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위에 요이사키 카나데가 아무렇게나 누워 있다. 한쪽 발은 의자에 걸치고, 다른 한 쪽은 침대 밖으로 삐져나온 채로. 컴퓨터 화면 불빛에 반사되어 푸르게 빛나는 머리카락 밑에는 악보와 메모지가 몇 겹이고 쌓여 있다. 카나데의 침대가 카나데의 체구에 비해 큰 편이기는 해도, 쉴 새 없이 쌓이는 종이뭉치들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작다. 책상 위에 놓지 못한
요이사키 카나데의 집에는 드나드는 이가 많지 않다. 생필품과 컵라면 박스를 배달하는 택배 기사를 제외하면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외에는 현관문이 열리는 일조차 없었다. 카나데는 적막한 집이 익숙했다. 아니,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져야 했다. 아버지가 쓰러지던 그 시점부터 카나데는 갑작스레 대화할 기회를 빼앗겼다. 머뭇거리며 뱉은 "좋은 아침이야"나
아사히나 마후유가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학교는 끝났고 예비교 활동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애매한 시간대에, 조금 들뜬 발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걷는다. 예쁘게 묶인 보라색 머리카락 뒤에서 소곤대는 목소리가 들린다. "와, 아사히나 선배다. 어디 가시는 거지?" "당연히 공부하러 가는 거겠지. 그 성적을 유지하려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걸." "하긴 그렇겠지?
"마후유, 마후유! 이번 글쓰기 숙제 내용 뭘로 할지 정했어?" "글쎄...아직 못 정했어. 주제가 가족이라서 그런가 고민이 되네." "그치? 마후유도 그렇지? 나도 도대체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 "넌 매번 그러잖아. 어쩌다 한 번 고민하는 아사히나랑은 다르지." "너무하네, 고민할 수도 있지!" 마후유는 피식 웃었다. 숙제의 내용을 그렇게까지 고민할
퇴근하는 마후유의 발 아래로 마른 낙엽이 밟혔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낙엽은 공중으로 흩어졌다. 바람이 데려온 한기가 코트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마후유는 바르르 몸을 떨었다. 아직 가을이라지만 날씨가 추웠다. 괜스레 따스함이 고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덥혀줄 난로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 따스하고 다정하고, 항상 내 곁에 있어주는 그런
살다 보면 가끔은 세상을 원망하며 한없이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내 감정과는 상관없이 아침이 되면 불그스름한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 끔찍이도 보기 싫어서, 시간이 흐르지 않기를 바라는 때도 있다. 물론 세상은 그리 너그럽지 않다. 시간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다른 형태로 바뀌어 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그런 흐름을 조금이나마 거스르
저녁거리를 고르느라 바쁜 주부들 사이로 짙은 보랏빛이 자연스레 섞여든다. 마후유는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무심한 얼굴로 장바구니를 집어들었다. 옆을 스치는 사람들이 흘끔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명문 여학교 미야마스자카 여학원 학생이 이 시간에 여기서 장을 본다고? 진짜? 그런 노골적인 시선이 쏟아진다. 순간 마후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옷을 갈아입을걸
아사히나 마후유는 무감각한 인간이다. 그녀가 짓는 미소는 아름답지만 텅 비어 있다. 그 어떤 것을 보더라도,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마후유는 웃음을 꾸며낸다. 그녀의 주변인이 그녀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그렇기에 마후유는 제 눈길을 끄는 한 소녀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제대로 안 먹어 아담한 체구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스치듯 기억해둔 말을 카나데는 몇 번이나 곱씹고 있었다. 카나데가 태어난 때보다 몇 세기는 일찍 만들어진 말이지만, 그 말은 놀랍도록 잘 맞아떨어졌다. 시간의 흐름은 감정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기나긴 시간 속에서 감정이란 찰나의 일에 불과했다. 요이사키 카나데는 지금 아주 의외의 방법
해가 쨍쨍한 7월이었다. 이글거리는 태양빛만큼 식물들은 줄기차게 꽃을 피웠다. 짙은 주황빛을 띠는 능소화, 수많은 씨앗을 품고 노란 꽃잎을 활짝 펼친 해바라기, 하얗고 청초한 백합. 꽃집에도 별의별 꽃이 다 들어와 있었다. 햇빛의 은혜를 듬뿍 받는 7월은 꽃들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계절임을 꽃집 주인은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꽃집에 소녀가 들어왔을 때 자
"나, 내일 접속 못 해." "뭐? 너 시험기간 때문에 한참 동안 접속 못 했잖아!" "워워, 진정해, 에나. 마후유는 할 일이 많잖아." 갑작스런 마후유의 접속 불가 선언은 25시 멤버들에게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대개는 시험 기간, 가끔은 동아리 활동. 혹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개인적인 사정도 있었다. "학교에서 여름 학습 캠프를 한대. 나도 참
흘러내린 눈물이 뺨을 적셨다. 축축하게 스며드는 물기가 괴로워 옅게 신음하다가, 아가씨는 눈을 떴다. 온통 어두워 무엇도 보이지 않지만 코에 닿는 냄새는 익숙하다. 외롭게 홀로 떨고 있지 않아도 된다고 다독여주는 듯한 안온한 향기. 손등으로 눈가에 남은 눈물을 닦아내고는 아사히나 마후유는 상체를 일으켰다. 덮고 있던 얇은 이불이 사르륵 흘러내린다. 이불의
아사히나 마후유는 착한 아이다. 정말이지, 아사히나 마후유는 착한 아이다. ‘착하다’ 는 표현의 정의가 다소 협소할지라도, 그녀를 두고 착한 아이라고 평하는 이들의 의도는 가감없이 표출되고 전달된다. 유치원에 들어가던 시절부터 의무교육 시기를 지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마후유는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언제나 착한 아이였다. 이 세상 부모들
3월의 하늘은 맑았다. 봄이 시작되는 시기였지만 불어오는 바람에는 포근함을 시샘하는 겨울의 질투가 묻어났다. 목의 리본을 매만진 다음, 아사히나 마후유는 가디건을 걸쳤다. 거울을 마주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아가씨는 찬찬히 자신의 모습을 훑었다. 단정한 교복에 붉은 리본, 짙은 검은색 스타킹. 지난 몇 년 동안 매일 같이 입으며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1.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실로폰 건반 두드리듯 울린다. 장마가 시작되기에 앞서 빗물받이 배수관을 한 차례 정비했다는 이야기를 듣긴 하였다. 배수관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처마 아래로 뻗은 빗물길이 비스듬하게 설치된 걸지도 모른다. 기울어져서 높이가 달라진 이음매마다 빗물이 고이고,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은 각기 다른 위치 에너지를 가진 채 툭 뻗어
누군가가 생전 안하던 일을 하겠다고 나서면 그건 위험 신호라고 했던가. 그 뜬금없는 행동이 심경의 변화를 암시하는 지표로 보이지 않더라도 촉각을 곤두세울 일이다. 일상의 궤적을 벗어나는 행동은 예측할 수 없는 결과값을 만들어낸다.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관심을 기울여야만 하겠지. 당사자가 따라붙는 관심을 곤란하게 여기더라도 주의 깊은 관찰은
<상술된 내용과 같이 ‘고금저문집’ 에서는 뱀을 질투의 상징으로 묘사하였습니다. 다른 이를 질투한 경험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본문에 제시된 내용에 대한 의견을 서술해봅시다.> 언젠가 작문 수업의 과제로 주어진 문항을 앞에 두고, 아사히나 마후유는 한참 동안 아무런 문장도 쓰지 못했다. 소녀에게 있어 질투란 막연하게 부정적인 어감을 가
*첫째 날 09 : 40, 역에서 / 요이사키 카나데 x 시노노메 에나 기차의 출발 시간은 오전 10시 20분이었다. 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은 9시 45분. 그리고 시노노메 에나가 역에 도착해 상대를 기다리기 시작했던 시간은 오전 9시 10분. 30분이라는 시간 동안 에나는 역 한켠의 의자에 앉아 전날 약속 상대와 나눴던 메신저의 대화 내역을 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