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와 아이렌의 미학 예찬

열한째 장

루크 헌트 드림

그저께였던가. 같은 동아리의 동급생에게 ‘아이렌 군은 유미주의자니까 이런 사소한 소품에도 까다롭구나.’라는 말을 들었어요. 참고로 그 애는 폼피오레 기숙사의 학생이었고요, (애초에 영화연구부 부원 대부분은 폼피오레 사람들이지만…….)

 

신기하죠. 저는 저 자신을 유미주의자, 조금 더 마음에 드는 언어로 표현하자면 ‘탐미주의자’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걸 남이 짚어준 건 처음이었고, 심지어 저 말을 설마 폼피오레 기숙사 사람에게 들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솔직히 선배네 기숙사 사람들은 대부분 아름다운 것에 환장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뭐라고 할까. 자전거 타고 열심히 달려가는데 옆에서 슈퍼카를 타고 달리는 사람에게 “와, 당신 정말 빠르네요!” 같은 소릴 들은 기분이라고 할까요.

물론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에 순위를 매길 필요는 없지요. 누구는 진짜 유미주의자고 누구는 가짜 유미주의자고 하는 건 오히려 단어에 대한 모독이니까요. 각자 추구하는 아름다움이 다르고, 추구하는 방식이 다를 뿐. 결국 예술과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그걸 최우선 가치로 둔다면 누구나 유미주의자이지 않겠어요? 하지만 역시 그 방향성의 다름에서 오는 사소한 차이점이 사람들 사이에 갈등을 만드는 것이겠지요. 누구든 사람은 제가 믿는 가치가 진리이길 바라고,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가장 숭고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니 진짜네 가짜네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겠지요. 그냥 다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으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아는 유미주의자 중 가장 아름다움에 관한 철학이 뚜렷한 사람을 꼽자면 역시 루크 선배랑 빌 선배, 이 두 분이더라고요. 그리고 두 분과 저, 이렇게 세 사람은 각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방식이 꽤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빌 선배는 아름다움이라는 궁극적인 가치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을 연마하는 사람이죠. 무엇이 되었든 지금보다 더 나은, 더 훌륭한, 더 아름다운 걸 그 몸으로 이뤄내는 사람. 저 자신이 도화지가 되고 대리석 조각이 되고 활자가 되어 신화를 써 내려가는, 그리고 저 자신이 신화가 될 수 있기에 제가 가치 있다고 판단한 존재들도 그러기를 바라며 독촉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반면에 루크 선배는 세상 모든 것에서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평범한 모든 걸 신화로 만들어내는 음유시인 같은 사람이죠. 선배 앞에서라면 길가를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세계적인 박물관에 있는 조각상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잎 하나 남지 않은 나무도 소설 속 주인공이 되곤 하잖아요.

그리고 저는 말이죠. 저만의 아름다움을 두고 그 아름다움을 구체화 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모두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어도 그게 ‘제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에 들어맞지 않으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거죠. 그렇기에 고집스럽게 무언가를 쓰고, 그리고, 찍고, 파헤치면서……. 제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에 맞는 무언가를 찾아내거나 창조하고, 혹은 보편적인 무언가를 제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에 끼워 맞추기 위해 망치를 드는 사람이 아닐까 해요. 말하자면 저는 하나의 유일신을 믿는 신자(信者)라는 거죠. 물론 다른 신과 신화를 믿는 이들을 존중할 줄 아는 신자고요.

 

생각해 보면 저희는 각자 이렇게 다르니까, 조금씩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빌 선배는 저희에게 자신처럼 신화가 될 걸 권유하지만 루크 선배는 이미 모든 것을 신화라 보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니 더 뭘 해야하나 싶을 때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평소엔 빌 선배의 요구에 잘 맞춰주시고, 때로는 빌 선배가 루크 선배의 신화화(저는 이걸 미의 발굴이라 말하고 싶네요)에 당황하기도 하지만요. 그리고 저는……. 제가 신화가 될 생각은 없는 사람이지요. 신자가 어떻게 신이 되겠어요? 제가 생각하는 신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멀쩡한 조각상의 사지를 자르고 성화를 불로 지지는 짓은 해도, 저 자신을 신화 일부라고는 생각하지는 못하는 사람이 저죠. 그러니 빌 선배의 요청은 들어줄 수 없고 루크 선배의 신앙엔 기겁하게 되는 거겠지요. 내가 신화라니, 신성모독이다! 라면서요.

 

어제 자기 전 고민하다가 떠오른 건데 어디든 정리해 두고 싶어서 적었고,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면 선배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여기에 적었어요.

혹시 제가 헛소리 한 거라면 반박해 주셔도 좋아요. 저는 말이 통하는 이와 하는 토론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지만, 특히 예술에 관해서 떠드는 거라면 종일 반박만 들어도 행복한 사람이니까요.


아이렌 군. 나의 르나르. 이런 생각을 공유해 주고 싶은 사람이 나라니, 정말로 영광이구나. 누군가가 내가 추구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움에 관해 깊게 생각해 주는 건 귀중한 일이지. 이 세상은 타인의 취향을 가볍게 여기고 자신의 취향만을 귀하게 여기는 이들이 너무 많으니까 말이야.

이해라는 건 참 어려운 일이야. 누군가를 그저 ‘별종’이라 여기고 자신의 세계에서 분리해 버리는 건 쉬운 일이지만,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동화되어보려고 시도하는 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니까. 무엇보다 대부분은 누군가의 미학을 이해할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하기도 하지. 사상이나 이론 같은 것은 정답이 있지만, 예술에는 정답이 없으니까.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는 건 생각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게 이 시대의 비극일지도 모르겠구나.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지식일지 모르지만, 예술이 없는 삶은 풍족하지 못한데 말이야.

 

네가 적어준 비유를 몇 번이고 곱씹어 보았단다. 내 미학을 그렇게나 고평가해 주다니, 영광스럽구나!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말해두어야겠어. 나는 모든 걸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누군가가 서로의 아름다움을 헐뜯고 무시하는 걸 싫어하긴 하지만, 나에게도 특별히 더 어여쁜 것은 있기 마련이라는 걸 말이야. 모든 걸 평등하게 생각하고 좋아하기엔 나는 너무나도 인간적이지. 그리고 아마 아이렌 군도 내가 어렴풋이 어떤 걸 더 좋아하는지 알리라 생각하는데. 우리는 서로에 대해 모든 걸 알지는 못하지만, 무엇을 아름답다고 여기는지는 잘 아는 사이이니까.

 

그래. 말이 나온 김에 적자면, 네가 나를 어여삐 여겨주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알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아이렌 군. 너는 많은 걸 떠드는 사람이 아니지만 네가 아름다워하는 걸 찬미할 때는 말을 아끼는 사람이 아니지. ‘표현하지 않아놓고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이기적인 행위이다.’ 늘 그렇게 말하질 않았니. 어느 날에는 내 시의 문장이나 단어 선택을 칭찬해 주고, 어느 날에는 내 눈동자 색이 아름답다고 속삭여주고, 또 어느 날에는 내 팔의 근육이 만들어내는 곡선을 은유법을 섞어가며 감탄해 주고, 어제는 내 머리카락을 보며 카나리아 깃털 같다고 말해주었지? 나는 다 기억하고 있단다. 네 칭찬에는 숭고함이 있거든. 네가 너를 신자라 말한 것처럼, 넌 네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걸 숭배하듯 사랑하니까 말이야. 그런 칭찬은 쉽게 잊히지 않지. 어떤 종류의 보답도 바라지 않는 일방적인 칭찬.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모든 걸 쉽게 파악하고 그 본질을 눈치채는 네 눈에는 사람의 장단점이 너무나도 선명히 보이겠지. 그런 네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건 아무리 광범위하게 정의한다 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단히 구체적이고 세밀한 정교함으로 채워져 있을 거라는 걸 안단다. 그 세밀화에 내가 들어맞는 부분이 있고, 네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사지를 자르고 불로 지지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 있다니! 정말 황홀한 일이 아닐 수 없구나. 아니, 어쩌면 언제든 나를 내려칠 기회를 엿보고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나의 르나르. 이것만큼은 기억해 주렴.

나는 네 말대로 음유시인이기도 하지만, 본질은 사냥꾼이란다. 아름다운 걸 그저 찬미하기보다는, 결국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걸 직접 사냥해 가져야 하는 사냥꾼 말이야. 내가 직접 사냥하지 않으면, 평생 원통스러워할, 그런…….

 

내가 널 르나르라고 부르는 걸 막지 않아 주어 고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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