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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Mid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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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기 시작한 늦은 오후, 어머니의 일터에 함께 도착한 에밀리아는 빗물에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마차에서 내린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저도 몰래 마른침을 삼킨다. 여름 장마철인데도 한겨울만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검은 아나벨라’는 특유의 형용할 수 없는 불온함으로 순식간에 사람을 압도한다. 이제 겨우 열 살 남짓 된 에밀리아의 눈에 저택은 폐가나 다름없는 모습이다. 정말 이런 데 사람이 사느냐고 묻고 싶건만, 사용인이 언제 마중을 나올지 모르는 일이니만큼 에밀리아는 애써 입을 다문다. 그렇잖아도 불청객으로 따라온 입장인 와중 어머니에게 더 폐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그 역시도 조금쯤 긴장한 것처럼 보인다면 기분 탓인 걸까.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이라던 설명 같은 것은 진작 잊어버린 에밀리아가 겁먹은 기색으로 어머니의 손을 힘주어 잡는다. 분명 정식으로 초대를 받아 온 손님인데, 어쩐지 주눅이 드는 기분이다. 그러나 그들이 타고 온 마차는 진작 떠난 지 오래다. 벌써부터 괜히 걱정하지 말자. 필사적으로 되뇌이며 에밀리아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저택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부지는 그 이름에 걸맞도록 전부가 검정 일색이다.

지역의 초입에 들어설 때부터 줄창 내리던 비가 공기를 온통 눅눅하고 습하게 만들어, 짙은 안개가 드리운 주변은 기껏 새로 마련한 램프로도 온전히 다 밝혀지지 않는다. 단단히 받쳐 든 우산 바깥으로 엿보이는 사방 모든 곳이 온통 살풍경하다. 눈에 힘을 주고 집중하면, 희부연 대기 사이로 검은 아나벨라의 고아한 윤곽이 점차 드러난다.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며 차례로 점등되기 시작하는 저택 내부의 샛노란 불빛에도 불구, 주변은 여전히 음습한 기운을 물씬 뿜어내고 있어 에밀리아의 검은 아나벨라에 대한 첫인상을 떨쳐내기는 어려울 듯하다. 땅거미와 함께 길어지는 나무그늘로 얼룩진 앞뜰에는 그 흔한 장미꽃 한 송이 보이지 않는다. 손을 뻗어 만지면 축축한 물기가 묻어날 것만 같은 벽돌담 틈바귀는 검붉은 담쟁이가 한껏 빽빽하게 자라나 뒤덮었고, 이름모를 가시덤불도 심심찮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높다랗게 치솟은 지붕 위에 올라앉은 까마귀 몇 마리가 열심히 깃털을 고르며 시끄럽게 수선을 떤다. 그 날카로운 울음소리에 놀란 에밀리아가 어깨를 움츠리는 찰나. 저택의 대문이 까마귀의 그것보다도 소름 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열린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셨네요.”

오딘입니다. 연락 드렸던 조율사 님 맞으시죠? 비가 많이 오니까, 어서 들어오세요.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사용인이 에밀리아의 어머니에게서 우산을 받아들며 그들을 환영한다. 옆에 꼬마 숙녀도 계시네요?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어머니가 오딘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동안, 에밀리아는 그의 등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눈앞의 남자를 몰래 관찰한다. 집에 딸을 홀로 남겨둘 수 없어 불가피하게 동행했다는 어머니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간간이 제게 눈을 맞춰 오는 남자는 다행스럽게도 어린 불청객을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다. 꼭 흰토끼를 닮았네. 에밀리아가 무심코 생각한다. 그의 왼눈은 안대에 가려진 채였지만 반대편 드러난 붉은 눈동자가 보석처럼 깊이 빛나고 있었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조율을 마칠 동안만 아이가 저택에 머물러도 되겠느냐는 질문에 오딘은 생각보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주인에게도 잘 설명하겠다며 에밀리아의 어머니를 안심시킨 그가 일행을 안내하기 시작한다. 에밀리아는 애써 씩씩하게 고개를 들고 걸음을 옮긴다. 기껏 허락도 받았으니, 기다리는 동안 작곡 노트를 좀 손볼 생각이었다. 어머니를 대신해 에밀리아가 들고 있던 램프는 오딘이 넘겨받아 챙긴다. 뒤이어 대문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등뒤에 묵직하게 떨어진다.

저택의 문턱을 넘으면 으스스한 기분도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검은 아나벨라는 바깥보다도 그 내부가 더 고풍스러운 모습이었다. 장맛비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기묘한 한기는 실내에서도 한결같다. 어머니의 손을 꼭 붙든 에밀리아는 오딘을 따라 푸른 카펫이 깔린 복도를 한참 걷는다. 짙은색 벽지에 아로새겨진 무늬가 줄지어 걸려 있는 촛대의 불빛을 머금고 은은하게 빛난다. 길목마다 드문드문 자리한 금빛 화려한 액자는 어룽지는 그림자 탓에 누구의 얼굴을 그려넣은 것인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온 집안이 침묵으로 고요한 가운데, 저택을 가로지르는 세 사람의 발소리만이 복도에 나직이 울린다. 야트막한 계단을 두 번, 그보다 더 긴 복도를 다시 두 번 지나 그들은 마침내 반투명한 유리문이 달린 응접실 앞에 도착한다. 모노톤의 공간 중앙을 차지한 테이블에 올라앉은 도자기 화병에는 다종다양한 흰색 꽃이 다발로 꽂혀 있다. 그토록 삭막한 정원에서가 아니라면 이것들은 다 어디서 난 걸까. 에밀리아는 괜한 고민을 한다. 그래도 보기에 예쁘니 아무래도 상관없으려나.

“꼬마 숙녀는 잠깐 여기서 기다릴까요?”

에밀리아는 오딘의 에스코트를 받아 커다란 소파 하나를 차지하고 앉는다. 고맙게도 오딘은 간단한 다과까지 챙겨 주고 사라졌지만, 어머니가 할일을 하러 떠나고 혼자서 동그마니 남겨진 에밀리아는 어쩐지 선뜻 쿠키에 손을 뻗을 수가 없다. 그는 땅에 채 닿지 않는 다리를 번갈아 흔들거린다. 이곳은 대저택의 응접실치고도 지나치게 넓은 감이 있었다. 남는 건 시간뿐인데, 무얼 하면 좋지. 품에 소중히 챙겨 온 작곡 노트의 온기가 에밀리아의 손안에 스민다. 그것을 펼치기 전 잠시 고개를 든 그는 주변을 다시 한 바퀴 살핀다. 꾸준히 관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말끔한 가구들에는 먼지 한 톨 없다. 그러고 보면 저편의 꽃다발도 오늘 아침에 새것으로 갈아놓은 듯 싱싱했다. 그 오딘이라는 남자가 했을까? 의외로 무서운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에밀리아는 조금씩 저택의 분위기에 적응해 가고 있다. 물결무늬 접시에 정갈하게 담긴 아몬드 사브레의 달콤함도 그의 긴장을 풀어주는 데에 큰 몫을 했다. 저택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특수함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에밀리아에게 외려 모종의 영감을 가져다 준다. 잠시 눈치를 살피던 그가 펜을 꺼내어 손에 쥔다. 사락, 펼쳐진 노트에는 이미 여러 개의 습작이 낙서처럼 서툰 형태로 그려져 있다. 손짓 몇 번으로 오선을 그려낸 다음이면 조약돌 같은 음표들이 차례로 그 위에 자리잡기 시작한다. 모처럼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에 들뜬 에밀리아가 머릿속에서 들려오기 시작하는 악상에 막 집중하려던 그때.

무언가 와장창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에밀리아에게 찾아들던 선율은 흔적도 없이 도망쳐 날아간다. 그것을 아쉬워할 틈도 없이, 뒤편에서 누군가 욕설을 짓씹으며 신경질적으로 걸어 나온다. 잔뜩 인상을 쓴 여자는 진회색 뒤통수를 아픈 듯 부여잡고 있다. 한껏 찡그린 푸른 눈동자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에밀리아를 일별한다. 동시에 에밀리아는 여자의 오른눈에 길게 남은 오래된 상흔을 발견한다. 무섭게 생긴 언니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에밀리아가 퍼뜩 정신을 차린다. 하지만 겁을 집어먹는 것보다는 걱정이 우선이다. 어쩌면 그가 다쳤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방금은 정말 엄청나게 큰 소리가 났으니까. 그러나 여자는 종종 걸어 제게로 다가오는 아이를 귀찮은 표정으로 흘끗 넘겨다보기만 할 뿐이다. 그 시선에는 조금의 친절도 담겨 있지 않다.

“얜 뭐야?”

에밀리아에게 눈길을 주는 것도 잠시, 그를 간단히 무시한 여자는 곧 응접실 바깥으로 향한다. 머리를 부딪힌 것 같은데 저렇게 걸어도 되나? 울상이 된 에밀리아가 여자를 급히 따라 나간다. 저기, 안 아파요? 괜찮아요? 아픈 것 같은데? 짧은 다리로 열심히 쫓아오며 재재거리는 에밀리아를 꼬리에 매단 채, 여자는 끝도 없이 펼쳐진 복도를 성큼성큼 지나 높은 계단을 오른다. 에밀리아는 포기하지 않고 그에게 달라붙는다. 사실 그를 놓쳤다가는 졸지에 미아가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했다. 아이, 좀 멈춰 보라니까요. 들은 척도 않고 미로 같은 저택을 종횡무진하던 여자가 도착한 곳은 삼 층 서재의 앞이다. 두꺼운 양장이 빼곡하게 꽂힌 책장들은 금방이라도 쏟아져내릴 것만 같은 기세로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빗물의 습기를 머금은 종이와 잉크의 냄새가 한층 진하게 풍긴다. 그 친숙한 향기에 에밀리아는 저도 모르게 조금 들뜬다. 그렇게 정신이 팔린 사이 여자는 그를 서재에 머물고 있던 인원들에게 떠넘긴다.

“이봐. 한가하면 애 좀 봐 주면 고맙겠는데요.”

“번 씨? 이 애가 누군데요?”

난들 아나. 성가시다는 듯 중얼거린 그는 바람처럼 모습을 감춘다. 오도 가도 못 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남겨진 에밀리아는 새롭게 나타난 두 명의 인물에게로 눈을 돌린다. 푸른 잿빛 곱슬머리, 분홍색이 섞여들어 묘한 컬러의 눈동자. 예쁜 언니다. 그리고 저쪽 창가에는…… 빨간 머리에 까만 눈, 음. 여기도 무서운 아저씨가 있네. 이 언니랑 친한가? 근데 좀 피곤해 보인다. 잠을 못 잤나. 멀뚱히 서 있던 에밀리아는 제 옆자리를 손짓하는 ‘예쁜 언니’의 부름에 따라 못이기는 척 걸음을 옮긴다. 그가 센스 좋게 에밀리아의 앞으로 밀어 주는 접시에는 아까 응접실에서 먹었던 것과 비슷한 생김의 쿠키가 쌓여 있다. 금세 경계를 풀고 그것을 집어먹는 에밀리아의 머리를 그가 살가운 미소 가득한 얼굴로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다. 나긋나긋한 음성이 에밀리아에게 묻는다.

“꼬마 아가씨는 이름이 뭐예요?”

“에밀리아요. 언니는요?”

“그냥 프림이라고 불러요.”

여긴 어쩌다 왔어요? 모처럼 낯선 방문객의 등장에 그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인다. 에밀리아는 우물대던 쿠키를 마저 삼키고 대답을 이어 간다. 엄마 따라서 왔어요. 피아노 조율하는 일을 하시거든요. 이 저택에 엄청 멋진 피아노가 있다던데, 정말이에요? 프림은 아, 이해했다는 듯한 탄성을 내뱉으며 에밀리아를 한 번 더 쓰다듬는다. 그럼요, 아덴베르크 씨가 그걸 연주해요. 그러니까 여기 집주인이요. 저만치 떨어져 퇴창에 기대어 앉은 ‘무서운 아저씨’ 노엘은 그들이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는 모습을 물끄럼 지켜본다. 어린애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역시 시끄러운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피아노에 관심 있는 걸 보아하니, 제 엄마를 따라서 음악에도 조예가 좀 있나? 어느덧 책을 덮어 내려놓은 그의 눈이 에밀리아를 가늠해 보며 미세하게 가늘어진다. 저 조그만 손으로 악기를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때마침 바이올린과 첼로의 서로 다른 매력에 관한 이야기로 신나게 조잘대던 에밀리아가 한참 늦은 자기소개를 시작한다.

“저도 음악을 좋아해요.”

작곡가가 꿈이에요! 선생님은 없지만 혼자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연습 노트도 있는데, 여기…… 어? 어디 갔지? 주머니를 뒤져 보지만 그런다고 사라진 노트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순식간에 울상이 되어 안절부절못하던 에밀리아는 결국 서재를 박차고 달려나간다. 프림이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뒤따른다. 내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던 노엘도 둘을 쫓아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허둥지둥 뛰어나간 에밀리아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노트를 찾는다. 올라오는 길목에 떨어뜨린 걸까 했지만, 복도는 처음과 같이 깨끗한 모습 그대로다. 끝내 에밀리아가 응접실 문을 낑낑대며 도로 열고 들어간다. 그러나 그가 처음 앉았던 자리도 말끔하기는 마찬가지다.

“노트가 어떻게 생겼는데요?”

프림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숨을 몰아쉬는 에밀리아를 차분히 달랜다. 애써 씩씩해지기로 마음먹은 그가 겨우 숨을 고른다. 그리고 소중한 노트의 생김을 설명한다. 연갈색 가죽 커버에, 오른쪽 아래 이니셜 E가 금빛으로 새겨져 있어요. 크기는 손바닥만하고……. 프림과 노엘은 응접실을 샅샅이 뒤지며 그것을 찾는다. 하지만 노트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온통 어두운 빛깔로 꾸며진 공간인 만큼, 그런 물건이 정말 여기에 있다면 금방 눈에 띄었을 터다. 그들은 울먹이는 아이의 눈치를 보느라 얼마쯤 응접실 구석구석을 더 헤집고 다니지만 그래 봤자 결론은 똑같다. 에밀리아의 노트는 이미 어딘가로 사라진 뒤다. 혹은 누군가 가져갔거나.

 

한껏 풀이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프림은 노엘과 함께 서재로 다시 돌아온다. 축 처진 에밀리아 몰래 곤란한 시선을 교환하던 그들이 베풀 수 있는 호의는 기껏해야 아이의 앞에 다과를 더 쌓아 주는 것뿐이다.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에밀리아는 얌전히 간식거리를 받아 먹는다. 이렇게 맛있는 걸 먹을 기회는 그렇게 흔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이것들은 모양까지 예뻤다. 혀끝에서 녹아내리는 단맛에 집중하고 있으면 어느새 슬픈 기분은 좀 날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앞으로 더 멋진 곡을 쓰면 되지.”

에밀리아를 지켜보던 노엘이 느릿느릿 한 마디 덧붙인다. 에밀리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후로는 그가 얼마나 큰 꿈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일장연설이 이어진다. 그것이 터무니없이 들릴 법도 하건만, 프림과 노엘은 성의껏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귀 기울인다. 나중에는 엄청 큰 홀에서 제 곡이 연주되면 좋겠어요! 흥분하며 펄쩍 뛰어오르는 에밀리아의 뒤로, 별안간 문이 덜컥 열린다. 예고 없이 나타난 것은 다름아닌 오딘이다.

"뭐야, 다 여기 있잖아?"

피아노 조율은 끝났는데, 비가 너무 심하게 와서. 그의 말대로 유리창 바깥에는 세찬 장대비가 줄기차게 퍼붓고 있다. 그렇잖아도 안개로 흐리던 풍경이 온통 쏟아지는 빗물에 형체도 없이 이지러진다. 집안 전체에 기묘하게 감도는 한기도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원에 꽃이 보이지 않는 것도 어쩌면 이곳 특유의 날씨 탓일 수 있겠다고, 에밀리아는 뒤늦게 짐작해 본다. 흙이 다 쓸려내려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지 몰랐다. 오딘은 창밖을 내다보느라 정신이 없는 에밀리아의 머리를 툭, 가볍게 쓰다듬는다. 마침 시간이 늦었으니 하루 머물고 가는 게 낫겠다고 하네요, 집주인께서. 어머니가 식당에서 기다리니 아가씨도 같이 가시죠. 에밀리아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오딘의 손을 덥석 잡는다. 참, 노트를 잃어버린 건 어머니한테 비밀이에요. 서재를 나서기 전 프림과 노엘에게 야무진 당부가 이어진다. 그들은 순순히 협조를 약속하고 걸음을 옮긴다.

 

붉은 톤을 덧입혀 꾸며 놓은 식당은 저택의 다른 장소와 마찬가지로 어두침침하다. 곳곳에 놓인 은촛대가 일렁이는 빛을 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실내를 모두 밝히기에 충분치 못하다. 더군다나 이런 날씨에라면야. 그럼에도 저택의 모두는 이런 풍경에 익숙한 듯하다. 어린 에밀리아만이 흐릿한 눈을 억지로 깜박이며 시야를 확보하려 애쓸 뿐이다. 그래도 이곳은 춥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아, 저기 어머니가 보인다. 에밀리아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진다. 하지만 그를 데리고 온 일행들은 어쩐지 조금 어색한 표정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저 사람 때문일까?

상석에는 검은 머리의 남자가 앉아 있다. 짙은 눈썹 아래로 푸른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난다. 흰 크라바트를 매듭지어 놓은 볼로타이에도 그의 눈을 닮은 캐보션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자의 입가에 걸린 기묘한 미소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는 듯도 하지만, 그의 고혹적인 낯을 계속 바라보고픈 욕심이 이유모를 찜찜함을 앞선다. 사람을 매료하는 동시에 주눅들게 만드는 아름다움은 이곳 저택의 외견이 품고 있는 그것과도 비슷하다. 그는 분명 흔치 않은 마력의 소유자였다. 한편 단정히 뒷짐을 지고 선 번이 그에게 저택의 설비 점검 현황을 보고하는 중이었다. 어린 에밀리아가 알아들을 수 없는 길고 어려운 단어들이 줄줄 쏟아진다. 에밀리아의 어머니는 정중한 태도로 그들 곁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다. 그는 어린 딸을 발견하자마자 쉿,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시늉을 한다. 그것은 귀한 분들 앞에서 함부로 목소리를 높이지 말라는 경고나 다름없다. 에밀리아는 입술을 비죽대지만 부러 말썽을 일으킬 마음은 없다. 한동안 나직한 침묵 속에서 번의 보고가 끝나고, 상석의 남자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뒤이어 그가 모두를 향해 눈짓한다.

“어서 앉으시죠.”

음식이 식겠습니다. 그러면 다들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자리를 찾아 앉는다. 에밀리아의 어머니도 마련된 자리에 서둘러 딸을 앉힌다. 사람 두셋이 올라가 누워도 될 만큼 널찍한 식탁에는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이 한가득이다. 집주인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는 느끼지 못했던 맛있는 냄새가 에밀리아의 식욕을 한껏 돋운다. 신선한 바질과 루꼴라에 오렌지 마멀레이드를 곁들인 샐러드, 얇게 저민 문어로 만든 카르파초의 상큼한 향기. 트러플 오일을 넣은 감자 스프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풍기고 펜네 면으로 만든 토마토 볼로네제 파스타에도 큼직한 미트볼이 올라앉아 있다. 그리고 식탁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훈연 향을 입혀 구운 새끼 돼지의 존재감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한켠에는 식후 입가심을 위해 탐스런 포도알이 주렁주렁 늘어진 과일바구니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무엇 하나 빠짐없이 조화롭고 동시에 호화스러운 차림이다. 어머니가 제 앞으로 덜어 주는 음식을 정신없이 받아 먹으면서도 에밀리아는 저택 식구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 기울인다.

“무슨 비가 하루종일 오고 난리인지. 배관 다 터지겠어요.”

“그래도 이런 날이면 저택이 유독 아름답잖아요.”

“얼어죽을 낭만은.”

돼지의 작은 앞다리를 죽죽 찢으며, 번이 먼저 말문을 튼다. 아프다는 말이 영 허튼소리는 아닌지 그의 신경질적인 낯 위로 언뜻 피로한 기색이 묻어난다. 프림의 웃는 얼굴에 대고 매몰차게 일갈하는 번에게 노엘이 무심한 어조로 툭, 던진다. “시끄럽군. 너희는 식사 예절이란 걸 모르나?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얌전히 밥이나 먹어.” 그러면 번은 포크를 콱 움켜쥐고 대꾸한다. “아, 예. 제국의 명예로운 참전 용사께서 조언하시는데 받잡아야지 별 수 있나.”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는 찰나,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내던 오딘이 한 마디 얹는다. “밥상머리에서 그러면 집주인한테 혼난다. 조용히 식사해.” 순간 모두의 시선이 ‘집주인’, 네카르 빈센트 아덴베르크를 향한다. 그가 시선을 내리깐 채로 말없이 미소짓는다. 식기 달그락거리던 소리가 일제히 멎는다. 식당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냉수를 끼얹은 듯 서늘해진다.

“표정 좀 봐. 애 울겠네.”

“안 울어요!”

질색한 번이 중얼거리고, 에밀리아가 눈치도 없이 해맑은 목소리로 끼어든다. 아이의 입에 황급히 토마토 조각을 밀어넣으며 그의 어머니는 모두를 대신해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 엄마가 조용히 하랬지. 에밀리아는 귓가에 속삭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미트볼을 집어 입안에 구겨 넣는다. 그 뒤로도 노엘과 번의 기싸움은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졸지에 가운데 낀 프림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지만 오딘은 더 이상 적극적으로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에밀리아의 눈으로 보기에도 유치한 수준의 싸움이었다. 조용한 가운데, 식기가 서로 부딪히는 금속성과 냅킨 스치는 바스락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온다. 그렇게 식사를 거의 마칠 무렵. 커다랗게 영근 포도알 몇 개를 떼어 입안에 밀어넣으며 에밀리아가 대뜸 집주인에게 말을 붙였다.

“여기 있는 그랜드 피아노가 엄청 멋지다면서요?”

에밀리아. 그의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 아이의 어깨를 짚는다. 모두의 시선이 에밀리아를 향해 휙 돌아가는 것을 보면 단지 그 혼자만이 걱정스러워하는 것은 아닌 듯 싶다. 그러나 네카르는 예상외로 사소한 예의범절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 듯 흔쾌한 목소리로 에밀리아에게 대답해 준다.

“증조할머니께서 남기신 유품입니다. 좋은 악기이기도 하지요.”

“증조할머니요? 우와.”

에밀리아의 어머니는 뭐라고 더 말하려는 아이의 입에 다시 포도알을 들이민다. 투덜거리면서도 그는 더 반항하지 않는다. 그렇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 자리가 파하고, 에밀리아 모녀는 오딘의 안내를 받아 꼭대기 층의 객실로 향한다. 역시 모노톤으로 꾸며진 손님방에는 커다란 침대와 소파가 하나씩 마련되어 있다. 기쁜 표정으로 침대에 냅다 뛰어드는 에밀리아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다는 인사와 함께 오딘이 물러난다. 마침내 하루의 끝이다.

 

온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탓일까. 에밀리아의 어머니는 아이를 깨끗이 씻기자마자 속절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폭신하고 보드라운 이불에 파묻혀 멀뚱멀뚱 눈을 뜨고 있던 에밀리아는 뒤늦게 잃어버린 작곡 노트를 떠올린다. 내일 아침이면 이 저택에서 떠나게 될 텐데, 그걸 그대로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한번 더 찾아 봐야겠어. 에밀리아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의 동태를 살핀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세상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다. 더군다나 어머니는 한번 잠들면 잘 깨지 않는 편이니까, 얼른 다녀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에밀리아는 몰래 침대에서 빠져나와 객실의 문을 열고 나선다. 응접실로 다시 가 보는 게 좋을까? 그곳에서 노트를 마지막으로 봤으니까. 그런데 저편, 복도 끝에서 기이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에밀리아는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는 벽에 걸린 촛대들의 그것보다도 환하고 따스한 빛에 이끌려 홀린 듯 걸음을 옮긴다. 어두운 복도를 조심조심 가로지르면, 살짝 열려 있는 문틈으로 엿보이는 것은 예의 그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다. 새카만 윤광으로 번뜩이는 몸체의 우아한 곡선에 시선을 빼앗겼다가도 에밀리아는 그 곁에 나란히 모여 있는 다섯 사람의 존재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한밤중에 뭘 하는 거예요? 다가가 묻고 싶었지만, 막 튀어나오려던 에밀리아의 목소리는 번이 품속에서 그의 작곡 노트를 꺼내드는 순간 물거품처럼 흩어진다.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렇게 찾아도 없더니, 누가 진작 챙겼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거 봐. 꽤 그럴듯하던데요?”

“그걸 당신이 가지고 있었어요? 내일 꼭 돌려 줘요.”

“누가 들으면 뺏은 줄 알겠네. 난 그냥 흘린 걸 주워 줬을 뿐이에요.”

프림이 황당하다는 듯 번을 쳐다본다. 번은 아랑곳하지 않고 에밀리아의 노트를 뒤적일 뿐이다. 뒤에서 서성대던 오딘이 바이올린을 들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어떻게 연주하는 건데?” 잠시 노트를 들여다보던 그가 활을 들어 G현을 부드럽게 그어내린다. 곧이어 D현을 넘나들며 아르페지오가 낮게 펼쳐진다. 그러나 송진을 덜 머금은 그의 활이 순간 미끄러지는 찰나를 노엘은 놓치지 않고 트집을 잡는다. “소리 한번 형편없군. 차라리 관둬.” 그 말에 울컥한 오딘이 바이올린을 턱에서 떼어낸다. “형편없다니, 애가 들으면 얼마나 속상하겠어?” 하지만 노엘은 흥분하지 않는다. 그는 끌어안고 있는 첼로의 몸체를 가만히 어루만질 뿐이다. “자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애가 아니라 널 욕한 거다.” 투닥거리는 둘의 뒤편에서 프림이 고개를 내젓는다. 오딘에게 송진을 챙겨 주고 덩달아 바이올린을 꺼낸 그가 에밀리아의 음악을 조금 연주해 본다. 이번에는 E현에서, 옥타브를 높여 한결 날카로운 멜로디가 천천히 흐른다. 그사이 활을 가다듬은 오딘이 그 선율을 함께 되짚는다.

“뭐지? 생각보다 좋네.”

음악을 듣고 있던 번이 놀랍다는 듯 중얼거린다. 그리고 그의 비올라가 연주에 자연스럽게 합류한다. 오딘과 프림의 바이올린보다 낮은 톤의 선율이 한데 섞여들며 묘한 조화를 이룬다. 어느덧 에밀리아의 노트는 피아노의 보면대 위에 올라가 있다. 곧이어 노엘의 첼로가 간단하게나마 화음을 쌓으며 함께 연주하기 시작하고, 그 모든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네카르가 마지막으로 건반 위에 손을 올린다. 저도 모르는 사이 방문 앞까지 다가가 있던 에밀리아는 느리게 이어지는 그들의 오중주에 숨을 삼키며 귀 기울인다. 완벽한 솜씨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마음을 깊게 울리는 소리였다. 무엇보다 이 손으로 써낸 곡이 다른 이의 손끝에서 피어나고 있다는 고양감이 에밀리아를 들뜨게 했다.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가 한 곡을 완전히 써내지 못한 탓에 같은 페이지의 멜로디가 도돌이표 속에 갇힌 것처럼 몇 번이나 반복되고 있었다는 점이겠지만. 그것을 들으며 에밀리아는 이대로 영영 시간이 멈추었을지 모른다는 착각을 하다가도 어느새 풍성하게 만개할 그다음 악장을 상상하고 있다. 내 음악이 이렇게 아름답게 들릴 줄은 몰랐어. 입을 벌린 에밀리아가 연주자들을 바쁘게 구경하는 사이. 문득 그의 시선이 네카르와 마주친다. 하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다. 아무도 모르게, 네카르가 에밀리아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무언가 허락하듯이,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해사한 웃음이 에밀리아의 얼굴에 가득 피어난다. 그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에밀리아가 숨을 크게 들이쉰다. 조그마한 양손이 힘차게 허공을 가르며 지휘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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