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도서관

[BL]난로의 꿈

1차 BL 자캐 페어 : ㄹㅁ님 연성 교환 샘플

찬 겨울바람이 네 아픔을 다 싣고 날아갈 수 있기를. 흰 눈송이 소복이 길가에 얹힐 때마다 네 추움 옅어지길. 어둠 내려앉은 밤거리에 붉고 푸른 조명이 반짝이면 네 기쁨 또한 배가 되기를. 나는 몇 번째인지 모를 기도를 올리며 잠든 너에게 체온이 스며든 손을 얽었다.

*

한겨울의 매서운 비명이 창밖을 메웠다. 내일이면 신의 아들이 이 땅에 축복으로서 강림하신 날이라는데, 전야(前夜)인 오늘 밤은 유난히 추웠다. 춥다 못해 아팠다. H는 겨울바람에 피부에 쓸릴 때마다 살갗이 아팠고, 또 침대에 누워있는 K를 볼 때마다 심장이 아팠다. 그는 한파가 몰고 온 냉기를 이기지 못하고 몸져누운 상태였다.

사람은 꿈을 꾼다. 일생의 절반 이상을 꿈을 꾸며 살아간다. 그 꿈의 한가운데에서 H는 정처 없이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랐다. 제 모든 걸 내어줄 수 있었다. 감정으로서 너를 치유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것은 정말로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 K는 제 앞에 눈을 감고 잠들어 있다.

사실 그는 알았다. 지금 K가 몸져누운 건 잠깐의 계절이 몰고 온 환상통 같은 것이라는 걸. K는 건강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찬 공기에 스러질 정도로 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 그러니까 이건 K가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함이 아니라... 나 자신의 나약함이다. 그가 평소처럼 다시 일어나서 제게 투덜대는 모습을 보지 못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그런 미련함.

천천히 손끝으로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등을 쓸어주었다. 약간 움찔하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갑작스레 노곤함이 몰려왔다. 눈을 감자, 방 안의 그림자 두 개가 꿈결 너머로 사라졌다. 방 안의 난로에서 순간 불길이 확 일며 탁탁거리는 소리를 냈다. 불길이 몰고 온 꿈이 보여준 건 언젠가의 과거, 어느 성탄절에 있었던 따스한 추억이었다.

*

어디선가 딱딱거리는 장작불 소리가 들렸다. K는 눈을 떴다. H가 맞은편 탁자에 걸터앉아 한 손에 문고본 책을 들고 뒤적이고 있었다.

“일어났어?”

“...응. 그게 뭐야?”

“그냥. 『불안의 서』라는 책인데, 책장에 꽂혀있길래 가져와 봤어.”

“무슨 제목이 그래?”

“그러게.”

손에 든 책을 탁자에 다시 내려놓은 H가 침대 가로 다가와 끄트머리에 털썩 자리를 차지했다. 그의 무게만큼 침대가 울렁이는 것을 느끼던 K는 곧 자연스레 자기 뺨에 손을 얹고 만지작거리는 H의 손길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열은 내린 것 같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 크리스마스잖아.”

이상한 걸 묻는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K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H는 그의 괜찮다는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려는 듯 안색을 이리저리 살피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데 그냥 크리스마스가 아니야.”

“...뭔데.”

“화이트 크리스마스. 저기 봐.”

유려한 손끝이 가리킨 끝에는 환한 풍경을 내다 건 창문이 위치한 벽이었다. 창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그 찬란한 아침의 광경을 눈에 담은 K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대박. 진짜네?”

“그치? 네 소원이 이루어졌나 봐.”

“뭐, 소원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신기하네. 크리스마스에 눈 오는 거 오랜만이잖아.”

하늘에서 내린 새하얀 경이로 반짝이는 거리는 계속해서 신의 축복과도 같은 절경을 빚어내고 있었다. 시골의 겨울은 그 자체로 경탄할만했고, 무척이나 눈이 부셨다.

... 꿈꾸지 않을 때는 오직 꿈만으로 기뻐하고,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진 꿈속에 있을 때는 오직 세계만으로 기뻐한다. ...

“눈 오는 크리스마스 날 이렇게 집에서, 따듯하게 일상을 보내고 무사히 하루를 마치는 것. 그게 네 꿈 중 하나였잖아.”

“꿈이라기엔 소소하지만... 응. 어쨌든 이루어졌네.”

K가 이불을 한쪽으로 몰아두고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자 H도 천천히 걸음을 옮겨 창가 쪽으로 가 그와 마주 섰다. 괜히 어색한 기분에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 K가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번 리그 상금 꽤 컸잖아. ...그걸로 뭐 할 거야?”

“나?”

“그럼 이번 시즌에서 우승한 사람이 너 말고 또 누가 있냐.”

“흐음. 글쎄. 너는 뭐 하고 싶어?”

“...왜 그걸 나한테 물어봐.”

그러자 H는 하하, 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리더니 K를 끌어당겨 안고는 그의 머리 위에 제 턱을 올려다 놓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네가 하고 싶은 게 내가 하고 싶은 거야.”

“......”

“우리 여행 갈까?”

“...여행?”

“응. 같이 가자.”

네가 더 아프기 전에. 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필요 없는 말이었고 그런 상황을 가정하는 것 자체가 싫었기에. H는 K의 어깨를 재차 끌어안고는 그를 품에서 떼어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안 좋은 생각은 떨쳐내고 저를 멀뚱히 올려다보는 K를 향해 부러 웃어보였다.

“어디 갈래? 가고 싶은 데 있어?”

“...그럼 바다 보러 가자.”

“바다?”

“겨울 바다도 좋다고 하던데.”

“추울 텐데. 괜찮겠어?”

“응. 그럼 네가 새 외투라도 사다주던가. 아니면 목도리나, 털장갑이나...”

“그래, 그래. 알았어. 다 사줄게. 같이 바다에 가자.”

어느 성탄절의 약속. 약속은 지켜졌다. 그 결과가 바로 이런 꿈을 꾸게 된 원인인 것이다. 어디선가 탁탁 장작불 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점점 커졌다. 온기와 창틈에서 새어 들어온 냉기가 동시에 정신을 깨웠다. H는 자신이 간병하다 잠들었다는 사실에 놀라 침대에 엎드려 있던 몸을 확 일으켰다.

“일어났어?”

“...K.”

분명 자신은 엎드려 있었을 터인데 어느새 침대에 반듯이 누워있었다. 부엌 쪽에서 K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를 들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왜 침대에 고꾸라져서 자고 있었어?”

“뭐?”

“내가 다시 옮겨놨어. 너 너무 무거워. 힘들었다고.”

작게 투덜대며 머그를 H에게로 내민다. 따스한 온기가 서린 잔을 받아든 H는 멍하니 붉은 액체를 내려다봤다. 홍차였다.

“... K 너, 몸은 괜찮아?”

“? 당연히 괜찮지. 그런 걸 왜 물어봐.”

“...아니, 아니야. 괜찮으면 됐어.”

오늘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였다. 기적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크리스마스 당일, 기적이 두 명에게도 찾아왔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기적이, 마치 선물처럼. 포근한 행복이 두 사람을 감쌌다. 꿈이어도 좋았다. 꿈이 아니라 세계여도 좋았다. 꿈이면 어떻고 현실이면 어떤가. 너와 함께 있는 곳이라면 내게 어디든 진짜였고 내 전부였다.

앞으로 우리에게 무엇이 찾아올지는 알 수 없다. 미래는 불안의 연속이다. 미지의 세계, 알 수 없는 꿈, 아직 찾아오지 않은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H는 알 수 있었다. K와 함께 한다면 불확실함이 들어앉은 미래 속에서 감정을 지표 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한 너에게 느끼는 불안함 마저 사치가 될 거라고. H는 K에 대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확신했다. 기적은 바라는 자에게 미래라는 이름으로 찾아온다.

... 그리고 이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어떤 별들이 올 것인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래도 무언가는, 일어날 것이다. 올 것이다. ...

[일반 글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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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워드 : 크리스마스 / 꿈 / 소소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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