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메리] 모형정원의 이방인
이 저택은 마치 모형정원 안에 지어진 인형의 집 같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FF14 확장팩 <효월의 종언> 지역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계 설정 창작에는 큐님이 크게 도와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BGM - FFXIV ost 'The Labyrinth'
: https://www.youtube.com/watch?v=j2cV4qc3lYo
“젠장, 잡히기만 해봐!”
다급한 발소리가 카펫으로 감싸인 복도 위를 내질렀다. 산크레드는 해사한 봄날의 볕같은 따뜻한 광원이 내리쬐는 저택 안을 두리번거리며 헤집고 있었다. 어중간하게 기른 새하얀 머리카락 아래로는 한껏 열받은 미간이 자연스레 구겨졌다. 좌로, 우로, 위로, 아래로, 시선은 낯선 건물 안을 훑으며 범인을 찾는 일에 열중했다.
적어도 상대의 이름이라도 알았으면 큰소리라도 치겠건만. 정체모를 낯선 아이와의 황당한 만남을 다시 한 번 곱씹으며 그는 다시 수색에 나섰다.
몇 시간, 아니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사건은 산크레드의 운명을 바꾼 어느 만남에서 시작됐다. 림사 로민사에 발을 딛은 지식도시 샬레이안의 현인, 루이수아의 지갑을 훔치다 잡힌 산크레드는 뜻밖의 기회로 그의 제자가 되었다. 한낱 항구도시의 좀도둑 애송이였던 그는 난생 처음 여객선을 타고 먼 바다를 건넜고, 에오르제아 땅에서 한참 떨어진 올드 샬레이안에서의 생활을 막 시작한 참이었다.
인자하고 책임감이 강한 루이수아는 스승의 역할에 충실했다. 첫날부터 도시 곳곳을 안내해준 그는 날이 지날수록 단순히 지리와 시설에 대한 설명에 그치지 않고 올드 샬레이안의 역사와 문화, 민족성에 대해 타지 출신인 산크레드에게 알려주었다. 오늘의 외출 또한 엄연히 말해 취지는 그 연장선이었다.
“이곳이 라비린토스란다.”
라비린토스. 미궁의 이름을 가진 그곳은 올드 샬레이안 지하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아주 특별한 구역이었다. 옛부터 샬레이안에 전해지는 각종 자료나 생물들을 이곳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루이수아는 걸음을 옮기면서 제자에게 설명해주었다. 말하자면, 이곳은 지식과 정보를 보관하는 거대한 지하 창고인 셈이다. 화사한 햇살이 눈 앞을 밝히고 부드러운 풀과 나무의 내음이 공간을 채웠다. 멀리서 물레가 돌아가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온다. 길을 에워싸고 펼쳐진 풍경은 어딘지 모를 그리움 마저 들법한 정경이었으나 산크레드의 얼굴 표정은 시큰둥했다.
“첩보원으로서 활동하려면 조달꾼들과 안면을 터놓는 것이 도움이 될테지. 아, 그 전에…….”
루이수아가 인자한 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이곳에 지내는 내 친구와 가족들을 소개해주마.”
“이런 곳에 사람이 산다고요?”
의아해 하는 산크레드의 반응을 예상했다는듯이 스승은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 사잇둘레의 가장 구석을 향해 걷고 걸었다. 그 사이 낯이 익은 미궁에 조금 대책없이 커다란 온실이라는 감상마저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로 보이는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한눈에 보아도 이질감을 줄 만큼 거대한 저택이었다. 여태까지 보아온 라비린토스의 건축물들은 학문적 목적을 갖춘 시설이라는 인상이 강했으나 야생의 자연 한가운데에 세워진 그 백금색 건물은 붉은 장미가 흐드러지도록 핀 정원을 끼고 있어 평범한 생활 공간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이 거대한 온실 안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스승의 말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산크레드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눈을 크게 깜박였다. 그의 스승은 그런 그의 반응이 즐거운듯 껄껄 소리 내어 웃고는 정문을 향해 앞서 발을 옮겼다.
“자, 들어가자꾸나.”
방 안은 새 것 같지는 않지만 깨끗하게 잘 관리된 오래된 가구들로 운치 있게 장식되어 있다. 산크레드는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앉은 채 괜히 식은 홍찻물을 티스푼으로 이리저리 휘저어댔다. 티푸드로 나온 과자는 훌륭했지만, 어쩐지 한껏 어린애 취급을 받는 기분이 들어 그닥 입에 넣고싶지 않았다.
“저런. 그대의 제자를 지루하게 한 모양이군.”
붉은 눈의 노인이 자신의 찻잔을 내려두며 시선을 옮겼다. 바로 오늘 소개받기로 한 루이수아의 친우 윌리엄 칼 체이서였다. 휴런족 노인의 눈가는 엄격한 모양새였지만 오랜만에 대접하는 어린 손님에게 마음을 쓰는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다.
산크레드는 머릿속으로 막연히 제법 긴 이름이라는 생각을 하며 입을 닫고 있었다. 이런 자리가 어려운 탓도 있지만 척 보아도 오랜만의 담소에 흥이 오른 두 노인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체이서 노인이 말을 이었다.
“늙은이들의 대화에 끼어 있으니 당연히 재미가 없겠지. 흥미가 있다면 저택을 자유롭게 구경해도 된다.”
“흐암……, 그게 좋겠는데요.”
루이수아는 허락을 구하는듯한 제자의 간절한 눈빛을 호통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부드러운 미소를 띤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마음 속으로 만세를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체이서 노인이 한 가지 당부했다.
“참, 손녀가 최근 기분이 저조해서 말이네. 무례한 행동을 할지도 모르지만, 모쪼록 잘 달래어 주게.”
두 사람에게 양해를 얻은 산크레드는 접객실을 뒤로 했다. 문을 닫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인내하고 있던 몸 이곳저곳에서 좀이 쑤셔오기 시작했다.
산크레드는 곧게 뻗은 복도를 발이 닿는대로 걸으며 건물 안을 둘러보았다. 새하얀 페인트와 백금색 장식이 인상적이었던 외장과는 달리 곳곳이 빛바랜 세피아 색 벽지가 발려 있어 따뜻한 분위기다. 한마디로도 아름다운 내부지만, 커다란 창문 바깥에서 비춰진 햇살이 은은하게 고급스러움을 더해주고 있다.
‘비록 인공햇살이지만.’
산크레드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인생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법인가 보다고. 이런 넓고 부유한 공간은 자신과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동시에 왜 이런 본격적인 주거시설이 섬의 지하에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라비린토스가 연구를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라면 보안을 위해서라도 주거 공간과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상식이었다. 만들어진 대지, 만들어진 물, 만들어진 공기, 만들어진 낮과 밤까지 모두 짧은 한평생을 림사 로민사의 탁 트인 푸른 바다 옆에서 살아온 그에게는 기이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이 저택은 마치 모형정원 안에 지어진 인형의 집 같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바다 한가운데에 자리한 올드 샬레이안 본토에서 사방이 막힌 지하 시설이라는 점 또한 어딘가 답답했다.
잡념에 빠진 채 산크레드는 복도 중간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가 중앙계단을 지날 즘 무엇인가 허공을 가르는 미세한 소리가 들려 왔다.
퍽. 곧이어 무엇인가 카펫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머리보다 먼저 시선이 반응해 물체를 찾아낸다. 산크레드는 발치에 굴러다니는 컵케이크를 향해 눈을 깜박였다. 웬 컵케이크? 뜬금없는 추락물의 정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잠시 간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으나 산크레드는 얼마 가지 않아 결론을 도출했다. 그의 몸이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천장에서 떨어진 그 물체를 피한 것이었다.
그는 계단 위를 휙 올려다 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구불구불 물결치는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양갈래로 묶은 어린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손에 컵케이크들이 놓인 트레이를 소중히 든 채, 소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산크레드를 내려다 보았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산크레드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가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려냈다. 방을 나서기 전 체이서 노인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었다.
‘참, 손녀가 최근 기분이 저조해서 말이네. 무례한 행동을 할지도 모르지만, 모쪼록 잘 달래어 주게.’
‘이 아이가 그 손녀인가.’ 산크레드의 눈동자가 위로 한 번, 아래로 한 번 데구르르 구른다. 여자아이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어쩐지 차가운 분위기를 녹여보고자 산크레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음. 안녕. 네가 떨어뜨린 거야?”
“…….”
“맛있어 보이는데 아깝게 됐네.”
가벼운 한탄과 함께 산크레드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으나 어째서인지 여자아이는 그의 질문에도 대답이 없었다. 대신 트레이에 놓여 있던 컵케이크들 중에서 탐스러운 검붉은 색 체리가 올려진 것을 손으로 집어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산크레드를 향해 그것을 내던졌다.
“뭐, 뭐야?!”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어린 첩보원의 빠른 반사신경이 이번에도 그 자신을 구한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신발코 끝까지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물컹한 생크림이 새카만 가죽신 끝을 더럽혔다. 갑작스러운 디저트 투척에 그는 다시 계단 위를 향해 고개를 처들었지만 범인은 이미 자리를 박차고 윗층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잠깐! 거기 서!”
산크레드는 곧바로 여자아이를 쫓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모습이었다.
“나 참! 왜 저렇게 빨라?”
시간이 지날수록 산크레드는 점점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금세 붙잡을 자신이 있었지만 예상 밖으로 여자아이의 몸놀림이 유연하고 빨랐던 것이다. 게다가 산크레드는 오늘 이 저택에 처음 온 방문인이다. 당연히 생활 터전의 배치나 구조를 잘 아는 상대편이 유리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쇳덩이가 무너져 내리면서 서로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크레드의 목소리가 천장을 때렸다.
“위험하게 무슨 짓이야!”
여자아이는 그의 목소리에 뒤를 한번 돌아보고는 혀를 낼름 내밀어 보였다. 도주 중에 그가 무너뜨린 갑주 장식은 엉망이 되어 온 복도 이곳저곳에 흩어진 채 다급한 산크레드의 앞길을 막았다. 아이는 이렇게 중간중간 장식품이나 가구를 무너트리는 것으로 거리를 벌렸다. 잠시 발목이 붙잡힌 산크레드는 곧바로 다시 소녀를 뒤쫓기 시작했으나 그는 이미 복도 끝 모서리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처음엔 자신에게 컵케이크를 던진 일에 대해 따져물을 생각으로 쫓아온 것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산크레드는 저택을 엉망으로 만드는 꼬마 주인을 막기 위해 달리고 있었다.
있는 힘껏 한달음에 복도 끝 모퉁이로 향했다. 꺾인 복도 저 너머로 드디어, 멈춰서 있는 작은 인영이 보였다. 산크레드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아이를 붙잡았다.
“잡았다……!”
손으로 가냘픈 어깨를 움켜잡자 그제야 숨이 트였다. 무엇보다 더이상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가볍게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산크레드는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너, 사람한테 컵케이크를 던지면 어떡해? 그리고 그렇게 날뛰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 때까지만 해도 따뜻한 햇살을 머금은 세피아 벽지를 닮은, 못된 두 눈동자가 겨우 그를 마주하는가 싶었다. 소녀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산크레드를 올려다보며 답했다.
“……누구세요? 무슨 소리예요?”
한 순간 마냥 잡아떼는 것이라 생각하기엔 무언가 강한 위화감이 스쳤다. 여자아이의 머리 모양이 조금 전과 달랐던 것이다. 곱슬머리인 점은 같았지만 양갈래로 묶고 있지 않았다. 애써 아랑곳 하지 않고 컵케이크를 투척한 이유에 대해 추궁도 해보았으나 대화가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끼던 찰나 산크레드의 뒷통수에 무언가 날아와 충돌했다.
퍽 경쾌한 소리와 함께 머리에 그것이 부딪힌 다음, 복도에는 달달한 내음이 진동했다. 예견했던 불길함을 느끼며 산크레드가 천천히 손을 들어 뒷머리를 쓰다듬자 손에 부드럽고 끈적한 생크림이 가득 묻어났다. 뒤를 돌아보자 어이 없게도 눈 앞의 소녀와 똑같은 얼굴을 한, 양갈래 머리의 여자아이가 마지막 컵케이크를 손에 든 채 산크레드에게 한번 더 혓바닥을 내밀었다.
“쌍둥이였어?!”
어안이 벙벙한 산크레드는 또다시 반대편 복도로 사라지는 범인을 망연자실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곁에 있던 소녀가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거구나.”
“으윽……, 젠장! 착각해서 미안하다!”
산크레드는 크림이 묻지 않은 손으로 아이의 정수리를 어수선하게 쓰다듬고는 다시 범인을 뒤쫓기 시작했다. 어느새 복도에는 가지런했던 단발 머리가 한껏 헝클어진 작은 소녀만 홀로 남겨져 있었다. 소녀는 얕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익숙한듯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내 여동생은 아무도 못 말린다니까.”
“젠장, 잡히기만 해봐!”
다급한 발소리가 카펫으로 감싸인 복도 위를 내질렀다. 산크레드는 해사한 봄날의 볕같은 따뜻한 광원이 내리쬐는 저택 안을 두리번거리며 헤집고 있었다. 어중간하게 기른 새하얀 머리카락 아래로는 한껏 열받은 미간이 자연스레 구겨졌다. 좌로, 우로, 위로, 아래로, 시선은 낯선 건물 안을 훑으며 범인을 찾는 일에 열중했다.
적어도 상대의 이름이라도 알았으면 큰소리라도 치겠건만. 산크레드는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곧잘 욱하는 성질을 갖고 태어난 그 치고는 오래 버텨낸 수준이었다. 그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눈 앞의 여자아이는 중앙의 계단을 향해 질주했다. 뒤를 쫓으며 주변을 살펴본 산크레드는 낯익음을 느꼈다. 그는 저택 내부를 돌고 돌아 처음 여자아이와 마주쳤던 그 계단에 돌아와 있었다. 이대로는 첫만남의 순간 처럼 눈 앞에서 꼬마를 놓치게 될 것 같았다.
그 때였다. 접객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방 안에서 걸어나와 절제된 손동작으로 바로 앞을 지나치던 소녀의 뒷덜미를 낚아채 멈춰 세웠다.
“앗!”
“앗,이 아니지요. 해야할 말은.”
소녀는 잠시 버둥거리다 자신을 붙잡은 이 앞에서 몸을 웅크렸다. 그것은 항복의 언어였다. 때마침 접객실 앞에 도착한 산크레드는 헉헉거리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소녀와 같은 파도치는 장밋빛 긴 머리를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성이 엄격한 얼굴로 소녀를 내려다 본다. 귀를 축 늘어트린 여자아이와 그녀는 누가 보아도 모녀지간임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꼭 닮아 있었다. 산크레드에게 디저트를 던지고 달아나던 기백은 어디로 갔는지 여자아이는 눈을 댕그랗게 뜬 채로 가만히 얼어붙었다.
아이는 손을 오들오들 떨면서 쥐고 있던 마지막 컵케이크를 어머니에게 건넸다.
“……. 이거……, 마먀 줄게.”
“어머니라고 해야지요.”
“어머니 줄게.”
“드릴게요, 지요.”
“어머니 드릴꼐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산크레드는 살짝 어이가 없어졌다. 어머니라는 존재들은 모두 저렇게 귀찮은 꼬투리를 잡는 것일까. 경험해본 적 없는 산크레드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알 수 없는 울컥한 기분이 샘솟았다. 먹먹함인지, 억울함인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는 감정을 떨쳐내기 위해 얼굴을 구긴채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그 순간 여성의 눈동자가 천천히 산크레드에게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을 마주하는 시선에 산크레드는 고개를 들었다. 눈 앞에는 이미 코 앞까지 다가온 여성이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여성이 끼고 있던 팔짱을 풀자 오른손에 접부채가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이내 그녀가 무언가 중얼거린다.
“......등.”
“등?”
예상치 못한 음절에 산크레드가 눈을 깜박이는 사이, 단단한 부채가 경쾌한 소리와 함께 피부를 때렸다.
“등과 허리를 곧게 세우도록! 어깨는 힘을 빼고! 고개는 정면을, 시선은 상대와 맞추고!!”
순식간이었다. 산크레드는 방어 한 번 시도해보지 못 한 채 여성의 부채에 연이어 등과 허리를 얻어 맞았다. 무슨 재질로 만든 물건인건지 따끔하고 얼얼한 통증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비명을 지르는 사이 여성은 부채로 산크레드의 턱끝을 들어올렸다.
“아야야야…….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무슨 짓, 이냐고?”
여성의 눈빛이 한 순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그녀의 등 뒤로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어렴풋이 산크레드의 눈에 들어왔다.
“말버릇이 상당히 고약하구나. 초면의 상대를 대할 때는 정자세를 취하는 것이 예절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턱 밑을 받치고 있던 부채는 산크레드의 정수리를 한 번 두드렸다. 탁! 맑고 청아한 목재의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산크레드는 머리에 살짝 혹이 생긴 기분이 들어 억울한 표정으로 맞은 부위를 매만졌다. 그러나 여성은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팔짱을 낀 자세를 갖추고 말했다.
“방문객은 왕이 아니다. 예우를 받고 싶다면 그에 걸맞는 모습을 갖추도록 하렴.”
“초면의 손님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한테 지킬 예절이 어딨어요?!”
“초면에 마음대로 내 집을 엉망으로 만든 녀석이 입 만큼은 팔팔히 살아 있구나.”
“‘내 집’?”
억울함과 얼얼함 때문인지 산크레드의 눈가에 찔끔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그의 의식은 소녀의 어머니에게 완전히 팔려 있었다. 산크레드는 ‘내 집’이라는 말에 눈을 또렷하게 뜨고 여성을 바라본다. 교본 삽화 처럼 바르고 곧은 자세에서는 우아한 기품이, 힘이 서린 붉은 눈동자에서는 강경한 기질이 전해져 왔다. 단정히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인은 이 저택이 자신의 영역임을 과시하듯이 구둣발로 카펫 위를 탁, 탁,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나는 칼미아 칼리오페 체이서. 이 저택의 주인이다. 나와 통성명도 하지 않고 온 집 안을 헤집어 놓다니.”
“우, 우리 스승님에게 돌아다녀도 된다고 허락 받았거든요?!”
“하아. 아무리 자유분방한 들개라 한들 이대로는 두고볼 수가 없겠군.”
“들……개?!”
난데없는 개 취급에 산크레드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일조했다고는 하나 자신은 집안을 어지럽힌 주범이 아니지 않은가. 그는 배에서 목소리를 쥐어짜내 항변하려 했다.
“그리고 엉망으로 만든 건 내가 아니라……!”
“오오, 돌아왔구나.”
그 순간, 산크레드의 말을 끊고 접객실에서 낯익은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승인 루이수아였다. 그는 체이서 노인, 그리고 저택 주인의 남편으로 보이는 젊은 휴런족 남성과 함께 방을 뒤로하고 걸어나오더니, 난장판이 된 복도를 빙 둘러본 후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둘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모양이구나.”
“전혀 즐겁지 않았는데요.”
“어른에게 말대답 하지 않도록.”
칼미아의 호통치는 목소리에도 무엇이 즐거운지 루이수아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며 껄껄 웃기만 했다.
“루이수아 할아버님, 죄송하지만 당신의 제자에게 예의를 알려줄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하하. 너무 겁주지 않는 정도로만 해주게.”
“저는 싫거든요?”
“조금 전에 내가 뭐라 말했지?”
집주인의 위압감에 산크레드는 기가 죽었다. 그는 얌전히 그녀의 말을 되뇌었다.
“……‘어른에게 말대답 하지 않도록.’”
“그래, 잘 기억했다. 네 이름은?”
“이름요?”
산크레드는 잠시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일의 원흉이 된 여자아이가 제 어머니의 등 뒤로 쌤통이라는 듯이 흉악한 미소를 지으며 산크레드를 비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크레드는 짜증을 감추기 위해 이를 악 물었다. 답이 없자 칼미아가 그를 재촉하듯 사족을 덧붙인다.
“만날 때마다 ‘들개’라 부를 수는 없잖니. 어서 답하렴.”
산크레드는 잠깐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산크레드다. 산크레드……, 워터스.”
“경어.”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곧바로 칼미아가 담담히 트집을 잡았다.
“어른에게는 올바른 경어를 써야하는 법이다. 제대로 다시 소개하도록.”
“……산크레드 워터스입니다.”
“옳지.”
그제야 저택의 주인은 미소를 띠어보였다. 그 사이 체이서 노인은 미안한 마음에 눈썹을 밀어 올리며 산크레드를 살피었다.
“이런, 산크레드 군. 머리카락이 엉망이로군.”
노인이 크림이 한가득 묻은 산크레드의 뒷통수를 안타까운듯이 매만지며 말했다.
“보나마나 우리 말썽쟁이 손녀의 작품이겠지. 칼미아, 수건을 가져오렴.”
“예, 아버지.”
칼미아가 자리를 떠나자 그녀의 뒤에 숨어 있던 사고뭉치가 숨을 곳을 잃고 우왕좌왕 했다. 산크레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여자아이를 째려 보았다. 아이가 고개를 떨구고 괜히 바닥을 차자 그 자리에 있던 어른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한 산크레드와 소녀만이 나란히 고개를 갸웃대었다.
“손님에게 무례하게 군 점 사과하도록 하세요.”
“미얀.”
“메리아 레인 체이서.”
호명하는 목소리에 소녀가 움찔했다. 그것이 뜻하는 바를 그는 뼈저리게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졔송헤요.”
“죄송합니다, 라고 똑바로 말하세요.”
여자아이가 불만스러운듯 입술을 앙 다문 채 시선을 위로 들었다. 산크레드는 칼미아가 건네준 물수건으로 크림 범벅이 된 머리카락을 박박 닦아내며 그 시선에 응했다.
소녀의 이름은 메리아. 그는 체이서 노인의 손녀인 쌍둥이 자매 중에서도 여동생이었다. 미코테족의 작명 양식에서 벗어난 탓인지, 부드러운 울림 덕인지 입에 익숙한듯이 달라붙는 이름이었다. 아무튼간에 이 작은 범인의 해명에 따르면, 산크레드를 새로 온 사용인으로 착각하여 가볍게 골려줄 생각으로 컵케이크를 던졌다고 한다.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듣는 모습을 옆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메리아는 이미 이전부터 사용인들에게 무례한 행동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몇 차례 훈육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완전히 습관이 고쳐지지 않은 것을 보니 호락호락한 아가씨가 아닌 것이 틀림 없다.
솔직히 말해 이 앙칼진 컵케이크 투척범에게서 반성의 기미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혼쭐이 나서 풀이 죽은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냥 얄밉지만은 않았다. 가까운 곳에서 자세히 본 소녀의 피부는 어머니를 닮아 새하얬고, 젖살이 통통한 양볼은 부드러운 빵처럼 부풀어 있었다. 무엇보다 달콤한 금색 눈동자가 햇살을 받은 저택의 세피아 빛 벽지에 잘 어울렸다. 첫만남이 과격하긴 했지만, 누가 보아도 사랑스러울 만큼 귀여운 아가씨다.
한참을 우물쭈물대던 소녀가 산크레드에게 펼친 손을 건넸다. 그 행동의 의미를 짐작한 산크레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허탈한 미소와 함께 꼬마 아가씨의 손을 맞잡아 악수했다.
“죄송합니댜.”
“이제 사용인들 괴롭히지 마.”
“응.”
“나 참. 아직 라비린토스의 절반도 둘러보지도 못 했는데, 네 덕분에 기운이 쏙 빠졌네.”
“여기 온 거 처음이냥?”
“아아, 올드 샬레이안에 온 지도 며칠 안 지났거든.”
산크레드가 내뱉은 별 의미 없는 혼잣말에 메리아의 눈빛이 번뜩하고 빛을 냈다. 소녀의 시무룩하던 얼굴에는 이제 호기심과 장난스러움이 한가득 차올랐다. 활짝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점점 밝아지는 아이의 표정과 달리 산크레드의 얼굴은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샨……, 섬 밖에서 온 샤람이냥?”
“산크레드.”
“응응, 샨크레드. 바깥 세샹에서 왔어냥?”
“뭐, 그렇지.”
그 대답에 메리아가 고개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예상했다는듯, 흥미가 돋는듯 눈을 빛내며 거의 밀치듯이 산크레드에게 달려들었다.
“얘기 들려줘!”
“깜짝아……. 뭐야? 무슨 얘기?”
“바깥 세샹 얘기! 들려줘! 어떤 곳에서 왔어 냐?”
산크레드는 다짜고짜 소리를 치는 메리아를 멀뚱멀뚱 쳐다본다. 기대감으로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빛을 보니 짧은 대답으로는 아가씨의 호기심이 쉽게 충족될 것 같지 않다. 어쩐지 막막한 기분도 들었지만, 그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성실하게 대답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자신은 림사 로민사에서 꽤나 이름을 날린 말썽쟁이이지 않은가. 지하 조직에서 활동하며 도시의 다양한 면면들을 눈에 담아왔다고 그는 스스로 자부할 수 있었다.
열 다섯의 산크레드가 짧고 긴 이야기의 운을 떼었다. 그의 첫마디는 머지 않은 미래에 노래될 빛나는 영웅담의 시작점이었다.
“어디 보자, 어떤 얘기를 들려줄까…….”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