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후유는 얼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부모님과 대화… 라고 할 수도 있는 타협을 거친 뒤에는 그나마 나아졌다. 에나가 마후유의 집에 놀러가서 얼굴을 비추는 일도 드문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어쩐지 언짢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은, 에나가 마후유의 엄마와 이야기할 때 경계만이 아닌 선망과 호감을 담은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견디지 못해 물어
첫키스의 추억은 최악이었다. 에나에게는 약간의 선망이 있었다. 상냥한 연인과 낭만적인 키스가 추억으로 남는 것. 에나의 감성은 여느 여고생과 다름이 없었다. 마후유와 맺는 관계는 남들과 현저히 차이가 있었음을 관과한 사고였다. 에나는 마후유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언제까지나 에나를 보고 멀뚱히 서서 지켜볼 마후유를 생각하면 화가 날 것 같으니 사전에 차단한
에나가 아사히나라는 성을 빌려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별 대단한 이유가 아니었다. 본명으로 시작했다간 아버지의 명성을 내세웠다는 오명을 쓸 것 같았고, 닉네임을 에나낭으로 지을 정도로 창의력이 없었으며, 그에따라 주변에서 빌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니, 별 시답잖은 의미부여를 하지 않을 사람은 마후유 뿐이었기 때문이다. 세상 어디서나 마찬가지였지만, 일
“하.” 입술을 떼니 열로 뜨거운 뒷목이 당겼다. 언제나 적응이 안 됐다. 얘랑은 한글도 못 뗀 어린아이를 건드는 느낌이 든다니까... 에나는 자기 삶에서 가장 나쁜 짓을 했던 순간보다도 얼굴이 홧홧했고 안구 윗부분이 저렸으며 약간은 울 것 같았다. 이런 속도 모르고 마후유는 시선을 내리깔고 에나의 입술을 바라봤다. 더 원하는 거겠지. 하, 흡. 키스따위는
“에나가 좋아.” “또 그거야?” 세카이에서 긴장감도 없이 퍼질러 누워있으니 들은 말이었다. 분명 열원도 없을 텐데 바닥이 차가운지 아닌지도 구분이 가질 않았다. “또가 아니라 계속.” “그런 말을 들어봤자…” 물론 나는 예쁘고, 상냥하고, 고백 받아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사람이지. 하지만 고백의 발언자가 마후유라면? “하아, 그래. 어디 한번 얘기해보자.
“에나가 좋아졌어.” “열 나니?” 탱그랑. 커터칼로 공들여 길게 깎은 미술연필의 심이 바닥에 닿아 부러졌다. 의아함을 숨기지 못하고 눈과 눈썹 사이가 한참이나 멀어졌다. 얘가 장난으로 이런 말을 할 애던가? “연애적 의미야.” 표정을 살피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얼굴을 들여다보자 듣는 척도 안 하고 뒷말을 이었다. 드로잉 북을 내려놓고 마후유의 이
6월. 작년보다 확연하게 높은 기온에 지구온난화에 대한 대책을 고민하게 되는 날이었다. 편의점에서 구매한 아이스크림의 포장지를 뜯으면 직전에 꺼내온 것인데도 벌써 표면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황급히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문다. 입안 가득 퍼지는 냉기와 소다의 단맛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찰나, 녹은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려 손에 하늘색의 줄무늬를 만들었다. 평
숨을 내쉬면 하얀 입김이 나왔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직 약속 시간까지 10분 정도 남아있었다. 가만히 서 있으면 주변 사람들의 발소리와 말소리 그리고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아사히나 씨!" 돌아보면 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진 남성이 보였다. 그는 단발 정도의 길이를 하나로 묶은 채였는데 급하게
*논컾해석○ *아래글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https://pnxl.me/b0cqn1 지금은 멀게 느껴지는 1학년의 어느 날, 비슷하게 흘러간다 느껴지던 일상 사이에 유난히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억이 있었다. * 오랜만에 기계들을 데리고 쇼를 하러 나왔다. 하루 종일 맑을 것이라는 예보와는 달리 흐린 하늘만이 눈에 들어왔다. 회색빛이 내려앉은 길거리에
*논컾해석○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1학년의 어느 날, 언제나 똑같았던 일상의 단면에 닦이지 않는 색깔이 있었다. * 비가 내린다. 나는 엄마가 가방에 넣어주신 우산을 쓰고 학원에 가려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학원까지 가는데 걸리는 잠깐의 시간. 그 속에서 흑백영화처럼 흐리게 보이는 길거리의 풍경은 나의 흥미를 끌어내지 못했다.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막이 내려간 극장. 조명이 꺼진 건물에서 관객들은 떠나간다. * 겨울이 끝날 무렵의 어느 계절이었다. 여전히 쌀쌀한 느낌이 있었지만 햇빛은 따뜻했고, 거리의 화단에선 씨앗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고있었다. 올려다본 푸른 하늘엔 새하얀 구름이 그림을 그린 듯 퍼져있었다. 평범하고도 좋은 날. 나와 연인관계인 그를 발견한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오늘 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