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도서관

[BL]봄맞이 데이트

1차 BL 자캐 페어 : ㅎㅂ님 연성 교환 샘플

봄을 머금은 바람이 부드럽게 얼굴을 스치었다. 꽃바람이 불었다. 햇볕이 머리 위로 쏟아져 빛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그만큼 따사로운 날이었다. 계절을 닮은 화창한 날씨가 머리 위를 장식했다. 이내 맞이한 봄을 품은 화사한 표정으로, 럭키가 진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기야.”

“...네, 선배.”

그런 얼굴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당신다웠다.

“우리, 오늘 학교 밖으로 나갈래?”

기숙학교에서의 무단 외출을 입에 담는 표정이 참 환해 보였다.

*

계획 없이 꺼낸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욜로를 몸에 새긴 것 같은 남자였으나 무작정 사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주말에 갑자기 기숙사 뒤편에서 만나자고 하더니 대뜸 하는 말이 학교 밖으로의 외출.

어이없어서 거절하는 것도 잊고 멍하니 있는데 미인이 다짜고짜 얼굴로 공격해대며 애정 공세를 선보이는데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청진기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미인에 약한 줄은 몰랐다...

곧 사라질 것 같은 아련한 분위기에서 땡땡이를 치자는 럭키의 말에 넘어간 진기 자신도 참 어쩔 수 없구나, 하고 생각한 것도 잠시. 늘 입는 교복이 아닌 사복 차림의 그가 진기의 손을 이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어디 가는 거예요, 럭키 선배?”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뭐 하고 놀래? 놀이공원? 쇼핑? 수족관? 다 말해! 이 형님이 특별히 다 데려가 줄게~.”

거침없이 마주 잡은 손에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사람의 온기가 서려 있었다. 잠시 말없이 맞닿은 두 손을 내려다본 청진기는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수족관.”

“오! 좋아. 이 근처에 괜찮은 수족관이 하나 있는 걸 알고 있지. 거기로 가자!”

...아니, 진짜 말만 하면 다 되는 거였냐고. 그보다 이 근처에 수족관이 있었나? 등 뒤로 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곧 환하게 웃으며 버스 정류장으로 자신을 끌고 가는 그의 페이스에 휘말려버렸다. 즉, 버스에 올라타서 있는 줄도 몰랐던 대형 수족관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소리다.

*

아침부터 버스를 타고 10여분 간 달리자 나타난 곳은 어느 거대한 건물 앞이었다. 내리자마자 크기에 압도될 것 같은 웅장함에 숨이 절로 막혔다. 그보다 이곳이 수족관이었다니. 전혀 몰랐다. 겉모습만 봐서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쪽에 좀 더 가까운 외형이었다. 괜히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런데 뭐가 그리 신났는지 럭키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앞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진기도 허겁지겁 따라갔다. 청소년 표 두 장을 끊고 더 깊숙하고 어두운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둠에 파묻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비한 푸른 빛이 온몸을 감싸오기 시작했다. 물빛 속에 잠겨 실내를 유영하듯 걸어 다녔다.

럭키가 가끔은 이상하게 생긴 물고기를 가리키며 웃긴 표정을 짓는 바람에 포커페이스 유지에 실패하기도 했고, 화려한 생김새를 자랑하는 물고기 앞에 가서 너랑 닮은 것 같애. 같은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목에 사레가 들리기도 했다.

그러는 선배는 저 물고기 닮았어요. 어디? 아, 저 아담~한 구피 얘기하는 거야? 역시 그렇지? ─아뇨, 그 옆에. 주황색 붕어요.

...그렇게 한바탕 구경 아닌 구경을 하고 나서 발이 이끄는 대로 걷다 보니 도착한 곳은 한 대형 수조가 벽면 전체를 통째로 장식하고 있는 굉장한 곳이었다.

“우와─. 여기 엄청나네. 바닷속에 들어온 것 같아.”

“그렇네요. 신기해...”

“사실 나도 여기 직접 와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 이런 굉장한 곳이 우리 학교 버스 10분 거리에 있었다고? 특종감은 아니어도 기사로 싣기에 나쁘지 않은 소재야.”

...어떤 수족관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데려온 티가 나는 발언이었지만... 눈 감아 주기로 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굉장한 곳에 데려와 준 것임엔 틀림없으니까. 천천히 투명한 유리 앞으로 걸어갔다.

장식용 난간 앞까지 다가가자 눈앞의 작은 바닷속과 자신을 가로막는 건 두꺼운 유리 하나뿐이었다. 장애물을 통해 닿을 수 없는 세계를 응시했다. 순간 상어 한 마리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으나 곧 헤엄쳐 위로 솟구쳐버리는 바람에 그 생각은 어딘가로 흩어졌다.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럭키에게 말을 걸었다.

“선배를 믿고 싶다고 한 거, 진짜예요.”

“...알아.”

“그러니까, 알고 있다는 소리예요. 선배도 나를 믿어준다는 거.”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한 번 더 내는 까닭은, 진심을 확인시켜주고 싶어서였다. 오늘 이렇게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게 된 이유도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였다. 청진기라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제 일상 한구석을 내어준 것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는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다해 바쳤다. 박럭키의 희생은 늘 그를 어떤 감정의 파도 속으로 내몰았다. 또한 힘이 들 때마다, 생각에 잠겨 있을 때마다 곁에 있어 준 이를 떠올렸다. 그 누구도 아닌,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었다.

우리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대가를 지금 치르는 중이라고. 대답 없이 희미한 미소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박럭키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졌다. 거대한 가오리가 천장의 빛을 가리고 유영하고 있었다. 가오리의 그림자에 먹힌 럭키의 눈동자가 시리도록 푸르게 빛났다. 그건 확신을 가진 자의 눈빛이었다.

“삶의 기로에 설 때 마다 저를 위한 선택을 내려줘서 고마워요.”

“...”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입가에 미소를 걸어 말했다.

“─선배는 역시 나만의 히어로예요.”

고백을 하고 싶었다. 사실은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자신을, 탈출해 어딘가로 가버리고 싶었던 자신을 끌어내 현실로 내몬 사람. 악역을 자처해 모든 부조리와 악의를 대신 짊어지려 했던 사람.

그리고 지금 평화가 찾아온 이 순간마저 청진기라는 사람의 즐거움을 위해 일상을 스스럼없이 공유해준 사람. 히어로도, 빌런도, 그를 추앙하는 불길한 단체도 더 이상 상관없어진 이 세계에서. 박럭키는 여전히 자신을 구원해주고 있었다.

어찌 그런 그를 히어로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인생을, 일상을 구원한 사람이다. 그는 이미 제 안에서 화이트 라쿤보다 더 대단한 존재였다.

“히어로를 구한 히어로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헤헤거리며 볼을 긁적이는 럭키를 바라보던 진기가 대뜸 그렇게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듯 잠깐 멈칫하던 박럭키는 곧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히어로는 그냥 히어로지!”

평온한 세상 속에서 그 누구보다도 영웅 같은 남자의 위로 다시 푸른 물빛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지나가고, 마치 휘장처럼 물빛을 두른 사내는 그 누가 봐도 납득할 만큼 영웅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사랑의 힘으로 구해낼 수 없는 건 이 세상에 없어.”

당신이 가져다준 평온한 세상에서 당신이 쓴 이야기를 계속해서 감상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고장 난 펜이 새롭게 자아낸 세계 속에서 앞으로의 미래를 그렸다. 그것은 둘에게 있어 더 없는 희망이었다.

[일반 글 커미션]

오월의 도서관 - 오월 백과사전 타입

- 키워드 : 봄 / 수족관 /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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