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도서관

[HL]너로 물든 봄

집이 없어 - 백은영 HL 드림 페어 : P***님 연성 교환 샘플

어떤 종류의 감정이 있다. 그것은 행복도 슬픔도, 아픔도 아닌 그 무언가. 텅 빈 가슴 속을 메꿔줄 단비 같은 감정인 동시에 공허로 채워오는 안개 비스름한 것. 처음에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심장을 조금씩 적셔온 그 감정은, 너를 만난 순간에야 비로소 개화해 내 온몸을 잠식했다.

이 감정에 빠져 죽어도 좋을 만큼, 깊고 애틋한 느낌. 그러니까 그건. 그날, 활을 쏘는 네 모습을 본 순간 이후로.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취한 애정이었다. 이건 프시케와 에로스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물며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처음 사랑을 자각한 누군가의 못다 한 편지일 뿐. 수신인은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

“백은영. 오늘은 한가하나 봐?”

“뭐래. 그러는 넌.”

“컨디션 조절을 위해 하루 정도는 휴식을 취하라고 감독님이 말씀하셔서. 아주 착실히 수행 중이지.”

“참나...”

가을바람이 달다. 한껏 들이켠 숨에서 낙엽 특유의 쌉싸름한 향내가 난다. 맞이한 스포츠의 계절로 인해 민재는 곧 있을 대회 준비에 한창이었다. 오늘은 쉬는 것 같지만. 은영은 사복 차림의 민재의 모습을 훑었다.

빨간 후드 집업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검은 레깅스에 운동화. 참 편해 보이는 차림이었다. 학교에서와는 달리 풀어 내린 결 좋은 머리에서 은은한 삼푸 향이 풍겼다. 맡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냄새였다. 그렇게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민재를 바라보고 있자 곧 톡 쏘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뭘 봐. 새삼 반했어?”

“...그럼 어쩔래.”

“쯧쯧. 이래서 미인의 삶은 피곤하다니까.”

같잖은 농담을 하는 모습마저 귀엽게 보인다. 미쳤나 보다. 백은영은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노닥거리는 것도 좋긴 하지만, 이제 슬슬 일어나야 할 때다.

“쇼핑 같이 가 달라며. 언제 갈 건데.”

“아, 맞다. 지금 가지, 뭐.”

이제야 생각난 듯 푸흐흐, 웃음을 터트린다. 후드 집업의 긴 소매를 나풀거리며 민재가 은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 누님이 널 코디시켜 주려고 가는 거야. 네가 하도 그 얼굴을 못 살리는 것 같아서.”

“그러는 넌?”

“나는 옷걸이가 잘나서 괜찮아. 너는 옷걸이만 잘나선 안 돼.”

“뭐라는 건지... 나는 다 잘났거든?”

투닥투닥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어느 번화가의 지하상가였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뭉쳐있는 인파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은영이 투덜거렸다.

“이렇게 사람이 많아서야. 큰일이네.”

“뭐가?”

“내가 좀 눈에 띄잖아? 시선이 몰리면 네가 불편할 수도 있잖아.”

“어이구. 그걸 지금 배려라고 해주는 거야? 그래, 너 잘났다.”

자아가 도취된 사람처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도록 민재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민재는 조심스레 자신을 끌어안은 은영의 손을 흘끗 보다가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흠흠, 헛기침했다.

둘은 곧 여러 옷 가게에 들락거리며 쇼핑하기 시작했다. 주로 민재가 은영을 옷걸이 삼아 이것저것 입혀보는 인형 놀이 시간에 가깝긴 했지만.

옷 갈아입기 귀찮다며 구시렁대는 은영도, 이것도 저것도 입어보라며 타박하는 민재도 지금의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엉?”

“이 근처에 양궁 카페가 있대.”

민재가 골라준 캐주얼한 패션의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고 막 나오던 은영이 뜬금없는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다.

민재가 어린 시절 양궁의 꿈을 처음 키우기 시작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던... 그녀에게 있어 추억 어린 장소라고. 그게 이 근처였나. 은영에게 입히기 위해 팔에 걸어 두었던 옷들을 갈무리하며 민재가 활짝 웃어 보였다.

“이것만 마저 입어 보고 가 보자.”

“엑... 아무리 나라도 이제 지쳤...”

“젊은 애가 그렇게 힘을 못 써서 어떡해? 이거까지만 입어 봐. 착하지~?”

“홍민재 진짜... 내가 너만 아니었어도... 말을 말자.”

옷을 받아서 들고 탈의실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은영의 뒷모습을 보며 민재가 장난스레 진짜진짜 마지막이야~! 하고 소리쳤다. 탈의실 문이 닫히자, 민재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사실, 그곳이 은영을 데리고 온 진짜 목적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활을 쏘는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실력을 자랑하고 싶어서? 사실 진짜 내 마음은...

*

휙─ 탕!

활시위가 흔들림 없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은영이 손가락을 움직여 줄을 놓자마자 쏜살같이 날아간 활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과녁 정중앙에 꽂힌다.

벌써 5개째였다. 어마어마한 실력이었다. 은영은 말없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감상했다. 눈앞에 있는 소녀가 활을 쏘는 모습이 무척 강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홍민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변함이 없었다. 계절에 상관없이 화려하게 순간 속에 피어난 벚꽃과도 같았다.

그에 비해 나는 어떻지. 그녀와 비교하면 자신이 너무 작아 보였다. 앞으로도 홍민재의 곁에 당당히 설 수 있을까? 미완성 채로 나는, 과거를 부정하며 현재를 연기하며 살아가도 되는 것일까. 그녀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과녁에 꽂히는 화살의 개수가 많아질수록 생각이 우울한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꼬리에 꼬리를 문 사념들이 머릿속을 지배하려고 할 때였다.

“백은영.”

“...”

“나 어때?”

“...뭐... 잘하네.”

“헤헷. 잘 보고 있었구나?”

“당연하지. ...내가 보고 있었던 거 몰랐어?”

“대충 짐작하고는 있었는데, 집중하느라 주변에까지 신경이 쓰이진 않아서.”

민재가 손등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대충 훔치고는 활을 거치대에 내려놓았다. 보기만 해도 무거워 보이는 저런 걸 저렇게 한 손으로 들었다 놨다 하다니. 여기 생각보다 제대로 된 양궁 연습장 같은데. 홍민재가 자주 들락날락하는 이유가 있긴 했나보다.

둘은 곧 뒷쪽에 마련된 벤치에 가 나란히 앉았다. 민재에게서는 땀 냄새가 날 법 한데도 신기하게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 좋은 무색무취의 향을 느낄 수 있었다. 본인이 매일 쓰는 바디 워시의 잔향이라거나. 아마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너한테 보여주고 싶었어.”

“...뭘.”

“너와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민재가 앞을 응시하며 표정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요즈음의 너는, 뭐랄까... 여기 없는 사람처럼 굴어.”

“......”

“우리는 순간 순간을 살면서 미래를 꿈꾸는 존재잖아. 그게 사람이잖아?”

“나는 여기 있어.”

은영이 짓씹듯 입 밖으로 그 한마디를 내뱉었다. 민재는 그런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는 여기 있지. 그럼 과거에만 매여있지 말고 앞을 좀 보면서 살아.”

“내가... 과거에 매여 있다고? 오히려 나처럼 자신의 과거를 싫어하는 사람도 없을텐데.”

“나한텐 그렇게 보여. 그러니까, 백은영.”

맑은 하늘의 날씨를 가득 담은 눈동자로, 봄빛 소녀가 시선을 마주해온다.

“너는 좀 더 나를 의지해도 돼.”

“...”

“타인을 잘 믿지 않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런 나라도 너만은 예외니까.”

무표정이던 민재의 얼굴에 화사함이 가득 퍼졌다. 꽃 같이 웃는 소녀가 입을 열었다.

“너도 나를 예외로 삼아줘.”

어떤 희망. 어떤 고백. 어느 가을의, 잊지 못할 순간. 추운 계절이 물러가면 곧 따사로운 봄이 찾아오리라. 은영은 계절에 맞지 않게 막 피어난 꽃을 보며 눈을 감았다. 다행히도, 아직 청춘이었다.

[일반 글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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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워드 : 봄 / 감정 /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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