에 들러요. 그러고선 오늘 팔아야 할 떡을 한 바구니 들고서 폴짝폴짝 산고개를 넘어 시장에 가지요. 몇 년 간의 장사 노하우가 쌓인 토끼는 시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떡을 팝니다. 그러다 배가 고파지면 집에서 가져온 주먹밥을 야금야금 먹어요.
이 주먹밥으로 말할 것 같으면, 토끼가 그저께부터 매일 아침 직접 만들기 시작한 비밀의 주먹밥이랍니다. 목적은 식비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래요. 무얼 넣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허기지고 기운없는 토끼도 한 입 만에 수저를 내려놓게 만드는 그런 주먹밥이지요!
친절한 회색 토끼는 주변 가게의 상인들에게 가져온 주먹밥을 나눠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쩐지 첫날 이후로는 주먹밥을 받아 가는 상인들이 영 없어요. 다들 항상 자신보다 식사를 일찍 마치는 것 같다는군요? 속상할 법도 하지만 토끼는 '바쁜 와중에도 식사를 챙기셨다니 다행이야!'라고 생각하며 남은 주먹밥을 바구니에 가지런히 넣어둔답니다.
대강 배를 채운 토끼는 또다시 시장 곳곳을 뛰어다니고……. 시간은 흘러 흘러 동쪽 산골짜기 사이 어두운 하늘 위로 달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어요. 이제 가져왔던 바구니에는 아까 먹다 남긴 주먹밥들만이 남아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토끼는 퇴근한다는 뜻이죠! 유후!
한결 가벼워진 바구니를 옆구리에 낀 토끼는 달빛이 내리는 오솔길을 타박타박 뛰어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어요. 바구니 속에서는 지폐와 동전들이 짤랑짤랑 신나게 흔들렸지요. 그러던 그때! 토끼의 앞에 하얀 털과 파란 무늬를 가진 잘생긴 호랑이가 나타났어요!
오후 트레이닝으로 마침 출출했던 호랑이는 떡바구니를 보고 새파란 눈을 빛냈습니다. 그리고 호랑이는 토끼에게 말했어요.
🐯"혹시 남은 떡이 있으면……."
🐰"떡은 다 팔렸지만 대신 직접 만든 주먹밥을 무료로 줄게요! 떡은 공장제거든요!!!"
저런,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토끼는 호랑이가 바닥난 떡 대신 자신을 잡아먹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얼른 주먹밥을 한 개 내밀었습니다. 수제라는 설명도 덧붙이면서요. 어쨌거나 공짜로 주겠다고 하니 호랑이도 거절은 하지 않았어요. 수제라면 왠지 더 맛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감사합니다."
공손히 인사하는 호랑이를 뒤로 하고 토끼는 후다닥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집에 급한 일이 있으신가?' 호랑이는 의아했지만 아무렴 어때요, 공짜 주먹밥도 얻었는데? 랩을 한 겹 벗기자 윤기가 흐르는 하얀 밥알들이 제법 맛있어 보였습니다. 호랑이는 주저 없이 주먹밥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고, 이내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땐 휘영청 둥근 달이 머리 위에 환히 빛나고 있었어요. 회색 토끼는 도망을 갔는지 주변엔 먹다 떨어뜨린 주먹밥과 밥알만이 굴러다녔지요. 하얗게 윤기가 흐르는 주먹밥이 이전과는 다르게 무시무시해 보였습니다. 생전 맛본 적 없는 주먹밥의 기이한 풍미가 아직도 입안에 남아있는 것만 같았어요! 무엇이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커다란 호랑이도 한 입 만에 정신을 잃었으니 굉장히 위험한 물질임이 분명합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하얀 호랑이는 이대로 넘어갈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자신 이외에 또 다른 동물이 이 주먹밥을 먹게 되는 상황은 바라지 않았으니까요. 심지어 그게 좀 전의 그 토끼라도요! 어떻게 해서든 그 토끼를 만나 설득해야만 한다고 호랑이는 생각했어요. 다시는 그런 주먹밥을 만들지 못하도록 말이죠. 결심한 호랑이는 바닥에 나뒹구는 증거물을 나뭇잎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챙겼어요. 그리고는 토끼가 걸어가던 방향으로 터벅터벅 발을 옮겼습니다.
토끼의 본거지를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떡을 파는 작은 회색 토끼를 알고 있느냐고 주변 동물들에게 물어보았거든요. 숲속 주민들이 가르쳐준 대로 걸어가자 손쉽게 토끼의 작은 집을 발견할 수 있었답니다.
🐯"계세요?"
통통통. 자그마한 문이 부서질세라 조심스레 노크를 하며 하얀 호랑이는 물었어요. 하지만 어쩐 일인지 집안은 조용하기만 해요. 자신이 화를 낼까 겁을 먹은 토끼가 숨어버린 걸까요? 아니면 늦은 밤 깊게 잠이 들어버린 나머지 작은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한 걸까요? 호랑이는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어젯밤 오솔길에서 주먹밥을 받은 백호랑이입니다. 주먹밥에 관해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똑똑똑! 그렇지만 문 너머는 잠잠했습니다. 호랑이는 혹시 토끼가 궁극의 주먹밥 레시피를 가지고 도주한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어요. 그런 주먹밥이 세상 곳곳에 퍼져나간다면…….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지요. 호랑이는 용기를 내어 문을 더 세게 두드렸답니다.
🐯"토끼 씨, 괜찮아요. 저는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화도 나지 않았어요. 아직 경찰을 부르지도 않을 테니 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쿵쿵쿵! 여전히 대답은 없었지만 문이 스르륵 밀렸어요. 잠겨있지 않았나 봐요! 역시 집을 버리고 도주한 것일까, 호랑이는 바짝 긴장한 채 한 뼘쯤 열린 문을 마저 밀었어요.
🐯"…실례하겠습니다."
몸을 굽히고 천천히 집안에 들어선 호랑이는 경악하고 말았습니다. 토끼는 도망을 간 것도, 잠이 든 것도 아니었어요. 백호랑이의 예상과 다르게 회색 토끼는 거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지 뭐예요! 놀란 호흡을 가다듬고 주변을 살펴보니, 거실 탁자에 올려진 채 반쯤 열려있는 바구니와 바닥에 나뒹구는 밥알들이 눈에 띄었어요. 주먹밥의 형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토끼는 이미 많은 양을 섭취해 버린 듯했습니다.
호랑이는 참담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어요. 이런 결말을 바란 것이 아닌데…….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이미 벌어진 일. 호랑이는 흩어진 밥알들을 수거하고 주변을 정돈했어요. 그러고선 공손히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작은 회색 토끼의 명복을 빌어주었습니다. 불쌍한 토끼, 다음 생에는 지금보다 멀쩡한 주먹밥을 만들길.
눈을 뜬 호랑이는 소파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담요로 토끼의 몸을 감쌌어요. 그런 다음, 이제는 따스한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뒷마당을 지나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몇 분이나 걸었을까요? 적당히 양지바르고 널따란 공터를 발견한 호랑이는 이곳에 토끼를 묻어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두껍게 쌓인 낙엽을 치우고 깊숙이 땅을 팠지요. 만약 세계를 지배하려는 사악한 흑마법사가 토끼를 살려내 다시 주먹밥을 만들게 되면 안ㄷ……. 아니아니, 빗물에 흙이 쓸려나가서 시신이 드러나면 안되니까요. 그것은 망묘(亡卯)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자신조차도 눈만 빼꼼 내비칠 정도로 땅을 판 호랑이는 펄쩍 뛰어 땅밖으로 나왔습니다. 다행히도 근처 아름드리나무 아래 뉘어놓았던 토끼의 시신은 그대로였어요. 호랑이는 토끼의 작은 몸을 다시 한번 담요로 잘 감싸준 후, 자신이 파둔 구덩이에 조심스레 눕히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어디선가 자신의 것이 아닌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른 고개를 들어 구덩이 밖을 둘러보았지만 공터는 여전히 고요했어요. 그렇다면 혹시……? 주위를 여러 번 둘러본 흰 호랑이는 바닥에 놓인 토끼에게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랬더니,
🐰"……으……."
하며, 토끼에게서 희미하게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 아니겠어요? 호랑이는 크게 당황했어요. 토끼가 완전히 죽은 게 아니었던 걸까요? 일단 하얀 호랑이는 침착하게 회색 토끼의 의식을 체크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말이 들리십니까? 들리시면 오른쪽 앞발을 살짝 들어보시겠어요?"
🐰"으아……. 토끼…… 살… 려……."
토끼의 오른쪽 앞발이 가볍게 올라왔다 제자리로 돌아갔어요. 토끼는 명백하게 살아있던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진 호랑이는 문득 어렸을 때 읽은 동화책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죽은 듯 잠이 든 공주에게 키스를 하자 목에 걸려있던 사과 조각이 튀어나오고 공주는 마법처럼 깨어났다는 그 이야기가요. 결심한 듯 침을 꿀꺽 삼킨 호랑이는 바닥에 놓인 토끼의 몸을 감싸들었습니다!
……그러고는 토끼를 뒤에서 껴안은 채 하임리히 요법을 실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호랑이는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동물이었거든요. 동화책은 동화책일 뿐, 음식물로 목구멍이 막힌 가련한 동물을 구할 수 없으니까요. 몇 차례 토끼의 복부를 압박하자 캑캑거리는 기침과 함께 기도를 막고 있던 주먹밥의 잔해들이 튀어나왔어요. 그리고 깊은 숨을 몇 번 들이마신 토끼는 동그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정신을 차린 토끼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어제의 그 커다랗고 하얀 호랑이였어요. 토끼는 있는 힘껏 팔짝팔짝 뛰어 구덩이를 빠져나가려 했지만, 깊이에 비해 너무 작아서 역부족이었답니다. 도망갈 수 없다고 판단한 회색 토끼는 절망에 빠지고 말았어요. '목에 걸린 주먹밥에서 벗어났더니 이제는 호랑이 밥이구나!' 자포자기한 토끼는 털에 묻은 흙을 탈탈 털고 일어나 호랑이에게 다가가 훌쩍이며 말했습니다.
🐰"어제도 만났는데 오늘 또 만났으면 호랑이 밥이 제 운명인 거겠죠. 당신 같은 잘생긴 호랑이한테 잡히는 마지막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해요……. 이왕 드실 거면 고통 없이 빠르게 잡아먹어 주세요."
🐯"저…….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는 당신을 잡아먹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게 야만적인 호랑이는 아니에요."
결연한 표정의 토끼를 보며 또다시 당황한 호랑이는 앞발사레를 쳤습니다. 일단 토끼를 구덩이 밖으로 올려준 후 따라 나온 호랑이는 자초지종을 늘어놓았어요. 어젯밤 주먹밥의 위험성을 알리려고 토끼를 찾아갔으며, 거실에서 쓰러진 토끼를 발견하고 정중히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여기서 땅을 파고 있었다고요.
🐰"그러니까 호랑이 씨는 제 생명의 은수(恩獸)신 거군요?! 그런 분께 말도 안 되는 오해까지 하다니 정말 죄송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아요. 감사와 사죄의 의미로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ㄷ"
🐯"괜찮습니다."
🐰"그치ㅁ"
🐯"괜찮아요."
호랑이는 은혜를 갚고 싶다는 토끼의 초대를 한사코 거절했어요. 그다음 파놓은 구덩이를 도로 메우고 나니 하늘에는 하얀 달 대신 눈부신 해가 얼굴을 내비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토끼의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지요. 토끼는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어요.
🐰"헤헤, 사실 어제저녁부터 먹은 게 하나도 없거든요. 낮에는 주먹밥을 먹긴 하는데 어쩐지 반만 먹어도 더 안 들어가고. 보통은 퇴근길에 음식을 배달시키는데 어제는 정신없이 뛰어오느라 마지막 주문 시간을 놓쳤지 뭐예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남은 주먹밥을 먹었고요. 근데 저는 괜찮았는데 호랑이 씨는 왜 기절한 걸까요? 혹시 평소 혈압이 낮은 편이신가요?"
🐯"토끼 씨도 기절했다 깨어났습니다만……."
🐰"아 그랬지!"
산기슭을 뛰어 내려가는 토끼가 조잘조잘, 신나게 떠들었어요. 호랑이는 이 토끼가 점점 불쌍해졌어요. 어떻게 동물이 이런 주먹밥을 먹고 살 수 있는지. 호랑이는 은근슬쩍 그 주먹밥에 관해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먹밥에는 무엇을 넣으신 겁니까?"
🐰"음, 소금만으로는 별 맛이 안 나는 것 같아서 (삐-)와 (삐-)를 좀 더 추가했어요. 아마 (삐-) 대신 (삐-)를 넣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보통 주먹밥에는 그런 재료들을 넣지 않습니다."
🐰"엥, 몸에 좋다고 했는데."
🐯"맛이 좋다고 하진 않았으니까요……. 혹시 입맛이 둔하다는 말 안 들으십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바쁘니까 점점 아무거나 대충 먹게 되더라고요, 헤헤."
🐯"……제가 새 주먹밥을 만들어 드릴 테니 그걸 드세요."
이렇게 하얀 털과 파란 무늬와 하늘색 눈을 가진 호랑이의 노력으로 토끼의 주먹밥은 완전히 사라지고 세상은 평화를 되찾았어요. 게다가 신중하고 또 신중한 호랑이는 혹여나 토끼가 또 다른 공격적인 음식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하얀 호랑이는 매일 찾아와 토끼의 저녁밥을 챙겨주었고 결국…….
요리는 기가 막히게 못 하지만 성실하고 귀여운 회색 토끼와 사랑에 빠져 한 가정을 이루었답니다. 요즘 두 동물은 공장제 떡 대신 백호 앞발표 수제 찹쌀떡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는데, 반응이 꽤 좋다나봐요? 마을과 시장 동물들은 물론, 멀리 떨어진 동네에서 택배 주문도 들어온다지 뭐예요! 그래서 매일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대요.
그렇지만 하루의 끝에 회색 토끼에게는 하얀 호랑이가, 하얀 호랑이에게는 회색 토끼가 있지요. 늘 함께하는 두 동물은 오늘도 행복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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