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Esoruen
나의 르나르, 괜찮니? 이런 때에 공책을 건네어 주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네가 걱정되어 어쩔 수가 없었단다. 영화연구회 소속인 우리 기숙사 후배들에게 들었단다. 빌과 싸웠다고 하던데. 후후, 정말 대단하구나. 동급생도 아니고 후배 중에서 그 빌 셴하이트와 싸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데. 심지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좋은 게 좋은 거다’
아이렌 군, 혹시 최근에 바쁘니? 아, 혹시나 하여 쓰는 거지만 네게 독촉을 하려는 마음은 전혀 없단다! 이 노트는 의무적으로 써야 하는 과제도 아닐뿐더러, 나는 네가 털어놓는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지 직접 무언가를 캐내려는 건 아니니까. 뭐든지 자발적으로 털어놓는 이야기가 가장 정직한 법. 협박이나 강요로 얻어낸 이야기는 진실성이 떨어지는 법이지.
새삼스러운데 말이죠, 연예인이라는 건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거 같아요. 정확하게 연예인뿐만이 아니라 이미지로 먹고사는 모든 직업이 제게는 아주 대단하게 보여요. 인플루언서라던가, 아나운서라던가, 그런 사람들 전부 다 말이죠. 자기 관리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에요. 당연히 외적인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것이나 건강을 유지하는 건 힘든 일이지만
그저께였던가. 같은 동아리의 동급생에게 ‘아이렌 군은 유미주의자니까 이런 사소한 소품에도 까다롭구나.’라는 말을 들었어요. 참고로 그 애는 폼피오레 기숙사의 학생이었고요, (애초에 영화연구부 부원 대부분은 폼피오레 사람들이지만…….) 신기하죠. 저는 저 자신을 유미주의자, 조금 더 마음에 드는 언어로 표현하자면 ‘탐미주의자’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걸
나이팅게일. 장미를 붉게 물들이는 피. 마지막 숨까지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가 당신이 좋아하는 색으로 정원을 물들일 때. 뿌리 위 쌓인 깃털로 나의 모자를 장식하고 나는 어느 가시에 얽혀 당신이 좋아하는 색으로 물들까. 다음 생에는 나도 날개를 가지고 태어나 당신의 정원을 붉게 물들여야지. 먼 날에 우리와 다른 말을 쓰는 아이가 내가 물들인 꽃을 들
아이렌 군, 오랜만에 이 공책을 네게 전해주게 되었구나. 저번 주말은 아주 즐거웠어. 함께 오페라를 보러 가주어서 정말 고맙구나! 네가 좋아하지 않을까 해서 권한 거였는데, 생각 이상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해 줘서 내가 더 행복했다는 걸 꼭 말해주고 싶었어. 나는 옛날부터 이 오페라를 여러 번 봤지만, 너는 단 한 번 본 것뿐인데 줄거리를 대강 파악한 점
독재의 사슬로부터는 구원을, 악인에게도 관용을, 임종의 참상에도 희망을, 교수대에도 은총을! 죽은 자들도 살아나게 하자! 형제여, 마시고 함께 노래하자. 모든 죄인들을 용서받아야 하고 지옥은 없어져야 하노라.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밝게! 수의를 입고도 단잠을 자자! 형제여, 너그러운 판결을 기대하자 죽은 자들을 심판하는 분의 입에서도 - Fri
나의 무슈.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최고의 사냥꾼. 최근은 이 필담도 뜸해졌네요. 어쩔 수 없긴 하죠. 지금 시험 기간이니까요. 저도 선배도 성실한 학생이니, 이 공백은 오히려 굉장히 안심이 가요. 다른 게 아니라, 역시 사냥꾼이라면 잘 알지 않을까 싶은 의문이 생겨서 공책을 폈어요. 선배는 사냥할 보람이 있는 사냥감을 좋아하시나요? 아니면 손쉽게
마드모아젤 르나르! 오늘은 무슨 변덕이 들어, 내가 너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기적을 이루게 해준 걸까? 요즘은 동아리 활동과 기숙사 일로 바빠 한동안 이걸 쓰지 못했지만, 오늘은 도무지 그냥 넘어갈 수가 없구나. 나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 찬사를 보내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몸이니까. 아이렌. 오늘의 네 머리카락은 마치 검은 바다 같았어.
아이렌, 어제 이데아 군과 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알고 있어. 아무리 긴밀한 사이라도 누군가에게 제삼자와의 일을 물어보는 건 매너가 아니라는 것 말이야. 하지만 그대도 잘 알고 있듯, 그 남자는 쉽게 타인에게 입을 열지도 않고 말을 한다고 해도 즐겁게 떠드는 일은 드물다는 걸 말이야. 너는 충분히 매
선배. 혹시 당나귀와 강아지 이야기를 아시나요? 먼 옛날. 주인이 기르는 강아지만 예뻐하고 자신은 일만 시키는 걸 억울하게 여긴 당나귀가, 강아지 흉내를 내며 주인의 환심을 사려다 실패하고 마구간에 갇히는 이야기에요. 꽤 간단한 스토리죠? 저는 어렸을 때는 그 동화가 이상하다 느꼈어요. 분수에 맞지 않은 일을 하면 화를 당한다는 게 교훈이라는데, 누구든
부담이라니! 당치도 않아. 나는 이걸 유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것보다, 로보라면 혹시 ‘이리왕 로보’를 말하는 걸까? 놀라운 걸. 너의 세계에도 로보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니. 예전에 핼러윈날 행사도 그렇고, 생각보다 네가 태어난 세계와 이곳의 세계는 비슷한 점이 많을지도 모르겠어. 나도 좋아해. 로보의 이야기. 그는
이런, 이건 돌려달라고 준 공책이 아니야. 아이렌. 꽃과 공책, 모두 네게 주는 선물이었어. 하지만… 이렇게 돌려받아버렸고, 너의 답신을 봐버렸으니. 내가 어떻게 펜을 놓을 수 있겠어. 나의 르나르. 꽃을 마음에 들어 해줘서 기뻐. 압화로 만들 정도로 마음에 든 걸까? 아니면 내가 준 것이기에 간직하기 위해 그런 방법을 택한 것일까. 너라면 후자라고
봉쥬르, 마드모아젤 르나르. 갑자기 공책을 주고 가다니, 당황스러웠을까? 하지만 중원에서 이 꽃을 발견했을 때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고. 혹시 이 꽃의 이름을 알고 있을까? 파란 모자, 파란 넥타이, 황제의 꽃…. 여러 가지 별명을 가졌고, 그 모든 꽃 중에서 가장 완전한 푸른색을 가졌다는 이 꽃은 이 계절이 끝나면 더는 볼 수가 없어지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