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요의 반지

게나조

篝火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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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위터 썰 기반, 약 미즈사요

  • 사요가 나구라 마을을 탈출한 생존if

  • 개저씨 주의

그 소녀는 야마다 사요로 다시 태어났다.

이전 이름을 그대로 쓰면 들키기 쉬우니, 가장 흔한 이름으로 가죠. 그를 마을에서 꺼내준 남자의 제안이었고, 사요는 그 의견에 동의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류가’가 존재하는 한 그는 가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기껏 그 짓을 벌이고 도쿄로 탈출했는데 또 가문에 속박될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남자의 성씨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 당신의 성이 아니냐고, 그 편이 사람들을 속이기 쉽지 않느냐고 순수한 호기심에 물었더니 그는 얼굴을 굳히면서 말했다.

“부친 쪽과는 절연한 지 오래라서 말입니다.”

이 사람도 복잡한 가정사가 있구나, 불순한 말이지만 그와 공통점을 찾아서 내심 기분이 좋은 사요였다. 남자는 화제를 돌렸다.

“당신은 제 모친 쪽의 먼 친척이고, 사정이 생겨서 제가 후견인이 된 것입니다. 당신이 자리를 잡고 경제적으로 독립을 한다면 이 후견인 관계는 깨지겠지만, 그게 영원한 이별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시겠지요? 그 후에도 저는 정기적으로 당신에게 안부를 묻고 제 근황을 이야기할 겁니다. 그 정도는 괜찮겠지요?”

남자는 공손하게 양해를 구하듯 사요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사요를 이렇게 소중하게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그 류가의 딸이라든가, 류가 제약의 귀한 외동딸이라고 추켜 세웠지만 그것은 사요 개인이 아닌 그 뒤에 있는 류가를 향한 아부이자 숭배나 다름없었다. 가족은 더 가혹했다. 그들에게 사요는 물건이었다. 가문의 영광을 지속시켜줄 물건, 영력이 강한 후대를 낳아줄 물건. 사요는 그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류가에 태어나 누려온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서라도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부를 바란 적도 없었다. 곳간에 쌀이 가득하면 뭐하나, 그것을 제 마음대로 쓰지도 못하는데.

그래서 사요는 사내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상냥하게 말을 걸면서 직접 흙바닥에 무릎을 구부리던 남자. 어깨를 짚고 발을 올려도 괜찮다고 말하던 남자. 그 사내의 속내가 무엇이든 상관 없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사요는 그를 믿었고, 도박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그렇게 둘은 식구가 되었다. 하루 한 끼 밥을 같이 하는 사이. 가족은 아니지만, 어쩌면 피붙이보다도 더 정이 깊고 서로에게 강하게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사이로서. 하지만 역시, 진정으로 이름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지 않았다는 점은 씁쓸했다.

걱정과 달리 사요는 쉽게 일자리를 구했다. 4년 전 도쿄 유라쿠초에 커피 사칸슈가 생기면서 도쿄에 킷사텐 유행이 분 덕이었다. 너도 나도 평일 휴일 구분 없이 커피를 마시기 위해 킷사텐으로 향했고, 가게 주인들은 늘어난 손님을 받아줄 종업원이 절실한 상태였다. 갓 시골에서 상경한, 커피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소녀가 지원을 해도 받아줄 만큼 말이다.

사요가 일하게 된 곳은 긴자에 있는 란주 커피라는 가게였다. 1951년에 생긴 이곳 역시 킷사텐 유행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그는 하얀 셔츠에 검정 원피스를 받쳐 입은 사요를 유심히 보더니, 모레 오전 여덟 시에 나오라며 사요를 돌려보냈다. 긴자에서 가장 유명한 킷사텐에서 일하게 되다니. 사요는 돌아가는 내내 입가에 미소를 한가득 띄우고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미즈키의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마당을 쓸고 있던 주인에게 긴자의 란주 커피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는 빗자루를 놓칠 정도로 놀랐다. 사요의 사정을 딱하게 여기던 그는 평소에도 사요에게 다정했다. 사요가 구직 면접에서 퇴짜를 맞고 돌아올 때마다 누구에게나 자리 자리가 있다는 말로 위로해주었다. 그는 자신의 딸, 아니 자신이 합격한 것처럼 사요의 양손을 잡고 축하해주었다. 마침 돌아온 미즈키도 소식을 듣고는 잘된 일이라며 사요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그 누구의 품보다 아늑하고 다정했다. 사요도 미즈키의 목을 끌어안으며 다짐했다. 꼭 돈을 모아서 이 사람에게 좋은 것을 선물해줘야지.

다음 날, 미즈키는 통장에서 돈을 찾아 사요를 데리고 한 악세서리 가게로 들어가서는 반지를 한 쌍 샀다. 귀찮게 하는 남자가 있으면 이걸 보여주세요. 그러면 대부분은 당신에게 다가가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서 사요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가짜 연인인 걸 들키면 곤란하다며 그는 제 몫의 반지도 샀으나 그 자리에서 끼지는 않았다. 사요는 그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짓이라도 좋으니 당신도 짝이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었으면 하는데. 하지만 속내를 말했다간 그가 질려버릴 수도 있으니 사요는 고개만 끄덕였다.

사요의 반지

첫날부터 일은 쉽지 않았다. 서빙은 암기력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처음 알았다. 손님이 물건을 가져오면 주인이 가격을 알려주는 문방구와 달리 이곳은 손님이 먼저 주문을 한 다음 음식과 커피를 가져다주고, 후에 카페를 나갈 때 계산하는 방식이었다. 즉 누가 무엇을 주문했는지 정확히 기억해서 메뉴를 나르고 결제를 해야 했다. 거스름돈 계산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어떤 손님은 50엔짜리 커피를 주문하고는 400엔을 내밀기도 했다. 이런 날은 끙끙대면서 동전을 맞추어야 했다. 앉아서 쉬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맞지 않는 구두 때문에 귀가하면 발이 얼얼했다.

다행히 사요는 머리가 좋은 편이었고, 나구라와 류가의 비호 아래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물처럼 지내온 시간이 무색하게 빠르게 적응했다. 일이 편하다고 느낀 적은 없지만 지금까지 류가의 비호 아래에 정물처럼 가만히 지내면서 어른들 마음대로 주물러지던 지난 17년보다는 훨씬 나았다. 무엇보다 사요에게는 목표가 있었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벌고 싶다가 아니라, 그에게 떳떳한 사람이고 싶었다. 나도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나도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첫 월급이 든 봉투를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었고, 급여가 오르면 그에게 그럴 듯한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다. 낡은 구두나 넥타이를 새것으로 바꿔주고 싶고 데이트도 가고 싶었다. 그에게 자신은 마냥 보호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기에 사요는 나름 버틸 수 있었다.

대부분은 그런 대로 참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딱 하나 부담스러운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자신을 떠보려는 남자들의 말과 제 몸을 여기저기 불순하게 훔쳐보는 남자들의 시선이었다.

“아가씨, 아가씨는 이름이 뭐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가씨, 이따가 같이 저녁 한 끼 드실래요? 여기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하나 생겼는데.”

“딱 보니 방금 막 올라왔네. 집은 구했어? 월세가 만만치 않을 텐데.”

사요는 사내들이 추파를 받을 때마다 부담스럽고 당황스러웠다. 남자들은 자신을 한 시도 가만히 두지 않았고 어떻게든 말을 붙이고 바깥에서 만나려고 했다. 은근슬쩍 손을 잡거나 치맛자락을 들추려고 하는 일도 가끔 있었다. 그런 손님이 눈에 띄면 점장님이 냉큼 다가와 쫓아냈지만 그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기에, 사요가 재빨리 몸을 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갑자기 고개를 돌려 혀를 쯧 차버리는 것이다. 왜 나를 피하느냐고 타박하듯이.

사요는 그런 부류를 아주 잘 알고 있다. 류가의 이름을 떼고 방금 막 도쿄로 상경한 시골 소녀인 척을 해도 그들은 사요에게서 무언가를 바랐다. 그것은 사요의 미모이기도 했고 청춘이기도 했으며 그들이 멋대로 여성에게 바라는 순결함과 순진함이기도 했다. 그들은 사요와 데이트를 하면 자신의 가치가 올라가고 모두가 자신을 동경하게 될 거라는 이상한 망상에 빠져 있었다. 사요는 순순히 자신의 요구에 응해야 하지만 다른 남자와 짧게라도 이야기를 나누면 바로 아무한테나 꼬리치는 계집애로 둔갑시키고 흉을 봤다. 구석진 자리에서 합석한 사람과 수근대면 모를 줄 알았나 보다. 다행히 사요에게는 최강의 무기가 하나 있었다. 바로 그가 소중하게 제 왼손 약지에 끼워준 은색 반지였다.

대부분은 반지만 봐도 풀이 죽지만, 일부는 집요하게 그이에 대해 캐물었다. 오오, 아가씨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렇게 입을 열고 나면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직장이 어디인지,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생겼고 성격은 어떤지 등. 그러면 사요는 그가 반지를 사주면서 일러준 말을 천천히 정확하게 되풀이한다.

“부모님들끼리 아는 사이였거든요. 그래서 어릴 때 약혼을 하게 되었죠. 그러다가 그이가 먼저 도쿄오 올라갔고, 자리를 잡았으니까 여기로 오라고 해서, 마침 가세도 기울어서 모두 팔을 걷어 붙이고 일을 하러 나가야 했거든요. 그래서 저도 따라 도쿄로 왔죠.”

사요는 홍조를 띄우고 그들에게 그에 대해 자랑했다. 그는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있으며, 달달한 냄새가 섞인 담배를 피운다. 눈은 특이하게도 푸른 빛이 돌며, 직업 특성상 이곳저곳 돌아다니지만 출장이 아닌 이상 사요를 밤에 혼자 두지 않는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홍조를 피우는 의외의 귀여움도 있고, 가방에는 늘 향수가 들어 있다.그렇게 한참 조잘거리면, 그들이 먼저 질려서 나가 떨어졌다. 물론 그렇게 해도 제가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열등감과 질투 때문인지, 계속 사요에게 집적대는 말종도 있었다. 그럴 때는 딱 한마디만 하면 되었다. 사요는 이 말을 꺼낼 때마다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리고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가 있어요. 왼쪽 귓바퀴도 조금 날아갔고요.”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한 말이었지만, 남자들이 위축되는 모습을 본 후로는 의도적으로 이 말을 먼저 꺼내기도 했다. 그것이 몇 번 반복되자, 사요의 약혼자는 거물급 야쿠자라는 엉뚱한 소문이 났다. 사요 입장에서는 자신을 건드리는 남자가 줄어들었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이 소문을 모르는 이가 사요를 건드려고, 주변 남자들이 기겁하면서 말렸으니 더 이상 수고를 들일 필요는 없었다.


“사요 씨, 오늘은 어땠습니까?”

“익숙해지니까 크게 힘들지 않더라고요. 항상 같은 것만 시키는 분들도 많고요.”

“하하, 그렇죠. 저도 킷사텐에 갈 때는 핫커피만 시킨답니다.”

“그런가요. 헌데 요즘은 아포가토라는 게 유행이더라고요. 아이스크림에 에스프레소를 부어서 먹는 디저트인데, 연인끼리 오면 항상 그것을 주문하더라고요.”

“그렇군요. 그럼 저희도 다음에 먹으러 가볼까요.”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손에는 담배를 끼우고 있지만 피우진 않는다. 나구라 마을에서만 해도 그는 하루에 세 개비씩 피우는 애연가였지만, 사요와 함께 산 후로는 거의 피우지 않는다. 회사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귀가 후 사요와 함께 있을 때에는 불을 붙이지 않는다. 사요는 남자의 말에 눈을 반짝이면서 상체를 내밀었다.

“오시는 건가요?”

“이번 주에, 아니 내일 한 번 가죠. 다행히 내일은 잔업이 없어서. 오후 여덟 시 퇴근이죠? 그럼 그때 마중 나가겠습니다.”

남자는 읽던 신문을 정리하고 잔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었으니 이만 잠자리에 들도록 하죠. 그는 익숙하게 거실에 이불을 깔았고, 사요는 잘 자라는 말을 남기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성인은 아니지만 그에 가까운 몸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사요의 과거를 생각해서인지 미즈키는 한 번도 사요와 같은 방에서 자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사요가 생각하기에 그는 충분히 정의로우며 좋은 사람이었다.

다음날 그들은 간단한 아침을 먹은 뒤 각자의 일과를 시작했다. 미즈카가 먼저 출근을 했고, 사요는 장볼거리를 정리한 다음 시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연어를 살까, 연어버터구이가 맛있던데, 이와코 씨에게 레시피를 물어보면 알려주시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때마침 시장 입구에서 이와코를 마주쳤다. 이와코는 등에 키타로를 업은 채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어머, 사요를 알아챈 이와코가 말을 걸었다.

“사요 양, 잘 지냈어요?”

“네. 오랜만이네요 이와코 씨. 안녕, 키타로?”

아우, 포대기에 쌓여 있는 키타로가 작은 손을 휘저어 사요에게 인사했다. 이와코는 몇 달 전 드디어 아기를 낳았다. 왼쪽 눈이 안 떠진 것을 제외하면 건강한 남자아이였다. 이와코의 남편은 아기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내가 아니라 자기를 닮았다며 오열했고, 그는 친구의 등을 팡팡 때리면서 적어도 누구 아들인지 헷갈릴 일은 없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이와코 가족으로 말하자면 그날 함께 나구라 마을에서 탈출한 사람들이었다. 인간은 아니고, 류가의 욕심 때문에 그 마을에 잡혀 있던 요괴이다. 이와코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사요는 그들에게 큰 빚을 졌다. 자신들을 학살한 집안의 사람인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안타깝게 여겨주었으니까.

사요는 이와코의 장바구니를 보면서 물었다.

“이와코 씨는 장을 보고 오시는 길인가요?”

“아뇨, 저도 이제 사러 가야해요. 사요 양도 저녁거리를 사러 오셨나요?”

“네, 연어구이를 할까 해서요. 혹시 레시피도 알려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오늘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나 보죠?”

“아…, 그분이 데리러 오기로 했거든요. 겸사겸사 커피도 마시고.”

사요가 부끄러워하면서 그와 한 약속을 말하자 이와코가 놀라면서 축하해주었다. 어머어머, 드디어 데이트하는 거예요? 이와코의 추궁에 사요는 괜히 몰라요, 하고 튕겼다. 몇 백 년 묵은 유령족도 남의 사랑 이야기에는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다. 이와코는 후후, 웃으면서 조언했다.

“이왕 둘이 즐거운 시간 보내는 거, 솔직하게 마음을 전해봐요. 그도 사요 양이 적극적으로 밀어 붙인다면 받아줄 걸요?”

“에이, 그분은 저를 단순히 피후견인으로만 생각하는 걸요. 아직 성인이 아니라서일까요.”

그리고 그분이 제 고집에 못 이겨서 교제를 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제가 노력해서 그분의 사랑을 받을 거예요. 사요가 똑 부러지게 말하자 이와코도 더 말하지 않고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래요. 그럼 오늘은 제가 좋은 연어 구하는 법을 알려줄게요.”

“와,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그게 제일 난감했거든요.”

이내 두 여성은 즐겁게 시장을 둘러보았다.

이와코가 알려준 방법대로 갖은 양념에 연어를 재워둔 다음 사요는 출근 준비를 했다. 가장 손님이 붐비는 정오에 출근하여 저녁 여덟 시까지, 식사 시간 한 시간을 제외하면 쉴 틈도 없이 일한다. 가장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묶어 망 안으로 넣는다. 전철을 타고 다닐 때는 이게 더 편할 겁니다, 라며 그가 사준 여성용 정장바지를 입고 굽이 낮은 로퍼를 신으면 끝이다. 마지막으로 작은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면 전력으로 뛰어야 한다. 그의 하숙집 앞을 지나가는 전철은 무려 30분에 한 대씩 오기 때문에 한 번 놓치면 꼼짝없이 지각이다. 사요는 한산한 거리를 가로질러 질주했다. 오늘은 다행히 전철에 자리가 있다. 사요는 안도하면서 군중 사이에 낑겨 앉았다. 밖을 보니 안내원들이 안간힘을 써서 사람을 밀어넣고 있었다. 조만간 이곳에 새로운 노선을 만든다는데, 그러면 만원전철이 조금 나아지려나 싶다.

가게에 도착하자 이미 손님들로 내부는 인산인해였다. 자리가 꽉 차고도 모자라 밖에서 대기하는 손님까지 생길 정도였다. 사요는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고는 탈의실로 들어갔다. 서둘러 검은 원피스로 갈아입고 앞치마를 맨다. 가게에서 제공하는 하얀 니삭스에 메리제인 구두까지가 이곳의 유니폼이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옷에 세월아 네월아 했지만 이제는 30초면 충분하다. 익숙해졌다는 증거겠지, 괜한 뿌듯함에 웃으면서 탈의실에서 나왔다가 대장의 불호령에 황급히 커피를 날랐다. 그 소문이 난 지 꽤 오래라, 이제는 더 이상 사요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사요는 마음 놓고 주문을 받고, 서빙하고, 결제를 하고 테이블을 닦았다. 안에서는 사람들이 대화하는 소리, 커피를 마시고 디저트를 먹는 소리와 그라인더로 원두를 가는 소리, 설거지를 하면서 도자기 잔끼리 자잘하게 부딪치는 소리 등이 났다. 고소하면서 살짝 탄 내음을 풍기는 커피가 마치 그가 애연하는 담배 냄새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 사요는 깔끔하게 닦은 테이블로 새로운 손님을 안내했다.

정신없이 일을 하면 어느덧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요는 시계를 확인하자마자 슬쩍 앞치마의 리본을 풀면서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야마다 양, 웬일로 일찍 들어가네?”

“아…. 사실 그분이 오늘 마중 나오기로 했거든요.”

대장의 말에 사요가 배시시 웃자 가게 안에 있던 모든 종업원의 시선과 단골 손님의 귀가 이쪽으로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바에서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고 있는 점장도, 아닌 척 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쪽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대장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머, 뭐야. 드디어 야마다 양의 그이를 보는 건가? 사진 한 번 안 보여주길래 의심했잖아~.”

“제, 제가 거짓말을 할 리 없잖아요!”

“어머? 누가 언제 네가 거짓말을 했다니? 하도 꽁꽁 숨겨놓고 안 보여주니까 대단한 미남이거나 위험한 사람인가 싶었지.”

하긴, 마을 여자들이 모두 얼굴을 붉혔으니 잘생긴 편이긴 하지. 사요는 그렇게까지 미남은 아니라고 모르는 척을 했으나 사람들은 쉽게 믿어주지 않았다. 점장은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더니 자리에 편하게 앉아서 기다리라며 물었다.

“뭐라도 내줄까?”

“아, 감사합니다. 혹시 드립 두 잔이랑 팬케이크 될까요?”

점장은 ‘뭐,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라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사요는 탈의하고 나온 다음 입구 쪽 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그를 기다렸다. 아아, 언제 오실까. 오늘은 일찍 끝난다고 하셨는데, 일이 생겼으면 어떡하지. 이 가게 전화번호를 아니 문제가 있었으면 전화를 하셨겠지만. 사요는 초조한 마음으로 입구 쪽만 바라봤다. 그렇게 빤히 쳐다본다고 사람이 오냐. 대장이 장난스러운 말로 사요를 달래면서 주문한 음식을 내려놓을 때, 딸랑 하고 문에 걸어둔 종이 울렸다.

“네, 란주 커피입니….”

“실례합니다. 아, 사요 씨. 많이 기다리셨나요?”

푸른 기가 도는 눈동자에 단정한 투블럭, 유독 두드러지는 애굣살과 적당한 키. 그리고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큰 흉터. 소문 속 그는 서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사요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에 가지런히 올려둔 손에는 사요와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사요는 과시하듯 왼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웃었다.

“아뇨, 저도 막 일이 끝났는 걸요. 미즈키 씨.”

우와, 저게 소문의 미즈키 씨…. 진짜 야마다가 말한 대로 생겼네. 종업원과 단골 손님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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