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sage
오페라의 유령 - 에릭 드림 / 1만 자
힘차게 이어지던 뱃노래가 이제는 다 끝나 간다. 불안과 공포를 몰아내기 위해 시작한 노래였으나 그 즈음 에르위나는 자신감을 거의 되찾은 상태였다. 유령을 묶은 매듭은 세상 무엇보다도 튼튼하다. 그가 아무리 힘세고 난폭하다고 한들 제 머리통 만한 그녀의 밧줄을 단번에 조각내지는 못할 것이다. 축 늘어진 유령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책상에 걸터앉은 에르위나는 스스로를 달래며 노래를 마무리한다. 지배인실은 여전히 어둡고 캄캄하다. 곁에 둔 등잔의 빛이 아니었더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었을 거다. 잠시 한눈을 팔 여유가 생겼는지, 멈출 듯하다가도 계속해 이어지는 멜로디를 흘려 보내며 에르위나는 괜히 주변을 한 번 둘러본다. 유령은 아직 잠들어 있다…… 아니.
차츰 잦아들던 에르위나의 목소리가 부자연스러운 리듬으로 뚝 끊긴다. 방금까지도 눈을 감고 엎어져 있던 유령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에르위나는 숨을 멈춘다. 붕대에 가려지지 않은 유령의 한쪽 눈이 노란빛으로 흉흉하게 번들거린다. 분명 결박당해 몸을 꼼짝할 수 없는데도 그는 압도적인 기세로 공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초죽음 상태였던 그 사람은 대체 어디로 갔지? 밀랍을 녹여 만든 것처럼 흔들림 없는 형상이 저를 응시하고 있다. 어쩌면 일부러 잡혀 준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에르위나가 멈추었던 숨을 다시 한 번 들이켠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온몸이 마구 경련하기 시작한다.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처럼 눈앞이 하얗게 떠오른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그녀는 억지로 호흡을 내리누른다. 아무래도 처음 순간 그의 심장을 칼로 찔렀어야 했던 것 같다는 후회와 함께, 에르위나는 단도를 넣어 둔 주머니의 위치를 간신히 더듬어 확인한다.
유령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에르위나를 바라볼 뿐이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그가 가장 처음 떠올린 생각은 에르위나의 노래를 더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낯설고 불규칙한 템포, 힘 있게 밀고 나아가는 진행이나 무엇보다도 노랫말을 보아하니 이 음악은 뱃사람의 그것이 틀림없는데. 짐작할 뿐 유령은 겁에 질린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애초에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분명 죽음을 기대하며 차가운 지하로 돌아갔었건만, 비록 두 팔이 자유롭지 못한 처지라고는 해도 그는 지금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납득할 수 없는 전개에 머리가 빙글빙글 돈다. 넝마나 다름없는 육체의 곳곳 마디마다 비명을 질러 대는 것 같다. 흐릿하던 시야의 초점이 온전히 잡히고, 마침내 상황을 파악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한참 혼란스러워하던 유령은 제 얼굴을 감싸고 있는 흰 천의 존재를 뒤늦게 감지한다. 그렇다면 눈앞의 저 여자는 이미 그의 맨얼굴을 목격했음이 분명하다. 좀 전까지 뱃노래를 부르고 있기는 했지만 망토 아래로 비싸 보이는 옷가지를 걸치고 있는 것을 보면 귀족 혈통인 것까지도 틀림없는데, 거기까지 알아챈 다음이면 유령은 더더욱 에르위나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녀는 왜 아직 도망치지 않고 제 곁을 지키고 있는가? 유령은 그제서야 시선을 주변으로 돌린다. 뻐근한 팔을 겨우 올려다보면, 그의 두 손이 다 가려질 정도로 커다랗게 엉켜 있는 매듭이 보인다. 아하. 이만큼 약해빠진 유령은 상대할 자신 있으시다는 거였군. 그의 입가가 신경질적인 웃음으로 비틀린다. 이대로 끌려가 구경거리가 되거나 혹은 바라던 대로 죽임을 당하거나, 결국 둘 중 하나겠지만 여기까지 와서도 순순히 당해 주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치밀어오르던 분노는 금세 가라앉는다. 어차피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유령이 체념과 조롱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연다.
―그래서, 고매하신 귀족 아가씨의 은밀한 취향은 이런 거요?
에르위나는 그의 비아냥을 듣자마자 직감한다. 눈앞의 이 남자가 바로 제가 아는 유령이라는 것을. 동시에 에르위나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이런 자가 그토록 아름다운 오페라를 만들었다는 거지? 그녀는 아직 돈 주앙의 객석에서 느꼈던 전율을 잊지 못했다.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음악과 연출 모두 빼놓을 것 하나 없이 훌륭한 공연이었다. 그런 극을 무대에 다시 올릴 수만 있다면, 가르니에를 부흥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터.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몸을 온통 에워싸고 있던 공포심이 눈 녹듯 사라져버리는 것만 같다. 이제야 숨 쉬기가 조금 편해진 듯하다. 여전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에르위나는 유령에게 대꾸할 말을 고른다. 그를 화나게 만들지 않되 적절히 자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의 안에 음악을 향한 열정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면 유령과 공생하는 것도 어쩜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테니까. 괜한 보복을 시도했다가 그를 놓쳐 앙갚음당하는 미래보다야 그편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이 협상은 모두를 위한 일인 셈이다.
―안타깝지만 내가 관심 있는 건, 무슈가 아니라 무슈의 음악인데요.
유령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다. 에르위나는 움찔, 몸을 떨면서도 할 말을 꿋꿋이 이어 간다. 무슈가 누워 있는 여기가 어딘지는 잘 알 거라고 믿어요, 그새 인테리어가 좀 바뀌긴 했어도요. 카르티에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겠죠…… 불편한 자세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던 유령이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는다. 날카로운 눈길이 드넓은 방 안을 훑고 지나간다. 에르위나의 말대로 그에게 이곳 지배인실은 더없이 익숙한 구조다. 이 여자가 새로운 극장주라도 된 거라면 가르니에도 이제 가망이 없군. 그가 속으로 조소한다. 참을성 없는 유령은 그녀가 말을 끝맺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나를 고용이라도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들리는군. 안됐소만 충견 노릇은 이제 지긋지긋하오.
―무슈가 원하는 뭐든지 줄게요.
에르위나가 재빨리 말꼬리를 물고 따라붙는다. 뭐든지라는 말에 유령이 눈가를 찌푸린다. 이렇게 위엄 없는 극장주라니, 그녀는 저를 설득하기 위해 거의 절박해 보일 지경이다. 에르위나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말을 쏟아낸다. 가르니에를 위해 일해 줘요. 그저 한 가지 약속만 지킨다면 나머지 일은 얼마든지 마음대로 해도 좋아요. 월급은 물론 필요한 악기나 소모품이 있다면 전부 지원할게요. 지하에 숨어 살지 않아도 돼요, 내가 거처를 마련해 줄 테니. 품위 유지비도 함께 지급하죠. 그 말을 듣는 동안 유령의 눈길이 서늘해진다. 그녀에게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하고많은 인재들 중 굳이 힘을 들여 저를 채용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지만 유령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죽음을 각오했던 만큼, 이보다 더 엉망일 수 없는 상태로 결박당한 지금. 이토록 어리숙한 지배인이라면 오히려 기회인지도 모른다.
―급여는?
―3만 프랑. 대신 당장은 못 줘요. 사업이 잘 되면 그 때 한꺼번에.
―날더러 그 소릴 믿으라는 거요?
―손해볼 거 없잖아요.
무슈를 살려낸 게 나인데, 그걸로는 믿을 수 없겠어요? 그 말에 입을 꽉 다문 유령이 에르위나를 노려본다. 꿰뚫는 듯한 시선에도 더는 움츠러들지 않고,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내가 원하는 조건은 딱 하나예요. 유령은 어디 들어나 보자는 듯 에르위나를 응시한다. 숨을 고르며 질끈 감은 그녀의 눈앞으로 공중에 매달린 시체의 잔상이 끔찍하게 스쳐 간다. 더는 이곳에서 어떤 죽음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카르티에가 가르니에를 인수한 이상 더욱이 그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됐다. 그녀가 결연한 목소리로 외친다.
―프랑스의 법을 어기지 말 것.
유령이 코웃음친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처럼 굴다가도, 그는 예상 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준다. 그런 것쯤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애초 그녀의 말을 따를 생각이 없기도 했다. 제게 와 음악을 달라니, 이 건방진 귀족 아가씨는 스스로 무엇을 요구하는지조차도 모르는 채 뻗대고 있었다. 그러나 조건을 들은 이상 유령은 사양할 마음 따위 없다. 그토록 원한다면 주지 못할 것도 없지.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라면 아무렇게나 갈겨 쓴 곡으로도 충분할 테니까.
―그래서, 이 불쌍한 유령을 언제까지 묶어 둘 심산이신지.
에르위나는 숨을 참고 걸음을 옮긴다. 한 발짝 가까워질수록 그의 형형한 눈동자가 더욱 선명한 노란빛으로 빛난다. 팔을 한껏 뻗은 에르위나가 거대한 매듭의 끄트머리를 그러쥔다. 복잡하게 엉켜 있던 밧줄이 그녀의 손끝에서 차근히 풀려나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수월할 줄 알았더라면 매듭을 조금만 작게 만들 걸 그랬지, 에르위나는 찌를 듯한 눈길로 저를 바라보는 유령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서둘러 손을 놀린다. 머잖아 붉은 카페트 위로 구불구불한 밧줄이 한가득 쌓인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유령이 발갛게 자국이 남은 손목을 매만진다. 에르위나는 그에게서 도로 멀찍이 떨어진다. 우물쭈물하던 그녀가 말한다. 우선 몸을 회복해야 할 테니 좀 쉬어야겠네요. 이틀 후 자정에 여기서 다시 만나요. 제대로 된 사업 이야기는 그때 시작하죠. 몇 걸음 더 뒤로 물러나며 에르위나가 눈을 굴린다. 이제 그만 여기서 나가고 싶은데, 먼저 등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고민하는 사이 유령이 느릿느릿 걸어 그녀에게 다가온다. 차마 고개를 옆으로 돌리지 못하고, 에르위나는 다시 허리춤에 찬 단도에 손을 뻗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선 유령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할 뿐이다. 망설이던 에르위나가 장갑 낀 손을 그에게 마주 내민다. 가벼운 옷감 너머로 희미한 온기가 닿는다. 짧은 악수가 끝나고, 유령은 미련 없이 뒤돌아 문 밖으로 사라진다. 에르위나는 그제야 제자리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는다. 방금까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잘 실감할 수 없었다. 다만 유령의 억센 손아귀에 잠시 붙들렸던 통증만이 선명하다. 에르위나는 힘없이 늘어지려는 몸을 억지로 추슬러 일어난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
유령은 매번 제시간에 나타났다. 대부분의 경우 악보 뭉치와 극본을 들고, 때로는 그저 훈수를 두기 위해 빈손으로. 유령을 마주 보기 껄끄러워하면서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에르위나는 내심 그의 오페라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분명 제가 써냈던 어설픈 극본 따위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테지. 유령의 지시와 그녀의 지휘 아래 무대는 아무런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최종 리허설이 끝나고 비로소 본 공연의 막이 오르는 순간부터, 커튼 뒤에 숨어 에르위나는 성공을 직감했다. 첫 실패 이후 잠잠하던 가르니에가 다시 문을 열었다는 소문을 듣고 구름떼처럼 몰려온 기자들의 인심도 갈수록 후해졌다. 의구심으로 가득 찼던 지면의 문장들은 어느새 가르니에를 향한 찬사로 바뀌어 간다. 텅텅 비었던 객석이 날마다 인파로 차오르고 있었다.
어느덧 마지막 공연까지 단 일주일. 남은 회차는 모두 매진이다. 카르티에로부터 이번 시즌을 별탈 없이 마무리한다면 정식으로 후원을 시작하겠다는 약속도 받아냈겠다, 한창 물이 들어오고 있을 때 슬슬 다음 작품의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하에 에르위나는 다시 한 번 유령을 불러낸다. 그에게 건네어 줄 몇 달치의 밀린 급여를 준비한 뒤였다. 약속 시간은 어김없이 자정이다. 아직 십여 분의 여유가 남았지만 그가 언제 문을 두드릴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허리를 바짝 세우고 앉은 채 에르위나는 문간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아직까지는 전부 순조로웠다. 하지만 진짜 사업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유령의 도움이 없다면 모든 게 물거품으로 돌아갈 테지만.
그러고 보면 그는 본래 어떤 일을 하던 사람일까. 문득 에르위나는 동업자에 대해 가진 정보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주제에 그와 한배를 타려는 건 너무 무모한 일인 걸까, 그러나 유령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기는 해도 그는 피와 살을 가진 진짜 인간이다. 그렇다면 그에게도 분명 지나 온 과거가 있을 텐데. 세간에 밝혀진 사실이라곤 그가 납치와 협박을 일삼는 신출귀몰한 살인귀라는 것 그리고 크리스틴이라는 프리마돈나와 긴밀한 관계였다는 것뿐이다. 그마저도 팔할은 사람들이 멋대로 부풀린 낭설이었다. 에르위나는 그가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도 지하의 유령으로 살아가는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때 거친 노크 소리가 들린다. 이런저런 공상으로 멍하니 앉아 있던 에르위나가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르게 고친다. 유령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법이 없다. 문이 벌컥 열리고, 그가 들어온다. 에르위나는 기계적인 미소를 입가에 걸친다.
―어서 와요, 무슈.
―본론부터 말하시오.
―다음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그 전에 이것부터 받아요. 에르위나는 빳빳한 지폐 뭉치가 담긴 봉투를 탁상 위로 밀어 둔다. 그녀의 맞은편에 아무렇게나 앉은 유령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그것을 집어들었다가, 이내 만족스런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성의를 좀 보이는군. 에르위나는 애써 웃는 낯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유령은 봉투를 품속에 챙겨 넣으며 뜸을 들이다가도, 머잖아 다음 작품의 기획을 술술 풀어내기 시작한다. 컨셉이며 테마, 구성까지 막힘 없이 늘어놓는 그의 얼굴을 에르위나가 멍하니 올려다 본다. 준비할 시간을 따로 준 것도 아닌데 이 정도까지 해내는 걸 보아하니 과연 천재는 천재인가. 대체 이곳으로 흘러들기 전에는 어디서 뭘 하면서 살았던 거냐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의문 가득한 눈초리로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에르위나의 집요한 시선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던 유령이 결국 말을 멈춘다. 그가 저를 마주 노려보자 당황한 에르위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왜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소, 들을 생각도 없는 것 같으니.
상연 마지막 날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 유령은 한 마디 통보와 함께 사라진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에르위나는 뒤늦게 자책한다. 뭐가 어쨌든 그와는 비즈니스로 얽힌 사이다. 기껏 고용주가 되어 놓고도 사적인 호기심에 휘둘려 일을 망칠 뻔하다니, 그나마도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었다. 지레 겁먹고 대꾸하지 못한 게 아쉽기는 하지만……. 남은 정리를 마치고 그녀는 지배인실의 간이 침대에 몸을 누인다. 남은 기간도 정신 없이 보내야 하니 이편이 더 효율적이었다.
에르위나의 예상대로 마지막 일주일은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얼마나 바빴는지 마지막 공연을 준비하면서는 드디어 하나의 시즌이 끝났다는 사실에 차라리 감사할 지경이었다. 극장 건물을 둘러쌀 정도로 길게 늘어진 매표소의 대기줄 때문에 그녀는 오페라하우스의 오픈 시간을 이십 분이나 앞당겨야 했다.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용수와 가수들이 싫은 내색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간 공연은 순조롭게 막을 올렸다. 붉은 휘장이 미끄러지듯 걷히고,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퍼진다. 화려한 무대 장치를 자유롭게 누비는 배우들이 극장의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마침내 피날레에는 관객 전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야말로 성공적인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끄트머리 박스석에서 커튼콜을 지켜보던 에르위나는 먼저 객석을 빠져나온다. 지금껏 고생한 모두를 위해 파티를 준비해 주려는 계획이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간단히 건배만, 제대로 된 축하는 다음날 해도 늦지 않겠지. 어떤 샴페인을 고르는 게 좋을까. 그녀는 가볍게 걸어 지배인실로 향한다. 이제야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다. 에르위나가 콧노래를 부르며 문고리를 잡아 돌린다. 방안은 온통 어둡다. 그런데 저 불빛은 뭐지, 아까 램프를 켜 놓고 나갔었던가? 의아한 채 고개를 들면, 한 쌍의 노란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소름 끼치도록 흉흉한 빛으로 번쩍이고 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에르위나가 그대로 주저앉는다.
등 뒤에서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힌다. 불 꺼진 등잔을 움켜쥔 유령이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온다. 그의 손에는 다 녹아내린 촛농이 하얗게 쌓여 있다. 여기서 오래 기다린 걸까, 그렇다면 공연을 끝까지 보지도 않았다는 뜻인데. 평소에는 얼굴을 절반쯤 뒤덮는 가면에 가려 온전히 드러나지 않던 유령의 안광이 오늘따라 유독 선명히 번들거린다. 에르위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애쓰며 손에 쥔 촛불을 멀찍이 밀어뜨려 놓는다. 카페트에 불이 붙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얼굴을 그녀의 코앞에 들이민 유령은 혼자서 씨근대고 있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었길래 이러는지. 에르위나는 짐승의 그것처럼 환하게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 앞에 못 박힌 듯 몸을 움츠리고 떨고 있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유령의 낯이 거친 들숨을 따라 움찔거린다. 졸도하기 직전의 그녀를 뼈째 씹어먹을 듯한 기세로 한참이나 노려보던 유령이 기어코 입을 열었다.
―모든 게 믿을 수 없이 엉망이오!
그래도 마지막 공연이라 일말의 발전이나마 기대했건만, 첫날에 비해 조금도 나아진 게 없더군. 막을 전환하는 타이밍이 계속 늦어지고 있잖소.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멍청한 자세로 굳어 있는 게 내 눈에만 보이는 건 아닐 텐데 말이오. 게다가 그 갈색 머리 가수는 왜 자꾸 병든 칠면조 같은 소리를 내는 거요? 이 가르니에를 위해 일할 만한 인재가 그리도 없나? 이런 오페라를 돈 받고 상연하다니 수치스러울 지경이군. 상황이 이런데도 축배를 들 생각이나 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소. 유령은 거의 울분을 쏟아내고 있다. 우렁차게 고함을 질러 대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에르위나는 머리가 다 지끈거린다. 그는 마치 장난감을 빼앗긴 다섯 살짜리 어린애처럼 굴고 있었다. 모든 게 엉망이라고,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그 까탈스러운 기자들이 하나같이 거짓말이라도 해 줬단 말인가? 솔직히 말해 완벽한 공연은 아니었겠지만, 이쯤 되면 에르위나도 할 말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건 무슈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본데, 무슈가 내게 줬던 곡이 대충 쓴 거라는 사실은 그 난잡한 필체만 봐도 알겠던 걸요. 기세를 되찾은 에르위나가 바닥을 짚고 간신히 일어나 선다. 이번에는 그녀가 유령에게 한 발짝 다가간다. 떨리는 손에 쥔 촛불이 한껏 일그러진 유령의 얼굴을 가까이 비춘다. 우리는 분명히 거래를 했잖아요, 그렇죠? 나는 불량품은 필요 없어요. 대가를 약속받았다면 적어도 성의껏 일하도록 하세요. 에르위나는 더 할 말 없다는 듯 눈에 힘을 주고 유령을 쏘아본다. 그녀가 되받아칠 줄은 몰랐는지 잠시 당황하던 유령은 기가 찬다는 듯 마른세수를 한다. 그녀를 얕잡아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런 만큼 이 애송이가 제게 대들 거라는 기대는 더더욱 해본 적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지금도 어깨를 떨고 있다. 두려움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이럴 수 있다고? 한동안 말이 없던 유령이 다시 고개를 들고 에르위나를 노려본다. 이렇게 된 이상 먼저 물러날 수는 없었다. 한참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거칠게 씹어뱉는다.
―다음 공연은 계절이 바뀐 뒤에나 올릴 수 있을 거요.
알다시피 좋은 작품을 위해서는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하니까. 그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털어낸다. 흔적만 남은 양초가 촛대와 함께 바닥에 구르고, 그의 손을 껍데기처럼 뒤덮고 있던 촛농들이 한꺼번에 부서져 떨어진다. 그리고 유령은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떠난다. 지축을 뒤흔들 정도로 거센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다.
홀로 남은 에르위나는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듯한 기분이다. 샴페인이고 파티고, 그런 한가로운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제야 막 생기를 되찾아 가는 극장을 몇 달씩 비워 둘 수는 없다. 어떻게 하면 저 유령을 휘어잡을 수 있을까. 그만큼 난폭하고 무례한 태도는 쉽게 고칠 수도 없을 거다. 방금까지도 마주하고 있던 그의 창백한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어서 떨쳐내고 싶은 기억이건만 도무지 쉬울 것 같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오늘 밤도 유령 생각으로 지새우게 생겼군, 에르위나가 한숨을 내쉰다. 그녀가 손에 든 촛불은 아직도 흔들리며 타오르고 있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고민하던 에르위나는 결국 오늘도 지배인실의 간이 침대에 몸을 누인다. 가족들이 보고 싶었지만 당장은 로비까지 걸어 내려갈 힘조차 없었다. 가는 길에 유령을 다시 마주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에르위나는 탁상에 올려놓은 촛불을 가볍게 불어 끈다. 회잿빛 연기가 어둠 속에서 길다랗게 피어오른다. 그녀가 어둠 속에서 눈을 감는다. 어쩐지 유령의 그 노란 안광이 아직도 제게 향해 있는 것만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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