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유카타를 입은 남자

게나조

篝火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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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 치치미즈

  • 환생 AU

처음 그 남자를 그린 것은 여섯 살 때였다. 그가 다니던 유치원에는 낮잠 시간 후 그리기 시간이 있었다. 4인 1조가 되어 크레파스나 색연필, 파스텔 등을 나눠 쓰면서 각자 좋아하는 것을 그리는 시간이었다. 미즈키는 첫 그리기 시간에 그 남자를 그렸다. 파란 유카타에 흰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는 남자. 선생님은 미즈키의 그림을 보고 물었다.

―아버지니?

미즈키는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은 남자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끝없이 질문했다. 형이니? 삼촌이니? 아니면 할아버지? 옆집 아저씨? 그러나 모든 질문에 미즈키는 고개를 흔들었다. 답답해진 선생님은 누구냐고 물었지만 미즈키는 곤란한 표정으로 우물거리기만 할 뿐 시원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누구인지, 왜 그 사람을 그렸는지 미즈키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사건 후로도 미즈키는 계속 백발 남자 그림을 그렸다. 선생님은 멋대로 그 남자를 미즈키의 상상친구로 결론 내리고, 그 이야기는 쏙 뺀 채 그의 부모님에게 말했다. 미즈키가 그림에 재능이 있는 거 같아요. 전형적인 아부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선생님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

이것은, 미즈키의 팬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푸른 유카타를 입은 남자」 시리즈의 탄생 비화였다.

푸른 유카타를 입은 남자

미즈키가 평생 그 남자만 그린 건 아니다. 중학생 시절, 본격적으로 미술을 한 후로는 다른 것을 더 많이 그렸다. 석고상이나 사과, 연필, 모형, 사람, 나뭇잎 등등. 선생님은 미즈키가 관찰력이 좋으나 색을 좀 더 과감하게 쓰는 게 낫다고 조언했다. 그 다음에는 상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기술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 조언을 모두 흡수한 후로는 선생님이 더 손을 댈 부분이 없었다. 그러나 합평이 끝난 후에는 늘 아쉽다는 듯이 한마디를 덧붙이곤 했다.

“솔직히 다른 게 더 그리고 싶지.”

미즈키는 그때마다 침묵했다. 그가 그리고 싶은 것은 기괴하게 비틀어진 조형물이나 색을 너무 많이 올려 빤딱빤딱하게 빛이 날 정도가 된 물질따위가 아니었다. 그가 정말로 묘사하고 싶은 것은 여섯 살 때부터 문득문득 떠오르던 그 남자였다. 푸른 유카타를 입고 게다를 신고, 흰 머리카락으로 왼쪽 눈을 가린 남자. 바보같이 생겼고 실제로도 순진한 구석이 있지만, 그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매력적인 사내. 그와 머릿속으로 대화해본 적도 없는데 미즈키는 신기하게도 그 남자의 성격은 물론 걸음걸이와 취향, 싫어하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는 서늘한 외양과 달리 불이 어울렸고, 눈물이 주사였다. 할아버지 같은 말투를 썼지만 늙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그에게 아내와 아들이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지? 미즈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여섯 살에 만든 상상친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제일 이상한 거지.

「푸른 유카타를 입은 남자」 시리즈의 공식적인 첫 작품은 그의 졸업작이었다. 유화를 거칠게 발라 낡았지만 오히려 더 선명한 쪽빛을 띤 유카타의 질감을 살려 인상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그 때부터 미즈키는 일 년에 두 번씩 남자를 그렸다. 재료도 그때그때 달라졌다. 어떤 사람들은 왜 푸른 유카타만 입고 있느냐고 물었고, 어떤 이들은 이번엔 어떻게 남자를 표현할지 궁금해 했다.

미즈키는 풀이 덕지덕지 묻은 붓을 내려놓으며 숨을 돌렸다. 이번 남자 연작은 콜라주 기법으로 작업하고 있다. 헌책과 잡지를 대량으로 사들인 다음 원하는 색을 잘라내 여기저기 붙이면서 멀리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남자의 현상이 보이도록 작업하고 있다. 종이의 질감을 살리기 위해 일일이 손으로 찢고, 에도 시대에 작업한 듯한 정취를 의도하기 위해 짓이긴 풀을 붓에 묻혀 종이를 붙이고 있다.

덕분에 미즈키의 손과 앞치마는 엉망이다. 몸이 좀 지저분해야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미즈키로서는 반가운 모습이지만, 역시 이번 건은 좀 많이 너저분하다. 손에는 풀이 묻어 끈적한데다, 종이를 자르면서 자잘하게 베인 탓에 손가락마다 밴드를 붙이고 있다. 그래도 미즈키는 어째선지 뿌듯함과 벅참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림이 완성되어 가고 있다. 남자가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 미즈키는 이번 그림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푸른 유카타를 입은 남자」를 작업하지 않을 작정이다. 아직 소속사에는 비밀이지만 이 작품이 공개됨과 동시에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그림을 완성하면 더 이상 남자를 그릴 수 없을 테니.

이번 작품을 구상하기 한 달 전이었다. 미즈키는 한 아이돌의 앨범 디자인 의뢰를 넘기고 쪽잠에 취해 있었다. 눈앞에 벚나무가 아른거렸다. 꽃이 무겁게 달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버드나무처럼 얇은 가지들이 축 늘어져 있었다. 아, 이 꿈이다. 미즈키는 벚나무를 올려다보며 꿈속에서 생각했다. 남자의 현상이 선명해진 이후로 늘 꾸는 꿈이었다.

미즈키는 사내를 찾아 벚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그는 언제나 푸른 유카타 차림으로 벚나무 아래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즈키가 걸을 때마다 게다 소리가 카라카랑 울렸다.

갑자기 물웅덩이를 밟은 듯 첨벙 소리가 났다. 미즈키는 제 발 아래를 보았다가 기겁했다. 핏물이 구덩이에 가득 차 정강이 근처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미즈키는 당황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핏물 바닥을 보았다. 온갖 물건이 가라앉아 파도에 힘없이 떠밀려 가고 있었다. 끈이 끊어진 게다, 인형, 석장과 사무라이 갑옷, 술병과 담배 등…. 마치 엄청난 수해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뒤 사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들의 유품만이 허망하게 둥둥 떠다니는 풍경 같다.

미즈키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느 새 평범한 벚꽃잎은 그 피를 디 빨아마시고 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미즈키의 몸 역시 피바다에 푹 담겨 얼룩덜룩했다. 꿈속인데도 현기증이 났다. 코가 따가워 소매로 훔쳤더니 피가 묻어나왔다.

저 남자는, 괜찮은가? 미즈키는 사내가 걱정되었다. 그 피 말린다는 미대 입시를 버틴 자신도 이렇게 이명과 코피와 구토감을 느끼는데. 저 하늘하늘한 사내도 필시 괜찮지 못할 것이다. 미즈키는 서둘러 발을 움직였다. 몸을 움직여 그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나 구덩이 속에서 벚나무 뿌리가 튀어나와 그의 발목을 옭아맸다. 손을 허우적거려도 그 뿐, 역시나 닿지 않는다. 사내 역시 피투성이에, 온몸이 문드러져 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분하기만 하다. 미즈키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손에 들고 있는 도끼를 휘둘러 뿌리를 잘라냈지만 모두 떨쳐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미즈키는 사내를 부르고는 놀랐다. 숱한 꿈 중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왜 이 자의 이름을 알고 있지? 그런데 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지? 미즈키는 고개를 들어 사내를 쳐다봤다. 어느 새 제 옆으로 다가온 남자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을 퐁퐁 흘리고 있었다. 푸른 유카타가 보랏빛이 될 정도로 피에 물든 사내는 새하얀 손을 내밀어 미즈키를 끌어안았다.

―자네, 드디어 내 이름을 불러주는구료.

그 말은 기쁨과 같았다. 슬픔 같기도 하고, 행복 같기도 하면서, 원망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장이라도 곁을 떠나갈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때 강한 직감이 들었다. 더 이 남자를 그릴 수는 없겠구나, 앞으로 얼마나 애를 써도 나는 이 남자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겠구나. 꿈에서도, 캔버스 안에서도.

꿈에서 깨 스케치를 하면서 미즈키는 다짐했다. 더 이상 남자를 만날 수 없다면, 하다 못해 그 마지막 모습을 가장 강렬한 형태로 남기자고.


3년 만에 새 「푸른 유카타를 입은 남자」 를 발표하면서 미즈키는 두 가지 사실을 공표했다. 첫 번째로 해당 연작은 더 이상 작업하지 않는다는 것과, 지금까지 그린 「푸른 유카타를 입은 남자」를 모아 대규모 전시회를 할 거라는 것. 인터뷰를 하기 전 소속사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설득했으나 미즈키는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 이상 사내를 그릴 수 없는 말만 반복하자 매니저는 끙, 하고 앓는 소리 한 번 하고는 그럼 은퇴가 아니라는 말을 같이 하라고 조언했다. 이유를 더 캐묻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푸른 유카타를 입은 남자」는 더 이상 작업하지 않아도 작업은 계속할 거라고 인터뷰에서 밝혔건만, 사람들은 사실상 은퇴라고 제멋대로 이야기했고, 그 소문이 현대미술에 아무 관심 없는 사람들의 관심까지 자극해 「푸른 유카타를 입은 남자」 전시회는 예매 사이트가 열리자마자 표가 다 팔리고도 모자라 암표가 돌기까지 했다.

그렇게 전시회 당일, 드디어 세상에 공개된 마지막 「푸른 유카타를 입은 남자」을 보고 사람들은 평이 엇갈렸다. 좋았다는 사람들은 평소 미즈키가 그린 남자와 정반대의 분위기라며 색다르다고 평했고, 별로라고 한 사람들은 바로 그 이유, 이전의 남자가 풍기던 그 느낌이 아닌데다 그로테스크함까지 느껴진다며 꺼려했다.

그 그림은, 넘실거리는 피웅덩이 사이에서 보라색으로 물든 푸른 유카타를 걸친 채 진분홍빛 벚꽃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내의 그림이었다.

미즈키는 볼캡을 꾹 눌러쓴 채 자신의 마지막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물 사이즈로 걸린 그림은 전시회의 맨 끝, 출구로 향하기 직전에 관람객이 마주하게 되는 벽 하나를 통째로 채우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 그림을 볼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소속사는 축소한 복사본을 걸기를 희망했지만 미즈키가 원본 그 자체를, 출구 직전에 있는 벽에 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 그랬는지는 자신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꿈과 상상 속에서만 만났던 그 사내가 이번 전시회 소식을 듣고는 자신을 어떻게 그렸는지 확인하러 와주길 바랐는지도.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판타지스러운 이야기지. 미즈키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다른 「푸른 유카타를 입은 남자」 시리즈가 그러하듯이 이 그림은 전시회 도록에만 수록하고 따로 판매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 연작으로 유명해진 만큼 소속사도 팬들도 작품을 모두 팔기를 원했으나 그러면 남자가 훼손될까 두려워 미즈키는 첫 작을 선보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푸른 유카타를 입은 남자」 작품은 판매 금지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 전시회 마지막 날 직접 와서 제가 남긴 작품을 하나씩 바라보니 팔아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다. 그 남자가 자기 그림을 살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림을 가진 자가 어떤 기묘한 인연으로 인해 그림 속 사내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자꾸 소설에서만 나올 법한 만남을 상상하고 있으니 어릴 때로 돌아간 기분이다. 그때는 정말로 남자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고, 언젠가 자신을 만나러 와줄 거라는 엉뚱한 희망과 기대에 차 있었다. 결국 오늘 이 날이 올 때까지, 당사자는커녕 그 비슷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지만.

관람을 마친 손님이 카랑카랑 소리를 내면서 다가왔다. 잠깐, 카랑카랑이라고? 구두를 신었어도 또각또각 소리가 나지 이런 느낌은 아닐 텐데. 이 소리는 마치…. 마치 게다 소리 같은데….

“정말로 더 이상 그리지 않을 겐가?”

아, 이 목소리. 그날 이후로 항상 꿈결에서 들었던 목소리. 미즈키는 놀라 토끼눈을 뜨고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아무리 흉내내려고 애써도 표현할 수 없었던 쪽빛 유카타 자락이 있었다.

“이제야 자네를 만나러 왔는데?”

아, 포기하지 않으면 만나게 되는구나. 미즈키는 자신을 향해 울면서 웃는 남자를 보고 같이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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