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3

BG3/아스타리온 드림/아스타브

BG3 - 대충 엔딩 이후 시점

몽유기담 by 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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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다크라 하면 많은 이들이 우연히 혹은 가볍게 지인을 만나기엔 적합하지 않다고 느끼고는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페이룬에서 지나가다 만났어, 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러나 페이룬에서, 페이룬에 있는 많은 곳에서 많은 이들이 우연히, 혹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만나듯이 그들도 그러했다. 비록 가까이 살진 않아도 순간이동 마법진을 통한 합리적이고도 신속한 방법, 혹은 근처를 지나가다 일부러 들르는 낭만적인 방법을 통해 바드는 특이한 홉고블린과 특이한 마인드플레이어 친구를 찾았다.

발더스게이트 안에서 곤욕을 치른 이후 연구를 계속하러 언더다크에 먼저 내려갔던 둘은 반색하며 그들을 맞았고, 노래하는 마이코니드 군락 안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플럼프의 짝짓기 의식 따위의 제목으로 위장하고 있던 진귀한 책, 조용한 마이코니드 군락까지 닿도록 언더다크를 뒤흔든 도시들의 소식, 수천 명의 뱀파이어스폰들이 자리 잡은 폐허에서 찾은 수상한 입구 등 이야기할 것은 수도 없이 많았고, 특히 언더다크의 생태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 가장 열렬했다. 그중에서도 정점은 역시 버섯에 대한 연구 이야기로, 상대가 비전문가 둘이라는 걸 잊기 시작한 연구자들의 열성적인 설명이 너무 뜨거운 나머지 아스타리온을 도망가게 만들곤 했다.

마인드플레이어나 우리 자기는 참 특이하기도 하지. 그런 점이 매력적이라곤 생각하지만 특이한 것은 특이한 거다. 대화나 자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진 않아도 항상 그 옆에 함께 하는 아스타리온은 오늘따라 유난히 곱슬거리는 양 느껴지는 머리카락을 연신 손으로 쓸어넘겼다.

어느 날부터인가 기묘하게 버섯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연인은 그 반쯤 뾰족한 귀를 쫑긋이 세우고 기묘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마법 버섯을 키워보고 싶다던 말은 그냥 한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마법 버섯이 아니더라도 식재로는 쓸 수 있을 거라나. 한입 물면 피가 흠뻑 배어 나오는 버섯이 아닌 이상 별 관심이 생기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으나, 그래도 식재라면 그걸로 야생동물을 꼬시든 키우든 할 수도 있을 테니 버섯 크기 정도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버섯 술이라도 담그든가.

그러나 오늘은 웬일로 화제가 일찍 넘어간 모양이었다. 긴 시간 걸으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블러그와 오멜룸이 파는 물품 보따리나 뒤지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사랑스러운 파트너는 반쯤 뾰족한 귀를 다른 이야기에 기울이고 있었다. 바로 책 이야기였다.

“―아, 연구집 이야기를 하니 이번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는군. 이번에 서로 연구집과 그 외 자료를 교환하기로 한 학회 동료가 책을 잘못 가져왔지 뭐요. 환영술이 걸려있길래 오멜룸이 지워보았더니 신문, 가십, 소설같은 게 잔뜩이라 정말 놀랐다오. 알고 보니 남몰래 숨겨가면서까지 즐겨보던 친구더군. 보니 다 발더스게이트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책들이었소.”

“발더스게이트? 거기 있던 학회 사람인가 보지?”

“그렇다오. 아직 난리 통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았는지 종이 질은 썩 좋지 않지만, 그래도 그대가 좋아할 것 같아 나와 오멜룸이 그냥 받아두었지. 한 번 보시겠소?”

“나야 환영이지. 그래도 될까?”

“얼마든지 보시오. 물론 가져가도 된다오. 블러그나 나나 이런 부류의 책에는 관심이 없으니.”

그렇게 말하며 오멜룸이 꺼내온 책이 십수 권이었다. 발더스게이트 이야기가 나오니 아스타리온이 긴 귀도 함께 쫑긋 섰다. 이렇게 좋아하는 걸 대체 어떻게 취미며 취향을 숨기며 살아온 걸까. 얼굴도 모르는 학회 연구자에게 혀를 차며 아스타리온은 마법 가방을 열었다.

“아니, 이게 뭐야. 웬일로 좀 재미있는 것들이 생겼네? 고맙기도 하지, 기대되는걸.”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며 책을 챙기는 손길에서도 이미 신난 것이 엿보였다. 가방은 오배송된 책 십수 권에 따로 준비한 책과 물품까지 차곡차곡 넣어주는 대로 수납했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다니, 신세를 졌네. 정말 고마워. 다른 이들도 좋아할 거야.”

“고맙기는. 이 정도로 일일이 감사 인사를 받으면 그대는 사람들에게 몇 날 며칠을 감사 인사만 받아야 할거요. 조심해서 돌아가고, 또 궁금한 게 생기면 연락하시오. 우리도 흥미로운 걸 발견하면 연락하겠소.”

“그래, 기대할게.”

그렇게 짧은 방문이 끝났다. 아스타리온과 파트너가 몇천 명의 스폰과 함께 자리를 잡은 터는 이제 슬슬 폐허 티를 벗어나고 있었다. 수천 명의 스폰이 공유하는 것이라곤 강제로 스폰이 되어 겪어야 했던 고통과 갈증 외에는 없는 만큼 여러 종족, 여러 성향, 여러 성격의 이들이 모였을 때 생기는 온갖 위험천만한 소란과 소동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나날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충돌하여 떠난 이들도 있었고, 격한 의견 충돌 끝에 벌어진 싸움에서 피치 못 하게 죽은 이들도 있었다. 폐허를 정리하거나 주변을 정찰하다 공격을 받은 적도 있었고, 폐허에서 발견된 정체 모를 통로에 그와 파트너가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햇빛을 피해 안전을 찾아왔다 해도 언더다크는 자극과 위험 가득한 곳이니, 떠나온 땅에 대한 가십거리며 이야기책 정도면 충분히 안전하고 괜찮은 심심풀이 소일거리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던 것은 역시 발더스게이트의 목소리였다. 그 유명한 신문은 오는 길에 이미 둘에게 가장 먼저 읽힌 뒤 다른 스폰들의 손으로 떠나갔고, 그다음으로는 둘의 선호하는 책 취향에 따라 갈렸다. 잡지, 가곡집, 꽁트집, 재담집, 그리고 특이한 친구들이 넣어준 특이하고 두껍고 재미없는 책 등등.

아스타리온이 몇 권 있던 가십 잡지와 유행하는 옷에 대한 기사를 다 읽고 손을 털 때까지도 하프엘프는 손에 든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수집하고 즐기는 것 역시 바드의 많고 많은 소양 중 하나답게 파트너는 글도 유달리 즐겼다. 한 번은 어디서 따분하고 재미없는 법전을 들고 와서는 그에게 용어를 물은 적도 있을 정도로. 그에 비하면 옷 잡지는 선녀였다.

“이렇게 치렁치렁하게 두르는 걸 좋아하는 치들이 있다고? 말도 안 돼. 그렇게 다 가려서 대체 무슨 재미야? 어디 하플링이나 드워프 같은 친구들이 입으면 다리나 보이겠어?”

“맞춰 입으면 되지. 왜 못 입어?”

“글쎄, 베개랑 뭐가 다를지 모르겠네. 물론 세상에 예쁜 베개라는 게 있긴 있겠지만 예쁜 베개 같은 사람은 내 취향은 아니야.”

“내가 입어도 별로일까?”

“자기가? 옷 잡지를 읽는 동안 아스타리온이 온갖 옷 스타일에 대해 내리던 평을 배경음악 삼아 흘려듣던 그는, 흰 손이 책을 내려놓고 일어나는 소리에 입을 열었다.

“왜? 이제 더 볼 게 없어?”

그가 내내 늘어놓던 본인의 옷 취향에 대한 일장연설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 말에 아스타리온은 씩 웃음 지었다.

“음, 적어도 재미있을 만한 책은 다 본 것 같네. 자기는 계속 읽을 거지? 혹시 더 선정적이고 재미있는 책이 더 있거든 꼭 알려줘야 해. 가능하면 내용이 자극적인 걸로. 내 취향은 이미 알지?”

넘치는 매력을 담아 날린 윙크에 파트너가 짐짓 실소를 감추며 눈을 흘기는 것이 보였다.

“자극적인 것만 찾다가 몸 망치면 어쩌려구.”

“오,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도 돼, 자기. 난 남을 망치는 쪽이지 망가지는 쪽은 아니잖아? 거기다 내가 보는 눈도 높고 입맛도 고급지긴 해도, 경우나 소재에 따라서는 순한 것도 가리지 않고 좋아한단 말이지. 건강 상할 정도로 편식을 하는 편은 아니랄까. 매일 밤 자기 덕에 보양식도 챙겨 먹고 있으니 뭐가 모자라서 몸을 망치겠어?”

“내가 그렇게 야식을 잘 챙겨 먹이고 있었어? 큰일이네, 몸에 좋은 것도 적당히 먹어야 한댔는데.”

“핫하! 그건 더 걱정할 필요 없지. 매일 밤 더없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걸. 땅이 이래서 밤인지 아침인지는 모르겠지만.”

하프엘프가 결국 실소를 참지 못하고 웃었다. 아스타리온은 붉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염색한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키득거리는 파트너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누구보다 자극과 쾌락을 즐기는 향락주의자라 말했지만, 놀랍게도 세상엔 그 외에도 좋은 것이 존재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자극과 쾌락보다 더 사랑스러운 게 세상에 존재한단 사실이었다.

모였던 절대자 신도들이 해체되어 일대 혼란이 빚어지는 도중에 여러 종족이 여러 지방에서 모이면서 퍼진 것은 새로운 패션 트렌드뿐만 아니었다. 색다른 이색 노래들을 서투르게 받아적은 가곡집을 보던 바드는 손끝으로 톡톡 책장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 책은 내 입맛에 더 가까운 거 같긴 해. 자극적이라기보단 달콤한 이야기가 가득하네.”

“아, 단 거. 좋긴 한데 자기 말대로 내 취향은 좀 다르긴 해. 산미도 좀 있으면 좋겠고, 목 넘김도 좀 있으면 더 좋고, 감칠맛도 좋고 알코올은 있으면 더 좋지. 그게 피면 금상첨화고.”

“어련하겠어. 흠, 그럼 단 술은 좀 괜찮지 않아? 앰산 후식용 포도주라든가.”

“그건 뭐, 나쁘지 않지. 그치만 자기, 단 것만 좋아하면 이 썩는다?”

“나는 너처럼 매일 마시지 않거든.”

아스타리온은 짐짓 못 들은 척 여린 어깨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어깨를 두른 창백한 손끝이 파트너가 들고 있던 책을 건드렸다.

“어디 보자, 자기 좋다는 그 달달한 게 어떤지 나도 좀 볼까?”

“괜찮겠어? 입에 안 맞아도 몰라.”

“괜찮아. 그러면 자기가 보상해주겠지, 뭐.”

“허어.”하고 옆에서 기막혀하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편협한 뱀파이어가 섬세한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훑자, 좋지 못한 재질의 종이가 바삭거리며 우는 소리를 내었다. 적당히 마음 가는 대로 아무 데나 골라 펼친 그는 고혹적인 목소리로 쓰인 가사를 읊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숲에서, 해안에서, 어둠 속에서, 세상 모든 이가 한 곳에 모였네, 누가 알았으랴, 이 중에 방화범이 있으리란 것을. 잘들 보게, 내 마음에 불을 지른 이가, 금기에 불을 지른 이가 이 자리에 있다네. 흠, 앞에서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불을 지르고 싶어지긴 하겠네.”

“그래? 솔직하지 않아?”

“너무 정직한 걸 보면 가끔 불을 놓고 싶어지더라고.”

아스타리온이 어깨를 으쓱이며 다음 노래를 골랐다.

“그대에게 목걸이를 선물하겠네, 한 알 한 알 셀루네의 눈물로 이뤄진 목걸이를. 그대 그 목걸이를 두르고 나면 셀루네의 눈물 아래 내 눈물 떨구게 하는 이유도 알 수 있겠지― 달기보단 짭짤한걸. 눈물 맛이라니, 으.”

“하나하나 다 핥아볼 생각이야?”

“자기도 아니고 왜 그러겠어. 내 평가를 내리자면 일단 지금까진 좀 실망이야. 다음은 어떤지 볼까? 그대 밤눈은 타고 났다지, 허나 그대와 달리 내 밤눈 어두워도 상관없다네, 잘 익은 과실향, 달콤한 향기, 부드러운 온기 따라가면 그대 입술 있으니, 길 잃을 일은 없다네. 흐으으으음.”

“어때, 그것도 별로야? 영 아니야?”

“지금까지 본 것 중에는 제일 나은 것 같네. 그치만 그래도 별로야. 패스.”

그 후로도 아스타리온의 평가는 계속되었다. “이건 술집에서도 못 써먹겠어. 고주망태가 되도록 취해도 차마 내 입으론 못 하겠네.”, “이건 그래도 써먹을 수는 있겠다. 하룻밤 꼬시는 용도로는 딱 괜찮겠네.”, “이 노래는 좀 괜찮은걸. 새빨간 피에 빗댄 묘사가 마음에 들어. 이건 좀 인정해줄 마음이 드네.” 등, 갖가지 기준과 표현으로 얇은 가곡집에 점수를 매기는 것이 끝나자 바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까탈스럽기는. 그러고 보니 넌 요새는 그런 말 안 해주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는 잠깐이나마 사탕발림 말을 해주더니. 반짝 한철이었다 이거야?”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 짓궂은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스타리온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 자기, 그런 말이 듣고 싶었어? 말 안 해도 이미 아는 줄 알았지.”

“흐음, 난 이미 잡은 물고기다?”

“이미 잡아서 맛있게 먹고 있긴 하지. 굳이 왜 하겠어? 미사여구를 억지로 끌어다 붙이지 않아도 더 솔직하게 나타내고 있는걸.”

얇은 책은 읽고 있던 주인에게 돌아가는 일 없이, 창백하고 예쁜 손가락에 의해 책상이 있을 만한 자리로 던져지고 말았다. 아름다운 뱀파이어는 파트너를 꼭 끌어안고서 속삭였다.

“그래도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매일 항상 잘 해주잖아. 알지?”

“알긴 알지.”

“자긴 매 순간 완벽해.”

“흐음.”

“사랑스럽고.”

“음.”

“우리 같이 있은 지 꽤 됐는데 아직도 자긴 자기가 내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몰라?”

“어떻게 보이는데?”

아스타리온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매력적인 입술은 작은 몇 마디를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가만히 듣던 하프엘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속삭임이 더해갈수록 혀 위를 채우는 달콤한 향기도 짙어져 갔다.

이런 스위츠라면 한 번씩 즐기기에는 나쁘지 않지. 반쯤 둥글고 반쯤 긴 귀 끝을 입술로 물며 아스타리온은 감미를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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