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준 대가 2

빌려준 대가 후속편.

삼림 by 와우
7
0
0

후속편.

에나의 짧은 평안은 끝났다. 지난번 마후유와 술자리를 가진 뒤 몇달이 지났다. 오늘은 에나가 고소장을 제출하고 난 뒤 집에서 혼자 열불이 뻗쳐 연소할 것만 같아서 예고도 없이 마후유네 집에 들이닥친 날이었다.

이미 에나는 있는 화 없는 화를 끌어다 내서 녹초가 된 채로 소파 위에 무릎을 세워 앉아 널부러져 있었다. 그러는 에나를 보고 마후유는 그저 물을 가져다 주거나 힘을 빡 주어 뭉칠 것 같은 어깨나 팔 등지를 주물러주었다.

평소같으면 시끄럽다며 일축할 마후유가 이렇게 얌전히 대한다는 건, 역시 이 일이 에나에게 있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나는 지난동안, 아사히나 에나라는 이름으로 화가 활동을 해왔다. 신인의 그림만 수집하는 특이한 취향의 자산가가 그림을 사주거나, ‘상품'이라는 개념으로 팔 그림을 그려보라는 조언에 약간의 불만을 갖고도 도전은 해본 그림이 팔리는 등 의외로 순탄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항상 세로 길이가 팔뚝보다 긴 캔버스에다만 그리던 게 보통이라 아기자기한 사이즈에 그리니 감각이 낯설면서도 재밌어서 추억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런 추억도 잠시, 익명 커뮤니티에서 한 악성 유저가 ‘아사히나 에나'와 ‘에나낭', 심지어 ‘시노노메 에나'의 연관성을 전부 연결시켜 글을 작성했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심심풀이로 둘러보던 미즈키, 스케줄이 없던 날 연예면 기사를 둘러보던 아이리, 그리고 에나를 알고 있는 고등학생 시절 친분은 물론이고 대학생 시절 동기들마저도 에나의 폰에 불을 냈을 때는 자신이 꿈이라도 꾸는 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사히나 에나'의 공식 SNS 계정, ‘에나낭'의 SNS 계정의 디엠이 몇백건은 쌓이고 있었다. 나 무슨 연예인이야? 연예인 아니잖아. 요새는 거창하게 인플루언서라는 호칭으로 부르지만 역시 자신은 공인이 아니었다. 근데도 이렇기 화제가 된다고? 물론 ‘에나낭'이 꾸준한 업로드로 인하여 7만 팔로워를 달성한 탓이었다. 심지어 일본인이면 한번쯤 들어본다는 화가 이름인 시노노메라고? 조회수에 목마른 명색만 기자인 작자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개인이 쉽게 대중의 앞으로 나설 수 있는 시대인지라 너무도 간단하게 악의가 담긴 손길과 눈길에 노출되었다. 에나의 현 상태는 간단히 말해 패닉이었다.

물론 에나가 이런 일에 집에 틀어박혀 히키코모리가 되는 일은 없었다. 그냥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아이리. 그래, 아이리. 이런 가십거리로 입은 피해를 대처할 방법은 아이리가 알 것이다. 안 그래도 이 일로 연락을 주었으니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 이후로는 정말로 정신이 없었다. 익명 커뮤니티인 터라 고소도 절차가 매우 복잡했다. 도중에 몇번이나 포기할 뻔한 에나는 이 감정을 그림으로 풀어냈고, 의외로 잘 팔렸다. 심지어 그 소동으로 인해 ‘에나낭'의 팔로워들과 시노노메 신에이를 아는 일반 대중들이 전시회를 더더욱 찾아주게 되었다. 이런… 이런 노이즈 마케팅같은 방식으로 대중화되고 싶지 않았어. 그렇게 심한 절망은 아니었지만 제법 실망했다.

어찌저찌 그 모든 절차가 순탄하게 진행되어갈 무렵, 에나는 겨우 마후유를 찾아와 지난 피로를 안정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수고했어.”

“흥. 고마워.”

지극정성인 서방님처럼 이곳저곳 주물러주는 탓에 에나는 가벼운 부끄러움과 기분 좋음을 느꼈다.

“그런 거 하지말고 그냥 이리와.”

“응.”

마후유는 에나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여 가까이 앉았다. 그 어깨에 가볍게 몸을 기대면 따스한 체온이 기분 좋았다. 에나의 머리 위로 가볍게 툭 닿았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마후유의 머리. 지난번 술자리 이후로 에나와 마후유는 미묘한 기류를 만들어냈지만 그렇다고 너무 찐득하지는 않은 거리감으로 지냈다.

“진짜 말이야. 내가 뭐하러 성까지 다른 성으로 들고 활동한지 왜 모르냔 말이야.”

“그러게.”

그 성을 빌려준 사람이라서 그런지 순순히 대답했다. 마후유는 대부분의 경우 들어주는 쪽의 사람이라 에나는 편안하게 제 속을 털어놓을 수가 있었다. 언젠가는 마후유한테 그렇게 말로 안 하는 생각은 어떤 생각이냐며 물었더니 보통 에나 앞에서는 말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생각을 많이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하긴, 고민에 빠지면 은근 티가 잘 나니까.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인 마후유가 에나 곁에서라면 사념에 빠지는 일 없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생각을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그게 불편한 생각이거나 무리를 하는 거라면 무지하게 싫었다. 그냥 멍하니 지내는 게 낫지.

“최근에 갔던 전시회, 유독 에나 부스만 사람이 몰렸어. 시간 들여서 감상하고 싶었는데 인파때문에 그러질 못했어.”

“아. 정말? 어쩌지. 마후유 너도 그랬던 거면 다른 관람객들도 그랬단 거잖아.”

마후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른 화제를 툭 던졌다.

“그 고소한 건. 어떻게 할 거야?”

“응? 어떻게 하냐니.”

“전과를 남기거나 합의금을 받거나잖아.”

“그러네. …아. 나 좋은 생각 떠올랐어!”

에나가 해맑게 웃으며 마후유 무릎에 손을 짚고 몸을 내밀어 마주봤다.

“합의금 받고 개인전을 열어버리는 거야. 그러면 공간 밀집도 해결되고 사건도 나 좋은 쪽으로 마무리 되고? 어떻게 생각해?”

“응. 좋은 것 같아.”

사실 마후유가 다 떠먹여준 결론에 가까웠지만 에나는 눈치채지 못했고, 마후유도 유세를 떨고 싶은 게 아니라 에나의 고민과 자신의 불편함을 해결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에나는 다시 마후유의 어깨에 기댔다.

“그럼 결정. 하아. 아무튼간에 내 신상 중에서 너 관련 자료는 안 퍼져서 다행이다.”

그랬으면 아주 그냥 내 손으로 손봐줬을 거야. 애정이 얼핏 보이는 투덜거림에 마후유는 눈을 살짝 내리깔며 입꼬리를 올렸다.

“알잖아. 그런 식으로 까발려질 것도 감안하고 빌려줬다는 거.”

“어, 진짜로?”

“그럼. 이렇게 인연을 이어가는 중에 아사히나 에나의 지인인 아사히나 마후유를 안 들켰을 거라고 생각해?”

“으음…”

“언젠가는 알려졌을 거야.”

흐음. 대답도 감탄사도 아닌 소리를 내면서 에나는 입을 다물었다. 왜 마후유한테 부탁했을까. 왜일까.

에나는 오랜 인생동안 고민에 빠져 살았다. 그 고뇌는 얼핏 자신의 정신력을 소모시키지만 언젠가는 그림에 도움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전혀 상관 없어뵈는 것일지라도 감정 그 자체가 영감이 되므로 에나는 생각의 밀집체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다. 설령 오래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인내심을 들여 답을 내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성급할수록 틀린 답을 내는 걸 깨달은 다음에는 그리 한방에 해결하지 않게 되었다.

마후유도 뭔가를 재촉하는 타입이 아니니 기다려줄 것이다. 그것이 기분이 좋았다.

“마후유. 개인전 열면 이번인 얼굴 좀 내밀까 생각 중인데.”

“그래?”

“어차피 다 알고 있을 테니까 더 당당하게 나가야지. 얼굴없는 화가로 지내는 것도 즐거웠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잖아.”

마후유는 고개를 살짝 틀어 에나를 보았다. 체념 혹은 자포자기가 있을 거라 생각한 그 자리에는 호승심이 깃들어 있었다.

“말해두지만, 에나가 이름을 바꾼 채로 전시회 돌던 시절에도 분명 에나의 그림을 좋아하던 사람은 많았어.”

촬영을 허가해둔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에나의 작품 앞에서 발을 멈춰 사진을 찍거나 도록을 가져가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모든 도록을 수집하려던 사람이 있는가보면 양손 가볍게 온 사람이 에나의 도록을 수고스럽게 가져가던 적도 있었다.

이 소동이 일어나자 에나의 지인들도 하나 둘 모여 전시회에서 마주치고는 했었다. 공통의 지인이라고는 온통 미야여고나 카미고 출신들 뿐이었지만.

그들 중 누구한테 들었을까. ‘에나보다 에나의 그림을 먼저 접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지가 궁금하다. 선입견 없이 순수하게 그림만 보고서 느낀 감상을 모르는 게 아쉽다.’ 그 말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 마후유 또한 에나와 그림을 떼어놓고 순수하게 감상할 수 있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 에나의 그림은 그토록 인상적이고 화려했기에. 언젠가 에나의 작은 목표라던 영화관 스크린 사이즈의 그림도 보고 싶었다.

“위로해주는 거야?”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그런 큰 사이즈의 그림이라면 마치 창문처럼 다른 세상을 보여주지 않을까. 분명 얼굴이나 아버지 이름을 앞세운 편법이라는 모함도 다들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합의금 뜯어내면 큰 작업실이나 빌릴까.”

“왜?”

“예전에 말했던 영화관 화면 크기 그림. 개인전이면 그정도 임팩트는 줘보고 싶어서.”

“기대된다.”

에나의 그림은 언제나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거울로 이어지는 입구처럼. 오션뷰 호텔의 창문처럼도 보였다.

세계관. 판타지 용어가 아니라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개념은 딱 이럴 때 체감할 수 있었다. 에나는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내 그림을 통해 보여줬다.

그렇다면 에나는 어떤 방식으로 마후유의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처럼, 에나처럼 뚜렷하다면 모를까 마후유처럼 흐리멍텅하다면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오랫동안 마후유의 세상은 지워져 왔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다.

“너 졸려?”

“응…”

에나가 쓰다듬어주는 등으로부터 마후유는 몸 전체가 점점 따뜻해졌다. 왜일까.

마후유는 직감적으로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떠올릴 것이라고 느꼈다. 파편적으로 남은 어릴 적 기억과도 같이, 반평생을 넘은 나이에 문득 이 날을 떠올릴 것임을 알았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