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위한 쇼
미즈키의 핸드폰이 울린 건 그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가볍게 학교를 빼먹고 집에서 영상 작업을 하고 있던 정오를 조금 지난 때였다.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한 미즈키는 “별일이네.”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루이?”
“야아, 미즈키. 오늘도 어김없이 땡땡이 중이니?”
“뭐, 그렇지~. 랄까, 무슨 일로 전화를 다 했어? 뭐 부탁할 게 있다거나?”
“후후, 역시 미즈키는 못 당하겠네.”
“평소에 간간이 라인만 하던 루이가 전화를 걸 땐 항상 용건이 있었으니까.”
“오야, 누가 들으면 내가 용건이 있을 때만 너한테 연락하는 줄 알겠는걸?”
“에~, 아니었던 거야? 하하하, 농담은 이쯤 해 둘까? 그래서 무슨 일인데?”
“응, 혹시 저녁에 시간 있나 해서.”
“저녁?”
카미시로 루이가 뱉은 단어를 곱씹듯 따라 하며 미즈키는 머릿속으로 오늘 하루 동안의 스케줄을 떠올렸다. 어디 보자, 오늘 할 일이 뭐가 있더라…….
“으음, 지금 하고 있는 영상 작업만 마무리되면 괜찮을 것 같아. 마침 아르바이트도 오프인 날이고…….”
“기가 막힌 우연이네. 그럼 저녁에 원더 스테이지로 와 줄 수 있겠니?”
“에? 원더 스테이지? 루이가 연출을 하고 있다는 거기?”
“응, 이번에 쇼를 하나 하는데 미즈키가 봐 줬으면 하거든.”
“흐응……. 내가 저번에 루이한테 얘기한 것 때문에 일부러 신경 써 주는 거야? 감동이야, 루이~.”
미즈키는 평소와 크게 다를 거 없이 농담조의 말투로 흐름이 심각하게 빠지는 걸 방지했다. 더 참다가는 병이라도 날 것만 같아 살기 위해 털어놓은 거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선심을 받는 건 심리적으로 약간 부담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나에 대해 훨씬 잘 아는 루이라면 알아 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들을 속으로 곱씹으며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전화를 끊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미즈키의 귀에, 루이의 부언이 살며시 들려왔다.
“너에게, 정확히는 너의 고민에 확실한 도움이 될 거야.”
단언하는 투의 루이의 말에 미즈키의 마음속에 제동이 걸렸다. 아, 이건 좀 큰일인데. 이러면 나도 모르게 기대하게 되잖아. 그리 생각하며 미즈키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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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키가 루이에게 자신의 고민에 대해 얘기한 것은 약 2주 전이었다. 장소는 두 사람에게 있어 당연한 장소인 학교 옥상이었다. 평소의 당연함과 다른 것이 있다면, 옥상과 그 위의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것이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의 눈부신 햇빛이 아니라 얼마든지 마주 보고 있을 수 있는 아련하게 붉은 노을빛이었다는 것, 그리고 미즈키의 표정이 절박했다는 것과 그 앞에 서 있는 루이의 표정에서 웃음이 없었다는 것 정도였다.
노을빛에 적셔진 루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즈키는 힘겹게 입을 뗐다.
“루이, 있잖아. …나, 이제 진짜 모르겠어.”
모르겠다. 미즈키가 내뱉은 그 말은,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변명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디가 최선이고 어디가 최악인지 하나도 모르겠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모르겠다니?”
그것을 잘 아는 루이는 함부로 미즈키의 생각을 판단하지 않고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에나가…… 기다리겠대. 언제까지고 계속, 나를 기다려 주겠대.”
기다리겠다. 또는 기다리고 있다. 그런 느낌의 얘기를 루이 이외의 사람에게 들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단 한 번의 흔들림도 없이 올곧게 이쪽을 바라보던 맑은 눈동자, 가슴속을 울리고 머릿속을 소란스럽게 만들던 굳은 심지가 엿보이는 몇 마디 말들, 언어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었는지 온몸으로 표현하던 커다랗고 선명한 진심……. 미즈키에게 있어 에나는 분명히 기다려 왔었고, 그리도 염원했으며, 드디어 만난 사람이었다.
그랬는데.
분명 그랬는데.
“그런데, 내가 에나한테 나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정작 그 자리에서 전부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이상해.”라는 저주와 같은 기억 속 목소리가 원인이었다. 그 저주는 에나의 극진한 노력을 통해 잔뜩 부풀어 오른 ‘전부 얘기하자.’는 감정을 단숨에 한 뭉텅이의 충동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절망이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루이는 미즈키의 눈이 서서히 빛을 잃어 가는 걸 실시간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목구멍에서 번지는 쓰디쓴 감정을 간신히 삼켜 냈다.
“에나뿐만이 아니야. 에나한테 나에 대한 걸 털어놓게 되면 나는 다른 멤버들한테도 털어놓으려 할 거야. 그러지 않아도 되는 거 알아. 아는데……. 같은 서클의 멤버인데 누구한텐 말하고 누구한텐 말하지 않는 걸, 내가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문에 가까운 질문에 루이는 어떤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루이도 미즈키와 동류이기에, 본인이 그런 것처럼 그가 선택적으로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게 불가능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격의 문제라기보단 욕심의 문제였다. 이 사람한테 이해를 받았으니 저 사람한테도 동일한 이해를 받고 싶다는, 그런 인정받고자 하는 욕심 말이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서 받을 수 있는 이해와 존중에 명확한 한계점이 그어져 있기에 생기는 감정이었고, 또한 자포자기한 것처럼 굴면서도 타인에 대한 기대를 완벽히 떨쳐 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만약 한 사람으로 충분했다면 우리는 중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쭉 서로에게만 의지하고 있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루이는 미즈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스워……. 내 꼴이 너무 우스워, 루이. 내가 에나랑 진정한 친구가 되려면 나에 대한 걸 말해야 하는데, 입을 열려고 할 때마다 나를 떠난 예전 사람들이 생각나서 에나도 그러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 때문에 웃을 수밖에 없어.”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그런 거구나. 응,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게 무리는 아닐지도 모르겠네.”
“그렇지? 아하하, 에나와도 이렇게 얘기가 빠르게 진행된다면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어.”
힘이 없을 때 나오는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미즈키는 루이에게서 펜스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노을빛에 푹 물든 미즈키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루이는 언어로 구사하기 힘든, 동정이 아닌 동감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답답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운이 참 좋았다고 루이는 생각했다.
고독이 함께한 시절이 길긴 하지만, 그래도 중간 중간 기댈 수 있는 것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쇼와 연출에 대한 생각은 말할 것도 없고, 유소년 시절에는 소꿉친구인 쿠사나기 네네가 함께였고, 중학생 시절에는 눈앞에 있는 미즈키가 함께였으며, 지금은 텐마 츠카사, 오오토리 에무, 그리고 네네와 함께 극단을 꾸려 나가고 있다. 또한 이들 모두가 루이를 온전히 받아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건 ‘천운’이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의 행운이었다.
그러나 미즈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배척과 거부, 경멸과 환멸을 마주하며 살아왔다. 딱히 무언가를 한 것도 아닌데 인간관계의 엔딩의 9할이 그랬다. 예외가 되는 1할은 가족들과 루이, 그리고 시라이시 안 정도였다. 살아온 세월이 십 몇 년인데 그 가운데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 남은 게 다섯 명이라니, 미즈키는 그 사실에 실소가 한 번씩 나오곤 했다.
위와 같은 일들을 겪은 미즈키에게 있어 에나는 특별한 케이스에 속해 있는 사람이었다. 1할에 속해 있는 다섯 명에게서 볼 수 없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은 가족이기에 이해할 수 있었고, 루이는 분야만 다를 뿐이지 본인과 동류였기에 서로를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으며, 안은 미즈키 본인이 선을 그을 겸, 그리고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을 겸해서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에 대해 선언했을 때 우연히 그 속에 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즉, 에나처럼 먼저 능동적으로 너의 고민을 듣겠다며, 너에 대해 알고 싶다며 다가와 준 사람은 이제껏 없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것을 옆에서 봐 온 루이였기에 미즈키의 혼란을 더욱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다.
“고민이 많겠네, 미즈키.”
“그러게……. 행복한 고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눈에 너무나도 선명하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노을. 그것이 꼭 자신의 행복과 닮아 있는 것 같다 생각하며 미즈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건조하게 웃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는 거니. 마음속으로 그런 말을 건네며 루이는 미즈키를 따라 펜스 너머로 시선을 향했다. 마땅히 해 줄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는, 자신이 떠올린 해답이 지금의 미즈키에게 먹히지 않을 걸 알기에 발언을 참는 것에 가깝다. 애초에 미즈키가 루이에게 본인의 고민을 얘기할 때 해답을 필요로 한 적이 얼마 없기도 했고, 루이는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붉게 물들었던 하늘에 쪽빛이 조금씩 끼어들어 번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이렇게나 투명하게 흘러가는데, 왜 나는 아직도 과거에서 살고 있는 걸까.
그런 자조적이며 감상적인 생각을 하는 미즈키의 옆에서, 루이는 자신이 떠올린 해답을 어떻게 하면 혼란에 빠진 동료에게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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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키?”
수화기 너머의 부름에 미즈키는 감았던 눈을 뜨고 자신의 방 천장을 바라봤다.
“응, 듣고 있어.”
루이는 듣고 있다는 미즈키의 얘기에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아예 돌아선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선심을 쓰는 것이 미즈키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건 루이도 인지하고 있는 바였다. 알고 지내 온 세월이 년(年) 단위이기에 그 정도는 감으로라도 때려 맞출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는 움직이기로 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너에게도 언젠가는 네가 원하는 사람이 올 거야, 하며 뒤에서 지켜보는 게 불가능했다. 미즈키가 원해 오던 사람이 그의 가까이에 와 있는 상황이었고, 누군가가 그의 등을 밀어 줘야 하는 상태라 보였기 때문이다.
체육제 때의 은혜를 갚기도 해야 하니 말이지. 자신의 생각들을 한마디로 정리하며 루이는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런 이유로 오늘 저녁에 원더 스테이지에 와 줬으면 하는데, 어때?”
너를 위해서, 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루이가 다시 한 번 미즈키에게 제안했다. 미즈키는 제 아랫입술을 잘근 씹곤 코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주해야 한다는 건, 언제까지고 도망만 칠 수 없다는 건, 한 발자국을 떼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그걸 돕는 게 루이일 줄은 몰랐고, 그 방식이 이렇게나 루이답지 않은 적극성과 루이다운 쇼라는 것일 줄은 몰랐다.
미즈키는 몇 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마음 한 구석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던 수긍이라는 감정을 깨달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주저가 무의미하다는 걸 실감했다. 그 무의미함에 허무함이나 공허함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동반되지 않았다는 건 참으로 행운이었다.
루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연출을 거북해하며 떠났다고 했고 본인의 경험담이니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함께 쇼를 꾸려 나가는 배우와 스태프들에 한정되어 있는 얘기라고, 관객에 속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연출을 좋아한다고 미즈키는 생각했다. 본인이 그 관객 중 한 명이기에 더욱 그랬다. 물론 루이가 원하는 것이 자신과 함께할 수 있는 동료들, 그리고 그들과 같이 만드는 쇼이기에 관객에게 집중하면 되지 않느냐는 식의 얘기를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작고 한정된 옥상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루이의 크고 끝없는 연출에 대한 이야기. 그의 격앙되어 있는 말투를 따라 스스로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꿈과 같은 스테이지. 드론이나 로봇을 통해 한 번씩 보여 주는, 루이 자신이 늘어놓은 연출에 대한 이야기의 작은 편린까지. 고독을 함께하는 동료로서도 그랬지만 연출가와 관객으로서도 미즈키는 루이에게 끌렸다. 연애나 성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루이라는 사람 그 자체에 말이다.
그런 내가 루이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까.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단정을 듣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어, 알겠어. 몇 시까지 가면 되는데?”
“제안에 응해 줘서 고마워, 미즈키. 음, 여덟 시가 공연 시작이니까 그 시간에 맞춰서 오면 될 거야.”
“오케~. 그나저나 루이, 여태까지 본 것 중에 가장 필사적인 것 같은데 내 기분 탓이야?”
미즈키의 물음에 루이는 “후후. 글쎄, 미즈키가 생각하는 게 정답일 거라 생각하는데.” 하고 대꾸하면서, 너를 위한 일인데 필사적이지 않으면 안 되지, 하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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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라면 역시일까, 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피닉스 원더랜드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혼자 이곳을 찾는 건 처음이네.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미즈키는 인파 속을 미끄러지듯 지나치며 원더 스테이지를 향해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공연 시작까지 얼마 안 남기도 했고, 기왕 보는 거라면 명당에서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얼마 가지 않아 도착한 원더 스테이지는 미즈키가 상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허름했다. 이전에 연출을 하는 곳이 어떤 느낌의 장소냐고 루이에게 물었을 때 돌아왔던 “으음, 골동품 같은 곳이려나. 그래서 더 재미있어.”라는 대답이 무슨 느낌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무대의 낡음과는 상관없이 관객석은 사람들로 붐볐다. 남녀노소에 구애 받지 않는 다양한 관객층을 바라보며, 미즈키는 새삼 루이와 그의 극단 멤버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장인은 악기를 가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러고 보니 SNS에 화제가 되었던 피닉스 원더랜드의 나이트 쇼도 루이네가 주도한 거라고 그랬지. 그러한 생각들이 물방울처럼 퐁퐁 떠오르는 걸 내버려 두며 미즈키는 남아 있는 자리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 앉았다.
스마트폰으로 나이트코드 멤버들과 다음 곡의 방향성에 대해 몇 분 정도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스테이지와 관객석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던 스포트라이트가 팡, 하는 소리를 내며 꺼졌다. 시작하나 보다, 기대된다, 오늘은 어떤 쇼일까.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속삭임들이 어울러 낸 웅성거림 속에서, 미즈키는 멤버들에게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스마트폰을 껐다.
다시 팡, 하는 소리를 내며 들어온 불빛 한 줄기 밑에 서 있는 건 텐마 츠카사였다.
“으흠! 오늘도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아침이구나! 좋은 일이 펼쳐져 있을 예감이 나를 감싸는군!”
우와, 딱 선배다운 배역이네. 쓴웃음을 지은 채 박수를 치며 미즈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좋은 아침이네, 아마우마(天馬) 군! 오늘도 저 위에 있는 해님처럼 반짝반짝 건강하구나!”
“오, 에미(웃음) 아닌가! 등교하는 중인가 보군!”
두 번째 불빛과 함께 등장한 사람은 진한 분홍색의 머리칼을 가진, 미즈키에게 있어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익숙한 사람이었다. SNS에 올라온 나이트 쇼 영상을 통해서 본 것도 있지만, 교내에서 츠카사 선배와 함께 있는 모습을 몇 번이고 봐 왔기 때문이다. 저 여자애, 학교에서도 분명 저런 텐션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무슨 내용의 극이기에 현실의 성격을 그대로 빼 온 걸까.
“아앗!”
“무슨 일이냐, 에미!”
“쿠사네(草寧) 쨩이 저기에서 혼자 등교하고 있어! 아마우마 군, 같이 가서 깜짝 놀라게 해 주자!”
“오우! 그런 서프라이즈는 언제든 환영이다! 살금살금…….”
“살금살금……. 쿠사네 쨩, 좋은 아침!”
“우왓……! 에, 에미? 깜짝 놀랐잖아…….”
“아~하하하! 작전이 제대로 들어갔군! 좋은 아침이다, 쿠…….”
“시끄러워, 아마우마…….”
“나눗?! 왜 에미한테만 상냥한 거지?!”
“하? 네가 에미인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세 번째 불빛과 함께 등장한 사람은, 쿠사네라는 이름에 걸맞게 풀빛 머릿결을 가진 작은 체구의 소녀였다. 미즈키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학교와 학년이 같아서 몇 번인가 마주치기도 했고, 무엇보다 중학생 때 루이가 입이 닳도록 얘기했던 사람이 바로 저 무대 위에 있는 쿠사나기 네네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뭔가 이상하다고 미즈키는 생각했다. 아마우마, 에미, 쿠사네. 에미는 잘 모르겠지만 나머지 두 명은 각각 두 사람의 원래 이름인 텐마(天馬)와 쿠사나기 네네(草薙寧々)에서 따온 것일 게 분명했다. 애초에 무대 위에 있는 세 사람이 하고 있는 연기가 평상시의 그들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을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실일 것이다.
심지어 복장도 교복……. 어라? 그런데 저 교복, 분명 중학생 때의…….
미즈키가 거기까지 떠올렸을 때, 무대 위에 네 번째 불빛이 켜졌다.
그 불빛 밑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정확히는 그 사람의 차림새를 보고 미즈키의 두 눈은 크게 떠졌다.
그곳에 있는 건 다름 아닌, 중학생 시절의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 루이였다.
“…후후, 즐거워 보이는구나.”
그 시절을 공유한 사이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단순히 루이가 연기를 잘하는 것일까. 미즈키의 귀에 들려온 루이의 한마디에는 중학생 때와 똑같은 크기의 쓸쓸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던, 한 발자국을 제대로 떼지 못하던 그 시절의 루이의 감정이 그 한마디 안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유일하게 역할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루이는, 그 한마디를 내뱉고 무대 구석으로 가 로봇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만면에 웃음을 띠울 때가 있는가 하면, 자신이 하는 일들의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 하는 것처럼 만면에 애상을 물들일 때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루이가 감정을 입체적으로 표현할 때마다 다른 세 사람은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그를 향해 다가갔다.
“어라? 아마우마 군, 쿠사네 쨩! 저기에 누가 있어!”
“음? 호오, 진짜군……. 뭘 하고 있는 거지? 여기서 보기엔 로봇인 것 같다만, 그렇다면 꽤나 별난 사람이라 볼 수 있겠군.”
“네가 별나다는 얘기를……. 뭐, 그래도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네. 평범하진 않으니까.”
루이의 근처에 어느 정도 도달한 세 사람은 그렇게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그리고 미즈키는 그 문장들에 섞여 있던 ‘별난 사람’과 ‘평범하진 않다’는 표현에 저도 모르게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의 여러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 표현들은 루이와 미즈키의 뒤를 아직까지도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있는 꼬리표였기에, 묻어 둔 기억들이 고개를 드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와~이! 보라 머리 친구, 로봇 만들고 있는 거야?”
분홍 머리의 소녀가 루이 쪽으로 폴짝, 하고 뛰며 물었다. 그제야 루이는 로봇을 향해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풀고 분홍 머리 소녀와 그 뒤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오야, 너희들은 누구니?”
“우리들은 이 학교의 학생이다! 나는 하늘을 나는 페가수스라는 뜻에서 아마우마라고 하지! 그리고 이 분홍 머리는 에미, 초록 머리는 쿠사네라고 한다. 그나저나 처음 보는 얼굴인 것 같다만, 혹시 전학생인가?”
“후후, 전학생은 아니란다. 너희들과 똑같이 1학년 때부터 쭉 다니고 있어.”
“미, 미안……. 얘가 좀 무례해. 혹시 기분 나빴다면 용서해 줘.”
“쿠사네, 그게 무슨 말인가, 무례라니!”
“괜찮아. 학교에 잘 안 나오기도 하고, 나온다고 해도 이렇게 교실이나 복도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으니까 모를 만하다고 생각하거든.”
“왜 멋대로 얘기가 진행되는 거지?”
“스톱, 스토옵!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 보라 머리 친구!”
이 사람들, 실제로도 처음에 이렇게 만난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미즈키가 알고 있는 그들의 모습 그대로가 눈앞에서 극으로써 펼쳐져 나가고 있었다.
“질문이라면, 이 로봇 말이니?”
루이가 제 손에 쥐고 있던 로봇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응, 응! 맞아! 만들고 있던 거야?”
“후후, 맞아. 오랜 취미랄까? 어려서부터 로봇을 꽤 좋아했거든.”
“호오, 로봇을 좋아한다라…….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거지?”
“음, 정말 많지만 하나만 꼽자면……. 역시, 귀엽기 때문이려나?”
루이의 마지막 대사와 함께 무대가 갑작스럽게 암전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미즈키의 마음속에도 암전과 비슷한 극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 루이가 무대 위에서 연기하고 있는 게 누구인지 깨달은 탓이었다.
루이가 연기하고 있는 건 미즈키였다.
생김새, 말투, 로봇, 그 모든 것들이 루이를 표현하고 있었으나 마지막 한마디에 미즈키는 그리 직감했다. 눈앞의 루이는 자신이라고 말이다.
이어진 명전.
무대 위에서는 네 사람이 활기차게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 걸까. 나에게 도움이 되는 쇼라고 했는데, 그건 언제부터인 걸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실제 학교에서도 볼 수 있을 것 같은 시시콜콜한 대화가 오가는 장면을 미즈키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네 사람의 볼륨이 서서히 작아지다가 이윽고 무음 상태가 되었고, 스테이지 위에 설치되어 있는 메인 스피커를 통해 기계음이 덧씌워진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묘하게 루이의 소꿉친구랑 목소리가 닮아 있네, 하고 스피커를 바라보며 미즈키는 생각했다.
“네 사람은 그대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아마우마와 에미, 그리고 쿠사네는 함께 연극부를 꾸려 나갈 사람을 찾고 있었고, 마침 세 사람의 눈앞에 나타난 보라 머리 친구는 로봇을 통해 재미난 연출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통을 받듯이 방금 전에 뮤트되었던 루이의 목소리가 뒤를 이어 흘러나왔다. 미즈키는 반사적으로 다시 루이 쪽으로 시선을 옮겼고, 자신도 모르게 헙, 하고 숨을 삼켰다. 숨길 기색도 없는지, 루이의 두 눈동자가 너무나도 똑바르게 자신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세 사람은 아까 하던 대로 침묵의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연출의 일종인 걸까. 그런 미즈키의 생각을 긍정하는 것처럼, 루이는 내레이션을 이어 나갔다.
“그 문제란, 보라 머리 친구가 남들에게 얘기하기 힘든 고민 하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봇에게 영혼이 있다고 믿으며 그들과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장된 루이의 말씨와 몸짓에 관객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속에서 미즈키는 그들과 의미가 조금 다른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방금 언급된 보라 머리 친구의 고민. 그것이 미즈키가 가지고 있는 실제 고민을 그대로 가져다 쓸 수 없었고, 루이 자신의 배역을 고려했을 때 가장 덜 어색할 거라 판단되어 창작해 사용한 소재라는 걸 눈치 챘기 때문이다. 실제로 루이는 자신이 창작한 고민이 말도 안 되는 것이긴 하지만 남들에게 이해 받기 힘들다는 속성에선 일치하고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루이 치곤 애매한 배려네. 뭐, 쇼라는 제약이 걸려 있으니 어쩔 수 없나. 미즈키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무대가 다시 암전과 명전을 반복했다. 빛이 들어온 스테이지 위에선 쿠사네와 루이가 서로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있잖아, 그……. 우린 친구지? 그렇지?”
쿠사네가 조심스레 입을 열어 루이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응? 당연하지. 갑자기 왜 그래?”
“뭐랄까……. 우리한테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아서.”
무대 위의 루이가 쿠사네의 얘기에 어깨를 한 번 움찔 떨었고, 무대 밖의 미즈키도 어깨를 한 번 움찔 떨었다. 루이는 태연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후후, 그럴 리가. 나한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니.”
“하지만……. 하지만, 가끔씩 쓸쓸한 표정을 짓잖아. 꼭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세상에 있는 모든 상처들을 받아 낸 사람인 것처럼…….”
“내가 그랬다고……?”
믿기지 않는다는 뉘앙스의 루이의 물음에 쿠사네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얘기해 주지 않을래? 무슨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쿠사네.”
“어떤 고민이어도 괜찮으니까! 응, 네가 외계인이라거나 유령이라거나, 그런 존재라는 게 고민이어도 괜찮으니까. …얘기해 줬으면 좋겠어.”
또 다시 암전이 이어졌고, 미즈키는 어두워진 무대를 바라보며 혼란을 느꼈다. 본인은 그저 ‘에나가 기다리겠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얘기만 했을 뿐인데, 루이가 펼쳐 놓은 무대 위 세계는 그날의 옥상의 분위기와 대화의 결을 그대로 빼다 박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혼란의 탓인지 가슴속 저 구석에서 술렁거림과 울렁거림이 치밀어 올랐다. 아, 어떡하지. 도망가야 될까.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루이의 쇼인데. 미즈키가 그런 내적 갈등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쇼는 거침없이 계속되었다.
어둠 속에서 불빛 한 줄기가 들어왔고, 그 빛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은 루이였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가 저의 비밀을 쿠사네에게 얘기해도 괜찮을까요?”
관객 쪽으로 몸을 돌리고 미즈키 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루이가 질문을 던졌다. 우리한테 묻는 거야?, 어떻게 대답해야 해?, 말해도 되는 거야? 그런 얘기들이 관객석 여기저기에서 작게 피어올랐고, 미즈키는 그 물음표들의 범람에 휩쓸리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자신의 비밀을 친구에게 얘기해도 괜찮을까. 그 질문에 답할 자격이 자신에게 없다는 생각이 그를 지대하게 지배하고 있던 탓이었다.
몇 초 동안 미즈키의 묵비권 행사를 묵묵히 바라보던 루이는 가볍게 쓴웃음을 흘렸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이어도 좋으니 얘기해 줬으면 했는데. 이렇게 되면 계획했던 대로 하는 수밖에 없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루이는 무대 위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너무나도, 너무나도 어려운 고민입니다. 얘기하고 싶지만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그런 감정이 영화 필름처럼 연속적으로 떠올라 제 생각들을 마구잡이로 헤집어 놓습니다. 이럴 때 해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저를 놓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에 있는 누군가에게 조언을 받고자 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루이의 대사가 끝나자마자 조명 하나가 켜져 관객석 쪽을 훑듯이 어지러이 움직였다. 여기까지 쇼가 진행되니 미즈키는 루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게 설마 이런 거였다니. 미즈키의 본능은 그의 다리에 힘을 불어넣었고, 머릿속에서는 경종과 닮은 도망치라는 고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와는 상반되게 미즈키의 마음속에서는 도망치고 싶지 않다는 속삭임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상충하는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미즈키의 머리 위에서 조명이 멈췄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와 부러움의 눈길이 빛 아래에 앉아 있는 이에게 쏟아졌으나, 정작 그는 그것들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무대 위에 서 있는 자신의 동료이자 친구를 바라봤다.
루이는 미즈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당신입니다. 무대 위로 올라와 주세요.”
그의 대사에 박수 소리는 한층 더 커졌다. 미즈키는 그것에 떠밀리듯, 어떻게 보면 조종당하듯 무대 위로 발걸음을 뗐고 그 길을 조명이 끊임없이 비추었다. 이대로 올라가도 괜찮은 걸까. 그런 생각이 심장을 옥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미즈키는 자신이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그 원리와 이유가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상태였다. 도망쳐야 한다는 이성과 도망치고 싶지 않다는 감정 사이에서 감정이 이긴 게 원인이었다.
미즈키가 무대 위에 올라 자신의 앞에 서자 루이는 입을 열었다.
“카시루 씨.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자신에게 부여된 배역의 이름에 미즈키는 자신도 모르게 “푸핫!” 하고 작게 폭소했다. ‘카미시로 루이’의 앞 글자만 따와 지은 이름이라는 게 너무 티 나서였다.
“그 전에 당신의 이름은 어떻게 되나요?”
루이가 맡은 역할이 본인이라는 걸 알면서도 단순한 호기심에, 그리고 쇼에 몰입할 생각으로 미즈키가 물었다. 루이는 미소를 지으며 지체 없이 대답했다.
“아야미라고 합니다.”
자신이 맡은 배역과 똑같은 형식으로 지어진 이름 앞에서 미즈키는 기왕이면 조금 더 귀엽게 지어 주지, 쇼가 끝나면 한마디 해야겠네, 하는 생각들을 떠올리며 얕고 쓰게 웃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카시루 씨, 제 물음에 답해 주세요. 제가 쿠사네에게 제 고민을 얘기하는 게 맞을까요?”
루이가 아야미로써, 미즈키로써 질문을 던졌다. 미즈키는 카시루라면, 루이라면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지 잠깐 고민한 뒤에 입을 열었다.
“친구에게 고민을 얘기하는 걸 망설이는 이유가 뭔가요? 쿠사네를 잃는 게 두려워서? 아니면 아야미 씨의 고민이 거부당하는 게 두려워서?”
루이를 향해 방금 창작한 대사를 입에 담으며 미즈키는 스스로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 나는 뭘 두려워하는 걸까? 에나랑 멤버를 잃는 거? 아니면, 내가 또 다시 거부당하는 거?
“둘 다에요.”
루이의 대답에 미즈키는 깨달았다. 그렇다, 둘 다 두렵다. 사람이 떠나는 것도, 떠난 사람이 남겨 놓을 상처도 모두.
“…그런데도, 그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데도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어째서죠?”
“속이는 건…… 괴로우니까요.”
그렇다. 괴롭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다 괴롭다. 얘기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결과적으로 속이게 되는 것도, 얘기하게 되었을 때의 결괏값을 혼자 상상하는 것도, 운 좋게 한 사람의 이해를 받아도 탐욕스럽게 계속해서 다른 사람의 이해를 바랄 성정도,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하면서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는 애매함도……. 그 전부가 괴롭다.
“아예 전부 놓아 버릴 생각은 안 들던가요?”
“들었죠. 그런데 잘 안 되더라고요.”
잘 안 되었다. 그 말대로다. 인생의 마침표를 스스로 찍으려 할 때마다 정말 귀신 같이 실낱같은 희망이 준비되어 있었다. 가족, 루이, 카나데의 음악, 니고, 그리고 에나. 참 신의 장난인지 배려인지 모르겠는 일이다.
미즈키는 소리 내지 않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루이라면 나에게 어떤 조언을 해 줄까, 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기 위해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것을 제대로, 그리고 빠르게 고민하지 않으면 관객들이 이상하게 보거나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을 거고, 그건 곧 자신이 좋아하는 루이의 쇼가 어그러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루이라면, 루이라면 나한테 무슨 말을…….
안개보다 흐릿하고 미로보다 복잡한 고뇌의 시간 끝에서 미즈키는 어렴풋하게 해답 비슷한 걸 찾아냈다.
“얘기해요. 그래도 괜찮아요.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게 죄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거부당하면 어떡해요? 제가 다시, 다시 혼자가 되어 버린다면……. 그러면 저는,”
“괜찮아요. 아니, 응, 분명 안 괜찮겠죠. 그 고독은 아야미 씨 혼자 감당하게 되는 거니까요. ……그래도, 제가 있잖아요. 제가 당신의 옆에 있을게요. 별거 아닌 사람이지만, 영원을 약속해 줄 순 없지만, 아야미 씨가 허락만 해 준다면 잠깐의 위로여도 좋으니 함께해 줄게요.”
자신이 찾아낸 해답을 입에 올리며 미즈키는 자각했다. 한 사람에게 이해를 받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도 이해를 바라게 된다는 얘기가 지금의 자신에게 충분히 적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 다른 사람에게 이해를 바라기 전에 가져야 할 선결 조건인 한 사람의 이해, 그것을 루이를 통해 진즉부터 받고 있었다. 정말 만약에 에나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다른 멤버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걸 곱씹으며 끝없이 감정의 심해로 가라앉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이미 눈앞에 있던 것이다.
물론 루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건 미즈키도, 그리고 루이도 알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한계가 명확하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도 된다는 얘기로 귀결되는 건 아니었다. 언제나 이번이 전부가 아니니까. 다음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미즈키는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라거나 등잔 밑이 어둡다거나 하는 얘기들은 본인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멍청한 거라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건데 어떻게 그걸 잊고 못 볼 수 있나 싶었다.
나는 멍청이였구나. 그리고 루이, 고생 많았겠네.
끓어오르려 하는 눈물을 꾹꾹 누르며 미즈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루이가 티 없는 웃음을 가득 지어 보이곤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사를 쳤다.
“고마워요, 카시루 씨. 용기를 내 볼게요.”
대사를 얘기하는 루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던 위로의 말들을 미즈키 스스로가 찾아냈다는 것에 감동을 느끼고 있어서였다.
“나야말로 고마워.”
카시루로써 호응해 줄까 싶다가 그러고 싶지는 않아 ‘아키야마 미즈키’로써 루이에게 대답했다. 이타적이란 말로도 다 담을 수 없는 상냥함을 가진 친구에게, 유일한 이해자에게 진심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다행스럽게도 관객들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건지 아니면 그것마저도 쇼의 일부분이라 생각한 건지, 미즈키가 무대 위로 올라갈 때보다 더 큰 박수 소리를 두 사람에게 보낼 뿐이었다.
루이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여 “응원할게.”라고 얘기했다.
미즈키는 그 말에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얼굴 위에 띠웠다.
그 웃음 위로 얇은 눈물이 짧게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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