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부조화
"마후유, 마후유! 이번 글쓰기 숙제 내용 뭘로 할지 정했어?"
"글쎄...아직 못 정했어. 주제가 가족이라서 그런가 고민이 되네."
"그치? 마후유도 그렇지? 나도 도대체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
"넌 매번 그러잖아. 어쩌다 한 번 고민하는 아사히나랑은 다르지."
"너무하네, 고민할 수도 있지!"
마후유는 피식 웃었다. 숙제의 내용을 그렇게까지 고민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하나하나 따질 수도 없을뿐더러 표절검사기 같은 걸 돌릴 일도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티내지 않았다. 친구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도 엄연한 우등생의 임무였다.
그것과는 별개로 마후유도 내용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직업을 갖고 있고,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주르륵 나열하는 건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수준이 낮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생이라면 몰라도 우등생 마후유가 그런 글을 쓴다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게 분명했다. 주어진 분량을 다 채우지 못하고 제출한다는 건 아예 고려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으음, 도대체 뭘 써야 하지.
마후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가족과의 에피소드를 넣으려고 해도 특별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우등생다우면서도 적당히 인간적인 느낌의 글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걸 글로 쓰는 건 다른 문제였다. 뭔가 참고할 만한 자료가....
아.
거실 안쪽 책장에 꽂힌 두꺼운 앨범이 떠올랐다. 엄마는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마후유의 사진을 찍곤 했다. 때로는 디지털카메라로, 때로는 스마트폰 카메라로.
"엄마, 왜 그렇게 사진을 자주 찍어?"
"이건 말이지, 마후유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한 거란다."
어린 시절 마후유의 질문에 대한 엄마의 답이었다. 사진은 순간의 시간을 붙잡아 평면에 간직하는 거라고,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났다. 앨범을 뒤적이다 보면 글로 쓸 만한 소재 한두 개는 건질 수 있겠지. 우리 집 앨범은 워낙 두꺼우니까. 마후유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다녀왔습니다."
"마후유 왔구나. 어서 오렴."
엄마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마후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와 똑같은 미소였다.
"있잖아, 엄마. 거실에 있던 두꺼운 앨범이 어딨는지 알아?"
"책장 왼쪽 맨 아래 칸에 뒀어.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러니?"
"아, 학교에서 가족과 관련된 내용으로 글을 쓰게 됐거든. 가족과의 추억에 대해 쓰려고 하는데, 앨범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렇구나. 가족을 그렇게 소중히 생각하다니 착하네."
착하다, 는 말이 뒤통수에 들러붙는 것 같아 불쾌했지만 마후유는 기계적으로 웃었다. 그 상황에서는 웃는 게 자연스러웠다.
두툼한 앨범을 책상 위에 내려놓자 저도 모르게 후, 하는 소리가 나왔다. 평소 사람 손길이 별로 안 닿아서 그런지 앨범에는 먼지가 살짝 쌓여 있었다. 마후유는 희미하게 얼굴을 찡그리고는 티슈로 닦아 냈다. 흰 티슈에 붙은 새카만 먼지덩어리가 흑백의 대비를 이뤘다.
마후유는 무덤덤하게 앨범 표지를 넘겼다. 얼마 안 되어 마후유가 아주 어릴 적의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진 속의 여자아이는 유치원 가방을 맨 채 활짝 웃으며 부모님 품에 안겨 있었다. 입가에 녹은 솜사탕이 묻은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마냥 즐거워하는 천진난만함이 돋보이는 사진이었다. 배경인 회전목마는 반짝반짝 화려한 빛을 내며 제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이 얽힌 총천연색의 불빛이 꼭 보석처럼 찍혀 있었다.
마후유는 어릴 적 회전목마를 좋아했었다. 피닉스 원더랜드에 갈 때마다 몇 번이고 다시 타곤 했었다. 직원이 마후유의 키를 확인하고 원하는 말을 골라 타는 그 순간이 무엇보다 짜릿했다. 어린아이에게는 조금 높은 등자에 발을 디디고, 몸에 힘을 주어 안장 위에 걸터앉는다. 회전목마가 돌아가는 동안 마후유는 신나게 부모님에게 손을 흔들었다. 엄마는 그런 마후유의 사진을 찍느라 바빴고, 아빠는 마후유가 보일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씩 웃었다.
마법 같은 시간이 끝난 후에는 가족이 함께 근처 매점에서 사온 간식을 나눠먹었다. 두어 번 아빠가 솜사탕을 사온 적도 있었다. 엄마는 순전히 설탕덩어리인 데다가 이에도 안 좋고 지나치게 비싸다며 사 주지 않았지만, 아빠는 가끔씩 마후유의 손에 솜사탕을 쥐어 주었다. 이래야 놀러 온 분위기가 난다나. 고등학생이 된 지금은 피닉스 원더랜드에 놀러 갈 일도, 아빠가 사온 솜사탕을 먹을 일도 없지만 마후유는 간간히 그때를 회상하곤 했다. 주어지는 것을 순수하게 즐길 수 있던 시간을. 그때는 마후유의 삶에 공부 혹은 의사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앨범을 몇 장 넘기자 내복 차림의 마후유가 나타났다. 토끼 모양으로 깎인 사과를 앞에 두고 찍은 사진이었다. 마후유는 어렴풋이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 속 마후유는 더이상 노란 유치원 가방을 매고 있지 않았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때의 마후유는 토끼를 좋아했던 듯했다. 초등학생용 빨간 가방에 달린 이름표의 모양마저 토끼였다. '3학년 4반 아사히나 마후유'라고 조금은 삐뚜름하게 적힌 글씨체가 낯익었다. 스스로 썼던 걸까. 마후유는 아마도 그랬으리라고 추측했다.
항상 사진을 찍는 역할이었던 어머니가 이 사진에서는 피사체가 되어 있음을 마후유는 깨달았다. 포크로 토끼 모양 사과를 찍어 마후유에게 건네는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어린 마후유는 이마에 냉각 시트를 붙인 채로 그걸 받아들고 있었다. 그리움과 동시에 복잡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엄마가 모임까지 빠지면서 자신을 간호해 주었던 것을 마후유는 똑똑히 기억했다. 오후 3시만 되면 칼같이 약속 장소로 향하던 엄마는, 그날만은 수화기에 대고 몇 번이나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마후유의 열이 내릴 때까지 이마를 짚어 주고 감기에 좋다는 사과도 손수 깎아 주었다. 그날 엄마는 마후유의 어리광을 귀엽다는 듯이 다 받아 주었다. 미지근해진 냉각 시트를 갈아주는 손길에 담긴 애정이 어찌나 달던지.
마후유는 그런 엄마가 좋았다. 그래서 엄마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마후유가 엄마의 말대로 행동할 때마다 엄마는 참 착한 아이네, 하고 칭찬해 주었다. 웃고 있는 엄마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으니까. 반복되는 행동이 습관으로 굳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흐름이 이상하다고 느낀 건 중학생 때부터였다. 마후유가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밝힌 때, 엄마는 이왕 의료계라면 간호사보다는 의사가 낫지 않느냐고 권유했다. 마후유는 조금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알겠다고 대답했다. 엄마의 말이니까. 마후유를 사랑하고 아끼는, 그리고 언제나 마후유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쏟는 엄마가 해주는 말이니까.
엄마의 말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불가사의한 원칙이 제 삶 깊이 뿌리내렸다는 걸 마후유는 그제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엄마의 규칙에는 올바름과 윤리 따위는 마비시키는 힘이 있었다. 마후유의 역할은 엄마가 이미 깔아놓은 길대로 나아가는 인형이었다. 거기에 의문을 품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아니, 의문을 품는 것 자체가 죄악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25시 멤버들과 만나고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엄마에게 거짓말하는 일이 늘었다.
그런데도 그게 즐거웠다.
엄마의 규칙 안에서 그게 옳지 않음을 알았음에도.
마후유는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갑작스레 빨라지는 맥박이 부자연스러웠다. 세카이에서 만난 카이토의 말이 스치듯 들려왔다.
"상대는 네 마음을 죽이려 하는 사람이다. 그런 태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엄마는 날 사랑했어.
이 사진에도 똑똑히 보이잖아.
스케줄을 바꾸면서까지 날 간호해 주고, 손수 토끼 모양 사과도 깎아 줬다고.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변명 같은 말을 마후유는 중얼거렸다. 증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든 카이토의 말이 틀렸다는 걸 확실하게 반박해야만 요동치는 맥박을 좀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았다. 마후유는 조급한 손길로 앨범을 넘겼다.
중학생 시절의 마후유가 상패를 들고 있었다. 수학 경시대회 최우수상이라는 글씨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앳된 얼굴의 마후유가, 지금과 비슷한 모습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입안이 깔깔했다. 자신의 몇 년 전 모습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이질감이 느껴졌다.
왼쪽 위부터 사선으로 마후유는 사진을 훑었다. 왼쪽에 아빠, 오른쪽에 엄마, 가운데에 마후유. 가족이라는 이름의 작품이 그 안에 있었다. 철저한 계산을 통해 만들어진 오브제를 조화롭게 배치해서 언뜻 보기에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좋은 직업을 가진 똑똑한 아빠와 가정에 헌신하고 딸에게 아주 많은 관심을 쏟는 엄마,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는 우등생 딸이라니 얼마나 완벽한가. 완벽해야 하는 가족인데.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 밀려와 마후유를 뒤덮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급함은 가라앉기는 커녕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직감은 생각과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장 원초적인 동력인 직감은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사실적이었기에, 마후유는 줄곧 직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았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마후유는 외부의 요소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눈을 뜨라고. 눈을 떠야 한다고. 처음 만나자마자 까칠하게 굴던 카이토는 물론이고, 그간 마후유를 토닥이던 25시 멤버들도 지금까지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후유는 크고 느릿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움직이는 톱니바퀴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더는 눈을 감을 수도, 귀를 막을 수도 없었다.
이제는 마음을 정해야 한다는 걸 마후유는 깨달았다. 그 생각만으로도 몸이 떨렸다. 눈을 뜨고 나면 남는 건 냉혹한 진실뿐일 터였다. 마후유는 삭막한 진실에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포장지를 덮어 자신만의 신기루를 만들어 왔었다. 그리고 아무리 원하는 모습이라 해도 신기루는 허상이었다. 눈을 뜨면 지금까지의 시간이 의미를 잃고 무너져 버릴 것만 같은 공포가 덮쳐왔다. 신기루를 보고 살아온 삶이 의미가 있을지,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겠지.
엄마는 날 사랑했을까?
사랑이라는 건 뭐지?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서부터는 사랑이 아닌 거지?
수많은 질문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마후유는 앨범의 마지막 페이지를 마주했다. 그리고 그대로 숨이 멎을 뻔했다.
미야마스자카 여학원 고등부 교복을 입은 마후유가 도쿄대 정문에 서 있었다. 의학부 수험 합격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작년 3월 말에 찍은 사진이었다. 마후유는 그때 엄마와 약속했던 것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도쿄대 의학부에 합격하고 나면 여기서 다시 한 번 사진을 찍자. 나중에 두 사진을 같이 보면 멋지지 않겠니?"
"응, 엄마. 의학부 수험에 합격하도록 열심히 할게."
앨범을 덮는 마후유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엇이 옳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있어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하고 마후유는 의미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누군가 자신을 상하좌우로 마구 흔들어 놓은 것만 같았다. 생각이 얽히고설켜 마후유는 그대로 사고를 멈췄다. 앨범 하나가 이렇게나 큰 나비효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마후유는 제 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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