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준 대가
에나마후 마후에나
에나가 아사히나라는 성을 빌려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별 대단한 이유가 아니었다.
본명으로 시작했다간 아버지의 명성을 내세웠다는 오명을 쓸 것 같았고, 닉네임을 에나낭으로 지을 정도로 창의력이 없었으며, 그에따라 주변에서 빌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니, 별 시답잖은 의미부여를 하지 않을 사람은 마후유 뿐이었기 때문이다.
세상 어디서나 마찬가지였지만, 일본 또한 결혼한 사람과 같은 성씨를 쓴다. 괜히 놀림을 받을까봐 에나는 아사히나 에나와 시노노메 에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구분해두었다.
에나가 일 관련해서 마후유의 성을 쓴다는 사실을 아는 건 당사자인 두 명 뿐이었다. 화풍을 통해 알아챌 수 있을 만한 사람은 부친이나 유키하라 선생님이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직접 마후유를 언급한 적이 없었으니 딱히 건드릴 화제는 아닐 것이다.
시원스럽게 일을 헤쳐나가길 좋아하는 에나가 이런 식으로 복잡스럽게 상황을 만든 건 오직 그림에 대한 긍지 때문이었다.
그림을 인정받고 싶은 격렬한 욕구에도 셀카 계정에 그림 계정을 언급하지 않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다른 요인으로 인해서 관심을 받아도 의미 없으니까.
제 얼굴 한 장짜리 게시글 하나에 몇천의 관심이 몰리는 현상이 무슨 뜻인지 모를만큼 천치도 아니었다.
제 그림이 그림 자체가 아니라, 시노노메 신에이의 딸, 그리고 젊고 예쁜 신인 여화가의 그림이라는 꼬리표가 붙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눈에 훤했다.
언론에 수없는 러브콜을 받을지라도 그건 결코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림 그 자체로 평가받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고집이라면 고집, 긍지라면 긍지였다. 시노노메 에나는 그런 인간이었다.
그러던 중 에나는 오랜만에 마후유와 만났다. 화가라는 직업을 가지고서 얼추 안정을 찾기 시작한 시기였다.
“오랜만이야.”
“응.”
성을 빌린 것 치고는 그리 잦은 교류를 나누지는 않았다. 오늘도 정말 드물게 겹친 휴일을 소모해서 만난 것이었다. 대외적으로 살갑게 지내는 통에 온갖 약속 권유가 쇄도했지만, 그걸 제치고 에나를 만나러 왔다는 자체가 특별한 경우였다. 그를 에나는 몰랐다.
적당한 이자카야를 잡아 마시기로 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시끌시끌한 분위기가 에나에게는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림에만 몰두하니 혼자인 게 익숙한 탓이었다.
마후유는 성인이 되고 나니 때깔이 훨씬 고왔다. 아닌가? 유독 나이 많은 어르신이 많은 예술계에 몸 담으니 제 또래 여자애들을 못 보고 사니까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마후유의 얼굴은 보기에 눈이 즐거운 외견인 건 확실했다.
“일은 알아서 잘 할 테고, 쉴 때 뭐하면서 지내?”
“음, 작곡이랑, 음악 듣기. …전시회도.”
“어, 진짜? 어디어디 다녀왔는데?”
“전시회명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러면서 더듬더듬 열린 지역이나 전시장을 나열했다. 온통 에나의 그림이 걸렸던 전시회였다.
“뭐야? 너 내 그림 보고 다니니?”
에나는 술이 들어간 탓인지 솔직하게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나른한 감각에 눈을 감고 웃으며 술잔에 손등을 대고 열을 식히는 중에 마후유가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어쨌든 관련이 있으니까.”
마후유의 성을 빌려 그림을 걸어둔 걸 말하는 것이다. 에나는 무심코 자신의 그림과 마후유의 성, 자신의 이름 앞에 선 마후유를 상상해보았다.
“그럴 거면 나한테 입장권 달라고 하지. 큰 돈은 아니라고 해도 자잘하게 나가니까 아깝잖아.”
“아깝진 않아.”
딱 잘라 말하는 마후유에 에나는 힐끔 마후유를 보았다. 술잔을 홀짝 기울였다. 절대 술을 무리해서 마시지 않는다. 어울리는 목적으로만 살살 목으로 넘길 뿐이었다.
마후유는 흐르듯이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테이블을 향했다. 뭐지. 무슨 반응이야. 좀 재밌었다. 그러나 순순히 재밌어할 상황은 아니긴 했다.
확실히 마후유가 지적한 것처럼 에나가 한 건 보통이 아니었다. 보통이면 그냥 연예인 이름을 갖다 붙였겠지.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사히나 에나라는 이름 맘에 안 들어? 그래도 이제는 못 무른다?”
왜 에나가 마후유를 골랐는가. 여태껏 여러 미사여구를 달아댔다. 빙빙 돌아 숨기고 얼버무리고 저 뒤편으로 던져버렸다.
생각이 깊어진다. 멈추려고 술잔을 길게 기울였다. 술은 맛없다. 즐기려고 마신다는 사람은 이해가 안 간다. 알딸딸한 느낌도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술 마실 돈이면 치즈케이크를 필두로 한 온갖 디저트를 맛보는 게 훨씬 나았다.
“아니, 마음에 들어.”
“큽, 뭐?”
마시던 게 목에 덜컥 걸려 기침을 여러번 했다. 유려한 손짓으로 물을 따라 이쪽으로 건넨 걸 마셨다.
“이름 말이야.”
운을 떼는 걸 힐끗 봤다.
“그동안은 별생각 없었어. 오히려 좀 무겁다고 느꼈어. 기대를 걸어주는 가장 큰 증거니까… 하지만 전시회에서 아사히나 에나라는 이름을 봤을 때.”
마후유는 자신도 한번 목을 축였다.
“얼핏, 아사히나 마후유라는 이름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모른다, 생각한다, 같다. 돌려돌려 말을 했지만 마후유가 드러낸 긍정적인 신호였다. 머리가 돌지 않아 말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 앞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내가 미쳤지. 냅다 술을 들이키는 게 아니었는데. 낭패였다.
분명 마후유가 중대한 발언을 한 것 같은데. 이해가 안 된다. 녹음이라도 해둘 걸 그랬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아냐. 지금 메모해두면 되지. 가방을 뒤져서 볼펜을 꺼냈다. 수첩을 펼칠 여유도 없어서 그냥 손 언저리에 적자고 결심하고 볼펜심을 드러내서 갖다댔다.
그러나 거기서 멈췄다. 마후유가 한 말이… 무슨 말을 했더라? 분명 이름 뭐라고 했는데. 조금만 떠올리면 될 것 같은데. 아닌가. 직감은 분명 잊을 거라고 알림을 띄우는데 내 고집은 기억할 거라고 뻗댄다.
가만히 손과 볼펜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후유의 손이 다가와 볼펜을 가져갔다. 멍한 정신으로 고개를 들자 마후유가 에나의 가방도 자신의 가방도 챙겨들어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가자, 에나.”
“응…?”
손을 이끄는 대로 일어서니 마후유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
본가에서 살던 시절이면 하지 못할 말이었다. 마후유는 분명 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에나 또한 그걸 알고 답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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