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후유는 얼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부모님과 대화… 라고 할 수도 있는 타협을 거친 뒤에는 그나마 나아졌다. 에나가 마후유의 집에 놀러가서 얼굴을 비추는 일도 드문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어쩐지 언짢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은, 에나가 마후유의 엄마와 이야기할 때 경계만이 아닌 선망과 호감을 담은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견디지 못해 물어
Amia가, 아니, 미즈키가 죽었다. 여름날의 함박눈 같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식을 접한 지 이제 막 하루가 지나고 있다. 이변을 눈치 챈 건 오늘 25시 때였다. 영상 편집만 끝나면 바로 올릴 수 있는 신곡이 하나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미즈키에게서 파일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업에 관련된 시간 약속을 어긴 적도 별로 없었고, 만약 시간을 맞
*전 글 '꿈-자각몽과 악몽'에서 이어지는 부분이 조금 있습니다. 읽고 읽으시면 조금 더 원활한 이해를 하실 수 있을 겁니다. —- 아키야마 미즈키는 오랜만에 기분이 안 좋았다. 안 좋다고 해 봐야 평소에 단전에 담겨 있는 우울 위에 울적이 몇 숟갈 얹어졌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즈키는 그것에 불행까진 아니더라도 불쾌함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루이.” “왜 그러니, 네네?” “잠깐…….” “잠깐?” “같이 밖에 나가 줄 수 있나 해서.” 쿠사나기 네네의 제안에 카미시로 루이는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네네는 이제 더 이상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되었다. 이유는 무겁고도 간단했다. 처음으로 주역을 맡은 공연에서 저지른 단 하나의, 단 한 번의 실수가 바로 그것이었다. 네네는 그
세카이에 앉아 머릿속을 부유하던 악상을 정리해 나가고 있는데, 돌연 뒤에서부터 감싸 오는 부드러운 중량과 향기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이곳에서 마주칠 수 있는 존재가 미쿠들과 나이트코드 멤버들뿐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튀어나온 생리적인 반사 반응이었다. “미, 미즈키……?” 목과 어깨에 둘러진 두 팔 위로 보이는 옷차림의 편린
“졸업 축하해, 선배.” “후후, 감동적이네.” “그럼 말만 감동적이라 하지 말고 눈물이라도 흘리지 그래?” “오야?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중인데, 혹시 안 보이니?” “네, 네. 나쁜 사람이라 그런지 하나도 안 보입니다~.” 졸업식 당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 이르게 고개를 내민 분홍빛 꽃잎을 품은 많은 벚나무
평화로운 토요일 오후. 나이트코드 멤버들은 패밀리 레스토랑에 모여 있었다. 무슨 중대한 일이 있어서는 아니고,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신곡 업로드를 끝낸 뒤의 뒤풀이로써 모인 것이었다. “역시, 이번 곡에도 댓글 엄청 많이 달렸네~.” 스마트폰으로 영상에 달린 반응을 확인하며 아키야마 미즈키가 입을 열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시노노메 에나가
미즈키의 핸드폰이 울린 건 그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가볍게 학교를 빼먹고 집에서 영상 작업을 하고 있던 정오를 조금 지난 때였다.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한 미즈키는 “별일이네.”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루이?” “야아, 미즈키. 오늘도 어김없이 땡땡이 중이니?” “뭐, 그렇지~. 랄까, 무슨 일로 전화를 다 했어?
*두 사람이 성인이 된 시점입니다. *전 글의 번외격 글입니다. 이 글을 읽지 않으셔도 전 글을 이해하는 데에 큰 무리는 없으나, 이 글을 원활히 이해하시기 위해서는 전 글을 읽으시는 게 좋습니다. 후, 하고 얕은 숨을 내뱉자 희뿌연 입김이 사뿐히 허공에 번져 나갔다. 눈 한 번 깜빡인 틈에 자취를 감춰 버린 입김이 어딘가 나처럼 느껴져서 나도
*'쇼타임 룰러'에서 루이의 두 번 다시 고독해지지 않을 거라는 가사와, 미즈키 성우 분께서 '너의 밤을 줘'를 녹음할 때 루이를 생각하며 녹음했다는 것을 듣고 끼적여 봤습니다. *등장인물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인입니다. —- 시침이 ‘11’이라는 숫자를 가리키는 늦은 밤. 딩동, 하고 맑고 투명한 초인종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몇 십 분 전에
1교시부터 수업을 빼는 건 이제 예삿일이 아니게 되었지만 등교하자마자 옥상으로 향하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어떤 특별한-당연하겠지만 부정적인 의미에서의-일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오늘따라 옥상에 가고 싶다는 충동이 심장과 뇌를 거세게 때렸다는, 이성이나 논리 따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탓이었다. 처음에는 한숨과 함께 잡았던 밋밋한 옥상의 출입문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사고사, 모브 캐릭터의 자살 요소가 있습니다. *캐해가 미흡해 캐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키야마 미즈키는 버스 창문에 기댄 채, 별 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고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풍경을 무감정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가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은 후부터 계속 유지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미즈키의 태도는 마치 “저는 이것밖에 못
첫키스의 추억은 최악이었다. 에나에게는 약간의 선망이 있었다. 상냥한 연인과 낭만적인 키스가 추억으로 남는 것. 에나의 감성은 여느 여고생과 다름이 없었다. 마후유와 맺는 관계는 남들과 현저히 차이가 있었음을 관과한 사고였다. 에나는 마후유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언제까지나 에나를 보고 멀뚱히 서서 지켜볼 마후유를 생각하면 화가 날 것 같으니 사전에 차단한
에나가 아사히나라는 성을 빌려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별 대단한 이유가 아니었다. 본명으로 시작했다간 아버지의 명성을 내세웠다는 오명을 쓸 것 같았고, 닉네임을 에나낭으로 지을 정도로 창의력이 없었으며, 그에따라 주변에서 빌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니, 별 시답잖은 의미부여를 하지 않을 사람은 마후유 뿐이었기 때문이다. 세상 어디서나 마찬가지였지만, 일
“하.” 입술을 떼니 열로 뜨거운 뒷목이 당겼다. 언제나 적응이 안 됐다. 얘랑은 한글도 못 뗀 어린아이를 건드는 느낌이 든다니까... 에나는 자기 삶에서 가장 나쁜 짓을 했던 순간보다도 얼굴이 홧홧했고 안구 윗부분이 저렸으며 약간은 울 것 같았다. 이런 속도 모르고 마후유는 시선을 내리깔고 에나의 입술을 바라봤다. 더 원하는 거겠지. 하, 흡. 키스따위는
“에나가 좋아.” “또 그거야?” 세카이에서 긴장감도 없이 퍼질러 누워있으니 들은 말이었다. 분명 열원도 없을 텐데 바닥이 차가운지 아닌지도 구분이 가질 않았다. “또가 아니라 계속.” “그런 말을 들어봤자…” 물론 나는 예쁘고, 상냥하고, 고백 받아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사람이지. 하지만 고백의 발언자가 마후유라면? “하아, 그래. 어디 한번 얘기해보자.
“에나가 좋아졌어.” “열 나니?” 탱그랑. 커터칼로 공들여 길게 깎은 미술연필의 심이 바닥에 닿아 부러졌다. 의아함을 숨기지 못하고 눈과 눈썹 사이가 한참이나 멀어졌다. 얘가 장난으로 이런 말을 할 애던가? “연애적 의미야.” 표정을 살피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얼굴을 들여다보자 듣는 척도 안 하고 뒷말을 이었다. 드로잉 북을 내려놓고 마후유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