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데, 생일 축하해
침대 위에 요이사키 카나데가 아무렇게나 누워 있다. 한쪽 발은 의자에 걸치고, 다른 한 쪽은 침대 밖으로 삐져나온 채로. 컴퓨터 화면 불빛에 반사되어 푸르게 빛나는 머리카락 밑에는 악보와 메모지가 몇 겹이고 쌓여 있다.
카나데의 침대가 카나데의 체구에 비해 큰 편이기는 해도, 쉴 새 없이 쌓이는 종이뭉치들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작다. 책상 위에 놓지 못한 메모지는 그대로 카나데의 얼굴로 내려앉는다.
책상 주인이 어젯밤 늦게까지 깨어 있었음을 방증이라도 하듯, 컵라면은 온기를 잃고 식어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온기 같은 건 없었을 테지만. 작곡 이외의 일로 시간을 쓰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그녀는 시간을 아끼겠다는 이유로 찬물로 컵라면을 끓이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기겁하겠지만, 맛이나 향 따위를 모조리 포기하고 면을 불려서 먹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그것만큼 쉽고 빠른 방법도 없었다.
컴퓨터를 끄는 것도 잊은 건지 화면은 낮이 되도록 푸르스름하다. 암막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카나데의 얼굴을 비춰도, 상시 수면 부족 상태인 카나데를 깨우는 건 역부족이다. 아무리 재능 있고 열정 넘치는 천재라도 휴식 없이는 다음 곡을 써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카나데는 한번 잠들면 잘 깨지 않는다.
좀 특별한 예외가 있다면, 휴대전화 메시지 수신음 정도일까.
익숙한 수신음 소리에 카나데가 천천히 몸을 비튼다. 그리고는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찾는다. 소리가 들린 방향을 찾아, 기억에 의지해 손을 움직인다. 곧 손끝에 단단한 물체가 집힌다. 카나데는 흐릿한 눈으로 화면에 나타난 글자들을 읽어내려간다.
"오늘 예비교 활동이 있어서 접속은 못 할 것 같아. 미안해."
요즘 들어 자주 오는 마후유의 문자다. 학교도 사이버 스쿨에 다니는 카나데와 달리, 마후유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완벽한 우등생이다. 성적은 전교 10위권 밖을 벗어난 적이 없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원만하다. 얼굴도 예쁘고 궁도부 활동 덕에 체육도 꽤 하는 편이다. 미야마스자카 여학원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아사히나 마후유라는 이름을 들어 보았으리라. 대부분은 그녀를 선망했고 소수는 질투하거나 훼방을 놓는 무리도 있었으나 마후유의 완벽함 앞에서는 나름 잘 짰다고 생각한 계략도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들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아사히나 마후유가 무엇으로 이루어진 인간인지. '완벽함'이 사라진 아사히나 마후유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세카이에서 사라지고 싶다며 모두를 거부했던 마후유가 어떤 이유에서 삶을 이어가는지.
요이사키 카나데는 그날 아사히나 마후유에게 스스로 굴레를 쓰겠노라고 선언했다. 그래봤자 짐을 늘리는 꼴이 될 거라고, 차갑게 비웃는 마후유의 태도에도 카나데는 굴하지 않았다. 저주나 다름없는 속박이어도 마후유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자신이 있었다. 설령 그 대가가 엄청나다고 하더라도. 다행히 마후유는 카나데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었다. 지금 예비교에 간다는 문자가 왔다는 건 아직까지 마후유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의미겠지. 나이트코드에서 유키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약간 아쉽기는 하지만, 일상을 이어갈 힘이 남아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어차피 마후유는 예비교 활동 때문에 바쁠 때를 제외하면 꼬박꼬박 접속하곤 했다. 방학이라도 공부를 놓지는 않을 테니, 시간이 좀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새로운 문자가 수신되었다.
"카나데,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접속 못 할 것 같아. 오늘 못 한 건 내일 오전까지 꼭 보내 둘게."
에나였다. 에나가 접속을 안 하다니 별일이네, 방학이니까 낮에라도 접속할 줄 알았는데. 하고 카나데는 중얼거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장 먼저 접속해서 미즈키와 투닥거리던 에나였다. 하는 얘기는 별거 없었다. 새로 나온 옷이나 화장품, 선생님 험담, 일러스트나 동영상에 쓰일 소재 같은 흔하디 흔한 이야기들. 카나데의 삶에는 그런 흔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공부를 포기하고 사이버 스쿨로 진학하기로 한 시점에서, 카나데의 인생은 또래 아이들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다른 아이들이 쇼핑과 수다에 푹 빠져 있을 때 카나데는 오로지 작곡에만 골몰했다. 그렇기 때문에 카나데는 둘의 대화를 듣는 것이 좋았다. 하루의 대부분을 생산적인 일을 하는 데 쓰는 사람은 가끔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굳이 그 대화에 끼어들지 않아도, 카나데는 줄곧 비어있던 마음 한 구석이 채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에나의 문자에는 드물게 구체적인 이유가 적혀 있지 않았다. 약속이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뭉뚱그린 것은 사적인 일이라서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카나데가 캐물을 수는 없었다. 25시 멤버로서 함께 작품을 만든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사생활은 있는 법이니까. 평소 에나의 행동을 생각해본다면 역시 카페 탐방이라도 다니려나. 아니면 새로 생긴 옷가게에서 어떤 옷이 잘 어울릴지 진지하게 고민할지도 모른다. 저녁쯤 에나의 SNS 계정에 셀카가 올라온다면 카나데의 궁금증도 풀리겠지.
"그러면 오늘 접속하는 건...나랑 미즈키, 둘뿐이네."
다들 사정이 있어 그런다는 건 알지만 괜히 서운했다. 괜찮아, 내일이면 돌아올 거야, 그렇게 다독여도 카나데의 기분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인생의 몇 없는 달콤한 순간을 빼앗긴 듯한 느낌이었다.
카나데는 라디오라도 틀기로 했다. 가뜩이나 혼자 사는 집에 사람 목소리가 없으니 지나치게 조용했다. 때마침 라디오에서는 토크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힘들 때 가장 위로가 된 건 무엇이었나요?"
"글쎄요...제 경우는 친구들이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같이 있어줬거든요. 좋은 친구들이었죠."
거기까지 듣고 카나데는 라디오를 껐다. 기분 전환용으로 튼 라디오는 하필이면 카나데가 가장 마주하기 싫은 감정을 정면으로 건드렸다. 다시금 적막해진 집안이 견디기 힘들었다.
곧 진동 모드로 바꾼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또 뭐지. 카나데는 꿀꺽 침을 삼키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요이사키입니다."
"아, 카나데! 나 미즈키인데...오늘 접속이 힘들 것 같아서, 연락하려고 전화했어."
"....아, 그렇구나....낮에도?"
"응....아까 문자를 보내긴 했는데, 답장이 없더라고."
미즈키의 말대로 휴대폰 화면에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떠 있었다. 카나데는 문자에 바로바로 대답해주는 편이니, 한참 동안 대답이 없는 카나데에게 이상함을 느꼈으리라.
"미안. 잠깐 뭐 좀 하고 있어서."
"괜찮아,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뭐."
"응....그럼 미즈키, 내일 나이트 코드에서 봐."
"응, 25시에 보자."
딸깍, 하고 카나데는 전화를 끊었다. 오늘은 마라도 낀 걸까. 이상하리만치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나이트 코드에 접속해 멤버들을 만나던 때는 곧 사라지던 감정이, 지금은 밀물처럼 차오른다.
왜 다들 나만 두고 가는 거야.
혼자 두고 가지 마.
마음속에서 맴돌던 말은 목소리가 되지 못한 채 가라앉는다. 카나데는 이미 많은 걸 잃은 채로 살아왔다. 카나데를 누구보다 아껴주던 어머니를 잃었고, 카나데에게 꿈을 준 아버지는 장기 입원해 의식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이버 스쿨에 다니면서 카나데의 인간관계는 극도로 좁아졌다. 그런 일상 속에서도 가끔 웃음을 주던 것이 25시 멤버들이었는데.
이성은 단순히 날짜가 겹친 것뿐이니 별로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한다. 카나데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감정은 그렇지 못하다. 어린아이가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듯이 마음속이 울렁거린다. 왜, 왜 이런 걸까. 고작 연락 몇 통 받은 건데.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들인데. 울렁이는 큰 파도가 그대로 카나데를 덮친다.
카나데는 요 며칠간 줄곧 켜져 있던 컴퓨터를 껐다. 지금은 작곡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만들어도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곡이 아닐 테니 의미가 없다. 영감도 받기 힘들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자. 카나데는 그렇게 몸을 웅크렸다.
딩동, 딩동-.
초인종 소리가 몇 번씩 울려도 카나데는 무시했다. 어차피 찾아올 사람은 택배 배달기사뿐이었다. 오늘은 모치즈키가 찾아오는 날도 아니니, 나중에 택배만 가져오면 그만이다.
하지만 한껏 저기압이 된 카나데의 귀에도 무시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네. 카나데가 원래 이렇게 일찍 자?"
"아마 아닐걸. 작업하느라 못 들은 거 아냐?"
"카나데라면, 그럴지도.."
순간 카나데는 귀를 의심했다. 문 앞에서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나데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카나데! 집에 있었구나!"
"휴, 에나 말대로 했으면 못 만날 뻔했네."
"그치만 서프라이즈 하러 왔다고 어떻게 말해!"
"얘들아...."
안약을 넣은 것도 아닌데 눈가가 촉촉해진다. 거세게 울렁거리던 파도는 잔물결만을 남기고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다. 에나와 미즈키는 폭죽을 터뜨리고, 마후유는 하얀 상자를 하나 건넸다.
"카나데, 이거."
언제나 담담하던 마후유였지만 입가에는 미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무엇이길래 저런 표정을 지을까.
카나데는 상자 포장을 뜯다가, 그대로 손을 멈췄다.
"아."
하얀 생크림으로 잘 덮인 케이크 시트 위에 딸기 여덟 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다. 투명하게 코팅된 딸기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새하얀 케이크 상자에는 별다른 상표가 없다. 그렇다면, 설마.
"우리가 에나네 집에 모여 직접 만든 거야. 어때? 마음에 들어?"
"하여튼 미즈키는. 꾸미기 빼고는 반죽도 제대로 못 만들었으면서."
"뭐어? 그러는 에나도 케이크를 먹기만 잘하지 만드는 법은 잘 모르던데?"
"시끄러워!"
익숙한 투닥거림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나이트코드 너머로 듣는 목소리가 아니라,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더 생생했다.
투닥대는 둘을 놔두고, 마후유는 카나데에게 질문을 던졌다.
"카나데.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 알아?"
"응? 아니, 잘 모르겠는데.."
"2월 10일이야, 카나데."
2월 10일. 카나데는 입안에서 그를 곱씹어 보았다. 분명 무언가 있어서 케이크까지 선물해준 걸 텐데. 뭐지? 집안에서만 생활하다 시간 감각마저 사라진 모양이다.
"요이사키 카나데가, 태어난 날이야."
마후유의 말에 카나데는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그렇구나. 오늘은 내 생일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방학인데도 접속할 수 없다고 한 이유도 이해할 수 있었다. 디저트 같은 건 처음 만들어보는 셋이서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완벽한 케이크를 만들려면 낮에도 나이트 코드에 접속할 시간은 없었겠지.
"우리 집은 부모님이 계셔서 안 되고, 미즈키네 집은 좀 멀어서 에나네서 만들었어."
마후유의 목소리는 늘 그랬던 것처럼 건조하다. 하지만 오랫동안 마후유를 지켜본 카나데는 이것이 마후유 나름의 성의임을 알 수 있었다. 우등생 마후유가 부모님께 예비교 활동이라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친구 생일 케이크를 만든다는 건 엄청난 리스크를 동반하는 일이었다.
"고마워, 마후유. 너희들도. 정말로 고마워."
말꼬리가 살짝 물기에 젖는다. 촉촉하던 눈가는 발그레하게 붉은빛을 띠고 있다.
"에이, 좋은 날인데 웃어야지. 그건 그렇고, 아직 그 말을 안 했네.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외치는 거야, 알았지?"
"알았어. 얼른 시작해."
"응."
"그럼 시작한다? 하나, 둘, 셋!"
미즈키의 목소리는 솟구치는 불꽃처럼 경쾌했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카나데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생일 축하해, 카나데."
"생일 축하해."
"카나데, 생일 축하해."
"모두들, 고마워..."
그간의 아픔도, 외로움도 다 사라지는 것 같은 따뜻함이었다. 넷은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저마다의 고민을 품고 있는 넷에게 서로는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오늘은 나머지 세 멤버를 모이게 한 구심점, 요이사키 카나데의 생일이었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카나데."
누가 그 말을 했는지, 카나데는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누구면 어떤가. 카나데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앞으로도 넷은 쭉 함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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