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나마후

에나마후 단편집 <눈의 초상> 수록

idiotxt by 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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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싹 긴장한 목이 빳빳해지기, 멀쩡하던 목소리가 갑자기 갈라져 나오기, 말끝이 갑자기 흐려지기. 옆에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죽어라 고함치는 맥박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거나. 고개는 분명 이쪽을 향해 있는데 시선은 자꾸만 주변으로 미끄러진다거나. 얼굴은 새빨갛거나, 아니면 창백하거나. 시노노메는 이런 흔하디 흔한 사랑의 법칙에 통달해 있었다. 왜냐면 연애의 법칙에 통달해 있었으니까.

요는, 저런 사람들은 대뜸 혼자서 분위기를 잡고는 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둥, 사실 네가 그냥 친구였으면 이런 거 안 했다는 둥, 오늘 일부러 약간 힘주고 나왔다는 둥, 촌스럽기 짝이 없는 멘트를 고른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싫은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걔들은 사랑을 하고 있는 거잖아. 그런 애들이 또 얼마나 귀여운데. 시노노메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싫지 않다. 그야, 시노노메는 창작으로 먹고사니까. 사랑은 언제나 좋은 영감이 된다. 그러니까 그 투박하고 바보 같은 멘트를 기꺼이 받아주는 것이었다. 사랑에 빠진 애들은 일단 귀여운 구석이 있잖아. (그렇다고 아무나 다 받아주는 건 아니고, 당연히 시노노메도 보는 눈은 있고. 일단 귀엽게 느껴지는 애들만.)

시노노메의 구애인 사전에 등재된 이들은 대다수가 다 이런 스타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촌스럽고 투박하고 진부한 고백을 하는 애들만 골라 사귄 건 아니고, 시노노메처럼 적당히 연애의 법칙을 아는 애들도 있었다. 시노노메는 그럼 걔들이 열심히 깔아 놓은 ‘썸’의 핑크빛 카펫 위로 기꺼이 올라가 주는 거였다. 이 카펫의 재질이 딱히 어마어마하게 특별하다고는 생각 안 한다. 그리고 상대방도 시노노메가 그걸 알고 있다는 걸 안다. 알면서도 적당히 모르는 척하는 거다. 그게 연애의 법칙이잖아. 왜 그런 법칙이 있나요? 참으로 어리석은 질문이구나. 그냥 카펫 위에서 춤 한 곡 땡기는 게 재미있어서 그런 거란다. 이것은 그야말로 사회적 합의. 시노노메는 특별히 고급스럽지 않은 카펫 위에 올라가서, 기꺼이 쉘 위 댄스를 말한다. ‘근데 우리 무슨 사이인데?’ 그러면 상대는 기쁘게 시노노메의 쉘 위 댄스에 응한다. 그게 사교계 매너니까.

그런데 얘는 대체 뭐지.

너는 애가 무슨 고백을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드링크 바 무한 리필 하다가 말하니?

아사히나의 사고나 언행은 시노노메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그냥 어려운 것도 아니고, 대체 어떻게 하면 사고가 저런 방향으로 튀는 건지 신기할 정도로. 아사히나를 처음 알았을 때 시노노메는 그 불가해의 속성에 비명을 질렀고, 나중에는 화를 냈으며, 더 나중에 가서는 체념했고, 이제는 적당히 요령 있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가 물에 들어가려고 할 때 진지하게 화내면 이상하잖아. 시노노메의 눈에 아사히나는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였다. 애들은 원래 물가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그러니까 쟤는 왜 저러지, 하고 화를 내기보다는 ‘쟤는 원래 그런가 보다’하고 마는 게 속 편하다. 그게 정답이고. 때문에 시노노메는 기껏해야 여기는 물가라는 것, 물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것, 그리고 ‘그러니까 물에 안 들어가는 편이 좋겠지?’ 라 타이르는 데에 그쳤다. 너무 깊게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 서로 피곤해지니까.

그리고 아사히나는 지금, (고백이라 하기도 어정쩡한) ‘어쩌면 에나를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어’라고 또 느닷없이 말하고 있는 거였다. 그것도 세 번에 걸쳐서.

 

 

첫 번째 고백은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이사키의 데모곡을 듣고 각자 구상한 이미지를 확인하기로 한 날이었다. 시노노메는 작업 속도에 물이 올라서 컨디션이 꽤 좋았다. 이미지 구상과 컨셉아트 스케치는 진즉 끝내 놓고, 나이트코드에 삼십 분 정도 일찍 접속해서 컨셉아트에 대한 설명을 작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사히나는 약속한 25시를 이십 분 정도 남기고 들어온다.

“에나낭, 오늘 일찍 왔네.”

“어.”

“에나낭, 작업하고 있는 거야?”

“어.”

“에나낭, 많이 바빠?”

“아니, 그냥 하고 있어. 왜?”

아사히나는 가사를 메신저로 보냈다. 그리고 ‘곡의 컨셉 중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어렵다’고 했다.

시노노메는 건네받은 텍스트를 주르륵 훑었다. 그리고 ‘테마가 러브송인걸 감안해도 표현이 너답지 않게 상투적인 것 같다’고 했다.

아사히나는 ‘그래서 다른 노래도 듣고 드라마나 영화도 뒤적거려 봤는데, 딱히 감흥이 없고 영감으로 이어지지도 않았다’고 했다.

시노노메는 아사히나가 나열한 레퍼런스 중 몇 개를 간단히 검색해보고는, ‘남의 말을 빌려와서 그렇다. 네 말로 써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니까 어려운 거다’라고 했다.

아사히나는 ‘어떻게 하면 내 말로 쓸 수 있는데?’ 라고 물었고, 시노노메는 ‘그야 네가 직접 겪어봐야 알 수 있겠지’ 라고 대답했다.

아사히나는 ‘그런 거 잘 모르겠는데’ 라고 중얼거렸고, 시노노메는 속으로 ‘그야 그렇겠지…….’ 하고 말았다. 그리고 또다시 마구마구 날아올 질문 폭탄에 마음의 준비. 에나낭은 그런 경험 있어? 에나낭은 그런 거 잘 알겠네. 에나낭 스케치도 보고 싶은데.

아사히나가 다음에 물어 온 것은 ‘에나낭이 설명해 줄 수 있어?’였고, 시노노메는 보편적인 사랑의 법칙에 대해 설명했다. 그렇게 공들여서 설명하지는 않았다. 러브송이긴 해도 발라드가 아니라 팝이었으니까. 그렇게 지리멸렬하고 진득한 사랑에 대한 설명은 불필요한 것 같아서. 아니나 다를까 시노노메가 최대한 친절하고 간결하게 설명해주었는데도 별 반응이 없었다. “잘 모르겠는데.” 여기까지는 예상한 반응. 아사히나의 목소리가 어쩐지 축 처진 것 같아서, 시노노메는 부러 목소리를 한 톤 올려서 가볍게 말했다.

“그렇게 어렵고 무겁고 심각한 것만 사랑인 건 아니고, 그냥…… 만났다가 헤어지고 집 가는 길인데 또 보고 싶고 자꾸 생각나고 용건 없이도 괜히 연락하고 싶고 그런 것도 포함되는 거야.”

“그래?”

“그래.”

또 짧은 침묵. 아사히나는 시노노메의 설명을 찬찬히 곱씹는 것 같았다. 이쯤 되면 말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뜻이다. 시노노메는 마저 집중하려고 작업창으로 커서를 움직였다. 그리고 아사히나는 느닷없이 선언했다.

“그렇다면 나는 시노노메를 좋아하는 걸지도 몰라.”

고저도 없고 무드도 없이, 너무나 일상적으로 흘러나온 문장이어서, 시노노메는 하마터면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습관적으로 적당히 맞장구 칠 뻔했다. 한 박자 놓치고 나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저기, 내가 설명한 건 연애 감정으로서의 좋아한다는 뜻인데.

“그러니까 에나낭이 방금 설명한 게 연애 감정으로서 좋아한다는 뜻이잖아.”

“그래.”

“그 말대로라면 나도 에나낭을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아닌데.”

좋다고 하는 사람은 아사히나인데 시노노메는 확신을 담아서 아니라고 맞받아쳤다. 그러니까, 고백같지도 않은 고백을 대차게 깠다는 말이다. 아사히나의 물음이 이어폰에서 미적지근하게 흘러나왔다.

“왜?”

“하여튼 아니야.”

“에나낭이 설명한 대로라면 맞는 것 같은데. 예외나 다른 설명할 거리가 남아있어?”

질문은 무지와 무구라는 포장지를 얇게 뒤집어쓴 채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시노노메가 당황해서 대꾸할 말을 고르는 동안에도, 아사히나와 엉망진창 소모적인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시간은 비정하게 흘렀다. 열두 시 오십 이 분 정도 되자 요이사키가 접속했고, 곧이어 열두 시 오십사 분이 되자 아키야마가 접속했다. 둘이 무슨 대화 중이었어? 시노노메는 작업 관련 이야기였다고 대충 얼버무렸고 아사히나도 별말 하지 않았다. 아사히나의 ‘좋아함 탐구 시간’이 흐지부지 끝나버렸지만 시노노메는 구태여 재개할 의사가 없었다. 그리고 곧 잊어버렸다.

 

 

두 번째 고백은 사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5가 처음으로 시도한 팝하고 귀여운 러브송은, 생각 이상으로 반응이 괜찮았다. 요이사키는 전에 없이 사랑스러운 곡을 만들었고 아사히나의 가사도 제법 귀여운 맛이 있었다. 시노노메는 이번 작업물의 결과가 요 근래 작업했던 것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아키야마도 ‘내 취향을 듬뿍 담아서 만들었다’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들은 아사히나네 대학 근처의 식당에서 이번 신곡의 반성회 겸 2분기 모임을 가졌다. 얼마나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는지, 댓글 반응이며 조회수 추이가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 열을 올리며 술을 마셨다. 그날 밤의 아키야마는 특별히 더 즐거워 보였고(화장이며 옷이며 잔뜩 힘을 준 태가 났다) 요이사키도 술이 들어가니까 계속 웃고 있었다. (솔직히 이때 아사히나가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대학가의 싸구려 안주와 싸구려 증류주의 맛에 얼큰하게 취한 채로, 자연스럽게 2차까지 정해졌다.

장소를 옮기기 전, 유일한 흡연자였던 시노노메는 잠깐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쥐고 남은 손으로 부지런히 dm에 답장을 보냈다. 25의 일러스트 작업물만 따로 모아 업로드하는 계정이었는데, 이번 신곡의 반응이 아주 괜찮아서 요즘 dm창이 바빴다. 일러스트로 구현하지 않은 파트의 가사를 모티프로 창작한 팬아트를 종종 보내오는 팬들도 있었다. K의 선율이, 유키의 가사가, 자신의 아트워크를 기반으로 다른 사람에 의해 구현되는 건 꽤 즐거웠다. 시노노메는 그림에 성실했고, 제 그림이 좋다는 언어에도 성실했다. 그래서 성실하게 제가 태그된 팬아트 링크를 모아 피드에 업로드했다. 시노노메는 계정 관리에 성실했다. 연초 하나를 태우는 시간만큼만 할애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마지막 팬아트까지 태그하고 감사의 멘트를 작성하던 중에 누군가 슬쩍 나와 시노노메 옆에 섰다.

“취했어?”

시노노메는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을 아사히나에게 말을 붙였다. 굳이 눈으로 한번 확인하지 않아도 옆에 선 사람이 아사히나라는 건 인기척만으로도 알 수 있다. 아사히나네 모친은 담배 냄새에 민감하기 때문에, 시노노메가 밖에서 담배를 태우는 동안 아사히나가 그 옆에 서 있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아사히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취한 것 같은데.” 시노노메는 중얼거리면서 아사히나로부터 한 발짝 옮겼다. 아사히나에게 담배 냄새를 묻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숙한 배려도 무색하게, 아사히나는 다시 그만큼 시노노메 쪽으로 발을 붙였다.

“왜 또,”

“에나,”

말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먼저 말해. 시노노메는 반쯤 태우다 만 연초를 쓰레기통의 재떨이 위에 비벼 껐다. 초여름이라 쓰레기 냄새가 슬슬 올라오는 게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아사히나는 담배꽁초를 비벼 끄는 그 일련의 동작을 주의 깊게 관찰하더니,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말은 아주 천천히 느리게 흘러나왔다.

“저번에 에나가 했던 말 듣고 생각해 봤는데, 에나의 설명대로라면 나는 에나를 좋아하는 게 맞을지도 몰라.”

“뭐?”

“그런데 왜 에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다른 이유가 있어?”

시노노메는 아사히나가 하는 말을 두 박자 놓치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에나낭이 눈앞에 없는데도 가사를 쓰면서 에나낭의 목소리가 생각났어. 에나낭이 해줬던 설명 같은 것도. 그리고 갑자기 뭔가 궁금해질 때, 에나낭한테 연락도 하고 싶었는데. 그런데 왜 에나낭은 아니라고 생각해? 깊이도 없고 윤기도 없이 시노노메를 시커멓게 내려다본다. 시노노메는 잠깐 멍하게 있다가 가까스로 픽 웃고 말했다. 그야 마후유, 너는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끝이잖아. 그것보다 더 많은 걸 생각하고 바란 적이 있어? 그러니까… 나를 상대로. ‘그런 거’ 말이야. 아사히나는 또 대답하지 못하고 도륵도륵 눈동자만 굴렸다.

집에 가서도 보고 싶고 용건 없이 연락하고 싶은 것만 따지면 썸이 맞지. 근데 나랑 그 이상의 것도 상상할 수 있느냔 말이야. 그 이상의 것인 즉슨 성적 긴장감이고, 즉 키스나 섹스 같은 거라고 설명하기 싫었다. 딱히 걸즈토크 하려고 만든 서클도 아니고, 이런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특히 아사히나랑은). 그 정도는 그 나이 먹고 대학생씩이나 되었으니 알아서 알아먹으라고. 또 대답 못 하고 도륵도륵 눈동자만 굴리는 아사히나를 뒤로 한 채 도망치듯 가게 안으로 돌아갔다.

2차가 파한 뒤 아사히나를 택시에 태워 보내면서 일렀다. 집에 도착하면 단체 채팅방에 연락하라고. 아사히나는 시노노메를 흘긋 보더니 물었다. ‘용건 없는데도?’ 시노노메는 묵은 피로와 알콜이 한데 흐느적 뒤섞여서는 간신히 대답했다. ‘용건이 없기는 뭐가 없어.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안부 하나 남겨달라는 거잖아.’

택시 뒷자리에 앉혀놓고 야무지게 벨트까지 채워주는데 아사히나가 귀에 대고 또 중얼거렸다.

“에나, 나중에 또 연락해도 돼? 용건 없는데도?”

“용건이 없는데 아무 때나 무턱대고 연락하면 실례지.”

“그렇구나.”

“……참다 참다 못 참겠으면 하루에 한 번 정도는 괜찮아. 밤 열두 시 넘어가서는 좀 그렇고.”

“알겠어.”

그날 밤 열 시 삼십 이 분 쯤, 25의 단체 채팅방에 아사히나의 연락이 왔다. 아키야마와 둘이 남아서 3차까지 마시고 있을 무렵이었다. 마후유도 집에 무사히 잘 도착한 모양이네. 아키야마는 이모티콘으로 답장했다. 시노노메는 따로 답장을 하지 않고 읽은 흔적만 남겼다.

아키야마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화가 왔다. 아사히나로부터 온 것이었다. 전화벨이 대여섯 번 정도 울리고서야 시노노메는 느릿느릿 전화를 받았다.

“어, 왜?”

“…잤어?”

“아니, 이제 집 가는 길.”

“그동안 집에 안 가고 뭐 했어?”

“미즈키랑 3차 갔지.”

“그렇구나.”

에나 목소리가 이상해. 그야 계속 떠들었잖아. 목쉬어서 그래. 난 하나도 안 쉬었는데. 너는 안 떠들었잖아. 하등 쓰잘데없는 말이 몇 번 오갔다. 용건 없어도 정 필요하면 전화하라 했더니 귀신같이 연락한다. 아사히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시노노메 역시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을 열심히 걷기만 했다. 벌써부터 밤이 후텁지근했다. 술까지 마셔서 몸에 열이 올랐다. 난리 났다. 귀찮아서 화장만 지우고 바로 눕고 싶었는데, 샤워까지 모두 하고 자야 할 것 같았다. 전화를 하고 있다는 건 잠깐 잊은 채로 그런 생각을 했다. 아사히나는 술에 절어서 힘겹게 걷는 소리를 잠자코 듣더니, 시노노메가 건물 중앙현관문 도어락을 해제하는 소리를 듣고 비로소 입을 열었다. 잘 자, 하고. 시노노메는 그래, 하고 간신히 대답했다. 자취방은 3층이어서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통화기록은 칠 분 오십 이 초였는데 대화한 시간은 통틀어봐야 일 분 남짓이었다.

화장을 지우고 씻은 뒤 시노노메는 습관적으로 SNS에 접속했다가, 감사의 코멘트를 아직 못 적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한참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고 있었는데 그때 아사히나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작성하다 말고 끊긴 채였다.

‘앞으로 더 다양한 작업물로 찾아뵙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여기까지 쓰다가 뭔가 문장이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사랑한다는 좀 무거운 것 같아. ‘앞으로 더 다양한 작업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는 상투적이지 않나. 너무 흔해서 진정성이 없어 보이지 않나. 좋다는 거 티는 내면서도 너무 무거운 느낌은 안 주는 게 뭐가 있지. 사랑합니다와 감사합니다 사이에서 시노노메는 주저했다. 그 와중에 아사히나의 ‘좋아합니다’까지 난입해서, 주저하는 마음이 뱅글뱅글 제자리에서 돌았다. 결국 시노노메가 고른 말은 사랑합니다 였다. 그렇게 무거울 게 뭐가 있어. 왜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그리고 적당히 무게감을 덜어낼 수 있는 이모티콘을 몇 개 골라 붙이고, 업로드 버튼을 누르고, 쓰러지듯 잠들었다.

그날 밤 시노노메는 꿈을 꾸었다. 수십 개의 계정들이 dm으로 찾아와서, 정말 사랑하는 게 맞냐고, 밥 먹다가도 갑자기 생각나고 아무 이유 없이 제게 dm을 보내고 싶고 용건 없이도 피드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맞냐고 따지는 꿈이었다. 매 끼니 밥 먹으면서까지는 생각 안 해도, 그림 그릴 때 보면서 응원을 받는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가 오히려 호되게 혼났다.

 

 

그리고 오늘, 지금 이 시각, 뜬금없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세 번째 고백이 이루어진다.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이 정도면 성의가 없어서 찼다고 해도 괜찮지 않나?)

‘역시 나는 에나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어.’

좋아하면 좋아하는거고 아니면 아닌거지, 어쩌면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건 대체 뭐야. 촌스럽고 유치하고 뻔한 고백은 괜찮다. 그만큼 정직하고 귀여운 구석이 있으니까. 그런데 이건 뭐 귀여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요령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성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혹시 내가 너한테 뭐 헛갈리게 한 거 있어?”

“…….”

아사히나는 대답 없이 시노노메를 빤히 응시한다. 거봐, 이렇게 (좋아한다는, 아니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사람 눈을 뚫어져라 쳐다볼 수 있는데 이게 어떻게 연애 감정이래. 시노노메는 생각한다. 도무지 속도 모르고 시커멓기만 한 동공이 부담스러워서, 시선을 피하고 싶은 건 오히려 시노노메 쪽이다. 아사히나는 시노노메에게서 조금도 눈을 떼지 않고, 두 박자 정도 늦은 대답이 느릿느릿 흘러나온다.

“잘 모르겠어.”

어 그래, 나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시노노메는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뻔한 대답을 간신히 삼킨다. 명백한 거절 멘트를 날리고 싶은데, 아사히나의 새카맣고 새카만 눈이, 시노노메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명백한 거절의 멘트를 날려도 아사히나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을 터였다. 지난 두 번의 고백 모두 거절했고, 아사히나의 표정은 못 봤다. 그래도 확신할 수 있었다. 왜냐면 마후유는, 원래 그런 애니까.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잖아. 아니, 잘 모른대잖아. 하지만 어쩐지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시노노메는 글라스 잔에 손을 뻗어 음료로 입안을 겨우 축였다.

“네가 말하는 ‘좋아한다’는 정의가 대체 뭔데? 너 그냥…… 내가 너 좀 오래 봤고, 가끔 좀 챙겨주고, 대충 편한 사이인 것 같고 그래서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거 아냐?”

그거랑 이거는 완전히 다른 문제지. 시노노메는 똑 부러지게 덧붙였다.

그러자 아사히나는 기특하고 성실하게도,

“만났다가 헤어지고 집 가는 길인데 에나낭이 생각나고, 다시 보면 좋겠고, 용건 없는데도 에나낭한테 전화했으니까.”

하고 시노노메가 가르쳐 준 것을 줄줄 읊었다. 안타깝게도 정답은 아니었다. 기가 막힌다. 얘 앞에서는 무슨 말도 못 하겠다 싶다. 시노노메가 대충 참고하라고 설명해 준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거기에 저를 끼워 맞춘다. 시노노메 귀에는 꼭 아사히나가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는 게 맞아’라고 우기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 그래 나도 너 좋아하지. 우리 서클 멤버잖아. 알기도 오래 알았고. 솔직히 대학 동기들보다 더 오래 봤고, 나도 25 애들이랑 있는 자리 편하고 재미있고. 뭐, 너랑 이렇게 평일에 할 일 없이 이런 데 와서 앉아 있는 것도 싫지 않아. 동기들이랑 쓸데없이 교수 욕하고 남의 남친 소식이나 가십거리 듣는 것보다는 너랑 이야기하는 게 더 생산적이라고 느낄 때 있어. 그리고 나는 네가 쓴 곡이나 가사 같은 거 취향이야. 분야는 다르지만 어쨌거나 같은 창작자로서 부럽고 리스펙트하고 그래.”

“…….”

“그렇다고 해서 너랑 키스를 하고 싶은 건 아냐. 넌 강아지가 좋다고 키스할 수 있어?”

“강아지 안 키워봐서 잘 모르겠는데.”

“아니, 그게 아니고……. 아이 씨, 그래 내가 말을 잘못했다.”

“나는 에나의 반려견이야?”

“아니 그게 아냐. 아까 강아지 이야기는 그냥 잊어. 어쨌거나 난 너랑 같이 창작을 하고 싶은 거지, 연애를 하고 싶은 건 아니라고. 나는 너와 상호 합의 하에 너를 독점하고 싶은 생각이 요만큼도 없어.”

시노노메는 엄지와 검지를 맞붙이고 ‘요만큼도’에 방점을 찍었다. 아사히나는 시노노메의 말을 잠깐 곱씹는 듯했다. 퍽 신중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나도 에나를 독점하고 싶은 것 같지는 않아.”

“그렇지? 그럼 이야기 끝났네.”

“그래도 에나를 좋아하는 건 맞는 것 같은데.”

“그래 나도 너 좋아해. 친구이자 동료이자 아티스트로서. 연애 대상은 아니고.”

시노노메는 이만 이 주제에 대해 결론을 짓고 싶었다. (대학 동기들이라면 몰라도) 서클 멤버와 연애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될 거라고는 한 번도 걱정하지 않았는데. 시노노메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연애에 아무 생각 없는 스토익의 화신들이었으니까. 사랑을 모르면서 사랑 노래를 만든다는 건 다소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시노노메의 생각은 달랐다. 사랑을 모르니까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거다. 아사히나는 사랑을 모르니까 가사가 잘 안 써진다고 했지만, 시노노메는 아사히나의 가사 정도면 충분히 준수하다고 생각한다. 지리멸렬하고 지저분하고 추레한 사랑의 뒷면까지 알고 나면 사랑이 어렵다. 모르니까 쉽고, 잘할 수 있는 거였다. (그럼 시노노메는 뭔데? 시노노메는 정직하게 요이사키의 노래를 재구현하는 일에만 철저했으므로 논외다) 어쨌거나 시노노메는 이 서클이 오래 갔으면 하니까, 아사히나와 그런 쪽으로 엮일 마음은 추호도 없다. 이제 그만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아사히나의 말이 시노노메를 붙잡는다.

“에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쓴 가사들이 전부 이상해 보였어.”

“뭐?”

신곡의 가사는 분명 발랄하고 귀여웠다. 표현도 그렇게 상투적이지 않았다. 시노노메의 충고에 맞게 사랑을 잘 모르겠다는 아사히나가 나름 타협해서 만들어 낸 최선의 결과물이기도 했고. 유튜브 댓글 창에서는 가사를 패러디 한 밈이 도배되어 있다. 완성도 있고 중독성 있고, 결정적 한 방이 있다는 걸 방증하는 셈. 그런데 정작 그 가사를 만든 사람은 제 가사가 이상하다고 한다.

“에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가슴은 딱히 두근거리지 않았어. 얼굴이 새빨개지지도 않았고. 지금 에나와 이렇게 마주하고 있지만 나는 긴장하지 않아. 에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고.”

“아니, 그럼 도대체 왜 좋다는 건데?”

“에나낭의 25 포트폴리오를 봤어. 5년 전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바로 지난 신곡까지. 에나를 보는 건 괜찮았는데, 이상하게도 에나낭의 작업물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어.”

“…….”

에나낭 그림 중에는 잘 그린 것도 있고, 이상하고 못생기고 뭘 표현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그림도 있었어. 완성도도 뒤죽박죽이고 제각각이었어.

그래도 하나같이 공통된 부분이 있었는데,

이걸 그린 사람은 그림을 엄청나게 좋아하는구나. 자기 자신을 엄청나게 좋아하는구나.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어.

적어도 자기 그림에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 사람이구나.

그러고 나서 내 가사를 보니까 너무 이상했어.

내 가사는 전부 거짓말투성이였구나. 나도 모르는 감정을 아는 체하면서 쓰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아사히나의 문장은, 가사를 쓸 때는 그렇게 잘 벼린 단어들로 깔끔하게 제련되어서 나오는 주제에, 말로 할 때는 영 투박하고 볼품이 없다. 말주변이 모자란 중학교 1학년 수준으로. 그런 투박하고 볼품없고 촌스러운 말들로 아사히나는 열렬히 고백한다. 그게 고백인 줄도 모르고. 어떻게든 ‘아사히나 마후유가 시노노메 에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학교에 있는 동안은 공부 생각만 했고, 그 외에는 대체로 에나낭에 대한 생각을 했어. 에나낭의 그림을 보면서. 시노노메 에나는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정직한 그림을 그리는 걸까. 어떻게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게 잘 알고 있을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래서 헤어지고 집에 가면서도 에나낭이 보고 싶었고, 용건 없는데도 에나낭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에나 옆에 있으면, 에나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고백은 무지와 무구라는 포장지를 얇게 뒤집어쓴 채.

마구 범람하는 고백에 시노노메는 한참을 굳어있다가, 약간은 변명하듯이 대꾸했다.

“그렇지만 마후유……. 나를 독점하고 싶고, 내가 마후유 아닌 다른 사람이랑 데이트하거나 그런 게 보기 싫고 그런 건 아니잖아.”

“응.”

“나랑 키스를 하거나 그…런 걸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

“그러니까, 아마도 마후유의 마음은… 나에 대한 호기심? 뭐 그런 것 같은데……. 아냐?”

“호기심은 좋아하는 게 될 수 없어? 내가 에나를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게 될 수 없어?”

마음이 약해진 탓인지는 몰라도, 아사히나의 목소리가 약간 간절하게 칭얼대는 것 같이 들린다. ‘나도 누군가를 좋아해 볼 수는 없어?’ 평생을 허락받고 살아오느라 이제야 마음을 느릿느릿 배우기 시작한 애한테, 좋아하는 마음마저 남에게 허락받아야 한다는 건 다소 잔인한 것 같다. 이쯤 되니까 시노노메도 약간 홀려서, 말을 이렇게 흘리게 된다.

“아니,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또 그게 맞겠지…….”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데, 내가 뭐라고 네 감정을 인정하고 인정 안 하고 그러겠어. 내가 어떻게 네 마음을 다 알겠어. 내가 어떻게 네 감정을 허락하겠어. 시노노메의 머릿속에는 그동안의 무수한 언쟁이 지나다닌다. 아빠가 뭔데. 선생님이 뭔데. 그 사람들이 뭐라고 그림을 좋아하고 잘 그리고 싶다는 내 마음을 인정하고 인정 안 하고 그럴 수 있는데? 내가 좋다는데. 내가 잘하고 싶다는데.

“마후유는…… 나랑 연애를 하고 싶은 거야?”

“궁금하니까 해 보고 싶어.”

“그 대상이 기왕이면 나였으면 좋겠다는 거고?”

“에나가 궁금하니까, 에나랑 해 보고 싶어.”

“…….”

시노노메는 스트로우로 남은 음료를 휘적거렸다. 얼음이 다 녹아서 유리잔 표면은 물에 흠뻑 젖었다. 아사히나는 종이 스트로우가 물렁하게 휘어지는 것을 보다가, 물바다가 된 코스터를 보다가, 마지막으로 파츠가 몇 개 떨어진 시노노메의 네일까지 닿았다. 언어에는 놀라우리만치 힘이 있어서, 추상적이고 비정형적인 것도 언어로 한번 구현시키고 나면 정말 그 언어에 맞게 꽤 명확해진다. 한 번 고백을 하고 난 아사히나는 시노노메를 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더더욱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정말이지 귀여운 맛이 없잖아, 귀여운 맛이 없다구.

“그럼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통으로 비워 놔. 할 수 있지?”

“응.”

“데이트니까 옷 제대로 입고 와야 해.”

“데이트…….”

데이트는 많이 해 봐서 알아. 뭐? 누구랑? 카나데랑 미즈키랑 에나랑. 바보야, 여자애들끼리 놀러 가는 데이트랑 이 데이트는 다른 거야. 그렇구나.

연애를 하고 싶다는 아사히나의 말에는 대답을 할 수 있었지만, ‘네가 좋아’라는 고백에는 답할 수 없었다. 시노노메가 보기에 아사히나는 시노노메를 연애 감정으로서 좋아하는 게 아니다. 그저 시노노메의 그림에 감명을 받았고, 그래서 그 근원에 대해 탐구하고 싶은 거다. 아사히나도 창작을 하는 사람이고 시노노메도 창작을 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이건 작품에 강한 이끌림을 느끼고 창작자에 대해 알고 싶은, 창작자의 고집에 가깝다고 본다. 시노노메는 그게 싫지 않았다. 당연하지, 시노노메도 창작을 하는 사람이니까. 시노노메는 아사히나와 연애를 한다고 해도 흔해 빠진 영화 관람이나 유원지, 카페 데이트 따위를 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물론 초반에는 좀 하겠지. 시간이 지나면 좀 다른, 뭔가 더 고차원적이고 유의미한 걸 할 계획이었다. 이건 그냥 연애가 아니니까.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연애랑은 좀 다른 거니까.

시노노메는 아사히나의 스마트폰을 빌려 디데이 어플을 설치해 주었다. 제 디데이 어플도 업데이트했다.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애인(시노노메보다 네 살 연상의 오피스 레이디)과의 디데이 카운트가, 헤어진 지 세 달이 넘었는데도 혼자서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 다른 건 다 정리해 놓고 이런 건 또 잘 빼먹는단 말이지. 시노노메는 구애인과의 디데이를 삭제하고 새로 써넣었다. 마후유, 라고 쓰려다가 좀 이상해서 유키라고만 적었는데, 그것도 기분이 좀 이상해서 눈 모양 이모티콘을 넣었다.

“오늘부터 너랑 내가 연애를 하기로 했으니까, 이날은 우리에게 특별한 날이야. 그래서 오늘을 시작으로 매일 디데이를 세려고 해.”

“오십 일, 백 일, 이백 일, 삼백 일, 일 년.”

“그래. 잘 알고 있네. 오늘부터 1일 인거야.”

“응.”

아사히나는 시노노메가 가르쳐 주는 대로 유순하게 제 어플에도 똑같이 등록했다. ‘시노노메 에나.’ 지나치게 정직하고 투박한 센스가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또 뭐 할 거 없나 싶어서 기념으로 손을 잡아 보자고 했다. 물론 아사히나와 진도 같은 걸 뺄 생각은 없다.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친구들끼리도 손 같은 건 잘 잡으니까, 그리고 마후유는 남들 하는 거 다 한 번씩 해 보고 싶어 할 것 같으니까. 시노노메는 그 정도는 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에나는 손에 굳은살이 많네.”

“너도 많잖아.”

“필기구를 오래 쥐느라.”

“나도 연필이랑 목탄이랑 붓이랑 뭐 많이 쥐느라.”

“성실한 손이구나.”

아사히나는 잡혀 있던 손을 스르륵 빼고는, 아예 두 손으로 잡고 시노노메의 손가락을 관찰했다. 시노노메는 아사히나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네일 샵에 안 간 지 사 주가 넘어서 파츠가 많이 사라진 손톱까지 유심히 헤아려 보고 그제서야 손을 풀어준다.

“잘 봤어.”

참으로 아시하나다운 감상이다.

“에나낭의 그림은 몇 년을 봐 왔는데, 그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손을 궁금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게 이상해.”

그 뒤에 이어지는 말까지는 예상 못 했지만.

시노노메는 어쩐지 가슴께가 물렁물렁해지는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그림에 대한 그 어떤 칭찬보다도 더 가슴께가 쉽게 물러졌다. 그저 손을 보여준 게 전부인데.

주말의 데이트 약속 시간을 정하고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학교 앞에서 잠깐만 얼굴 보자길래 금방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시계를 보니 벌써 여섯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엄청 피곤한데 그냥 밖에서 저녁 먹고 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사히나가 갑자기 시노노메의 어깨 위로 고개를 숙였다.

“아까 손잡으면서 생각해 봤는데, 상대가 에나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어.”

“뭐가?”

“그런 거.”

“뭐?”

“나중에……. 나중에 그럴 상황이 된다면.”

목소리는 잔뜩 낮추고 속삭이듯이 빠르게 뱉어낸 아사히나는, 시노노메가 돌아볼 틈도 주지 않고 가 버렸다. 시노노메는 3초 정도 뒤늦게 그 말을 이해했다.

“야!”

그리고 대사의 주인이 사라진 자리에 대고 탄식했다.

그런 거라니, 난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그리고 너 그런 거 할 줄은 알아? 아니 그게 뭔지 알기는 해? 얘 앞에서는 진짜 무슨 말도 못 하겠다. 시노노메는 단추를 잘못 꿴 것 같다고 깨닫는다. 하지만 무를 방법은 없다. 그리고 이제 와서 무르기에는……, 그녀는 제 자존심이 너무 소중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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