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와 아이렌의 미학 예찬

열셋째 장

루크 헌트 드림

아이렌 군, 혹시 최근에 바쁘니?

 

아, 혹시나 하여 쓰는 거지만 네게 독촉을 하려는 마음은 전혀 없단다! 이 노트는 의무적으로 써야 하는 과제도 아닐뿐더러, 나는 네가 털어놓는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지 직접 무언가를 캐내려는 건 아니니까. 뭐든지 자발적으로 털어놓는 이야기가 가장 정직한 법. 협박이나 강요로 얻어낸 이야기는 진실성이 떨어지는 법이지.

 

어찌 되었든. 나는 그저 네가 걱정되는 것뿐이란다. 최근에는 필담뿐만이 아니라, 얼굴을 마주하는 일도 줄어들지 않았니. 설마 아무 말도 없이 날 피해 다니는 거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이렇게까지 마주치는 날이 줄어든다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단다.

혹 독촉으로 느껴질까 봐 직접 전해주지 않고, 에펠 군을 통해 전달해 주도록 하마.

간결한 대답이라도 좋으니, 잘 지내는지만 알려주렴.


……선배, 일부러 떠보시지 않으셔도 되어요. 그거 조금 무섭다고요. 그냥 솔직하게 물어도 되는데, 혹시나 오해일까 봐 돌려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요. 선배도 본인이 감 좋은 거 아시고, 어지간히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 이상 말을 꺼내지도 않으실 만큼 신중하신 편이잖아요?

 

일단 제 나름대로 해명하자면, 딱히 선배를 피해 다니려고 그런 건 아녜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배만 피해 다닌 건 아니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죠. 무슨 일이 있냐고 하면 그건 아니지만, 외부 자극으로부터 좀 멀어질 필요가 있었다고 할까요. 타인과 잘 지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저 자신과 잘 지내야 하는 법이죠. 혼자서도 잘 지내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를 망치기 마련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좀 개인적으로 취미 관련해서 바쁜 일이 있어서……. 통조림을 해야 할 일이 있었거든요. 아, 여기서 통조림이라는 건 진짜 통조림 이야기가 아니라, 어디 가둬놓고 일만 계속 시키는 걸 통조림이라고 해요. 진짜 제가 통조림이 된 건 아녜요, 그랬으면 이 글도 쓰지 못하고 있겠죠?

 

그러니까, 선배에게 화가 나거나 한 건 딱히 없어요. 제가 왜 선배에게 화를 내겠어요? 선배는 제게 다정한 사람이잖아요. 너무 잘 대해주셔서 황송할 정도인데, 제가 화를 내면 적반하장이 아닐까요.

선배에겐 늘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른 일로도 바쁘실 텐데, 항상 절 신경 써 주시고 계시잖아요. 폼피오레 부사감으로서도, 과학부 부원으로서도, 그리고 루크 헌트라는 한 명의 개인으로서도 할 일이 많을 텐데 두문불출한 후배 하나 때문에 이렇게 노트도 써주시다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어요.

 

선배야말로, 요즘 바쁘시지 않으세요? 무리해서 절 챙기시려는 건 아닐까 걱정이네요.

저 말고 챙겨주셔야 하는 사람이 있거나 한 건 아녜요?

 

어쨌든, 제게 사과하실 일은 없어요.

즐거운 이야기 대신 변명뿐인 이야기를 써서 죄송하네요.


오, 이럴 수가. 맙소사.

몽 르나르. 혹시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니?

 

너야말로 나를 떠보고 있구나. 후후, 하지만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야. 나는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전부 솔직하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깜찍하게 토라질 줄도 알았다니. 너와는 오래 알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질투 같은 걸 할 줄은 정말 몰랐단다. 혹시 다른 이들에게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곤 하니? 그건 좀 속이 쓰릴 거 같은데. 후후. 이런 뾰족하고 귀여운 모습은 나만 보고 싶거든.

 

아, 물론 질투 때문에 나를 피해 다닌 건 아니겠지. 그건 나도 안단다. 빌에게 듣자 하니, 동아리 활동 외에도 뭔가 쓰고 있다고 하던데. 네 답장을 보곤 그 일로 바쁜 거구나 하고 깨달았단다.

‘통조림’까지 할 정도로 필사적으로 뭔가 쓰고 있다니, 꼭 그 결과물을 읽어보고 싶구나! 네가 열과 성을 다하여 쓴 글이라면, 그게 어떤 글이라도 내겐 참으로 아름다울 텐데.

하지만 내게 서운한 게 없었다면, 분명 작업하다가 잘 풀리지 않는 부분이 있거나 할 때 내게 연락했겠지? 그거 하나는 정말로 안타깝구나. 사소한 오해 하나가 너와 내 연결고리를 흔들다니 말이야.

 

아이렌 군. 확실하게 말해둘게. 너 외에 내가 중요하게 챙겨야 할 사람은 없단다.

 

아마 네가 생각하는 그 ‘챙겨줘야 하는 존재’는 분명 우리 동아리의 1학년 후배겠지. 하츠라뷸의 그 아이 말이야.

네 답변을 들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르나르가 신경 쓸 일은 그거밖에 없을 것 같더구나. 얼마 전에 내게 공책을 주는 걸 본 거겠지. 혹은 누군가에게 들었거나. 굳이 따지자면 후자의 가능성이 더 클 거 같구나. 과학부에는 수다쟁이가 몇 명 있으니까. 너와 내가 필담을 나눈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니까, 네게도 알려줘야 할 정보라 여긴 이가 적지 않았을 거라 짐작한단다.

 

재미있기도 하지. 고작 필담 정도로 마치 내가 큰 부도덕이라도 저지른 듯 굴다니. 후후.

 

아. 오해하지 말렴. 네가 토라지는 건 이해한단다. 타인은 모르지 않니. 우리의 필담이 단순한 교환일기 같은 게 아니라는 걸. 그것보다는 좀 더, 큰 의미가 있지. 그렇지 않니?

그리고 무엇보다, 난 그 아이와 필담은 하지 않았단다. 그 애가 필담을 요구한 건 맞아. 평소에도 날 잘 따르는 아이긴 했지만, 네가 나와 필담을 나누는 걸 보곤 자신도 하고 싶어진 모양이더구나. 아주 가끔이라도 좋으니, 뭐든 써달라고 그러더구나.

하지만 난 거절했단다. 웬만하면 해주고 싶지만, 이런 건 아이렌 군과만 하고 싶다고 말이야.

트레이 군이 그러더구나. 정말 아무거나 써 줘도 될 텐데, 생각도 해보지 않고 거절할 필요는 없지 않았냐고 말이야. 하지만 말이지, 나는 뭔가 한다면 모두에게 공평하게 해줘야 옳다고 생각한단다. 네게는 온갖 이야기를 다 해놓고 그 아이에게는 형식적인 말 몇 마디만 써준다면, 그건 너무한 차별이지 않니. 그럴 거라면 아예 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했단다.

그 애도 아마 너와 내가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아예 짐작하지 못했기에 부탁한 거겠지. 아마 일기나 편지 같은 걸 쓴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아니면 정말 뭔가 색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한들…….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겠지. 이건 우리니까 나눌 수 있는 필담 아니니.

너도 나 이외의 다른 사람과는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란다. 누구든 우리의, 혹은 서로의 흉내를 낼 수는 있겠지. 하지만 알지 않니. 모방에서 발전하지 못하고 그저 남을 흉내내는 이들은 결국 자기 자신까지 잃고 만다는 걸.

 

기억하렴. 그 아이는 네 대신이 될 수 없고, 나도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없단다.

 

그러니 그만 화 풀렴. 후후. 바쁜 일이 마무리되면, 네가 좋아하는 파스타를 먹으러 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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