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맛 컵라면
저녁거리를 고르느라 바쁜 주부들 사이로 짙은 보랏빛이 자연스레 섞여든다. 마후유는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무심한 얼굴로 장바구니를 집어들었다. 옆을 스치는 사람들이 흘끔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명문 여학교 미야마스자카 여학원 학생이 이 시간에 여기서 장을 본다고? 진짜? 그런 노골적인 시선이 쏟아진다. 순간 마후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옷을 갈아입을걸 그랬나. 교복 차림만 아니었어도 이렇게까지 주목받지는 않았을 텐데. 잠깐이니 상관없겠지, 하고 생각 없이 나온 게 실책이었다. 원래도 우등생으로 유명한 마후유였다. 설령 같은 학교 학생이 아니더라도, 입소문을 통해 알음알음 알고는 있겠지.
옻이 오르듯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쾌함에 마후유는 희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장만 보고 얼른 가야지. 그녀는 속도를 약간 올려 주부들이 북적거리는 채소 코너에서 벗어났다. 이곳에 더 있다가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소곤거리는 소리를 장 보는 내내 듣게 될 게 뻔했다. 마후유는 발걸음을 돌렸다. 왠지 모르게 도망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귀 뒤로 사람들의 말소리가 따라붙었다. 쟤구나, 쟤. 우등생이라며? 생긴 것도 예쁘네. 마후유는 자기도 모르게 보폭을 넓혔다. 단화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잦아졌다. 탁, 탁, 탁, 탁탁탁탁탁.
정신을 차려 보니 마후유는 본인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마트가 이렇게 넓었던가? 마후유는 가만히 생각에 빠졌다. 애초에 아사히나 마후유의 스케줄에 장보기라는 일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집에 식재료만 있었다면 스스로 한 끼 정도는 해먹을 수 있었을 터였다.
마후유가 간과한 것은 어머니가 장보는 것을 조금 미뤘다는 것이었다. 식재료를 확인하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지난주에 사둔 재료들은 거의 떨어져 있었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1인분 분량의 식사를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저녁 준비 못 해둬서 미안하구나. 한 끼 정도는 알아서 해결할 수 있지?]
마후유에게 어머니의 말은 절대적이다. 비록 그것이 화면에 표시되는 몇 줄 안 되는 글이어도, 마후유는 저도 모르게 그것을 따르고 있다. 그건 마후유가 유치원생일 때부터 쭉 이어져 온 아사히나 가의 관습이었다. 항상 최고가 되도록 노력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부모님의 말에 반항하지 말 것.
그런고로, 오늘 아사히나 마후유는 저녁을 먹어야 한다. 마후유에게 있어서는 음식 덩어리를 기계적으로 씹는 작업이다.
든든한 저녁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굶고 싶지도 않았다. 대충 배고프지 않을 만큼만 먹자고, 마후유는 그렇게 결정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후라서 그런 건지 샌드위치 같은 것들은 거의 다 팔려 있었다. 노력이 별로 들어가지 않으면서 배를 채울 수 있는 선택지는 몇 가지 없었다.
라면이라도 먹을까.
항상 어머니가 직접 만든 요리로 식사를 해결한 마후유로서는 라면이 낯설었다. 지금껏 마후유가 가진 라면에 대한 인상은 MSG 덩어리라면서 엄마가 금지하는 것. 딱 그 정도였다. 친구들이 편의점에서 산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놓고 기다리는 동안, 마후유는 브로콜리와 토마토, 닭가슴살 등으로 이루어진 엄마표 수제 도시락을 꺼내곤 했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미지의 물체에 마후유는 약간 호기심이 동했다. 어차피 엄마는 마후유가 뭘 먹었는지 모를 것이다. 늘 그렇듯이 약속이 끝나면 집에 와서 씻고 침대로 들어가겠지.
마후유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라면 코너로 다가갔다. 온갖 종류의 라면이 매대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소금 맛, 미소 맛, 해물 맛, 카레 맛... 마후유는 간장맛 라면을 보고는 미미하게 웃었다.
"매일 먹어야 한다면 오리지널 간장 라면이려나."
에나와 미즈키가 실없이 투닥대던 때 카나데가 했던 말이었다. 카레 맛이냐 해물 맛이냐를 놓고 옥신각신하던 둘 사이에서 카나데는 아예 제 3의 선택지를 만들어 냈다. 크게 중요하지도 않고 굳이 기억하려 노력할 이유도 없는 대화이지만, 어째서인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마후유가 간장맛 컵라면을 구입한 건 단순히 평소에 카나데가 무엇을 먹고 사는지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커피 포트에 뜨거운 물을 끓인 후 그대로 붓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조리법. 마후유는 컵라면 용기 틈새로 비어져 나오는 하얀 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뽀얀 김은 금세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린다. 그렇게 하기를 한 번, 두 번. 3분은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다. 컵라면 윗부분을 잡아뜯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라면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후루룩. 마후유는 적당히 익은 면발을 삼켰다. 늘 그렇듯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해서 반복한다. 카나데가 이걸 먹는다니까. 비록 맛을 느끼지 못해도 같은 것을 해보고 싶었다. 마후유는 혼자 픽 웃었다. 맛을 느끼지 못하면 음식을 먹는 게 무슨 소용이람.
마후유는 컵라면을 바닥까지 비웠다. 속이 따뜻했다. 국물 때문이었을까. 마후유는 습관처럼 잘 모르겠어, 를 중얼거렸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가슴께가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차디찬 일상에 퍼지는 작은 온기가 얼마나 소중하던지. 마후유는 미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컵라면 쓰레기를 버렸다.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한번 더 먹어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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