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 인연

프로세카 by Sh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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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가끔은 세상을 원망하며 한없이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내 감정과는 상관없이 아침이 되면 불그스름한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 끔찍이도 보기 싫어서, 시간이 흐르지 않기를 바라는 때도 있다. 물론 세상은 그리 너그럽지 않다. 시간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다른 형태로 바뀌어 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그런 흐름을 조금이나마 거스르고, 어떻게든 서로를 붙잡아 보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혹은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과거의 자신을 기억하기 위한 일종의 닻일까.

나이트코드 접속창의 유키 아이콘은 몇 달째 불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최근 접속일은 '오래 전'. 나이트코드 시스템은 한 달 이상 접속하지 않은 유저의 최근 접속일을 '오래 전'으로 표기했다. 요이사키 카나데는 새삼 시간의 흐름을 실감했다. 마후유의 어머니를 만난 후부터 벌써 한 달이 넘게 지났다. 그렇다고 해도 대면했을 때의 느낌은 생생했다. 처음 카페에 들어갔을 때부터, 그녀는 자연스럽게 공간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카나데를 보고 가볍게 웃더니 케이크 세트면 되겠지? 하고 물었다. 이유 모를 서늘함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곰곰이 곱씹고 나서야 카나데는 그것이 질문이 아닌 확인임을 깨달았다. 그녀가 정말로 카나데의 의사를 궁금해했다면 "케이크 세트는 어떠니?"라고 물었으리라. 언뜻 질문처럼 보이는 이 대화는 사실 그녀의 의사가 받아들여졌는지를 점검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카나데는 이 답답한 연쇄를 끊기 위해, 그 자리에서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던 것이었다. 

"마후유가 힘들어해요."

카나데는 이 한 마디에 굉장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란 아이의 행복을 바라는 존재. 그러니 아이가 힘들어한다는 말을 들으면 충격을 받고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카나데는 그렇게 생각했다.

카나데의 말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이러했다.

"어머, 그러니?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성적이 떨어졌나? 아니면 친구랑 다투기라도 한 건가?"

그날 카나데는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는 마후유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이 확실했다. 등골을 타고 흐르던 싸늘함은 곧 끓어오르는 분노로 바뀌었다. 

"그리고는 마후유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고 말했었지."

카나데는 쓰게 웃었다. 평소 카나데가 직설적인 화법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걸 고려하면 무척이나 감정이 담긴 말이었다. 결심을 꾹꾹 뭉쳐 만든 단단한 한 마디. 다행히도 마후유는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언제가 될지, 어떤 형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꼭 다시 오겠다고. 

그로부터 일주일쯤 후 카나데는 우편함에 꽂힌 낯선 우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늬 없이 깔끔한 흰색 봉투는 딱 A4용지 하나가 들어갈 법한 크기였다. 수신자는 요이사키 카나데. 발신자 칸에는 이름 대신 눈꽃 모양 스티커가 하나 붙어 있었다. 그건 카나데도 전에 본 적이 있었다. 뒷풀이가 끝나고 돌아가던 길, 미즈키에게 이끌려 간 팬시점에서 이것과 똑같은 스티커를 판매하고 있었다. 마후유는 유키(눈)니까 이걸 쓰면 딱이겠네~하던 미즈키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카나데는 작업하던 것도 내려놓고 급하게 봉투를 뜯었다. 

봉투 안에는 A4용지 두세 장이 들어 있었다. 각 종이마다 다양한 필체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또박또박 예쁘게 쓰인 글씨가 있는가 하면, 급하게 휘갈겨서 자세히 보아야 알아볼 수 있는 글씨도 있었다. 카나데는 주의 깊게 그 글자들을 읽어내려갔다. 

「오래도록 써서 낡은 자신의 이름에 굳이 천박한 주석을 붙여서」

「달 바로 아래를 서성거리며 밤새도록 생각했어」

각 구절의 의미가 명확하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후유를 지금껏 가까이에서 지켜본 카나데는 이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봉투 안에는 A4용지 말고도 노란 메모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카나데. 가사 완성했어. 이걸 발견하면 작곡에 사용해 줘.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손으로라도 작사는 계속할 거야. 완성되면 카나데네 집으로 보낼게. 에나랑 미즈키한테도 알려 줘. 휴대폰은 엄마가 보고 있어서 연락 못 할 것 같아.]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메모였음에도 카나데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약속 지켰구나. 마후유."

마후유는 그 후로도 몇 번 더 가사를 보냈다. 때로는 카나데네 집 우편함에 꽂혀 있었고, 때로는 미쿠의 CD를 함께 듣기로 한 이치카가 들고 오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가사도우미 역할을 하는 호나미 손에 들려 오기도 했다. 도착 경로를 여러 가지로 갈라 놓은 이유는 마후유 나름대로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서였겠지. 카나데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짝 웃었다.

25시의 활동은 이전보다 천천히 굴러가게 되었다. 그래도 거기에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카나데는 물론이고 에나와 미즈키도, 마후유가 없는 25시는 진정한 25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누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셋은 마후유의 가사를 기다리며 느긋하게 각자의 역할을 했다. 

그때부터 카나데는 오후가 되면 현관 근처를 서성이곤 했다. 우편함을 열어보기를 한 번. 혹시나 누군가 오지는 않는지 살펴보기를 한 번.

곧 익숙한 얼굴이 문 안으로 들어왔다.

"요이사키 선배! 부탁받은 물건 가지고 왔어요."

"항상 고마워, 모치즈키."

호나미가 건넨 봉투에는 눈에 익은 눈꽃 모양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카나데는 봉투를 품에 꼭 안았다. 당장 눈앞에 없어도 마후유를 느낄 수 있었다. 봉투를 뜯으면서 카나데는 미소를 지었다. 마후유가 자신을 완전히 잃지 않는 한, 25시는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느꼈다. 설령 그 형태가 변하더라도 본질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카나데에게 있어서는 그거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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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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