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테르페의 소설

[HL]왕관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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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HL 자캐 페어 - 『왕관의 무게』

Keywords : 판타지 / 혁명 / AU

에우테르페의 소설 中 겨울 타입 글 커미션

ㄹㅈ님 연성 교환 ⓒ리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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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8


왕관의 무게

왕국의 깃발이 꺾였다. 혈흔이 낭자하게 튄 천이 곧 선홍빛으로 불타올랐다. 재가 되어 흩어진 것은 더 이상 한 나라의 상징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스러진 한 줌의 먼지에 불과했다.

저 멀리 어디선가 함성소리가 들려온다. 우레와 같은 소리는 곧 혁명의 불길이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눈앞에 선명하게 퍼졌다. 반란군이 성을 점령했다. 수많은 희생이 뒤따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무너진 나라의 보금자리는 이제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성 곳곳이 조금씩 무너지고 불길에 집어삼켜졌다. 위대한 왕이 주재하셔야 할 왕성 안에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기득권자들이 제가 가진 것을 빼앗기기 싫다는 처절한 몸부림은 반란군의 무기 앞에서 하잘것없는 벌레의 발버둥일 뿐이었다.

가진 자들이 제 욕심으로 그득하게 끌어모은 재보를 들고 도망가다 죽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났다. 그런 모습은 분노에 찬 백성들의 감정에 더더욱 불을 지피우기만 했다.

혁명의 검에 스러지는 폭정의 산물을 견뎌내며 오딜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검에 묻은 혈흔과 지방을 휙 휘둘러 털어내고 곧 들개처럼 왕성 내부를 헤매기 시작했다.

알현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이 나라 알현실의 위용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음이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거대한 문이 반쯤 열려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급히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터벅터벅 들어갔다. 저 멀리 제국의 태양이 내려앉은 자리가 보였다. 드디어 시야에 왕좌가 걸렸다. 그리고 그 왕좌 위에서는 누군가의 인영이 조용하게 제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다.

오딜은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가만히, 죽은 듯이 앉아있는 그는 연회에서나 입을 법해 보이는 휘황찬란한 의장으로 몸을 휘감고 있었다. 마치 저보고 제가 왕이요, 하며 온몸으로 광고하는 것 같은 느낌.

제게 다가오는 여성을 보는 이안의 표정은 무서울 만큼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것은 어떤 반항도,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는 자의 얼굴이었다.

이안은 그리 생각했다. 제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수탈당한 것은 사실이었고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은 의도한 대로 행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선한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만을 부르는 것은 아니다. 어떨 때는 불운이라는 큰 걸림돌이 의지를 변질시키기도 한다.

자신에게는 억울해 할 자격조차 없었다. 힘이 없는 왕에게 선한 의도란 그저 나라를 집어삼키는 화마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오딜은 이안의 번듯한 모습을 보고 변장한 대역이라 판단했다. 대외적으로 얼굴을 비치고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왕이 아니었으니 진짜 모습을 확인할 방법이 막연했다. 왕이란 자가 백성과 소원하니 알아볼 틈이 있나.

오딜은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팔을 들어 왕좌의 주인에게 검을 겨누었다. 저런 자가 그 소문의 극악무도한 폭군일 리가 없었다. 진짜는 따로 숨겨놨을 게 분명하다. 그녀는 꾹 다문 입술을 비틀어 음성을 내뱉었다.

“진짜는 어디로 갔지?”

“...”

“왕은 어디로 숨겼지.”

“...저는 이제 당신들에게 진짜 왕으로 여겨지지도 않는 듯하군요.”

자조하며 쓰디쓴 언어를 내뱉는 그 모습은 오딜 자신이 그간 들어오고 상상해왔던 폭군의 모습과는 일억 광년 정도 떨어진 태도였다. 이안은 망설임이 묻은 칼끝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검신을 떠는 그것을 천천히 제 목으로 잡아당겨 겨누었다. 그녀가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황망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저를 멍하니 쳐다본다. 비애의 왕은 그 일련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조용히 죽음을 각오한 언어를 입에 담았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이 다들 나 때문이라고 하던가요.”

“...”

“그렇다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것으로 분이 풀린다면 당신의 손에 처단당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꾸욱. 칼날을 붙잡은 흰 손이 제 목에 닿은 칼끝에 힘을 가하자, 날카로운 면에 걸린 피부에서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이안의 손바닥과 목에 새겨지는 자상을 본 오딜은 살짝 몸을 떨더니 결국 검을 떨어트렸다.

챙강, 쇠붙이가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공허하게 알현실 내부를 울렸고 검의 주인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급히 뒤로 물러났다.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이런 게... 이런 자가 그 소문의 극악무도한 폭군이라고? 그럴 리가 없어. 왜냐하면 내가 알던 왕은...

난잡하게 이리저리 튀는 생각을 붙잡으려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급하게 머릿속을 갈무리하고 사태를 파악했을 땐 이미 이안이 떨어진 검을 주워 돌려주려는지 제게 유순한 태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젠장.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게 끌려오는 이안을 뒷문 쪽으로 끌고 갔다. 문을 여니 나타난 곳은 역대 왕들의 석상이 모셔져 있는 신성하고 낡은 장소였다.

그녀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 같은 오래된 석상 뒤에 그를 적당히 숨겼다.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하얀 얼굴이 보였으나 무시했다. 그 순한 눈빛은 제 마음속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기만 할 뿐이었다.

군중이 모인 곳에서 처형하기 위해 자신을 뒷문으로 데려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안은 자신을 숨기는 듯한 태도에서 묘한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은 뭘까? 본능적인 궁금함에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버렸다.

“왜 나를 여기로 데려온 거죠?”

“그건... 감이야.”

“네?”

“지금 당신을 여기서 죽이면 안 될 것 같은 감이 왔어. 그뿐이야. 아직 들을 얘기도 많고...”

횡설수설 여러 말을 주워섬기는 그녀의 모습은 퍽 혼란스러운 모양새였다. 오딜은 고개를 한차례 털더니 멀뚱히 서 있는 이안을 다시 끌어다 석상 뒤에 재차 숨겨두고는, 다시 왕좌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온 알현실 내부는 끔찍한 참상의 현장이었다. 이런 곳에서 저런 순해 빠진 자가 미동도 없이 자리에 앉아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왠지 속이 탔다. 오딜은 두리번거리며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있는 시체를 찾았다.

아, 찾았다. 저기 제가 마치 왕이라도 되는 양 휘황한 금장으로 몸을 두른 망자가 보였다. 왕의 권위가 무색할 정도로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는 귀족.

그것을 본 오딜은 속으로 혀를 차며 제 생각에 확신을 가했다. 저자가 왕이라면 그림자 왕 같은 것임에 틀림없다고. 제 의도와 상관없이 귀족들의 수작질에 농락당하다 처형의 위기까지 몰린, 정치에 아둔하지만 의지만은 그저 선량한 자.

그녀는 귀족의 시체를 끌어다 왕좌에 앉히고 적당히 주변에 굴러다니는 검을 꽂아 넣어 왕을 즉결처분한 듯한 장면을 만들었다. 억눌린 감정을 달래는 정당한 연출이었다. 오딜이 뒤를 돌자 그와 동시에 알현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왕은! 왕은 어디 있나!”

“이미 처분했어요. 변명도 하지 않길래 즉결 처분했습니다.”

“그럼 저자가...!”

분노한 표정의 반란군 일원이 왕좌에 나자빠진 시체를 노려봤다. 왕의 얼굴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의심하는 자는 그 누구도 없었다.

그들은 검에 꿰어진 시체를 왕좌에서 끌어내렸고 곧 광장으로 향하자 외쳤다. 오딜은 곧 뒤따르겠다 선언하고는 먼저 일행을 돌려보냈다. 다시 혼자 남은 거대한 공간에 산 자의 숨소리는 저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주위를 한 번 살피고 뒷문으로 향했다. 왕들의 성소(聖所)와 알현실을 갈라놓은 작은 문을 열자 오래된 석상이 다시 저를 반겼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장 오래된 석상 뒤를 확인했다.

키가 훌쩍 큰 인영이 인기척에 놀라 저에게로 시선을 주는 게 보였다. 저도 모르게 속으로 안도한 오딜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당신이 진짜 죽을죄를 지었는지 아닌지는 내가 직접 듣고 판단하겠어.”

“...”

“그러니 일단은 나를 따라와.”

*

왕이란 자를 자신의 집에 데려와 버렸다. 면대면으로 심문할 생각으로 데려온 거긴 한데, 어쩌다 보니 무작정 그를 제 보금자리로 끌고 온 게 되어버렸다. 오딜은 잡생각을 떨쳐내고 이안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무어라 말을 할 작정으로 안색을 살핀 거였는데, 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체념 어린 표정이 새하얀 그 얼굴을 장악하고 있었다.

살짝 벌렸던 입을 저절로 다물었고 이어진 것은 가느다란 한숨이었다. 지금 당장은 심문이고 뭐고 할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우선 쉬도록 해. 거기 침대에 눕던지.”

“이런 상황에서는 제대로 자기도 힘들 텐데, 차라리 원래 하려던 대로 심문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슬쩍 다시 한번 안색을 살핀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제정신도 아닌 사람을 당장 심문해봤자 올바른 대답이 나오겠어?”

“...”

“지금은 정신이 없어 보이니 일단 자. 심문은 그다음이야.”

그 타당한 말에 적당한 변론을 찾지 못한 이안은 수긍하고 이불 안으로 제 몸을 구겨 넣었다. 침대는 적당히 큰 편이라 그가 누워 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안은 곧 죽은 듯이 잠에 빠졌다. 피로했던 정신이 회복을 위해 그를 깊은 수면의 늪으로 잡아당겼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오딜은 이불을 고쳐 덮어주기 위해 천 자락을 들어 턱 밑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그때, 자는 줄 알았던 그가 제 손을 턱 붙잡았다.

“...!”

혹시 경계하는 걸까. 침을 삼키고 천천히 시선을 이안의 얼굴로 옮겼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뭐 이런 희한한 잠버릇이 다 있어... 자면서 아무나 턱턱 붙잡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팔을 조심스레 빼내려 했다. 하지만 자고 있음에도 어찌나 잡는 힘이 강한지 그대로 쑥 뺐다간 깰 것 같았기에 하는 수 없이 오딜은 제 팔을 내주고 침대맡에 주저앉았다.

조용히 잠든 저 얼굴을 보고 어느 누가 잔악한 폭군을 상상이나 하겠는가. 저 번듯한 얼굴을 보니 실제 성격은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다를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삶과 세월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고 그랬다.

그로 미루어 보아 이 자는... 악행과는 거리가 먼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이안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오딜은 어느새 저도 모르게 같이 잠들어 버렸다. 본래의 목적은 잊은 채 단잠에 빠진 두 명분의 숨소리가 작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

새들의 청명한 지저귐 소리에 저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언제 잠들었지? 세상에. 적일지도 모르는 자를 앞에 두고 태평하게 잠이나 자다니. 오딜은 자신의 무신경함에 혀를 차며 엎드려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기지개를 켜며 자연히 시선을 침대 위로 향했는데, 없었다. 이불이 단정하게 개어져 있을 뿐, 있어야 할 사람이 없었다.

도망갔나? 마음이 급해져 벌떡 일어나 방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떨리는 심정으로 방문 손잡이를 돌렸고 문을 박차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 누군가 있었다. 이안이었다. 그녀는 맥이 빠져 입을 쩍 벌리고 이안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는 어색한 동작으로 집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순간 화가 뻗쳐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도망간 줄 알았네! ...말도 없이 나와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아, 미안해요. 너무 곤히 자길래 깨우기가 힘들어서...”

“......”

그렇다면 또 할 말이 없다. 제가 생각해도 너무 무신경하게 경계도 없이 그의 앞에서 잠든 건 사실이었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문 오딜은 멋쩍게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이안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어제 본 단정한 차림새 그대로였다. 왕치고는 꽤, 아니 많이 수수한 복장이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 그에게 식탁 쪽으로 손짓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심문 아닌 심문을 시작했다. 당신은 지금까지 뭘 했었냐, 백성들의 인식은 어쩌다 이렇게 된 거고 왜 도망을 가지 않고 있었던 거냐... 주로 오딜이 질문하고 이안이 그에 대답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모든 대답을 자기 잘못으로 돌리는 이안의 화법은 오딜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궤변에 불과했다. 게다가 본인이 저질렀단다.

말이 되는가? 거짓말이란 딱 봐도 나 거짓말 같은 거 못해요 라고 얼굴에 써놓고 다니는 사람이 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말이 안 통하니 더 이상 대화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했다. 재차 한숨을 쉰 오딜은 이안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선언했다.

“솔직히 말해, 당신의 말을 신뢰할 수 없어.”

“...”

“그러니 내게 증명해 봐.”

“...?”

“지금부터 네 행적을 따라갈 거야. 네가 저질렀던 악행이 만연한 낮은 자들의 거리로. 그곳에 가서 현실과 마주하면 생각이 달라지겠지.”

그녀는 이안이 현실에서 도피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그의 선심(善心)을 믿었다. 처음 보는 이였지만 그 행동과 말투, 눈빛을 보니 오히려 모를 수가 없었다. 오딜은 자신이 믿는 이안의 영혼에 제 운명을 걸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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