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피크닉, 도시락

프로세카 by Sh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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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봄은 시작과 생동의 계절이라고들 한다. 겨우내 죽은 듯이 조용했던 나무에 새순이 움트고, 평소 눈길 한 번 줄 일 없던 화단에서는 푸릇하고 여린 싹이 봄비로 촉촉해진 흙을 뚫고 나온다. 예전보다 자연과 함께하는 일이 적어졌다곤 해도 사람들은 생각보다 사소한 것에서 봄을 느끼곤 한다. 단골 카페에서 한정으로 나오는 딸기 파르페라든가, 찬 기운만 가시면 곧바로 내걸리는 벚꽃축제 현수막 같은 것들에서. 봄은 다양한 형태로 바뀌어 다가오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아키야마 미즈키가 봄을 마주친 곳은 평소 가던 화장품 매장이었다. 위에서 두 번째 선반에 마음에 드는 제품이 있었다. 까치발을 하고 손을 뻗자 살짝 반짝거림이 있는 분홍빛이 눈에 들어왔다. 눈치 빠른 직원이 미즈키 곁으로 다가왔다.

"어머,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그건 올해 봄 시즌에 새로 나온 신상품이에요."

"그래요? 이름이 뭔가요?"

"핑크빛 피크닉이에요. 이름 그대로 봄에 피크닉 갈 때 딱인 상품인데, 베이비핑크나 로즈핑크, 슈가핑크 색상도 있어요. 손님께서 고르신 건 벚꽃 핑크 색상이고요."

미즈키는 주르륵 늘어선 블러셔들을 살짝 훑어보았다. 솔직히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다. 이번 달에는 봄 신상 옷을 사느라 제법 지출이 컸으니까. 봄은 늘 화사한 옷을 넘치도록 가지고 왔고, 그 대가로 지갑 속의 지폐를 쓸어가곤 했다. 미즈키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그동안의 지출 내력을 떠올렸다.

지난주 수요일에 인터넷으로 산 흰색 레이스 원피스, 월요일에 산 체크무늬 리본 핀, 어제 주문한 앙증맞은 크로스백....

핸드폰 계산기와 지갑의 영수증을 동원해 계산한 결과, 아슬아슬하게 블러셔를 구입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 남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정말로 지갑에 몇십 엔 정도밖에 남지 않을 터였기에 미즈키는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망설임을 눈치챈 직원이 결정타를 날렸다.

"벚꽃 핑크는 그게 마지막 남은 제품이에요. 본사에서 물류 배송이 늦어지고 있어서 아마 지금이 아니면 2주 후쯤에나 만나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미즈키는 홀린 듯 벚꽃 핑크 블러셔를 집어들었다. 직원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평소보다 좀 더 들뜬 것 같은 직원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미즈키는 가볍게 가게를 나섰다. 이젠 정말로 아껴 써야 할 상황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문한 봄옷과 찰떡처럼 어울리는 화장품을 산 건, 적어도 미즈키 입장에서는 합당한 소비였다. 몇 번을 고민해서 고른 옷에는 그만한 화장품이 따라붙는 게 당연하니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미즈키는 입이 근질거렸다. 얼른 25시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쿠션을 팡팡 치고, 애먼 이불에 주름을 잡고, 그동안 모은 공단 리본을 정리해 보아도 시간은 느리게만 흘렀다. 견디다 못한 미즈키는 그냥 평소보다 일찍 접속하기로 했다.

24시를 갓 넘긴 시각임에도 접속 알림창에 불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일찍 들어왔네, 에나낭."

"어? 응. 오늘은 학교 수업이 일찍 끝나서. Amia도 일찍 왔네."

"뭐, 그렇지. 오늘도 학교는 빼먹었거든."

"하여튼. 학교 정도는 제대로 가는 게 어때? 매번 출석일수가 아슬아슬하면서."

"네네, 다음부턴 제대로 갈게요~"

조금은 틱틱대는 그 말투에 미즈키는 웃음이 터졌다. 가볍게 질책하는 듯 아닌 듯 본인을 챙겨주는 느낌이란. 에나가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성격이라는 건 미즈키도 알고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에나의 관심을 오롯이 독점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참, 에나. 나 오늘 새 블러셔 샀다?"

"또? 이번 달엔 지출이 많아서 고민이라고 그러더니."

"그치만~ 이렇게 예쁜 걸 어떻게 두고 가. 너도 보면 갖고 싶어할걸?"

약간의 로딩 후 나이트코드 채팅창에 블러셔 사진이 업로드되었다.

"아, 이거 그거잖아. 역 앞에 있는 가게에서 나온 신상품."

"역시 에나는 뭘 좀 안다니까. 이 블러셔 직접 써보고 싶지 않아?"

"사려고는 했는데...점원분 말로는 벌써 다 떨어졌다고 하더라고. 새 물건은 2주 후에나 들어온대."

"후후후, 그럼 내가 빌려줘야겠네.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

미즈키는 히죽히죽 웃으며 조건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25시 봄 피크닉에 참석하는 거야!"

컴퓨터 너머로 하아? 하는 소리가 들려서 미즈키는 저도 모르게 쿡쿡거렸다. 그래, 이 반응이지. 에나는 늘상 미즈키의 제멋대로인 계획에 어이없어하면서도 반응해주곤 했으니까. 뒤이어 투덜대는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블러셔 한번 빌리는데 왜 피크닉까지 참석해야 해? 그냥 만나서 빌려주면 되잖아."

"그~치~만. 모처럼 새 화장품을 샀는데 자랑할 기회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이번에 산 건 정말 마음에 든단 말이야."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나이트코드의 접속 알림창에 두 개의 불이 더 들어왔다.

"둘이서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

"안녕."

"드디어 왔구나! K, 유키, 혹시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돼?"

"되긴 하는데...무슨 일 있어?"

"그게 말이지, 노노기 공원으로 25시 봄 피크닉을 가려고. 그것도 수제 도시락을 싸오는 봄 피크닉으로!"

"그날은 시간이 비어 있으니까 괜찮아. 유키는?"

"...아마 예비교 활동이 있는 날일 거야."

"역시...유키는 어려우려나. 에나낭은 당연히 올 거지?"

"휴...알았어, 갈게. 그런데 굳이 수제 도시락 피크닉인 이유는 뭐야? 손 많이 가는데..."

"어라, 에나낭 자신 없어? 혹시 할 줄 아는 음식이라고는 계란 프라이 정도밖에 없는 거 아냐?"

"아니거든?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럼 결정한 거다? 이번 주 토요일 12시에 노노기 공원 큰 벚나무 밑에서 만나는 걸로!"

"응. 그때 보자, 미즈키."

"...시간이 되면 갈게."

"에휴...알았어. 시간 늦지 마."

툴툴대면서도 어울려 주는 에나를 보며 미즈키는 싱긋 웃었다. 미즈키에게 에나란 무슨 일이 있어도 제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었다. 그걸 믿고 좀 더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는 자각도 있었다. 놀림당해서 빨개진 얼굴도 귀엽고, 불평하는 것도 귀엽고...

"...얼른 토요일이 되었으면 좋겠네."

미즈키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발그레해진 뺨을 두 손으로 받쳤다. 설렘과 기대감이 몽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 * *

한편 카나데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중이었다. 수제 도시락 피크닉이라는 단어를 적당히 넘겨버린 게 화근이었다. 일반적인 도시락 피크닉이라면 가게에서 사온 도시락을 옮겨 담아도 상관없겠지만, 앞에 붙은 '수제'가 카나데를 곤란하게 했다. 수제라 함은 곧 직접 만든 것. 직설적으로는 스스로 요리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크게 고민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모양이 어설프고 맛이 짜도 '사랑이 담긴 맛'이라며 만든 사람의 애정으로 여길 수 있는 게 수제 도시락의 장점이니까.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였다. 까맣게 타버린 계란 프라이와 소금 대신 설탕을 넣은 된장국 수준이 된다면, 아무리 애정이 담긴 도시락이라고 해도 선뜻 입에 넣기 망설여질 터였다.

슬프게도 카나데는 요리 솜씨가 그리 좋지 못했다. 일주일에 겨우 두 번, 그것도 모치즈키가 해놓은 식사를 먹으러 부엌에 가는 사람의 요리 실력이 좋길 바라는 건 지나친 처사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카나데를 도와줄 구원투수가 있다는 점이었다. 검색창에 '수제 도시락'을 치자마자 수많은 레시피가 화면으로 쏟아져 내렸다. 컴퓨터 창을 채우는 사진들은 하나같이 군침을 돌게 하는 모습이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카나데는 난이도가 낮아 보이면서도 맛있을 것 같은 레시피를 찾아냈다. 이거라면 마후유도 맛있다고 해주지 않을까. 도시락 메뉴를 정할 때조차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마후유의 존재를 느끼며, 카나데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늘상 '모르겠어' 라고만 하는 마후유가 '맛있다'고 느낄 요리를 할 수 있다면 시도해 볼 가치가 있었다.

모치즈키가 지난주에 장을 본 덕분에 재료는 충분했다. 주먹만한 감자 세 알, 조그마한 사이즈의 달걀 세 개, 1/3 정도 남은 오이, 뜯지도 않은 게맛살, 튜브에 담긴 마요네즈 그리고 간을 맞추는 데 쓸 소금과 설탕. 예비교 끝나고 피크닉 장소로 급하게 올 마후유가 배고파할 걸 고려한 양이었다. 만약 남는다고 해도 그날 저녁밥으로 먹으면 그만이었다.

감자 껍질을 벗기는 과정은 생각보다 순탄치 않았다. 감자칼이 있다고 해도 울퉁불퉁한 감자 표면에서 깨끗하게 껍질을 벗기는 건 기술의 영역이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칼날은 보는 사람까지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야!"

군데군데 남은 갈색 얼룩을 훑던 칼날은 기어이 손끝을 베었다. 찌릿한 통증이 느껴저서 카나데는 반사적으로 검지를 입에 물었다. 비릿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손이 상처투성이가 된 후에야 카나데는 깔끔하게 감자 껍질을 벗겨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전자레인지로 감자를 찌는 동안 카나데는 다른 재료를 손질하는 데 집중했다. 달걀을 끓는 물에 넣고, 동시에 볶음밥에 들어갈 법한 크기로 오이를 썰었다. 오이는 감자에 비하면 훨씬 쉬웠다.

카나데는 레시피에 따라 오이 위로 소금을 살짝 흩뿌렸다. '적당히'라는 표현이 애매했기에 몇 번이고 맛을 보면서 뿌려야 했다. 간간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소금을 쳤을 때쯤, 다 삶아진 달걀 세 알이 냄비 안에서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카나데는 급하게 가스불을 끄고 조심스럽게 냄비 뚜껑을 열었다. 달걀 껍데기에는 금이 가 있었지만, 내용물은 그럭저럭 멀쩡했다.

조금은 삐뚤빼뚤하게 잘린 게맛살을 시작으로, 카나데는 준비한 재료를 큰 그릇에 넣었다. 포슬포슬하게 잘 삶아진 감자는 힘없는 카나데가 눌러도 금방 으깨졌다. 계란 흰자와 노른자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적당한 크기로 부스러지고 있었다. 군데군데 모습을 드러내는 오이와 게맛살이 눈을 즐겁게 했다. 좀 뻑뻑하다 싶을 때쯤 마요네즈를 넣고, 기호에 맞게 설탕을 뿌린 다음 주걱으로 뒤섞었다. 거친 식감이 날까 싶어 귀퉁이를 잘라낸 식빵 위에 지금까지 만든 샌드위치 속을 두텁게 펴바르면 끝이었다.

카나데는 만족스럽게 이마의 땀을 닦았다. 마후유가 좋아하려나. 그날만큼은 "잘 모르겠어"가 아니라 다른 대답을 듣고 싶다고, 카나데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세상 최고의 맛이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마후유가 맛있다고 할 만큼은 되기를.

* * *

그 시각, 시노노메 에나는 하염없이 주방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수락은 했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난관에 부딪힌 탓이었다.

"카나데랑 마후유 건 괜찮은데 감자튀김이 고민이네. 미리 해놓자니 눅눅해질 테고, 미즈키가 좋아하는 것만 준비하지 않는 것도 좀 그렇고..."

이미 받아들인 이상 대충 한다거나 타인에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건 안 됐다. 25시의 일러스트도 성에 찰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그리는 그녀가 '대충'을 허용할 리 없었다. 언제나 최고의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그러기 위한 노력은 해야 한다는 게 에나의 생각이었다.

오렌지색 실내용 슬리퍼가 주방을 서너 바퀴 돌았을 때쯤 소파 쪽에서 누군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그렇게 중얼거릴 거면 친구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하? 네가 무슨 상관이야. 신경 꺼."

"요리 잘하는 친구 있다고 엄청 자랑했잖아. 모모이 씨는 까먹기라도 한 거야?"

"아이리? 확실히 잘하긴 하지..."

곰곰이 고민하던 에나는 이내 아키토의 머리카락으로 손을 뻗어 마구 비벼대기 시작했다.

"웬일로 쓸모있는 아이디어를 다 내네?"

"하지 말라고, 에나! 머리 다 헝클어지잖아!"

아키토는 오만상을 썼지만, 에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두어 번의 통화 연결음 끝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모모이입니다."

"아이리, 오랜만이야. 잠깐 통화 가능해?"

"물론이지. 어쩐 일이야?"

"오랫동안 눅눅해지지 않는 감자튀김을 만들 수 있어?"

"응, 기본적인 감자튀김 레시피랑은 살짝 다르지만 가능해. 그런데 그게 왜?"

"이번 주 토요일에 수제 도시락 피크닉을 가거든. 같이 가는 친구들이 좋아하는 메뉴를 하나씩 준비하려고 하는데, 감자튀김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서."

"아하, 그렇구나. 그 음악 서클 친구들이랑 같이 가?"

"역시 눈치가 빠르구나."

스마트폰 너머로 쿡쿡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왜 웃어?"

"아니, 에나는 미즈키를 엄청 생각하는구나 싶어서. 미즈키가 좋아하는 걸 해주고 싶어서 이렇게 레시피까지 알아보고 있잖아?"

"나한테 있어서 중요한 사람이니까 당연하지."

미즈키는 늘 그랬다. 장난기가 가득해서 툭하면 어라, 에나낭 지금 화났어~? 하며 에나를 놀리곤 했다. 거기에 반박하는 게 25시 채팅의 약 80%를 차지할 정도로 둘은 심심하면 투닥댔다. 하지만 결코 미즈키가 무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유키히라 선생님께 날카로운 비평을 듣고 풀이 죽었을 때도, 마음처럼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아 고민하던 때도 미즈키는 음성 채팅의 미묘한 떨림을 알아챘다. 상심해서 웅크렸을 때면 어느샌가 등 뒤에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에나를 위로했다. 담백하면서도 기댈 수 있을 만큼 단단하게. 다른 사람 앞에서 징징대는 건 자존심이 용납지 않는 에나로서는 고마운 존재였다.

"어쨌든 레시피는 곧 보내 놓을게. 피크닉 재밌게 다녀와."

"응, 고마워. 역시 아이리가 있어서 든든하네."

"별말씀을. 이런 건 편하게 맡겨."

전화를 끊고 5분도 채 되지 않아 레시피가 도착했다. 에나는 제 주먹만 한 감자를 깨끗하게 씻었다. 미즈키가 좋아하려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을 움직였다. 곧 깨끗하게 손질된 감자가 쌓였다. 그제서야 시노노메 에나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완벽한 피크닉을 위한 첫 걸음이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토요일이 되었다. 아사히나 마후유는 평소처럼 정확한 시간에 눈을 떴다. 아침 7시였다. 손을 뻗어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을 끄고, 상반신을 일으켜 오늘의 일정을 확인했다. 11시 30분에 예비교 활동이 하나 있는 걸 빼면 특별히 움직여야 할 일정은 없었다. 엄격하게 정해진 일과에 따라 마후유는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비프 스튜가 놓여 있었다.

"마후유, 일어났니? 오늘 아침은 네가 좋아하는 비프 스튜란다."

"와, 맛있겠다. 고마워, 엄마."

한 숟갈 떠넣은 비프 스튜에서는 별다른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후유는 오래된 기억을 뒤적여 비프 스튜의 맛을 끄집어냈다. 적당한 단어와 형용사, 그리고 칭찬 한 스푼을 더해 감상을 완성했다.

"오늘 비프 스튜는 특히 더 맛있네. 푹 익힌 소고기랑 토마토의 산미가 잘 어울려."

효과가 있었는지 엄마의 얼굴이 확 펴졌다.

"어머, 기뻐라. 평소보다 더 좋은 재료를 쓴 걸 알아주다니 역시 마후유구나."

"응, 정말 맛있어. 오랜만에 먹는 거라서 더 맛있고."

"이 소고기는 엄마가 마후유를 위해 꼼꼼하게 고른 거란다. 토마토는 햇빛을 많이 받아서 감칠맛이 많이 나는 걸로 골랐고. 소중한 우리 마후유한테 아무거나 먹일 순 없잖니?"

"엄마 말이 맞아. 항상 날 신경써 줘서 고마워, 엄마."

"고맙긴, 마후유는 워낙 착해서 신경 쓸 것도 없는걸."

화기애애한 대화 속에서 마후유는 기계적으로 스튜를 삼켰다. 당근과 감자가 치아에 부딪혀 으스러졌다. 혀는 맛을 느끼기 위함이 아닌 목구멍으로 음식물 덩어리를 밀어내기 위한 기관이 되었다. 음식이 맛있건 맛없건 마후유에게는 그게 그거였다.

마후유가 음식을 먹고 남기는 감상은 거의 대부분 학습한 것이었다. 케이크는 달다, 혹은 레몬은 시다, 하는 정보를 외부에서 받아들이고 그대로 베껴냈다. 주위 사람들의 말과 살짝 어긋난 감상을 말했다면 능숙한 언변과 견고한 신뢰로 무마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고,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그러한 일이 이어질 수 있었다.

마후유는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힐끗 바라보았다. 한참 봄바람이 불어 벚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25시 멤버들이 놀러 가기로 한 토요일이 오늘이라는 걸 마후유는 뒤늦게 떠올려냈다. 예비교 활동을 위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드문드문 미련이 남았다. 평소에는 별 느낌 없었던 가방이 왠지 모르게 무겁게 느껴졌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쯤 마후유의 스마트폰이 메시지 수신 알림음을 보냈다. 학원에서 온 문자였다. 무슨 일이지, 하고 수신함을 열었던 마후유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오늘 예비교 활동은 프린트기 고장으로 인해 쉽니다. 오늘 분량의 프린트는 나중에 보내드릴 예정이며...'

이동해야 하는 스케줄이라면 이게 다였다. 그리고 방금 전의 문자 하나가 유일한 스케줄을 날려버렸다. 갑자기 생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마후유는 고민에 빠졌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도서관이었다. 마후유는 별다른 스케줄이 없다면 그곳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엄마가 가장 만족스러워하는 곳이기도 하니까.

도서관 정문에 다다르고서야 마후유는 노노기 공원이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기분 탓인지 오늘은 공원이 좀 달라 보였다. 그곳에는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와 따사로운 햇살이 있었다. 여럿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따스한 봄 날씨를 만끽하며 피크닉을 즐길 25시 멤버들이 거기 있었다. 가만히 손으로 쓸어본 가방 안의 책이 아까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아주 잠시만, 잠깐만 들렀다 가는 건 괜찮지 않을까.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엄마는 마후유가 예비교 활동이 취소된 시간에 도서관에서 공부했다고 해도 그다지 의심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때때로 신뢰는 맹점을 만들어내니까. 더군다나 지금까지 엄마 말을 거스르는 일은 한 번도 없지 않았나.

마후유는 가방끈을 꾹 쥔 채 스마트폰을 꺼냈다.

[지금 갈게.]

일방통보에 가까운 메시지를 보낸 후, 마후유는 벚나무가 모인 쪽으로 전력질주했다. 누가 시키진 않았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곧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아름드리 벚나무가 눈에 들어왔고, 그 아래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마후유! 왔구나!"

"못 온다더니 어떻게 된 일이야? 스케줄 바꿨어?"

"어서 와, 마후유. 기다리고 있었어"

"다들 고마워. 오늘 예비교 활동이 갑자기 취소됐거든."

"학원도 참, 그런 건 좀 미리 말해주지. 그래도 피크닉 참석할 시간이 생긴 건 잘됐다."

"프린터가 고장났대서 어쩔 수 없었어."

"자자, 그런 건 됐고! 마후유까지 왔으니 얼른 도시락 꺼내자. 나 배고파."

"그래그래,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파닥거리며 도시락을 내놓으라는 미즈키는 들뜬 일곱 살 어린애 같았다. 에나는 저도 모르게 풋 웃었다. 주섬주섬 도시락을 꺼내기가 무섭게 미즈키의 눈이 반짝거렸다.

"오오 ~ 에나, 설마 날 위해 일부러 감자튀김을 준비한 거야?"

"다 같이 먹으려고 준비한 거거든?"

"그치만 굳이 내가 좋아하는 감자튀김을 준비했다는 건 어느 정도는 날 생각했다는 거 아냐~?"

에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여튼 능글맞긴, 같은 생각을 하면서. 딱히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너만을 위해 준비한 도시락이라는 타이틀을 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손이 오그라들었다. 에나는 저도 모르게 답을 우물거렸다.

"...어느 정도는. 얼른 먹어."

얼굴로 찾아오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에나는 서둘러 감자튀김에 손을 뻗었다. 감자튀김의 바삭함이 화끈거림을 지워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직후에 스쳐간 말랑한 촉감에, 화끈거림은 지워지긴 커녕 더욱 존재감을 키웠다.

감각 신경은 한번에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느라 바빴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미즈키의 뺨, 빼빼로 게임을 하다 만 것처럼 끊긴 감자튀김, 입가 근처를 오고간 부드러운 촉감, 전신을 타고 도는 열기까지. 심장이 요란하게 쿵쾅거렸다. 느려진 사고를 억지로 가동하고 나서야 에나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미즈키, 너..."

"감자튀김 많잖아!!! 왜 내 걸 뺏어먹는데??"

시노노메 에나는 그리 솔직하지 못했다. 설레는 말보다 타박이 먼저 나왔다. 싫은 건 아닌데, 아니 좋은데, 어쩔 줄 모르겠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탓인지 괜히 어질어질한 것도 같았다.

미즈키가 딱히 이런 상황을 만들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친구가 먹으려던 간식을 잽싸게 뺏어가서 성질을 긁는 짓궃은 장난, 딱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거리가 예상보다 가까웠다는 게 빗나간 부분이었다. 평소에는 들이댄다 싶을 만큼 적극적이면서도, 막상 상대방이 다가오면 당황한다는 게 아키야마 미즈키의 기묘한 점이었다.

"아니, 그게...에나가 먹는 감자튀김이 맛있어 보이길래..."

여유로움은 어디 간 채로 횡설수설하는 미즈키, 눈도 못 맞추고 어쩔 줄 몰라하는 에나. 둘 사이에는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들은 오롯이 상대방에게 집중하며 상대의 모든 것을 읽어내려 애썼다. 표정의 형태와 시선의 온도는 물론, 말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형태 없는 것들까지 전부.

그렇기에 둘을 바라보는 지긋한 시선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긋한 시선의 주인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제 눈앞에 앉은 하얀 머리카락의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에나랑 미즈키, 사이 좋아 보이네."

"그러게.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좋네. 참, 일부러 시간 내줘서 고마워."

"딱히... 아까 말했다시피 프린트기가 고장났거든."

"그래도. 마후유를 볼 수 있어서 기뻐."

그러더니 카나데는 자신의 도시락에서 작은 샌드위치를 하나 꺼냈다.

"배고플 텐데 이거 먹어. 샌드위치야."

마후유는 샌드위치 귀퉁이를 집어들고 한 입 베어물었다. 삼각형으로 잘린 식빵과 내용물이 촉촉했다. 맛이 느껴지지 않아도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맛있다'는 게 무엇인지, 마후유는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고마워. 그리고 수고했어."

"으응, 아니야. 별로 힘들지도 않았어."

웃으며 고개를 젓는 카나데를 보고, 마후유는 딱딱하게 한마디 했다.

"카나데, 거짓말은 정말 못 하는구나."

"응?"

"손. 장갑 꼈잖아."

꽃샘추위가 물러가고 따스한 봄바람이 부는 4월, 요이사키 카나데는 암적색 장갑을 끼고 있었다. 마후유는 장갑의 검지 부분을 잡고, 그대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앗, 마후..."

급박한 목소리는 그대로 묻혔다. 카나데의 손이 무방비하게 허공에 노출되었다. 손가락 끝 마디, 손등, 손바닥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상처가 손을 뒤덮어서 누가 보면 고양이가 할퀴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날붙이를 다루는 데 서투르다는 게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카나데는 괜히 부끄러웠는지 양손을 숨겼다.

"아, 이건...메모하다가 종이에 베여서..."

마후유는 묻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는 카나데를 보고 픽 웃었다. 거짓말을 하려면 그럴듯하게 해야 믿지, 이렇게 횡설수설하는 사람의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을수록 말이 꼬이고 당황해하는 걸 보면 확실했다. 마후유는 더 묻지 않고 카나데의 양손을 살며시 끌어냈다.

"윽, 마후유, 아파..."

"가만히 있어."

마후유는 가방 안에 넣어 다니던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상처 치료용 연고, 일회용 밴드, 면봉, 소독약과 소독솜이 가득 들어 있었다. 소독솜에 소독약을 떨어뜨린 후, 촉촉해진 솜을 상처 부위에 살짝 문질렀다. 덜 아문 상처에서 보글거리며 흰 거품이 올라왔다. 카나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마후유는 익숙한 솜씨로 계속 진행했다.

마후유는 면봉 머리에 연고를 발라 베인 곳에 조심스럽게 펴 발랐다. 소독할 때보다 더 부드러운 손길로, 최대한 아프지 않게. 감자 깎다 생긴 얇은 상처, 오이 썰다 생긴 깊은 상처. 칼끝에 찔려 생긴 자상. 상처의 종류는 끝이 없었다. 같이 먹을 도시락 만들겠다고 혼자 낑낑대다 베였을 게 눈에 선했다. 마후유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창백한 손이 상처투성이니 더 안쓰러워 보였다.

"미안해, 마후유...이제부터 열심히 연습해서, 걱정 끼치는 일 없게 할게."

"....이게 다 카나데 잘못이야."

당혹감이 비치는 푸른 눈동자가 구슬마냥 동그래지는 게 보였다. 오해가 되지 않게, 마후유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항상 혼자 다 감당하고, 상처나도 말 한 마디 안 해주고, 남을 위해서는 뭐든 하면서 본인은 안 챙기고."

불합리한 투정이라는 건 마후유 본인도 알고 있었다. 배고픈 사람 먹이겠다고 손수 도시락까지 싸온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멈추지는 않았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고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마후유는 한 마디씩 끊어 뱉을지언정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픈 거 아픈 거 다 날아가라...멀리멀리 날아가라..."

깔끔하게 밴드를 감고 마후유는 참새 쫓듯 손을 휘저었다. 곧 어깨에 부드러운 손이 얹혔다.

"마후유, 치료해 줘서 고마워."

"딱히...상처를 방치하면 감염될 위험이 있으니까."

미소 띤 다정한 얼굴이 마후유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래도 고마워. 마후유가 일부러 나를 신경 써준 거잖아."

마후유는 차갑디차가운 공간에 따뜻한 스토브 하나가 놓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자그마해서 온몸을 덥힐 수는 없어도, 손을 녹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천천히 따뜻해지는 손과 함께 세상이 감각으로 채워져 갔다. 뺨을 훑는 봄바람, 침이 고이게 하는 샌드위치 냄새, 은은한 주위의 웃음소리,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은발의 여자아이.

"어라, 둘이 뭐하는 거야? 혹시 비밀 이야기라도 했어~?"

묘하게 웃음기 섞인 얼굴로 다가온 미즈키를 필두로, 마후유는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자신에게는 25시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사람들이 이곳에 있었다.

"다같이 도시락 나눠 먹게 가운데로 모으자. 그게 편할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미즈키, 감자튀김 그만 먹고 네 도시락도 꺼내."

"히히, 알았어. 내 도시락은 보면 깜짝 놀랄걸?"

벚나무 밑에서 넷은 웃고 떠들며 준비해온 도시락을 먹었다. 미즈키는 새로 산 블러셔를 자랑하다가 빌려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며 항의하는 에나에게 빼앗겼다. 마후유는 가늘게 눈을 뜨고, 카나데는 쿡쿡 웃으면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오랜만에 즐기는 느긋한 시간이었다. 공부하고 있는 게 아닌데도 혼날까 봐 걱정되지 않았다.

즐길 수 있는 시간은 놓치고 싶지 않다고, 마후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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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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