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밤을 줘.
*'쇼타임 룰러'에서 루이의 두 번 다시 고독해지지 않을 거라는 가사와, 미즈키 성우 분께서 '너의 밤을 줘'를 녹음할 때 루이를 생각하며 녹음했다는 것을 듣고 끼적여 봤습니다.
*등장인물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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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침이 ‘11’이라는 숫자를 가리키는 늦은 밤. 딩동, 하고 맑고 투명한 초인종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몇 십 분 전에 머릿속을 빛과 같은 모습으로 스쳐 간 연출을 실현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 노트북에 각종 포털 사이트를 늘어놓고 그것과 눈씨름을 하던 나는, 그 청아한 소리에 현관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노트북을 덮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야호~. 자고 있던 건 아니지, 루이?”
“미즈키……?”
아닌 밤중의 손님의 정체는 정말이지 말 그대로 예상 밖의 사람이었다. 내심 네네나 츠카사 군, 혹은 에무 군일 거라 짐작하고 있었기도 해서, 나는 속절없이 ‘놀람’이라는 감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게 되었다.
“내가 여기에 온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누가 보면 귀신이라도 본 줄 알겠어.”
아키야마 미즈키는 마지막으로 만났던 세 달 전의 집들이 때와 비교했을 때 달라진 게 없었다. 벚꽃을 똑 닮은 빛깔의 머리색과 눈동자, 장난기가 가득 서려 있는 눈매와 입가는 당연했고, 겨울이라는 계절에 걸맞으면서도 본인이 추구하는 귀여움을 놓치지 않은 옷차림의 분위기마저 똑같았다.
그 변함없음에 나는 오히려 할 말을 잃었다. 앞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지금의 나를 본다면 분명 “변함없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렇게까지?” 하고 얘기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유감스럽게도 앞뒤 사정을 알고 있는 이에 속해 있다. 그것도 아주 속속히 말이다.
“그건 그렇고 들어가도 돼? 나 지금 꽤 추운데.”
나와 마찬가지로 앞뒤 사정을 속속히 알고 있는 미즈키는 내가 당혹 섞인 침묵을 보일 거라 짐작하고 있었는지, 태연하게 그렇게 얘기하며 입가에서 슬며시 장난기를 없애고 투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를 거절할 이유와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는 “당연하지.” 하고 대꾸하며 미즈키를 집 안으로 들였다.
“실례합니다…… 랄까. 루이, 집들이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코트를 벗으며 미즈키가 또 다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그렇게 얘기했다. 그가 먼저 아무 일 없는 상태의 일상적인 평온함을 바라고 있는데 내가 나서서 그 바람을 깰 수는 없지,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동요와 당혹을 최대한 짓누르고 미즈키의 텐션과 흐름에 편승했다.
“응? 뭘 말이니?”
“진짜로 반년도 안 되어서 이렇게까지 어지럽혀진 모습을 보니까 새삼 경이롭네~.”
거실 바닥에서 어지럽게 휘날리고 있는 갖가지 설계도와 공구들, 제때 끝내지 못해 싱크대에 조금 쌓여 있는 설거지 더미, 연출을 위해 정리를 잠시 미뤄 둔 반찬이 담긴 플라스틱 용기들을 한 번씩 번갈아 바라보며 미즈키가 미간을 찌푸린 채 웃었다.
“그렇게 얘기하다니 섭섭한걸, 미즈키. 어지럽혀진 게 아니라 아직 정리를 시작하지 않은 건데.”
“애니메이션에서 꼭 방을 어지럽히는 꼬맹이 캐릭터가 그렇게 대답하는 거 알아? 루이도 어쩔 수 없는 애라니까, 정말~.”
“후후, 꼭 네네 같은 얘기를 하는구나. 그럼, 아이 같은 나를 위해 정리를 도와주는 건 어때?”
“설마 손님한테 청소를 시킬 줄이야! ……뭐, 도와줄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대꾸한 미즈키는 곧장 식탁으로 가 플라스틱 용기의 뚜껑부터 닫기 시작했다. 설계도와 공구들은 본인보다 내가 정리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해서 주방으로 간 것일 테지. 미즈키의 배려와 선의에 마음속으로 감사 인사를 보내며 나는 거실에 낭자하게 흩어져 있는 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거 루이네 어머니가 해 주신 거야?”
“아니, 네네가 가져다준 거야.”
“친구가 해 준 반찬을 이렇게 방치했다고?!”
“방치가 아니라 보류라고 해 주겠니?”
“뭔 차이인지 전혀 모르겠어…….”
우리가 아직 학생이던 시절에 옥상에서 나눴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시시콜콜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그런 대화를 미즈키와 나누며 나는 집들이 때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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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이 되는 금년, 나는 집에서 나와 따로 살게 되었다. 무슨 큰일이 있는 건 아니었고, 단지 원더랜즈 쇼타임의 쇼를 보고 미소를 짓게 되는 관객이 늘고 그 관객들이 외국인인 경우도 점점 늘게 되면서, 관객들의 기대와 멤버들의 기대에 부흥할 수 있을 만한 새롭고 재미있으며 감동적인 연출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센세이션한 연출을 제대로, 다양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에 쓰던 작업장인 차고보다 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그런 이유를 통해 구해지게 된 이 집의 첫 손님은 원더랜즈 쇼타임의 멤버 세 명과 고등학생 시절에 여러 재미있는 일들을 함께 했던 시라이시 군, 시노노메 군, 아오야기 군,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독에 짓눌려 압사 당할 것 같았던 시기에 만난 옥상에서의 인연인 미즈키였다.
“우와~! 엄청 넓다, 루이 군! 여기서 저기까지 우두두, 파파팟, 슈슝! 할 수 있을 것 같아!”
“음, 에무의 얘기가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의 연출가다운 최고의 안목이라는 것엔 틀림이 없어 보이는군!”
“단독 주택이 아니라 맨션이라서 이웃이 있을 수 있으니까 조용히 해, 츠카사.”
“뭣?! 왜 에무는 쏙 빼고 나한테만 그러는 거지?!”
“바로 그런 고함을 조심하라는 겁니다, 선배.”
“와……. 졸업해서 그런가? 아키토의 ‘선배’라는 호칭 엄청 어색하네.”
“아니, 그렇다고 갑자기 형이라 하거나 어이, 하고 부를 수는 없잖냐.”
“동료의 안목을 바로 파악하시다니, 역시 츠카사 선배는 대단해…….”
“진심이냐, 토우야…….”
“본인을 앞에 두고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는 거냐, 너희들!”
“시끄럽다니까, 츠카사!”
고등학생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왁자지껄함에 시간이 꽤 지났는데 달라진 게 없구나, 하고 생각하며 나는 한 발자국 물러나 집들이에 온 이들의 만담 같은 대화를 지켜봤다. 그러기를 몇 십 초, 그들 속에 섞여 웃음꽃을 피우고 있던 미즈키가 내 쪽을 슬쩍 보더니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박수를 한 번 크게 쳤다.
“자, 자, 모두들! 오늘의 주인공은 여기에 있는 루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니지?”
“여태까지 너도 같이 웃었으면서.”
“남동생 군, 그런 자잘한 거에 너무 집중하면 안 돼~.”
“그 호칭 좀 어떻게 안 되냐…….”
“후후, 그렇게 주목시키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지.”
“에~? 우리들 중에서 처음으로 나온 독립자의 집들이잖아! 처음이라는 건 주목 받아 마땅하다고~.”
미즈키의 진행 덕에 동창회로 바뀌어 가던 집들이가 제 모습을 되찾았다. 뭐, 그대로 동창회로 바뀌었어도 이 인원이라면 유쾌하기 이를 데 없을 테니 나쁘지 않았을 것 같지만.
그 뒤로 이어진 순서는 여타 집들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물을 받고, 준비해 둔 음식을 먹으며, 한껏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땐 그런 일이 있었지, 요샌 이런 일이 있어, 앞으론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대화의 흐름을 만끽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성인이 되었다 보니 우리의 음료는 탄산이나 주스가 아니라 대부분 술이었다. 거나하게 취한 츠카사 군과 그런 그를 집에 바래다주겠다며 나선 아오야기 군을 시작으로 시노노메 군과 시라이시 군, 에무 군, 마지막으로 술을 마시지 않은 네네까지 차례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찬거리에 야채는 빼 뒀으니 끼니 거를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나간 네네를 마지막으로, 내 집에는 나와 미즈키만이 남게 되었다.
방금 전까지 떠들썩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것이 싫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적재적소에 찾아온 침묵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둘만 있게 되면서부터 미즈키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무슨 일 있니, 미즈키?”
먼저 입을 여는 건 그런 명백하고 선명한 변화를 목격한 내 쪽의 몫이었다. 내 물음에 미즈키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씁쓸하게 웃었다. 쓰게 웃었다는 게 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긍정과 부정이 애매하게 섞여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나서 몇 초, 미즈키가 과일주가 가득 든 잔을 들며 나지막하게 얘기했다.
“내 마음에서 나가, 루이.”
꿈에서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발언에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방금 세상 밖에 나온 발언이 연애적인 의미로 오해할 법한 것이어서 그런 건 아니다. 우리 사이에 연애라던가 하는 간지럽고 금방이라도 붕 뜰 것 같은 감정이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나는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해라는 걸 할 만한 틈이 존재하지 않는 사이라 얘기한다면 이해하기 쉬울까……. 그런 내가 미즈키의 발언에 머리가 하얘진 이유는 그가 뱉은 한마디에 서려 있는 감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나도 쉽게 유추할 수 있어서였다.
위와 같은 이유로 아무런 대꾸도 못 한 채 오랜 동료를 바라보고만 있자, 동료는 내게 “뻘쭘하니까 무슨 말이라도 해 보시죠, 카미시로 군.” 하고 평소와 다르지 않은 농담조의 말투로 얘기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는걸, 미즈키 군.”
그의 말투를 빌려서 최대한 머리를 굴려 만들어 낸 나의 한마디에, 미즈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할 법한 사람은 이미 다 돌아갔으니까. 루이가 그런 사람도 아니고.”
“예상을 넘는 고평가에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고평가라니, 정확한 평가지. 내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니까 말이야~. 순수하게 고마워해도 된다고?”
“후후,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할까?”
미즈키는 “응, 응. 그렇게 하는 편이 좋을 거야!” 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과일주를 순식간에 비웠다. 아, 역시, 내가 유추한 대로구나. 탄식에 가까운 문장이 마음속에 번져 나갈 무렵, 미즈키가 잔을 내려놓으며 대화를, 아니, 대화를 가장한 독백을 시작했다.
“만약에 남들이 오해하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의 의미로 내 마음속에서 나가라 하는 거라면, 루이는 어떻게 반응할래?”
“……미즈키.”
“……세상에 나 혼자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아서 너무 외롭고 힘든 그런 밤이 오면 있잖아? 나도 모르게 루이를 떠올려. 떠올리려고 애쓰는 것도 아닌데 중학교 시절의 루이와 내가 저절로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거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래서 한 번씩 이런 밤중에 연락을 하곤 했던 거야.”
이어지려는 독백을 멈추기 위해 꽤 이른 타이밍에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미즈키는 내 부름에 대꾸는커녕 이쪽으로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계속해서 입을 움직였다.
“루이는 안 그러지? 물론 중학생 때는 나랑 똑같았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츠카사 선배를 비롯한 극단 멤버들을 만나고부터는 한 번도 그러지 않았을 거야. 루이가 좋아하는 걸 마음껏 할 수 있고, 그걸 온전히 받아줄 수 있는 사람들이 편이 되어 주고 하는 그런, 응, 나 같은 걸 떠올릴 새도 없는 행복한 나날의 연속이었을 테니까. 혹시나 해서 얘기하지만 원망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오히려 축하할 일이지! 루이가 그토록 원했던, 아니, 갈망했던 장소를 찾은 거니까.”
밝아도 너무 밝다. 내가 미즈키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에 머물러 있었거나 타인의 시선과 감정에 무딘 편이었다면 그가 지금 보이는 말투와 태도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말투는 밝았다. 하지만 나는 미즈키라는 사람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시선과 감정에 꽤 예민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더욱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독백의 끝에 있는, 결코 긍정적이라 할 수 없는 그 복합적인 감정이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할수록, 루이는 그저 나보다 이르게 동료를 찾았을 뿐이라고 생각하려고 하면 할수록,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먹구름 같은 기분이 스멀스멀 퍼져 나가더라. 아, 루이는 이제 더 이상 내가 필요 없구나. 이젠 나를 동료가 아니라 챙겨 줘야 되는 사람으로 보고 있겠구나. 내가 필요 없어진 것도, 나를 챙겨 주려고 하는 그 마음도 분명 기쁜 일인데 왜 순수하게 기쁘지가 않을까……. 이전처럼 옥상에 올라오지 않는 루이를 알게 된 고등학생 때부터 꽤 최근까지 줄곧 그런 생각들을 해 왔어.”
그걸 왜 지금까지 얘기하지 않은 거니.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내뱉을 수는 없었다. 함께 옥상에서의 나날을 공유한 시절의 나라면 눈치 챌 수 있을 만한 일이었다는 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최선이라 생각하며 미즈키에게 행했던 것들이 사실은 최선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나는 그저 그가 정해 둔 거리를 넘지 않겠다는 허울 좋은 변명을 이용해 옥상으로부터, 그리고 그곳에 언제나 있었을 미즈키로부터 눈을 돌리고 감았을 뿐이다. 이런 이기적인 마음을 나는 정말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나. 스스로에게 던진 날카로운 질문 앞에서 나는 떳떳하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사과해야 할 건 그런 이기적인 나인데, 미즈키가 먼저 “미안, 이상한 얘기해서.” 하고 잠깐 독백을 끊고선 자신의 상냥함을 드러냈다.
“어쨌든 그런 기분이 계속 있었는데, 어제 막 깨달았어. 내가 왜 루이의 변화와 배려가 순수하게 기쁘지 않은지에 대해서. ……질투였던 거야. 다시는 고독해지지 않겠다고 얘기하는 것 같은 루이의 말과 행동이 너무나도 부러웠고, 나는 따라가지 못할 색채를 입어 가는 루이의 표정이 욕심이 났어. 심지어는…… 심지어는, 왜 내가 아니라 루이인 걸까, 내가 루이보다 더 원했던 것들인데, 같은 생각들을 하면서 우리의 고독을 비교하기까지 했어. 쓰레기 같지 않아?”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그렇지 않다고, 네가 느낀 감정은 쓰레기 같은 게 아니라 자연 같은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미즈키의 마음과 그 흐름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내가 미즈키에게 값 싼 위로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것은, 그가 이미 스스로에 대한 정의를 내려 버렸고 내가 알고 있는 미즈키는 그 정의를 도통 뒤집지 않는 사람이어서였다.
그리고 미즈키가 내게 이런 얘기들을 하는 이유는 털어놓을 곳의 유일성도 있겠지만, 자신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알고 있는 내가 그의 얘기에 이렇다 할 대꾸나 위로를 뱉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일 것이다.
입을 떼지 못하는 나를 향해 미즈키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어딘가 시원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이제 루이랑 거리를 두려고 해. 이거, 나 치곤 엄청난 발언인 거 알아? 이렇게 미리 얘기하고 거리를 둔 적,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어.”
“거리…….”
“응, 거리. ……루이한테 연락하는 것도 그만두고, 나도 모르게 루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온 힘을 다해 억누르고, 외롭고 힘들기만 했던 중학생 시절을 루이를 떠올리면서 그래도 싫지만은 않았다 생각하는 것도 멈추고, 그렇게 해 볼까 싶으니까, 협조 좀 해 줘, 루이.”
그러고는 미즈키는 내게 잔을 들지 않은 쪽 손을 슥, 하고 내밀었다. 협조를 해 달라는 뜻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미즈키의 손을 맞잡는 데에 망설임이 있었다.
아쉬움, 슬픔, 두려움 같은 감정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사실상 연을 끊고 싶다는 얘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그런 감정들은 없었다. 상대방이 그러기를 원한다는데 무슨 명분을 들고 그 선택을 저지하겠는가 하는, 지금의 동료들을 만나기 전에 뇌에 물들여 버린 습관 같은 생각이 지대한 탓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즈키의 선택을 저지할 수 없음을 알고 나 자신에게 그럴 생각이 없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내 앞에 내밀어진 손을 잡는 것에 망설임을 품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불안.
이대로 미즈키의 손을 잡으면 그가 너무나도 가볍게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그런 근거 없는 불안의 탓이었다.
“……루이.”
꼭 나무라듯, 어떤 의미에선 닦달하듯 미즈키가 내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처럼 들린 건 기분 탓일까. 답을 알기 위해선 입 밖으로 내뱉어야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나는 손을 잡아 주지 않은 채, 어느새 웃음이 거두어져 있는 미즈키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뭔데?”
“꼭, 미즈키가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줘.”
“……그 얘기를 루이가 하는 거야?”
“조금…… 이기적인 부탁이려나?”
내 물음에 미즈키는 한동안 내 눈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기적인 부탁은 내가 하고 있는데, 뭘. ……알겠어, 루이. 꼭 찾을게. 물론 그런 게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응, 고마워. 믿고 있을게.”
확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엔 조금 부족한 대답이었지만, 그래도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단정적인 말투여서 나는 불안을 조금 덜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에 미즈키가 원하는 대로, 나는 그와 악수를 나누는 것으로 협력 관계를 정립할 수 있었다.
그때 지은 미즈키의 웃음 속에는 채 완성되지 못한 너무나도 많은 말들이 있었다. 분명 나 또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폐막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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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그랬을 텐데. 그렇게 우리의 극은 끝을 맺었을 텐데. 관객 하나 없이 단 두 명이서 펼쳤던 쇼는 분명 과거가 되었을 텐데. 아니, 그렇게 하기로 정했을 텐데.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머릿속 한 구석에 밀어 놨던 생각들이 회상을 계기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가 문 앞에 서 있던 미즈키를 보고 당황을 금치 못한 계기는 이와 같은 일들이 있어서였다.
어지럽혀져 있던 집 안을 어느 정도 정리한 뒤, 나와 미즈키는 누가 제안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식탁으로 가 마주 앉았다. 어떻게 지냈니? 살 만했니? 어디 아픈 곳은 없지? 서클 활동은 어때? 요즘은 어떤 옷을 입고 다녀? 흔하디흔한 수많은 인사말들이 입 앞까지 올라왔다가 그대로 사라지길 반복했다.
“어쨌든 손님으로 온 건데 마실 것도 안 내 주는 거야?”
이런 저런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인사말을 고르는 내가 퍽이나 재미있어 보인 건지, 미즈키는 또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웃어 보였다. 아, 그렇지. 눈앞의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해서만 생각하느라 정작 가장 기본적인 걸 생각하지 못했다.
“손님이 온 게 너무 오랜만이라……. 조금만 기다려 줘. 혹시 마시고 싶은 게 있니?”
싱크대로 향하며 내가 그렇게 묻자 미즈키는 “으음.” 하고 고민하는 신음을 냈다.
“혀가 아릴 정도로 단 거였으면 좋겠다 싶은데.”
“단 거라……. 마침 라무네 맛 라떼를 개발했는데 시음해 볼래?”
“내가 츠카사 선배가 아니라는 걸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루이…….”
“조금은 아쉽네.”
“에~, 아쉬운 거야? 여기에 앉아 있는 게 내가 아니라 츠카사 선배였으면 좋겠다거나? 막 이래~.”
미즈키가 농담일 셈으로 던졌을 게 분명한 발언에서 나는 멋대로 날카로움을 찾아내 스스로를 찔렀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아픈 자해성이 짙은 사고의 흐름에 나는 별 다른 대꾸를 뱉지 못한 채 후후, 하고 웃어 보였다.
거절 당한 라무네 맛 라떼를 대신해 핫 초코와 작은 스푼을 건네자 미즈키는 “루이, 나 고양이 혀인 거 잊은 거야? 몇 달 안 되었는데 너무하네~.” 하고 볼멘소리를 냈다. 스푼으로 저으면 조금 더 빨리 식힐 수 있어. 이 겨울에 차가운 걸 건넬 수는 없으니까 말이지. 분명 그런 말들이 먼저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러이 부유하고 있었음에도, 그것들과 전혀 다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잊었을 리가 있겠니.”
내 말에 후후, 하고 바람을 불며 핫 초코를 식히던 미즈키가 움직임을 뚝 멈추더니 내 쪽으로 반듯하게 시선을 향했다. 이쪽을 빤히 응시하는 그 크게 떠진 눈빛에 떠 있는 온갖 상념과 만감을 전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알 것 같아 나는 이렇다 할 표정 하나 짓지 못했다.
나와 거리를 두겠다고, 다시 찾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한 미즈키가 이 집과 나를 찾아온 것이 뜻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실패했다.
나를 떠올리는 것을 그만두지 못했고,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을 억누르지 못했고, 나를 통해 힘들었던 시절을 미화시키는 것도 멈추지 못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요소들은 ‘있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달라’는 나의 부탁을 이루어 내지 못했다는 얘기로도 귀결된다.
열등감과 닮아 있는 질투를 해결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질투를 유발시킨 나에게 발걸음을 한 미즈키의 속마음이 어떤 상태일지 나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미즈키는 이내 눈을 한 번 길게 감았다가 떴다. 변함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눈길의 향방과는 달리, 그 눈에 담겨 있던 상념과 감정들은 싹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긍정적인 변화인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미즈키의 눈에서 빛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밤이 어둠을 뜻하고 어둠이 죽음을 뜻한다면, 그는 꼭 밤을 닮은 눈을 하고 있었다.
“……미즈키.”
나지막하게 눈앞에 있는 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한 번 부르고 나니 살면서 경험해 본 적 없는, 뭐라 부르는 게 좋을지 모를 격한 감정의 요동이 북받쳐 올랐다. 그것을 핑계 삼아 나는 미즈키, 미즈키, 하고 반복해서 이름을 불렀다. 조금씩 떨리기 시작한 목소리는 이윽고 목멘 소리로 바뀌었지만 나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불렀다.
“루이…….”
단순한 호응인지 아니면 나와 같은 감정의 요동이 있었기 때문인지, 얼마 가지 않아 미즈키도 나를 따라하듯 루이, 루이, 하고 몇 번이고 내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렇게 우리는 눈앞에 있는 서로를 찾았다.
아, 그렇다. 이 행동은 그저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다. 절박하게, 어떻게 보면 처절하게 서로를 찾고 있는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마주하고 있지 않았어야 할 이상적인 서로를, 각자의 장소에서 각자가 만난 사람들과 웃고 있었어야 할 서로를,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인간관계라는 책에서 적게는 한 문단, 많게는 한 페이지 정도만 내주는 선에서 그쳤어야 할 서로를, 그날의 그 옥상에서 동질감이 아닌 동족 혐오를 느꼈어야 할 서로를 말이다.
점차 그 크기를 더해 갔던 목멘 소리는 끝내 내 목을 완전히 틀어막고 목소리 대신 눈물과 한숨만을 토하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밤을 닮은 눈과 그 눈에 어울리는 말라비틀어진 무표정을 짓고 있는 미즈키는 끊임없이 내 이름을 찾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행동뿐이었다. 나는 식탁 위에 놓인 미즈키의 손을 잡았다. 엄지로 그의 손등을 쓸며 나는 하염없이 조용히 눈물을 흘렸고, 그제야 미즈키는 나를 부르는 걸 멈췄다.
나는 미즈키가 행복하길 바랐다. 나와 거리를 두겠다고 선언한 날, 우리 집 현관문을 열고 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는 그 모습에 나는 그가 자신만의 온전한 것들을 찾길 바랐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에 있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것이길 바랐다.
그래, 나는 미즈키가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만나 웃길 바랐다.
그런데 왜. 어째서.
생각의 연쇄가 시작되려던 찰나, 미즈키가 내 손을 맞잡았다.
그 다음에 이어진 것은,
“루이. ……너의 밤을 줘.”
너무나도 처량한 갈 곳 없는 자의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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