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테 드림 단편 모음집

굶주린 이의 모험담

레오나 킹스카라 드림 / 정통 판타지 AU


* AU 드림 웹진 참여작. 정통 판타지 AU입니다.

바스락.

언제 가지에서 떨어진 건지 가늠할 수 없는 바짝 마른 나뭇잎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에 산산이 부서진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 같은 건 남아있지 않은 오래된 유적 안. 풍파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세월의 흔적들을 면밀하게 살펴보던 아이렌은 자신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동료에게 멋쩍게 웃어 보였다.

 

“레오나, 아무래도 여긴 아무것도 없나 봐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유적이라 더 둘러볼 곳도 없으니, 이 탐사는 꽝이라고 단정 지어도 되겠지. 기껏 시간 내어 숲속 깊은 곳까지 왔는데 허탕이라니. 참으로 허무하지 않을 수 없다.

레오나는 고대 문자가 새겨진 벽을 손으로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이래서 소문만 믿고 움직이면 안 되는 건데.”

“하지만 확인해 볼 가치는 있었잖아요?”

 

그래. 딱 그 정도 가치밖에 없다는 게 문제인 유적이긴 하지만, 온 것 자체를 후회하는 건 아니다. 만약 오지 않았다면 계속 거슬렸을 테니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확인해 보는 게 현명한 일이지 않던가.

게다가 오는 길에 몬스터를 잡으며 소소한 용돈벌이도 했고, 적혀있는 고대 문자에서 이 근처엔 제가 원하는 게 없다는 걸 확인하기도 했으니 성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

어차피 짜증을 내봐야 자신만 손해다. 모험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정신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쓸데없는 감정 소모는 하고 싶지 않은 레오나가 한숨과 함께 벽에 기대어 둔 석장을 챙겨 들려는 순간.

 

“……잠깐.”

 

짙은 갈색 머리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그의 귀가, 먼 곳의 소리를 포착하고 움찔거렸다.

 

“왜 그러세요?”

“쉿.”

 

아이렌의 물음을 조용히 하라는 몸짓으로 답한 레오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인간의 귀로는 들리지 않을 테지만, 수인족인 그는 분명히 들었다.

‘살려줘’, 라고 외치는. 최소 두 명 이상의 사람이 내는 구조 요청을 말이다.

유적의 중심부를 나와 수풀이 우거진 쪽으로 향한 레오나는 점점 더 크게 들리는 비명에 눈을 가늘게 떴다. 일단 그 장소에 몇 명이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들리는 목소리는 두 사람이 맞았다.

 

“아악! 사람 살려!”

 

처절한 외침을 따라 도착한 곳엔 새까만 털들을 감싸고 있는 덩굴이 보였다.

그 털이 사람의 머리카락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본 레오나는 망설이지 않고 석장을 휘둘렀다.

 

쿠르릉.

 

주문을 외우지도 않았는데도 우뚝 솟아오른 땅은 그대로 식물을 뿌리째 뽑아냈고, 중심을 잃은 덩굴 몬스터는 포박하고 있던 사람들을 놓아주었다.

 

“헉!”

 

겨우 자유를 찾은 구조자들은 주저앉은 채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굵직한 덩굴이 숨통을 조였기 때문일까, 가쁘게 호흡하는 이들의 얼굴은 희게 질려있었다.

 

“역시 사람이었나.”

 

제가 환청을 들은 게 아닐까 했는데. 이런 외진 곳에 자신들 외의 모험가가 있었다니.

레오나는 비슷한 생김새의 두 인간 남녀를 번갈아 보며 이들이 누구인지 추리해 보았다.

 

‘여자 쪽은 위저드거나 소서러, 남자 쪽은 워리어인가. 생긴 게 닮은 걸 봐선 남매일지도 모르겠군.’

 

정확한 직업은 알 수 없다지만, 그래도 근접형 전사와 원거리의 마법사 조합이라면 썩 나쁘지 않은 파티인데. 겨우 저런 식물형 몬스터에게 죽을 뻔하다니. 자신들의 실력을 과대평가하고 안일하게 굴었던 것일까.

만나는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레오나는 혹 제가 구해선 안 될 것들을 구한 건 아닌가 고민했다. 반면, 뒤늦게 현장에 온 아이렌은 서서히 혈색을 찾아가는 구조자들을 보며 진심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사람 흉내를 내는 몬스터가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그게 다행인 건가?”

“하지만 습격당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사람도 충분히 자신들을 습격할 수 있는데, 그 점은 고려하지 않는 건가.

여유로운 아이렌의 모습에 어깨만 으쓱인 레오나는 상대가 제가 구한 모험가들을 챙기는 걸 내버려 두었다.

 

“괜찮으세요?”

 

두 사람 중 상대적으로 안색이 더 안 좋아 보이는 워리어에게 먼저 다가간 아이렌은 흙이 묻은 상대의 몸을 대신 털어주었다.

이제 겨우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 워리어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답했다.

 

“그, 그런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저 식물은 사람의 혼을 집어삼키거든요. 자칫하면 큰일 날 뻔했어요.”

“호, 혼을 삼킨다고요?! 세상에…….”

 

아이렌이 워리어를 챙기며 유익한 대화를 하는 사이. 정신을 차린 여성 위저드는 자신을 구한 레오나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강한 분들이네요!”

“아, 그래.”

 

위저드는 손쉽게 주술을 부리는 레오나에게 두 눈을 빛내며 관심을 보였지만, 당사자는 관심 없다는 듯 눈길도 주지 않고 무심하게 답했다.

‘이런 유적에서 모험가가 죽으면 언데드가 될지도 모르니 구해준 것뿐. 딱히 선행을 베풀려 한 건 아니다.’ 그런 마음으로 행동했던 레오나다 보니, 이렇게까지 관심을 보이며 고마워하는 게 딱히 달갑지 않았던 탓이었다.

 

“어이. 슬슬 가자고.”

“네, 잠깐만요!”

 

레오나의 재촉에 워리어를 일으켜 준 아이렌은 혹 위저드가 무안해할까 봐 무정한 동료를 대신하여 해명하였다.

 

“원래 말이 짧은 사람이에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헤에, 그래요?”

 

하지만 걱정과 달리 위저드는 딱히 상처받지 않았던 걸까. 제 동료를 데려온 아이렌을 위아래로 훑어본 그는 한쪽 입꼬리만 씩 올려 웃곤 레오나를 따라나섰다.

‘제 동료는 챙기지 않고 다른 파티의 모험가를 따라가다니. 저래도 되는 걸까.’ 아이렌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제가 느낀 이상함을 말로 표출하지 않았다.

 


 

 

레오나의 예상대로, 구출된 두 모험가는 남매 관계였다.

위저드의 말에 의하면, 자신들은 잡화점 주인의 의뢰로 쓸만한 재료를 구하러 숲에 왔다가 유적 근처의 식혼(食魂) 식물을 만났다가 뭐라나.

자세한 사정 같은 건 전혀 궁금하지 않지만, 자신을 쫓아온 추격자나 도적단이 아니라면 그걸로 됐다. 자초지종을 들은 레오나는 그렇게 두 모험가가 자신들을 따라 마을로 돌아가겠다는 걸 허락했고,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걱정되던 아이렌 또한 적극적으로 동행에 찬성했다.

 

“저기, 조금 있으면 해가 완전히 질 것 같은데. 이대로 괜찮은 겁니까?”

 

그렇게 마을로 돌아가는 길. 워리어는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레오나를 재촉했다.

근처에 다가오는 자질구레한 몬스터들을 주술로 한 번에 처리해나가며 길을 뚫던 레오나는 성가시다는 듯 대꾸했다.

 

“난 밤눈이 밝거든. 그러니 어두워져도 길은 찾을 수 있어. 애초에 너희들이 빨리만 걸으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테니 얌전히 걷기나 해.”

“그, 그런가요.”

“그래. 그리고 이 숲은 해가 떠 있을 때도 몬스터가 득실거리니 조용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으윽.”

 

아까 자칫하면 죽을 뻔했기 때문일까. 워리어는 끔찍한 소리 말라는 듯 어깨를 떨며 입을 닫았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겪었음에도, 위저드는 이 상황이 그리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쓰러진 소형 몬스터들과 레오나를 번갈아 보던 위저드는 아까처럼 살갑게 레오나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 정말 강하네요! 제가 본 샤먼 중에서 가장 강한 거 같아요.”

 

너무나도 속 보이는 칭찬이지만, 레오나는 이게 빈말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신은 부족 내에서도 최고의 샤먼으로 대우받았고, 고향을 떠나서도 자신보다 강한 샤먼은 만나 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렇게나 자꾸 귀찮게 군다면, 계속 무시해봐야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여러모로 관심받는 상황에 익숙한 레오나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위저드의 말에 어울려 주었다.

 

“뭐, 어디 가서 실력으로 뒤처지진 않지.”

“그렇죠? 그럴 것 같았어요.”

 

드디어 자신을 상대해 주는 게 기쁜 걸까. 한층 높아진 톤으로 대꾸한 위저드는 레오나의 옆에 바짝 붙어서서 대화를 이어갔다.

 

“유적엔 무슨 일로 왔었나요? 보물찾기?”

“보물은 아니고. 개인적으로 찾고 있는 게 있어서.”

“그래요? 어떤 거기에 이런 외진 곳까지 온 거예요?”

“그것까지 알려줄 이윤 없는 것 같은데.”

 

어차피 마을에 도착하면 두 번 다시 안 볼 상대에게 그런 중요한 걸 알려줄 수는 없지. 오지랖 넓고 수다 떨길 좋아하는 모험가들은 제 목적을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기도 한다는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레오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윽.’ 명백하게 선을 긋는 태도에 멈칫하는 것도 잠깐뿐. 짧은 탄식을 내뱉었던 위저드는 겁에 질린 제 형제와 조용히 맨 뒤를 지키는 아이렌을 살펴본 후, 레오나에게 속삭였다.

 

“분명 이름이……. 레오나라고 했던가요?”

 

아까 전 아이렌과의 대화에서 상대의 이름을 들어 기억하고 있던 위저드는 입을 손으로 가린 채 은밀한 제안을 했다.

 

“혹시 저희랑 같이 다니지 않을래요? 사실 오늘은 쉬운 의뢰라 저희 둘이서만 나온 거지, 꽤 큰 길드에 소속되어 있거든요.”

“길드?”

“예. 참고로 전 간부랑 아는 사이라서, 절 따라오면 바로 한 자리 차지할 수도 있어요.”

 

레오나의 강함이 탐이 나는 걸까. 아니면 그 자체가 욕심나는 걸까.

쉽게 신뢰가 가지 않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레오나를 꾀려 하는 위저드는 실실 비웃으며 아이렌을 향해 곁눈질했다.

 

“약한 동료랑 다니는 건 지겹지 않나요? 지금도 혼자서 몬스터를 처리하고 있잖아요.”

 

그 말대로, 이 귀갓길에 아이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뒤에서 전체적인 상황을 봐주거나 처리한 몬스터에서 쓸만한 부분을 수거하긴 할 뿐. 전투는 일절 거들지 않았지.

게다가 이 여성 위저드가 쉽게 아이렌을 업신여기는 것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척 봐도 고급품인 석장과 질 좋은 의복을 걸친 레오나와 달리, 아이렌의 복장은 수수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들고 있는 낡은 나무 스태프는 별다른 장식도 없이 초라하며, 입고 있는 옷도 초보자들이나 사 입는 천 재질의 로브라니. 이러니 ‘내가 그래도 저쪽보단 낫지’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지 않나.

 

“저희 길드는 인맥도 두텁고, 강한 모험가도 많은데다가 자본력도 이 근방에선 최고죠. 어때요, 좀 혹하지 않나요?”

 

‘아무리 자신이 아직 미숙한 마법사라 해도 저 여자보단 낫다.’ 그리 믿어 의심치 않는 위저드는 사람들이 혹할 만한 이야기는 전부 끌어와 말하며, 슬그머니 상대의 팔에 제 손을 얹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고개를 돌렸다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끈적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레오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매우 적극적으로 자신을 꾀려 하는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도 되지 않는 무표정으로 답했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군.”

“네?”

 

앞뒤가 잘린 말에 반사적인 대답을 하는 순간.

방금까지 조용하던 숲에서, 끔찍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아아아!”

 

짐승의 것인지 몬스터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포효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본능적인 공포를 떠올리게 하는 울음에 등골이 오싹해진 워리어와 위저드는 저 앞에서부터 달려오는 그림자들을 보고 경악했다.

 

“저, 저건!”

“꺄악!”

 

자신들을 향해 네 발로 뛰어오고 있는 건, 족히 2m는 되어 보이는 키를 가진 웨어울프 무리였다. 대체 몇 마리나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땅이 울릴 정도로 많은 수라는 건 어두워지는 숲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쳇’ 진짜 성가신 존재의 등장에 혀를 찬 레오나는 석장을 허공에서 한 바퀴 휘둘러 흙의 장벽을 만들어 냈다. 우르릉,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솟아오른 땅은 웨어울프 무리를 잠깐 막아주기엔 충분해 보였지만, 영원히 버텨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이, 아이렌!”

 

흙의 정령들이 흩어지지 않게 정신을 집중하던 레오나는 제 동료를 불렀다.

고향에서도 최소한의 종자 외에는 믿을만한 측근을 두지 않았던 그가, 모험가가 된 후 유일하게 곁에 두고 함께 다니는 유일한 동료를.

호명된 아이렌은 그 간절한 외침에 대답하는 대신, 고목으로 된 스태프를 두 손으로 꽉 쥐고 주문을 외웠다.

 

“―까마귀의 노래, 여인의 비명, 다리 없는 목자(牧者)의 발소리. 구천의 경계에서 굶주린 이들이여, 그대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하라.”

 

중얼중얼 빠르게 말을 쏟아내고 있자니, 어느새 레오나가 세운 흙벽 앞 바닥에 검은 원이 생겨난다.

처음에는 우물 정도의 크기였지만 점점 크기를 불려 거대한 원이 된 ‘어둠’은, 이내 아이렌이 스태프로 땅을 내려침과 동시에 하나의 ‘통로’로 변했다.

 

“스타브드 램―!”

 

우웅.

마치 공간이 우그러지는 듯한 기묘한 소리와 함께, 새카맣게 변한 땅 위로 수많은 손이 솟아오른다.

새까맣게 변색 된 뼈밖에 남지 않은 손들은 닥치는 대로 웨어울프를 붙잡아 아래로 끌어내렸고, 망자에게 붙잡힌 몬스터들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이 세상의 너머로 사라져갔다.

 

“그아아악!”

 

커다란 몸체가 너무나도 간단히 바닥 아래로 꺼지는 모습 자체도 놀랍지만, 초보 모험가 두 사람의 눈에 더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기괴하게 움직이는 뼈다귀 들이었다. 근육과 피부의 제약이 없어 살아있는 존재들과는 확실히 다르게 움직이는 손들은, 주변에 살아있는 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 손에 잡히는 건 닥치는 대로 저승으로 끌어당겼다.

 

“허, 허억.”

“뭐야, 이게……!”

 

그야말로 지옥 같은 풍경이다. 남매는 동시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이 제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에 감격하기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에 넋이 나가 있는 사이. 마법을 해제한 아이렌은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젖은 이마를 소매로 훔쳤다.

 

“휴, 다행이다. 생각보다 마릿수가 많지 않아서 이정도로 해결되었네요.”

 

더는 적이 남아있지 않은 걸 확인한 레오나 또한 흙의 장벽을 무너뜨린 후, 뻐근한 어깨를 가볍게 돌렸다.

숙련된 모험가인 두 사람에게 방금 같은 일은 큰 사건도 아니었기에, 오고 가는 대화에는 큰 긴장감이 없었다.

 

“분명 피 냄새를 따라온 거겠지. 지금은 번식기니 한창 먹어 치울 때고.”

“으음. 역시 이분들을 치료해 드리고 이동했어야 했을까요?”

“허튼소리를 하는군. 너나 나나 회복 마법은 하나도 못 쓰지 않나?”

“그건 그래요. 제가 하는 건 재활용이지, 수리가 아니니까요.”

 

제 직업에 대해 웃으며 농담한 아이렌은 겁을 먹고 얼어버린 남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몸짓은 방금 이곳에 지옥의 파편을 불러온 사람의 것이라기엔 너무나도 온화했다.

 

“자, 얼른 가요. 저기 마을이 보이네요. 금방 도착하겠어요.”

“……네, 네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한 워리어는 손끝만 닿게 아이렌의 손을 마주 잡은 채 겨우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간다.

반면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있는 위저드는 덜덜 떨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들고 있는 스태프를 지지대 삼아 겨우 서 있을 뿐이었다.

 

“약한 동료랑 다니는 게 지겹지 않냐고 했던가?”

 

레오나는 안색이 파랗게 질린 위저드를 내려다보며 얄궂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진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맹수의 발톱처럼 날카로웠다.

 

“난 저 녀석이 강하니까 같이 다니는 거야. 참고로 방금 그건 본인 말로는 ‘가장 기초적인 사령술’이라고 하더군.”

“저, 저게……?!”

“그래. 이런 걸 기본기로 쓰는 녀석에게, 어떻게 길에 굴러다니는 잡것 처리를 맡기겠어? 그러니까, 아까 들은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치도록 하지.”

 

아, 어차피 곧 헤어질 작자들에게 이런 것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을 텐데. 하지만 제 안목을 무시하는 발언을 한 건방진 인간을 어찌 가만히 두겠나.

경멸과 비웃음을 가득 담은 말투로 상대의 제안을 거절한 그는 위저드가 따라오든 말든 내버려 둔 채 아이렌의 뒤를 따랐다.

 

‘하여간, 이래서 겉보기에 만만해 보이면 안 된다는 건데.’

 

진정한 강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곤 하지만, 제 동료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거 같다. 마음만 먹으면 사룡(死龍)도 불러내는 실력을 갖춘 네크로맨서면서, 저런 초라한 꼴로 다니니 이런 주제 파악도 못 하는 초보자들에게도 업신여겨지는 것이 아닌가.

넉살 좋게 웃으며 워리어를 이끌어주는 아이렌을 반쯤 뜬 눈으로 지켜보던 레오나는 서늘하게 빛나는 상대의 제비꽃색 눈동자에 숨을 삼켰다.

 

‘어디서 그런 여유가 나오는 건지, 볼 때마다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부족 최고의 샤먼으로 인정받았지만 제2 왕자라는 이유로 왕위를 이어받을 기회는 얻지 못하고, 그렇다고 전투원으로 대접받기엔 혈통 탓에 늘 겉돌며 전장에 나갈 기회를 박탈당했던 자신으로서는 저런 태도는 이해할 수 없다. 제 강함을 인정받지 않아도, 모두에게 깔봐져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저 의연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생과 사의 경계에 선 자는 다 이런 건가.’

 

뭐, 어찌 되었든 상관없다. 정신력도 실력도 초월자의 경지에 도달한 저 여자는 결국 제 것이 아닌가. 그거면 됐지.

제게 왕좌가 없어도, 혈족의 인정이 없어도, 저런 규격 외의 존재가 자신을 사랑하며 곁에 있어 준다는 건 꽤 마음이 충만해지는 사실이었다. 제가 집착하던 모든 것들을, 다 우습게 느껴지게 해주었으니까.

왕자에서 모험가가 된 후,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걸 얻은 레오나는 이 생활에 분명 만족하고 있었다.

어느새 제 것을 향한 모욕도 머릿속에서 싹 지워버린 그는 늘어지게 하품할 뿐이었다.


노동요로 쓴 곡:

쓴 글은 8천자 남짓인데 나름 설정을 뇌내에 자세히 짠 글이라 TMI 쓰고 싶어 남기는 설정.

아이렌은 이 AU에선 순수 인간이 아닙니다. 갓난아기일 때 암흑교단의 흑마법 제물로 사용되었다가 정작 교단에서 불러온 마족의 혼이랑 본래 혼이 융합되어서 반인반마에 가까운 뭐... 그런... 오타쿠스러운 설정입니다. 예.

어쨌든 교단에서 '아 이게 아닌데 망했네;' 하고 쫄아서 숲에 버렸는데, 그걸 마족인 크로울리가 줍고... 스승 겸 보모 노릇하며 길렀다가... 아이렌이 '키워줘서 감사합니다 저 세상 구경 하러 갈거임 ㅇㅇ' 하고 유적 탐사하며 세상 방랑하다가 샤먼의 극치를 보기 위해 비술을 찾아다니던 레오나와 유적에서 만나서 이러쿵 저러쿵 한 후 서로 '너... 강하구나. 동료가 되어라' 가 되어 본문처럼 다닌다는 이야기입니다. 네.

레오나는 흙과 초목의 정령을 다루는 사자 수인족 샤먼, 아이렌은 보시다시피 네크로맨서입니다.

이 파티, 법사가 둘인데 괜찮을까? 싶지만? 원래 롤에서도 바텀에 투 원딜 가고 하잖습니까. 그런 거죠(??)

언제 기회 되면 이 AU로 아이렌 육아하는 크로울리와 이셀라 이야기도 써보고 싶고 첫만남도 써보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꼭...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HL
커플링
#드림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