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해언
왕이 병상에 누운 지 사흘이 지났다. 사냥을 나섰다가 곰을 마주쳤다고 했던가, 그와 함께했던 정예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러나 그 소식을 들으며 멜레아강은 앞뒤 상황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왕은 개나 양을 비롯한 짐승들이 그에게 으레 순하게 굴었듯 곰이라고 해서 다를 것 없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깊은 숲속에서도 홀로 마음을 놓고 방심
모처럼 시내 나들이에 신이 난 앤은 피앙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나룻배에서 훌쩍 뛰어내린다. 새로 갖춰 입은 드레스의 치맛자락이 산뜻하게 휘날린다. 앤은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혼자서 외출하는 건 그만큼 흔치 않은 일이었다. 처음부터 지상으로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야 기분이 안 나니까. 기왕이면 배를 타고 나오는 편이 더 근사하기도 하고.
해가 저물기 시작한 늦은 오후, 어머니의 일터에 함께 도착한 에밀리아는 빗물에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마차에서 내린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저도 몰래 마른침을 삼킨다. 여름 장마철인데도 한겨울만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검은 아나벨라’는 특유의 형용할 수 없는 불온함으로 순식간에 사람을 압도한다. 이제 겨우 열 살 남짓 된 에밀리아의 눈
황혼녘,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서 눈을 뜬 여자는 자신이 이곳에 누워 있게 된 경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삐걱대는 몸을 간신히 추슬러 고개를 들면 커다란 나무에 처박혀 새까만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는 자동차가 보인다. 그 너머로는 그저 끝없는 초록뿐인 것을 보아하니 사람이 오가는 도롯가에서는 한참 멀어진 게 분명하다. 온몸에서 매캐한 냄새가 난다. 빽빽이 솟아
머리가 아프다. 목소리가 들린다.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며 어두운 충동을 부추기는 낯익은 음성.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선잠에서 깨어난 흰토끼는 참았던 숨을 겨우 몰아쉰다. 시야 바깥에서 어스름하게 밝아 오는 새벽하늘은 언뜻 물 탄 핏빛 같기도 하다. 사방이 고요하다. 다시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네. 흰토끼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다. 곁에 아직 잠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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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에리는 작은 친구에게 손을 내밀어 그가 마차에서 안전히 내릴 수 있도록 한다. 화가로서 그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방문인 만큼, 살롱에 발을 들이며 그는 제법 긴장한 것도 같다. 시종이 그들의 도착을 알리면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활동의 시작이다.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한 살롱의 문 너머에는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저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늘어져 다과를 즐기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봄밤 내리는 부슬비에 젖어든 옷자락을 알아채듯이. 에릭은 문득 그의 연인이 베풀고 있는 사랑의 크기를 감히 짐작할 수 있다. 매번 숨 쉬듯 당연스레 받아들이고 있던 것들이 실은 얼마나 무거운 증명이었는지. 에릭은 약지에 자리잡고 있는 반지를 가만히 어루만진다. 내리깔린 그의 시선이 품속에 곤히 잠들어 있는 앤에게로 옮겨 간다. 세상모르고
거친 콘크리트의 질감이 등을 사납게 친다. 머리를 부딪힌 것은 아닌데도 뒷골이 서늘하게 당겼다. 장기철이 틀어쥔 목깃 아래가 답답하다. 사람 뒤나 캐고 다니는 주제에 뭐가 이리 당당해? 코너에 몰렸지만 강혜린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몇 대 더 맞아 주다가 상황을 봐서 반격하면 그뿐, 아무래도 피할 이유가 없다. 강혜린이 바라보는 것은 장기철의 눈이다.
몇 차례 노크에도 응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 시간이면 자리에 있을 법도 한데, 그새 또 밖으로 나간 걸까. 잠시 고민하던 한스는 조용히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업무에 집중했을 때의 콜린은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바쁜 사람을 방해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잠깐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새로 쓴 원고
힘차게 이어지던 뱃노래가 이제는 다 끝나 간다. 불안과 공포를 몰아내기 위해 시작한 노래였으나 그 즈음 에르위나는 자신감을 거의 되찾은 상태였다. 유령을 묶은 매듭은 세상 무엇보다도 튼튼하다. 그가 아무리 힘세고 난폭하다고 한들 제 머리통 만한 그녀의 밧줄을 단번에 조각내지는 못할 것이다. 축 늘어진 유령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책상에 걸터앉은 에르위나는 스스
한참 추격전 끝에 광장 한복판까지 내몰린 빌런이 가쁜 숨을 몰아쉰다. 그를 뒤쫓느라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린 레이가 품속에서 주저 없이 권총을 꺼내들어 위협사격했다. 진작 이랬어야 하는데 쓸데없이 힘을 뺐다는 생각이다. 난데없는 총성에 거리를 오가던 시민들이 비명을 지른다. 이대로라면 정말 잡혀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주변을 마구 두리번거리던 빌런이 곁
“지금까지 클럽 드바이의 보컬, 구본하였습니다.” 조명은 꺼졌고, 공연도 끝났다. 무대에서 내려온 구본하는 등에 기타를 둘러멘다. 물을 충분히 마셨는데도 목이 탔다. 구본하는 괜히 헛기침을 몇 번 한다. 그리고 삐걱대는 클럽 계단을 끝까지 올라간다. 제법 묵직해 보이던 철문은 아무런 저항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바깥은 아직 어스름이 깔린 새벽인데도 공기
아직 땅이 마르지 않았다. 오래된 어항의 그것처럼 비린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사방이 음습한 물기로 가득해 황망한 걸음은 자꾸만 미끄러진다. 한 발짝 뗄 때마다 철퍽대는 소리가 났다. 저녁 내내 퍼붓던 비가 겨우 그친 참이었다. 제롬은 머리를 숨길 우산조차 없이 폭우를 뚫고 걸어 여기까지 왔다. 지금이 한밤중인 줄도 모르고 달려왔다. 간신히 사울의 거처 앞에
앤을 잃었을 때, 에릭은 이미 한 번 죽었다. 그는 연인의 마지막 숨이 흩어지던 순간에 제 호흡 역시 남김없이 소진되어버렸음을 알았다. 구차한 삶을 연명하도록 그를 돕는 것은 여전히 불멸하는 음악뿐이다. 사랑을 잃고도 살아남은 예술이 그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승에 붙들려 있는 것이 더 이상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노
그날은 비공식적인 휴일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미친 듯 비가 퍼부었다. 어지간한 날씨였다면 일정은 당연스레 강행되었겠으나, 함께 밀어닥친 돌풍 탓에 곳곳의 창문이 박살나고 더러는 사람이 차도로 떠밀려 내려가기도 했으므로 모처럼 종일 내근이 결정되었다. 출장 없는 날이라니 휴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날만큼은 모두,가 위에 계신 분에게 내심 은밀한 감사를 올렸을
쏘―냐. 말끝을 늘어뜨리는 그 특유의 어조가 귓가에 껌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를 않는다. 그를 보지 못한 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하필 목소리만큼은 왜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지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고개 숙인 쏘냐의 얼굴 위로 갈색 곱슬머리가 쏟아져 그늘을 드리웠다. 차갑게 식은 발코니의 난간이 화를 삭이느라 열 오른 피부를 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