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 도윤 X NPC인줄 알았는데 마왕 주원
자컾 로그 / 도윤주원
긴 여정이었다. 사지를 몇번이나 찢기고 점점 지능이 오르는 몬스터들을 가족단위, 마을단위로 죽여가며 앞으로 전진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도윤은 멈출 수 없었다. 용사니까. 용사의 운명은 마왕을 토벌하는 것이니까. 그저 그 운명 하나만을 믿고 도윤은 너무나 험한 길을 걸어왔다. 곁을 지켜주던 동료들은 이미 모두 잃었다. 회복 물약도 예전에 바닥났다. 방금 전까지 아이만큼은 살려달라 빌던 몬스터의 고기를 먹으며 인간으로서의 도덕성마저 잃었다. 지금 자신은 용사라고, 아니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마왕을 토벌할 자격이 있는걸까. 하지만, 지금 눈 앞에 있는 이 문을 열지 않으면 무엇을 해야하지. 마을로 돌아가면 한심한 취급을 받을 것이다. 아무리 멍청한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알 수 있었다. 결국, 용사도 뭣도 아닌 지금의 자신은 이 문을 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도윤은 알고 있었다.
육중한 문이 열리며 듣기 싫은 쇳소리가 울렸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문이 열리며 바닥에서 먼지가 흩날렸다. 안은 어두웠고 복도에서 흘러온 불빛만이 희미하게 입구쪽을 비출 뿐이었다. 그리고 그 희미한 불빛 끝에서 보인 것은 다름 아닌 마을의 신부님이었다. 인질로 잡혀 계신걸까? 마을을 오랫동안 떠나있었기에 도윤은 마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미카엘 신부님? 어찌 여기 계십니까? 용사 마을의 신부님이라 끌려오신겁니까?"
누가 들어도 도윤이 그저 신부라서, 지인이라서 미카엘을 걱정하고 있는게 아니었다. 도윤은 신에게 일생을 바친 이 신부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주원 미카엘 신부. 도윤이 살던 마을의 신부님으로 수녀님마저 없는 아주 작은 성당을 혼자 책임지는 신부님이었다. 미카엘이라는 세례명에 맞게 그는 천사같았다. 용사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도윤을 언제나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고 힐러를 구하기 전에는 회복을 담당해주시던 신부님이었다. 자신이 용사라는 것도 모르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용사가 되어 마을을 떠나던 그 날까지 도윤은 언제나 주원을 생각했고 사랑했다. 신부는 결혼을 할 수도 누구를 만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멈출 수 없었다. 주원을 사랑하는 것은 이미 도윤에게 일과가 되어 있었으므로. 그렇기에 사랑하는 신부님이 너무나 평온한 모습으로 마왕성에, 그것도 마왕의 방에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없었다.
"도윤 형제님, 저를 사모하고 계시죠?"
제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정곡을 찔러오는 주원에게 도윤은 이곳이 마왕의 거처임마저 잊고 얼굴이 빨개진채 고개를 숙였다. 용사들은 거짓을 못하고 우직한게 성정이라지만 감히 신부님을 사모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지 못할 정도일줄은 몰랐다. 말이 없는 도윤을 보며 주원은 한걸음 한걸음 느리게 다가갔다.
"도윤아, 정말 한 번도 의심해본적 없어? 왜 내가 널 치료해주고 나면 마을에 몬스터들이 들이닥쳤을까? 왜 내가 있던 곳에는 수녀가 없었을까? 왜 나는 단 한번도 성수를 써서 너를 치료해주지 않았을까?"
몇번이고 도윤이 의아해하던 부분이었다. 자신이 치료를 받기 전에는 조용하던 몬스터들은, 치료를 받기 무섭게 마을로 들이닥쳤다. 마치 누군가가 몬스터들을 조종하기도 하는 마냥. 성당의 규모는 용사의 마을임에도 한없이 작았고 주원은 결코 성당을 키우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성당을 폐쇄적으로 운영했다. 그리고 아무리 심각한 중독에 걸려도 단 한번도 자신은 성수로 치료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 모든 부분을 도윤이라고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늘 외면해왔다. 그 모든 것이 가르키는 한가지 진실을 외면하고 싶었으니까. 용사의 마을에서 용사를 기다리고 용사를 키우는 마왕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니까.
"도윤아 아니, 용사님.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무엇인지. 그곳이 사실 어떤 곳이었는지. 외면하지마. 너는 용사잖아. '나'를 물리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 아니었어?"
용사가 평생을 사랑해오던 사람이 마왕이라는, 그런 삼류 소설같은 이야기를 누가 믿어줄까. 도윤은 떨리는 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베어야한다. 물리쳐야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몇번이고 손잡이만 잡는 도윤을 보는 주원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용사가 태어나자마자 죽일 생각이었다. 인간성을 잃고 제 앞에 무릎꿇는 용사들만 수십명이 넘었다. 자신이 마왕이 되고 몇세기동안 용사들은 늘 뻔한 패턴으로 제게 패배했다. 이제는 그런 용사를 기다려줄 생각도 안들었다. 지루한 싸움을 더이상 반복할 이유 없이 막 태어난 용사에게 마왕의 저주를 내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하면 되겠지. 그래서 용사의 마을에 성당을 세웠다. 용사라면 본디 신의 선택을 받아 성당에 올 수 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처음 막 태어난 도윤을 보았을 때, 그리고 그의 미래를 보았을 때 그 운명은 생각보다 재밌었다. 마왕을 사랑하는 용사라니. 심지어 파멸의 길을 스스로 걷는 용사라니. 여지껏 있어본 적 없는 용사였기에 주원은 조금 더 도윤을 살려놓기로 했다. 천진난만하게 웃는 이 아이가 한 평생 자신만 사랑하고 그렇기에 스스로 용사를 내려놓은채 마왕의 편으로 돌아선다니. 지금껏 뻔한 클리셰의 반복이던 삶에 한번쯤 이런 이벤트가 있어도 좋겠지.
주원은 20여년을 기다려온 순간이었고 도윤은 한순간에 세상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명백하게 갈리는 희비. 인간성을 잃은 용사와 그런 용사를 기다린 마왕의 싸움은 시작도 못하고 승패가 갈렸다. 용사는 마왕을 이길 수 없었다. 이길 마음이 없는 싸움을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의지를 잃은 용사의 검은 이제 한낱 고철덩어리에 불과했다. 도윤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 순간에도 신부가 아니니 자신의 마음이 죄가 아니라는 것을 기뻐하는, 용사라 할 수 없는 제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이 사랑을 접고 마왕을 토벌할 수 없는 제 자신이 한심했다. 파르르 떨리는 도윤의 손 위로 주원의 손이 겹쳐졌다.
"도윤아. 네가 원하는건 나잖아. 나를 봐. 네가 내게 와준다고 약속하면 나는 기꺼이 너를 사랑해줄 수 있어. 나는 자비로운 왕이니까."
악마의 속삭임인걸 알아도 도윤은 넘어갈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사탄의 속삭임에 넘어간 아담과 이브처럼, 도윤은 금기를 범했다. 대리석 바닥에 무거운 검이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천천히 고개를 든 도윤의 얼굴에는 여전히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목소리는 바람 앞의 갈대처럼 한없이 떨렸다.
"용사였던… 서도윤. 마왕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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