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마후]연극의 뒤편에

카미시로 루이×아사히나 마후유

프세카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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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내려간 극장. 조명이 꺼진 건물에서 관객들은 떠나간다.

*

겨울이 끝날 무렵의 어느 계절이었다. 여전히 쌀쌀한 느낌이 있었지만 햇빛은 따뜻했고, 거리의 화단에선 씨앗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고있었다. 올려다본 푸른 하늘엔 새하얀 구름이 그림을 그린 듯 퍼져있었다. 평범하고도 좋은 날. 나와 연인관계인 그를 발견한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오늘 운이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다가가려 발을 뗐을 때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한 듯한 그는 혼자였지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은 이제껏 봐왔던 그의 미소와는 달랐다. 눈꺼풀 아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났으며. 올라간 입꼬리에서 행복이 묻어나왔다. 어느새 내 쪽을 쳐다보며 눈을 휘어 보이는, 그런 그를 보는 순간 숨이 멈췄다. 그 어떤 순간보다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그는 쇼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을 만큼 극적이었다.

처음 보는 그의 미소에 감탄하던 것도 잠시. 그와 동시에 또 다른 감정이 밀려 들어왔다. 당신은 내가 없어도 그렇게 웃을 수 있구나. 이제 나의 도움은 필요 없구나. 성급한 억측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그를 오랜 기간 지켜봐 온 나의 판단이었다. 이제는 이런 인연을 끝낼 때가 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동안 그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카미시로 씨,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우연이네요."

머릿속에 느리게 입력되는 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마도.

"...그러네요. 아사히나 씨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잠시 같이 걸을까요?"

"좋아요."

내민 손을 그가 잡았다. 여전히 밝게 웃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면 어떨까. 그와 내가 손을 마주 잡은 채, 그가 웃으면 나도 따라 웃는다. 우리라는 이름에 묶여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된다. 정말로 그럴 수야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그런 단편적인 상상이 현실을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이미 시작해버린 극의 진행은 아무리 뛰어난 연출가라도 막을 수 없다. 이야기가 끝을 향해가고 있다면 더더욱.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의 흐름 속에 몸을 맡기며 계속 걸어갔다.

계획 없이 걷다 보니 보이는 것은 한 공원이었다.

도착지를 발견한 그가 말했다.

"아, 여기 오는 건 오랜만이네요."

나에게, 어쩌면 그에게도 지울 수 없는 기억이 담겨있는 장소였다. 내가 그에게 고백했던 장소. 당시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공원 한쪽의 벤치에서, 규모는 작지만 내 인생에 다시는 없을 최고의 연출을 해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날 관객의 반응은 긍정적이었지만,

"아사히나 씨, 사실 할 말이 있어서 불렀어요."

괜히 겉옷과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정돈했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우리의 관계는 나의 욕심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진심으로 웃게 되길 바랐으며 그렇기에 그와 함께하기를 원했다. 그는 내 요청에 응해주었지만 나와 같은 감정을 나누지 않았다. 우리는 일치할 수 없었고 이별은 예정되어있었다. 계획된 시나리오가 끝났음에도 공연자의 욕심으로 이야기를 질질 끄는 짓은 연출가로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목표했던 관객의 웃음을 봤다면 그걸로 만족하고 떠나가는 걸 지켜봐야 한다. 이것이 그가 주인공인 연극이라면 결말은 해피엔딩이길 바랬다. 그의 인생에 끼워진 단편극이 끝날 시간이 되었다.

마지막 대사를 말하려 했지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원더쇼의 연출가이자 배우로서 수도 없이 했던 일이었지만 수많은 관객 앞에서보다 당신 앞에 서는 것이 더 긴장되었다. 연기가 엉망인 배우가 간신히 연 입에선 짧은 문장만이 나왔다.

"...저희 그만하죠."

그날 그의 표정은 잊히지 않았다. 슬퍼하는 것도, 원망하는 것도 아닌 미안하다는 표정. 그가 나를 잡는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당신에게 나의 존재는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걸까. 언제든 떠나가도 괜찮은 상대.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확인받으니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마지막 인사는 웃으면서 해야 하는데, 그날 내가 어떤 표정이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그보다 먼저 등을 돌려 떠났다.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 알록달록하게 물든 나뭇잎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가을과는 또 다른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째서 갑자기 그날의 일이 떠올랐을까. 꽤 오래 지난 일이어서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올라오려는 감정을 누르려는 듯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낮의 길이가 줄어들어 이른 시간임에도 주위가 꽤 어두웠다. 이번에 쇼를하게된 공연장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는데 바닥에 버려진 공연 팸플릿이 보였다. 저건 우리 공연 팸플릿인거같은데... 이렇게 버릴 거면 가져가지나 말지. 떨어진 팸플릿을 주우려 했을 때 조금 더 뒤에서 바닥에 버려진 팸플릿을 유심히 보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관심이 있는 건가? 그 사람은 보랏빛 곱슬머리를 길게 길러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팸플릿을 주워 들고 숙였던 고개를 드는 그는​...

"카미시로 씨?"

"...아사히나 씨."

그날 이후로 그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혹시 자신을 피해 다니는 건가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사귀기 전에는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과 애초에 만나도 곤란해할 것이라는 걸 생각해 내고는 그에 대한 잡념을 버렸다. 이미 끝나버린 인연에 매달리는 건 좋지 않으니까.

예전 일이 어찌 됐든 중요한 건 지금 눈앞에 있는 그였다. 나는 미소를 그려내듯이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아사히나 씨. 잘 지내셨나요? 그건... 저희 쇼 홍보 팸플릿인데 관심 있으세요?"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퍼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은 그리움일까. 아니면 미련? 길게 말하면 할수록 늘어지고 싶어질 것 같지만, 어째서인지 문장을 내뱉는 입은 멈추지 않았다.

"아... 그게... 여기 연출에 카미시로 씨라고 적혀있는 걸 봐서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나에게 팸플릿을 내밀었다. 펼쳐진 팸플릿의 페이지에는 배우들의 이름과 함께 주요 스태프들의 이름도 쓰여있었다. '연출:카미시로 루이' 확실히 나의 이름이 정자로 쓰여있는 한 구석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아는 사람 이름이 쓰여있어서 멈춰 선 것일까.

"아, 제가 연출하는 쇼라서 관심이 생기신 걸까요?"

아무렇지 않은 듯 어쩌면 사심이 담겨있을 농담을 던진다.

"...그럴지도요."

그는 해석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팸플릿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반응은 예상에 없었다. 그는 내렸던 고개를 들고 이번엔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카미시로 씨를... 만난 뒤로 관심이 생겨서 여러 가지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러 다니기도 했지만 카미시로 씨만큼 마음에 드는 연출을 하는 공연을 하는 건 못 봤어요. 이런말은 그분들에게 실례일 수도 있지만 항상 뭔가 허전한 느낌이 남아서, 카미시로 씨가 하는 쇼를 보러 가볼까도 했지만..."

그는 말끝을 흐리며 말을 마쳤다. 짧은 정적속에서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멈췄다 하는 느낌이었다. 평소 천재라는 말을 듣고 살았던 나지만 이런 문제의 답은 명확하게 내릴 수 없었다. 말을 맺으며 웃는 그의 얼굴은 이별을 결심했던 그때의 미소와 전혀 달랐지만 비슷하게 느껴졌다. 무슨 뜻일까. 해석의 여지가 많은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이번만큼은 명확한 해설을 내놓아주었으면 했다. 천재 연출가의 상상력은 차고 넘쳐서 언제나 내 좋을 대로 해석해버린다. 완전하게 웃을 수 있게 됐지만 그럼에도 당신은 나를 원한다. 이렇게 생각되는 걸까.

당신은 닫혀있던 문을 열었다. 그 틈이 너무 작아 희미한 빛만이 간신히 보임에도 내가 당신에게 문을 열고 다가가도 괜찮을까.

고민 끝에 간단한 해답이 나왔다. 이야기의 해석은 관객 마음이니까. 그는 나의 연출을 보고 싶어 하고. 다음 공연은 주말인 내일이다.

"그러시다면, 보러 오실래요? 공연. 바로 내일이거든요."

"그렇지만 저는 표가 없는데..."

"그건 괜찮아요. 관계자한테 말해놓을 테니까 이름만 말하면 들여보낼 줄 거예요. 자리하나 마련하는 것쯤은 어려운 일도 아니에요."

나는 주머니에서 새 팸플릿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의 손가락이 나의 손에 닿았다.

"...감사합니다. 카미시로 씨"

"별말씀을요."

자연스러운 미소가 나왔다. 눈앞의 그가 마주 웃었다.

"공연 꼭 보러 갈게요."

끝났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이야기는 겨우 1막이 내려갔을 뿐이었다. 새벽의 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에 가로등 불이 일제히 켜졌다. 끝난 줄 알았던 이야기의 두 번째 막이 오르는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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