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과 바다

V ; 탄생과 첫 기록

밀레시안의 이야기

이름 잃은 혼백이 허공으로 헤엄쳐 나온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무엇이었던 건지도 모르는 순진하고 깨끗한 혼은 정처 없이 우주의 틈새를 유영한다. 여러 우주가 그를 선뜻 스쳐 지나가는 감촉을 기꺼이 여기며 묶인 곳 없이 자유함을 기쁘게 만끽하던 영혼은 찰나 어떠한 세계를 본다. 혼들이 스며들 틈이 찢어져 있는 곳, 희끗희끗한 강이 틈을 따라 흐르고 신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는 곳이 그를 아주 약하게, 그러나 무시할 수 없게 끌어당긴다. 가벼운 깃털과 같았던 이는 무언가에 저항했던 경험이 없어 끌어당김에 유순히 순응한다. 곧 세계의 표면에 영혼이 닿는다. 강물의 유속은 충분히 가벼웠고 영혼은 처음 맞이한 강물 속에 천천히 녹아든다. 그곳을 본래부터 흐르던 이들과 다를 바 없어진다. 그리고 영혼의 인도자는, 새로이 강에 깃든 혼백을 가볍게 건져 올린다. 늘 해왔던 일이기에 망설임 없이 손바닥 안에 감싸 안는다. 선뜻 이 세계에 낯선 영혼을 초대한다.

첫 번째 발자국은 아무렇지 않게 새겨진다.

숨을 부여받은 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는 처음 보는 하얀 소녀가 서 있다. 희어서 눈이 부신 공간에는 이따금 부엉이 우는 소리가 울리고,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없었으나 뺨에 닿아 오는 공기는 다정하다. 그가 눈을 두 번쯤 깜박였을 때,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정말로 그것이 그를 부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밀레시안 님.”

밀레시안은 아무런 표정 없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낯선 곳에 온 것 치고는 무던했고 친화적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반응이 없었다. 소녀는 그것이 익숙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밀레시안 님의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 내 이름?”

최초의 발화는 소녀의 말을 되묻는 것이었다. 입을 움직이는 게 어색해 도막도막 끊어진 채로 물었으나 다시 제대로 말하지는 않았다. 세계를 처음 디딘 이에게는 제법 어울리는 일이었다고, 이후의 밀레시안은 회상했다.

“네, 이름…. 이곳에서, 에린에서 밀레시안 님이 불릴 이름이요.”

소녀가 그렇게 설명하자 옅게 남은 혼백의 잔상이 나타난다. 들뜨고 신이 난 모습으로 제 가슴을 누른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데도 발돋움을 하고 한 바퀴를 뱅그르르 돌았다. 그러니까 내 이름, 이 애의 이름은 말이야. 숨을 얻은 이의 이름은, 정말 좋은 것만 모으고 모아서, 내가 아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을 고르고 골라서. 혼백은 한참, 혹은 순간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이 세계에 선물할 이름은 말이야. 표정 없는 이의 낯에는 작은 물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일말의 생기가 번졌다.

“베르다미어.”

혼백이 기쁨으로 부스러진다. 밀레시안의 어깨 주변을 춤추며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른다. 사라지기 전까지 마음껏 웃으며 탄생을 기념한다. 내가 마지막으로 빚은 가장 좋은 것, 이 세계에 반드시 남기고 싶은 것, 잘 부탁해, 에린, 영영 남기기로 해, 귀하고 고운 생生을 주기로 해. 흰색의 소녀는 그것을 알아들은 듯이 보드레하게 웃는다. 환영하는 사람의 얼굴이다. ‘베르다미어’는 숨을 처음 쉬는 것처럼 그 얼굴을 천천히 배운다.

“베르다미어…. 베르다미어 씨군요. 베르다미어 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 날?”

“네, 아, 제 이름은 ‘나오’라고 해요. 베르다미어 씨 같은 맑은 영혼을 에린으로 인도하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 에린?”

베르다미어는 질문이 많았다. 나오에게는 그것마저 익숙한 일이었다. 소녀는 조급하지도 거칠지도 않게, 영혼을 처음 맞이한 인도자답게 대답했다.

“에린은 베르다미어 씨가 가게 될 세계의 이름이에요. 마비노기의 세계라고 부르는 곳이 바로 에린이지요.”

“… 마비노기는 뭐야?”

“음유시인들의 노래라는 뜻이에요. 때로는 음유시인들을 마비노기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에린의 사람들은 모두 음악과 노래를 좋아하고 마비노기를 사랑한답니다.”

“… 나도 노래해야 해?”

“후후, 어쩌면요. 모쪼록 베르다미어 씨도 좋아하시게 되길 바라요.”

베르다미어는 자신 없다는 듯이 시선을 제 신코에 두었다. 나오는 부드럽게 웃기만 했다.

“그리고 마비노기는… 베르다미어 씨와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존재하는 이 모든 곳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기도 해요. 베르다미어 씨도 에린에 도착하면 사람들과 어울려 보세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걸.”

“괜찮아요. 모두 그렇게 지내는 법을 배우는 곳이니까요.”

“… 그것만 하면 돼? 사람들과 어울리고, 노래를 부르고….”

“베르다미어 씨가 하고 싶은 걸 하시면 돼요. 무엇을 꼭 해야 한다는 의무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아요. 목표는 베르다미어 씨의 삶에 자연스레 자리 잡을 거고, 베르다미어 씨는 삶을 살아가며 그 목표에 다가가게 되겠지요.”

“…… 어렵네.”

“처음 오신 분들께서는 언제나 그런 말씀을 하세요. 베르다미어 씨도 분명 잘 해내실 수 있을 거에요.”

베르다미어는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흔들리는 제 머리카락 끝을 바라보았다. 검고, 윤이 났다. 손발이 작고, 아마 키도 작달막한 것 같았다. 속으로 밀레시안이라는 단어를 곱씹어 본다. 그러면 또 물어볼 것이 떠올랐다.

“나오.”

“네, 베르다미어 씨.”

“… 밀레시안은, 어떤 뜻이야?”

나오는 다시금 부드럽게 웃어 보인다. 그리고 아주 반가운 질문에 답하듯,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대답했다.

“‘별에서 온 자’라는 뜻이에요.”

베르다미어는 응, 하고 작게 대답하고, 이제 더 물어볼 것이 없다는 듯 선명한 시선으로 나오를 바라봤다. 인도자는 별들이 흘러가는 강물의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에린으로 보내드리도록 할게요. 에린에서 베르다미어 씨를 기다리고 있는 분들이 계신답니다.”

“그 사람들도… 너에게서처럼 배울 게 많아?”

“네, 베르다미어 씨가 에린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울 수 있을 거에요.”

“… 선생님이 많네. 응, 알았어. 이제 정말 준비됐어.”

“그럼… 에린에서의 모든 일에 행운이 함께 하시길 기원할게요.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세요, 베르다미어 씨.”

에린에서의 모든 일에 행운이 함께 하길. 베르다미어는 손안에 들어온 빵과 책 한 권, 온기가 담긴 돌을, 마치 그 말이 새겨져 있는 것처럼 꼭 쥐었다. 세계에 발을 딛고 처음 맞이한 온기는 짧고 빠른 여행 동안에도 꺼지지 않았다.

밀레시안의 첫 기억은 다정스럽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잔상이 남긴 기원처럼 춥지도 날카롭지도 아프지도 않다. 둥근 발자국이다. 그 뒤에 만난 이들과 몇 걸음을 더 떼었다. 여전히 춥지 않다. 아프지 않다. 따뜻한 손길이 있다.

그래서 그는 앞에 놓인 길을 망설임과 두려움 없이 걷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는 세계를 거뜬하게 걸어 횡단할 준비를 마친다. 풀과 북풍의 냄새가 그에게 끼쳐 왔다.

북쪽 마을의 촌장은 가슬가슬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방문자를 기다렸다. 흰 부엉이가 물고 온 편지는 반가운 소식을 품고 있어서, 미처 별이 이지러지지 않은 때부터 팔라라가 따뜻한 손을 천천히 뻗어내는 지금까지 집 바깥에서 손을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그리고 촌장이 ‘저놈의 새, 매일 잠만 자는구나.’라는 혼잣말을 정확히 세 번쯤 했을 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작고 어린, 땅을 밟는 것이 아직 서툰 소리였다. 그는 안도가 번진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별에서 온 자들이 흔히 어린 모습으로 도착하는 것을 알기에 시선은 아래를 향한 채다. 다행히도 딱 맞아 든다. 둥글고 붉은 두 눈동자가 정확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는 아주 조금 구깃해진 소개장을 든 채였다. 떨림 한 점 없이 베르다미어는 그것을 내밀었다.

“이건…. 나오의 편지로군. 언질은 받았네. 자네가 베르다미어?”

“… 응.”

“반갑네. 나는 이 마을의 촌장인 던컨이라고 하네. 티르 코네일에 온 것을 환영하네.”

“…… 티르 코네일?”

“이 마을의 이름이네. 이곳으로서는 참 오랜만의 손님인데…. 자네가 앞으로 잘 적응해 나가면 좋겠군. 자, 잘 부탁하네.”

“… 나도 잘 부탁해… 요.”

작게 따라붙는 존칭이 들렸다. 던컨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어수룩하게 뻗은 작은 손을 잡아 몇 번 위아래로 흔들었다. 손님이자 마을의 새로운 일원은 그것마저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그럼, 베르다미어. 여기까지 오면서 하고 싶은 게 무언지는 생각해봤나?”

“음…. 노래 부르기. 나오가 하라고 했으니까… 요.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 보기.”

“노래 부르기라. 말콤이 류트를 팔고 있긴 할 텐데, 그 친구 노래 실력은 어떤지 모르겠군. 사람들을 만나 보는 거라면, 마을에 인사를 다녀 보는 건 어떤가?”

“… …”

“… 낯설어서 엄두가 나질 않나?”

“…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하하…. 그럼 이렇게 하지. 내가 나오처럼 소개장을 써 줌세. 그러면 좀 더 용기가 나겠는가?”

베르다미어는 한참을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던컨은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집 안으로 들어갔고, 밀레시안은 홀로 서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제야 고개를 들어 마을을 둘러보았다. 조금 서늘한 공기가 작은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커다란 광장 나무 너머의 목가적인 집들과 포장되지 않은 길이 친근한 몸짓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저 멀리 보이는 평원이 아마도 이 마을의 끝인 모양이었다. 세계에 처음 발을 딛은 여행자가 머무르기에 좋은 곳이었다. 산맥을 타고 내려온 바람이 그의 뺨을 선선하게 스쳤다. 그는 문득 이곳을 좋아하게 되리라는 예감이 고개를 드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태어난 곳처럼 굴게 될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예감이 다음 걸음을 떼기 전에, 나무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상념을 부드럽게 가르고 지나갔다.

“여기, 소개장이네.”

던컨은 정갈한 글씨가 쓰인 종이를 건넸다. 베르다미어는 그것을 받아들고 눈으로 읽어 보았다. ‘촌장 던컨이 신원을 보증하는 새로운 손님이자 여행자이므로, 마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길 바람.’ 그리고 소개장의 이야기가 어떤 뜻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밀레시안은 모두 여행자라는 대명사를 갖는 걸까? 하지만 어떤 곳에서 삶을 구가하는 자는 여행자보다는 거주자가 맞지 않던가. 내가, 그리고 나와 같은 여행자가 ‘밀레시안’이라면, 여기에 본디 살던 이들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을까? 의문을 품을 차에 자상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 왔다.

“그럼 모두에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오게나. 이따금 사소한 도움이 필요한 이들도 있을 테니, 이 마을의 생활이 어떤지 경험해볼 겸 그들을 도와주고 돌아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걸세.”

“… 난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그것도 배워 가면 되지 않겠나? 본래 시작하는 게 가장 어려운 법이라네. 한 번 배우고 나서는 금세 적응할 수 있을 게야.”

“… 응. 열심히 할게… 요.”

베르다미어는 소개장을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고, 잠시 머뭇거리다 걸음을 떼었다. 얇은 가죽 신발 아래에 밟히는 흙이 부드럽게 처음 마을에 들어선 이의 길을 지탱했다. 낯선 것이 익숙하게 변하는 순간은 일종의 경이를 동반하나, 동시에 아무런 일이 아니다. 마치 그가 첫 번째 발자국을 아무렇지 않게 찍었듯이. 팔라라가 머리 위에서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여행자가 에린에 발을 딛은 최초의 하루는 그렇게 저문다.

베르다미어는 새벽이 오는 냄새를 맡고 잠에서 깨어났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담요 때문에 살갗이 찼다. 주홍색의 기묘한 고양이는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고, 던컨은 언제나처럼 새벽 산책을 하러 나간 듯했다. 집 안의 목재가 머금고 있던 온기가 스며 나오는 것을 멍하니 느끼고 있다 보면 혼몽하던 머리에서 해무가 걷히듯 꿈의 잔해가 천천히 사라졌다. 무슨 꿈을 꾸었더라? 그래, 목소리를 들었었다. 들리느냐고 속삭이는…. 그리고 티르 나 노이가 파괴되려 한다는 멀고 꿈결 같은 목소리. 날개를 단, 처음 보는데도 낯설지 않은 여인의 모습. 베르다미어는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흐려지기 시작한 꿈을 곱씹어 새겼다. 이쪽으로 와 달라고 했어. 이쪽이 어디일까? 붉은 눈동자 두 개가 몇 번을 거푸 감겼다 뜨인다. 해가 조금 더 끌어올려지면, 그때…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러 다녀야겠어. 그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몇 번을 더 입 속으로 그 말을 중얼거려 본다.

마을에서 가장 어린 여행자는 나무 막대기 하나를 들고 흙길을 걸었다. 닭을 괴롭히는 여우의 눈앞에 막대기를 휘두르면 캥, 하는 소리와 함께 네 개의 발이 바닥을 박찼다. 겁을 먹은 암탉을 달래 안아 들고 머리를 긁어 준 뒤, 꼭 안아주면 곧 깃털 아래의 팔딱거리는 심장이 진정하기 시작한다. 그대로 들고 다녀도 돼? 하고 속삭이듯 물어보고 홰를 치지 않으면 허락의 뜻이다. 닭의 말을 모르니 가늠에 가까웠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방법이라 베르다미어는 쭉 방법을 고수했다. 지금도 그렇다. 따뜻하고 통통한 닭의 몸을 가볍게 감싸 안고 마저 길을 걸어간다. 어린 여행자에게는 할 일이 크게 많지 않았는데, 보통은 여우를 내쫓거나, 성당의 일을 거들거리나, 던전을 가겠다고 트레보와 입씨름을 하거나, 늑대와 다투다 지나가는 다른 여행자에게 목숨을 빚지는 등이 다였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일이 있었다. 첫 번째, 티르 나 노이는 어디인가? 두 번째, 검은 날개의, 감은 눈의 여인은 누구인가? 베르다미어의 세계는 작은 마을에 한정되고 있기에 물어볼 사람이라고 해봐야 매일 보는 마을 사람들 뿐이었다. 그는 제일 먼저 성당으로 향했다. 왜인지는 잘 몰랐다. 그냥 그게 더 괜찮은 일처럼 느껴졌다. 아직도 이름을 외우지 못한 여신의 그림이 새겨진 창문을 바라보다 문을 가볍게 밀어 열었다. 부드러운 인상의 사제가 그를 반겼다.

“메이븐 사제님.”

“오, 베르다미어. 오랜만이오. 성당엔 어쩐 일로…? 엔델리온 사제는 바깥에 있을 텐데.”

“궁금한 게 있어서요.”

“나에게 물을 만큼 궁금한 일이 있소? 말씀해 보시구려.”

베르다미어는 잠시 무얼 먼저 물어볼까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티르 나 노이라는 곳은 어디에요?”

“티르 나 노이? 어디에서 들은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티르 나 노이는… 아주 간단히 설명하자면, 삼 주신이 떠받치고 있는 죽음이 없는 세계라오… 우리 모든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자 신들의 세계기도 하지.”

신들의 세계라. 베르다미어는 눈을 깜작거렸다.

“거기에 검은 날개를 단…. 눈을 감은 여신도 있어요?”

“검은 날개의 여신이라…. 허허, 무슨 일로 물으시는지 이제는 내가 궁금해지는구려. 어떤 일로 여신에 관한 이야기를 묻고 다니시오?”

어린 여행자는 잠시 망설였다. 꿈에서 나왔어요, 하자니 꼭 비밀을 누설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암탉의 머리를 어색하게 긁어주며 이렇게 얼버무린다.

“그냥…. 여행자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요.”

메이븐 사제는 턱을 만지작거리다 금세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는 외부인과도 쉽게 말을 트는 모양이오. 평소에는 마주하려고 하지도 않지 않았소?”

“… 가끔 재밌는 얘기를 해주긴 하더라고요.”

“허허, 촌장님께서 걱정하고 계신다오. 워낙에 외부인을 경계한다고….”

“너무 걱정이 많으신 거라니까요.”

“당신도 여행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조만간에 다른 곳에도 가보아야지요.”

“별로….”

그건 ‘싫어요’라는 뜻이었다. 사제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작은 양피지를 꺼내 무언가를 메모했다.

“궁금해하는 여신에 관해서는 관련한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은데…. 마침 법황청 쪽에 몇 가지 서적을 요청할 예정이었소. 그 책을 함께 보내달라고 할 테니… 나중에 다시 와 주시겠소?”

베르다미어는 사제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나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작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마음 한구석이 작게 찔렸지만, 비밀을 뱉는 기분에 휩싸이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얌전히 안겨있는 암탉을 한번 꼭 안아준 베르다미어는 사제를 일별하고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아직도 팔라라는 중천에 떠 있었다. 그는 암탉을 성당 옆의 공터에 놓아주고 언덕을 따라 내려갔다. 그는 때때로 밀밭이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모양을 지켜보기를 좋아했다. 보통 생각이 아주 많을 때 그는 그렇게 했다. 학교의 대문 근처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베르다미어가 나뭇가지를 옆에 내려두고 턱을 괴었다.

지난밤의 꿈이 폭풍의 가장자리에서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그림자처럼 그의 눈꺼풀 위에서 깜박였다. 들은 말은 얼마 되지 않았다. 티르 나 노이가 파괴되려 한다, 이쪽으로 와 달라. 실상 그를 부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부르는 자가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도움 요청 같은 느낌이었다. 그에게는 꼭 대답할 필요도 없었고, 궁금해할 필요도 없는 목소리. 그런데 계속해서 호기심이 일었다. 반드시 대답하거나 여신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낮은 파도처럼 계속해서….

밀밭이 허공에 그어내는 부드러운 선을 따라 흔들리던 상념은 멀리서 날아오는 부엉이의 그림자가 끊어낸다. 작은 발톱이 손안에 던져준 스크롤을 낚아챈 베르다미어는 하늘에서 두 번 맴을 도는 익숙한 새에게 손을 흔들었다. 던컨이 보낸 것이다. 스크롤을 펼쳐 꼼꼼하게 읽고, 그것을 쥔 채 몸을 일으켜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낸다. 고개를 들어 북쪽을 한 번 바라보고 귀걸이… 하고 작게 혼잣말했다. 세계를 처음 밟았던 때와 같이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이, 받은 부탁을 해결하려고 가볍게 발을 떼었다.

그리고 그 걸음으로부터, 비밀 기사단의 문서 위에 몇 개의 단어와 간결한 문장으로 여행자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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