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쿠토 신의 신부님(中)

미즈사요

篝火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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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제약이 쉽지 않네요….”

“그래도 석 달 차에 이 정도면 정말 잘 한 거예요 마님!”

“그, 그런가요?”

명색이 제약회사의 고명딸임에도 사요는 약에 관해서는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겨우 하나를 익히면 오늘처럼 하나 실패하는 게 일상이다. 재료 조합에 실패한 가루를 보고 망연자실해 있으니 갈색 얼룩무늬 토끼가 곁에서 폴짝대며 위로를 해주었다. 사요가 토끼를 내려다보며 묻자 암요 암요! 선생님 토끼가 약대 위로 폴짝 올라왔다. 털날림을 최소화하기 위해 흰 가운에 흰 모자를 쓴 토끼는 가루의 냄새를 맡아보곤 사요에게 조언했다.

“덜 말린 강황가루를 써서 그런가 봐요. 이 자식들, 강황 가루는 버석하게 말려야 효과가 좋다고 귀에 딱지가 앉게 말했는데!”

“괘, 괜찮아요! 그러면 강황 가루를 쓰지 않는 걸로 다시 한 번 해볼까요?”

화가 나 귀가 양옆으로 벌어진 선생님을 진정시키고 사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의 제안에 선생님은 감동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상냥하신 분이 마님이라니, 우리 하쿠토 신은 복 받았지…. 묘하게 아들이 마음에 드는 며느리를 데려와서 감격한 시어머니 같은 반응이다.

첫 날 배운 대로 솔을 사용해 약대를 치우는 사이 선생님은 약방에 들어가 서랍을 열어 약재의 재고를 확인하고 새로 꺼내오고 있었다. 드르륵 하고 나무 서랍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이제 약방에 익숙해진 사요는 소리가 들리는 위치로 대강 어떤 약재를 준비하고 있는지와 만들게 될 약이 어떤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높은 곳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미뤄 보건데 이 다음에 만들 약은 메밀을 이용한 혈압약인가 보다. 히비스커스와 메밀차는 혈압을 낮추어주는 효능으로 유명하다. 메밀은 또한 소화에도 좋아 소화제를 만들 때 자주 들어가는 재료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사요가 이곳에 들어와 처음으로 만든 약도 메밀을 이용한 소화제였다.

하쿠토 신의 신사에 지내는 토끼는 하나하나 모두 뛰어난 약사이기도 하다. 분업도 잘 되어 있어 재료가 될 식물을 키우는 역할과 그 재료를 가공하는 역할, 재료를 보관하고 관리하는 역과 실제로 약을 만드는 역할이 따로 있다. 식물성 재료는 모두 신사의 밭에서 직접 재배함을 원칙으로 하고, 일부는 선계에서 물물교환을 통해 얻어온다. 따라서, 하쿠토 신의 신부로 들어온 사요 역시 약에 관한 재주 하나를 배워야 한다―는 게 하쿠토 신사 총관의 논리였다. 하쿠토 신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나 사요가 자원하여 석 달 째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신의 신부라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대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 삶을 누리고 싶지 않아 신부로 받아달라고 빈 것이다.

사요의 예상대로 선생님이 메밀을 비롯해 심신의 안정을 가져다주기로 유명한 것들을 바구니에 담아왔다. 약재를 덜 때는 한 바구니에 하나씩 덜어야 하며, 항상 천으로 덮어 직사광선이나 습기 등에 의해 상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일부 재료의 경우 향을 통해 효과를 발하는 것들도 있으므로 향을 잡아두는 데에도 좋다. 이상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복기하고 있으니 선생님이 물었다.

“그럼 혈압약을 만들어 보겠어요! 마님, 할 수 있겠죠?”

“네! 이건 자신 있어요!”

사요는 다시 소매를 걷고 제약에 몰입했다.

하쿠토 신의 신부님 (中)

사랑과 제약의 신 이나바노시로우사기. 통칭 하쿠토 신.

열심히 약을 만들어 병을 낫게 하고, 운명의 상대를 점지해주며 정작 자신은 짝도 못 만나고 새끼도 못 얻은 채 약 1000년 동안 바쁘게 살던 하쿠토 신은….

번아웃이 오고 말았다.

번아웃에 우울증까지 제대로 오고 만 하쿠토 신은 이렇게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며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만다. 그러나 신의 자리는 비워둘 수 없다. 이제 나는 은퇴를 하겠다며 평생 가꾼 텃밭과 한약방을 모두 없앨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럤다가는 신사의 토끼들이 모두 실업자가 되어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 토끼란 먹이사슬의 최약체이기에 상위의 존재에게 아양을 떨지 않는다. 그들은 이렇게나 무서운 초식동물이다.

그리하여 하쿠토 신은 일꾼 중에서 제 후계자를 찾기로 했다. 마침 자신과 비슷하게 군데군데 흉터가 난 어린 토끼를 발견했다. 검은 털이 8할을 차지한다는 점이 마이너스 요소였지만 약재 장부를 꼼꼼하게 살피면서 모자란 것과 과한 것을 정확히 짚어내고 보충하는 일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하쿠토 신은 정체를 숨기고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름이 뭐지?

―저요? 미즈키라고 합니다.

―아니? 너는 이제 하쿠토 신사의 주인 이나바노시로우사기다.

―예?

―그러니 앞으로 이 신사를 부탁한다!

―잠시만요! 이렇게 멋대로 정하는 게 어딨습니까? 하다 못해 인수인계라도 해주십시오!

―그럼 나는 선계로 떠나곘다!

―이봐요옥!

그렇게 말단 회계 사원이었던 토끼는 순식간에 이나바노시로우사기(2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일에는 큰 차질이 없었다. 신성이 초대에서 2대로 옮겨갔다는 것뿐, 그 외에는 변한 게 없었다. 일단 선대가 마련한 시스템이 훌륭했기에 잡음이 일어날 리 없었고, 신사의 토끼들은 새 주인을 별 부담이나 견제 없이 받아들였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앞으로 어떻게 신사를 이끌어 가야 하는가 노심초사한 토끼는 오로지 미즈키밖에 없었다.

“자잘한 걱정이 많은 분이니까요.”

“암요 암요. 그 걱정 많은 부분 덕분에 대비는 철저해서 일꾼들이야 편하지만.”

“아마 본인이 일꾼 출신이라서 잘 아는 걸 거예요. 윗선이 빠릿하게 결정해서 움직여주지 않으면 아랫토끼만 죽어나가거든요.”

티타임에 모인 세 마리 토끼가 목련차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환절기 감기에 가장 좋은 차가 유자차인지 모과차인지, 그것도 아니면 목련차인지 치열하게 토론하다가 하쿠토 신이 검은 토끼인 줄 몰랐다는 사요의 말에 이야기가 딴 길로 샜다. 한 번 삼천포로 빠진 이야기의 흐름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검은 점이 쿠키앤크림처럼 자잘하게 박힌 토끼가 모과차를 호록 마시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 하쿠토 님도 영 연인을 만들거나 신부를 들일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걱정이었는데, 참 다행이죠! 이렇게 똑 소리나고 아리따운 신부님이 들어오셔서.”

“그러니까요. 그나저나 인간을 신부로 삼을 줄은 저도 몰랐네요. 그렇게까지 인간 세계에 간섭하시는 분이 아닌데.”

“어머, 하쿠토 신이 진작 인간 세계에 간섭하려고 했으면 아주 난리가 났죠! 이 사람 저 사람 막 짝 지어줬을 텐데!”

“어머, 그러면 인간계 돌아가는 꼴 보기엔 재미있었을 거 같다.”

“어쩌면 독약을 풀어서 인간 개체 수를 조절했을지도요.”

발끝까지 새까만 토끼가 키히힉, 하고 불길하게 웃었다. 토끼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어머, 그러면 애먼 토끼도 죽잖아. 하지만 인간은 너무 많아서 좀 조절할 필요가 있어.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그런 내기만 하지 않았어도…. 그 틈바구니에서 인간인 사요는 묵묵하게 당고를 먹고 모과차를 홀짝였다. 토끼들과 다과회를 할 때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어느 쪽에도 동조하지 말 것. 회색 털이 매력적인 집사 토끼가 일러둔 말을 영심하면서 병풍처럼 가만히 있는데 새까만 토끼가 사요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하쿠토 님이 갑자기 신부로 삼겠다고 해서 놀라지는 않으셨나요?”

“저, 저요?”

사요는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가 사레가 들렸다. 고개를 틀고 거친 기침을 토하자 토끼들이 에구구, 하면서 등을 토닥여주었다. 토끼의 발에는 개나 고양이 같은 말랑한 부분이 없다더니 진짜구나. 보송함보다는 딱딱한 느낌이 더 강한 토끼의 앞발에 새삼 놀라면서 사요는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 다음이 막막해졌다. 하쿠토 신이 사요를 심부로 삼겠다고 인간을 괴롭힌 게 아니라, 사요가 하쿠토 신의 신부가 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 그가 적당한 핑곗거리를 만들어준 셈이니까.

사요의 갈색 눈동자가 한참이나 빙빙 돌아가고 있으니 점박이 토끼가 새까만 토끼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타박했다.

“얘, 무슨 그런 곤란한 질문을 하니. 인간 입장에서 놀라는 게 당연하잖아.”

“아이코, 그렇긴 하죠. 인간들은 우리와의 혼례를 불길하게 여기니까.”

“그, 그럼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위험하지 않다는 이야기인가요?”

일본의 행방불명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일반적인 실종에 해당하는 유쿠에후메이行方不明와 신, 요괴에게 잡혀가는 카미카쿠시神隱し. 카미카쿠시의 경우 신변이 아닌 존재 단위의 문제라 여기며 불길하게 대한다. 신이나 요괴의 반려가 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재와 정체성이 사라지고 그 세계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이기에 넓게 보면 카미카쿠시에 해당한다. 과거에는 카미카쿠시를 ‘마음에 든 인간을 신이나 요괴가 반려로 삼기 위해 납치해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인간계에서 불길하게 여기는 거고, 신비인 당사자들 입장에선 조금 다른 것인가? 하지만 하쿠토 신 역시 처음 꿈에서 나타났을 땐 곤란하다며 몸을 사리기도 했고. 사요는 그것이 궁금해져 토끼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동조만 할 뿐 말은 않고 있던, 눈 주변만 갈색 털이 빼곡히 나 사요가 ‘판다 토끼’라 부르는 이가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며 대답했다.

“인간은 어리고 단명하니까요.”

“그…, 그 무슨 관련이 있나요?”

“신부님, 20살 연하와 교제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떤 생각이 드나요?”

“음….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주장해도 꺼림찍하죠?”

“바로 그겁니다. 심지어 인간은 아무리 오래 살아봤자 백 살이 한계죠. 인간의 개나 고양이의 수명에 대한 감상과 같아요.”

하기사, 15년도 긴 시간이라지만 100년을 사는 인간에게는 한순간이지…. 그걸 저들은 인간에게 느끼는구나. 판다 토끼의 말이 이어졌다.

“어떤 요괴가 인간을 좋아한다? 그럼 그 요괴는 ‘어린 것만 밝히는 호색한’이라거나, ‘단명하는 놈을 좋아하는 취향 특이한 놈’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됩니다. 그게 우리의 사회에요. 그래서 하쿠토 님이 당신을 들이겠다 했을 때 만류했는데.”

“아, 아하하. 그랬군요….”

사실은 제가 신부로 삼아달라고 억지부리다시피 해서 그런 거였어요…. 그분의 탓이 아니라 그분이 제 어리광을 모른 척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죠…. 차마 진실은 밝히지 못하고 사요는 다시 제 몫의 차만 홀짝였다. 이대로 무난히 넘어갔으면 좋겠건만, 한 번 발동한 토끼의 호기심은 사요를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무리로 사냥하는 맹수마냥 토끼들은 빙빙 돌면서 사요에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흠, 아리따운 외모 때문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치기엔 너무 어리지 않아?”

“마님이 아직 인간 기준으로 성년이 되지 않아 정식 혼례는 치르지 못했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러면 하쿠토 님은 어린 것이 취향이었던 걸까요.”

“아니, 하쿠토 님이 그런 문란한 분이셨다면 인간들이 너도나도 제 아이를 바쳤겠죠.”

“마님, 혹시 하쿠토 님을 뵌 적이 있었나요?”

“아, 그, 사실 작년 여름에 한 번 신사에 들르긴 했는데….”

“그럼 그 때 보고 반했나 보다!”

“하쿠토 님, 의외로 집요한 구석이 있으시네. 인간 소녀를 신부로 들이고 싶어서 인간의 회사를 그렇게 건드리고….”

아, 저기, 그게 아니라…. 양심에 역으로 털이 나서 가슴을 쿡쿡 쑤시는 기분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식은땀만 뻘뻘 흘리는 사요 앞에 적당한 구원자가 나타났다. 소란스러움에 미즈키가 안채로 들어오면서 세 마리 토끼를 가볍게 꾸중했다.

“어째 티타임이 갈수록 길어집니다.”

“헉, 하쿠토 님.”

“하이고, 저희는 그저 마님이 지루한 시집살이에 말동무라도 되어드리고 싶어서….”

까만 토끼가 히히 웃으며 귀를 팔랑댔다. 미즈키는 적당히 세 토끼를 밖으로 보내고 사요 앞에 꾸물거리면서 누웠다. 네 다리를 편하게 두고 쭉 늘어진 모습이 흡사 탄 가래떡이나 먹물 바게뜨 같다. 언제나 반듯하게 네 다리를 모으고 앉아 있는 그가 자신 앞에서만 저렇게 무방비 상태로 흐물학고 푹신하게 처지는 모습은 봐도 봐도 신기하기만 하다. 문득 앙증맞은 발을 만지작거리거나 여름을 맞이해 살짝 줄어든 가슴털 속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이건 모두 그가 늠름하면서 동시에 귀여운 탓이다. 하지만 당사자는 언짢아 할 수 있으니(그리고 평범한 토끼가 아니라 토끼 신이니까) 사요는 손가락만 꼼짉거리며 만지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푸응, 코로 한숨을 쉰 토끼가 다시 일어나 앉으면서 뒷다리로 왼쪽 귀를 긁었다. 뜯겨나간 쪽이 때때로 간지러운지 그쪽 귀를 앞다리로 쓸어내리거나 뒷다리로 긁는 버릇이 있었다. 저 귀는 어쩌다가 다친 걸까. 들개나 늑대, 여우에게 잡힌 적이 있었을까. 사요는 그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으나 미즈키는 사랑 없는 혼례라고 못박듯이 자신에 관한 것은 일절 알려주지 않았고 사요에게도 이전의 삶에 대해 전혀 물어보지 않았다. 그것이 서로에게 좋은 것이라고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같이 사는 사이에 서운함이 몰려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사요의 눈썹이 살짝 쳐지자 미즈키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사요의 무릎에 앉았다. 앞다리를 가슴팍 안으로 밀어넣으니 꼭 고양이가 식빵 굽는 듯한 자세가 되었다. 사요는 머뭇거리다가 그의 등과 엉덩이를 천천히 쓸어주었다. 비단결처럼 보드라운 털은 따뜻하기도 했다. 미즈키가 사요의 팔에 턱을 부비면서 말했다.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를 붙여드릴까요. 당신이 갑갑해할 것 같습니다.”

“아, 아뇨. 괜찮아요. 그래도 전보다는 훨씬 나으니까요.”

“훨씬 나은 삶이 아니라, 다른 삶을 살고 싶어 이곳을 선택한 거 아닙니까.”

토끼가 눈을 들어 사요를 바라본다. 토끼가 원래 이렇게 그윽한 눈길을 가졌던가? 토끼 세계에도 인간과 같은 직업이 있다면 미즈키는 분명 눈빛 연기로 유명한 배우 토끼가 되었을 것이다. 토끼한테 심장이 뛴다니 18년 인생 처음이었다. 게다가 상냥하고 부드럽고 폭신하고 따끈하기까지! 그리고 다른 토끼에 비해 키나 다리가 짧아 상대적으로 앙증맞아 보이기까지 한다.

“미즈키 님은…. 정말 완벽한 토끼에요.”

“네?”

갈무리하지 못하고 흘러나온 본심에 미즈키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귀를 팔랑거렸다. 대체 저 같은 아저씨 토끼의 어디가 좋다고…. 콧구멍을 벌렁대다가 미즈키른 푸흥, 하고 또 콧김을 뿜었다. 사요는 웃으면서 미즈키의 겨드랑이 쪽에 손을 끼우고 뒤집어 앞발을 잡았다. 졸지에 배를 드러낸 자세가 된 미즈키가 불편한지 꼼질댔지만 금방 포기하고 사요에게 몸을 완전히 맡겼다. 영락없는 인형 신세가 된 미즈키가 체념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도 좋으십니까….”

“네! 미즈키 님은 다른 토끼보다 복실복실한 거 같아요!”

“네에…. 흉터만 건드리지 마십시오.”

“네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선은 여전히 왼쪽에만 난 흉터들에 가 있었다. 이젠 아프지 않은 걸까. 하지만 아파 보인다. 다쳤을 때 연고는 제대로 발랐을까. 그때는 하쿠토 신사의 약사가 아니었던 걸까. 미즈키 님은 어쩌다가 하쿠토 신사에서 일하게 되었을까. 그가 먼저 알려주지 않는 과거가 궁금했으나 차마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상상 속으로 그의 왼쪽 귀를 더듬으며 사요는 중얼거렸다.

“어쩌다 이렇게 많이 다쳤을까, 우리 미즈키 님은….”

미즈키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그 말을 산경 쓰고 있음은 느껴졌다.


사요의 어꺠와 목덜미에 턱을 대고 자던 미즈키는 귀를 움찔거리며 일어났다. 귓가에서 사요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악몽인가 싶어 미즈키는 사요의 뺨에 앞발을 올렸다가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것을 알아채고 벌떡 일어났다.

“사요 씨, 사요 씨.”

나지막히 그의 이름을 부르며 뺨을 두드리고 머리를 기울어진 고개 안에 파묻어 깨우려고 했다. 그러나 수면열에 따끈하게 오른 토끼의 체온에도 사요의 혈색은 돌아올 기미가 없고, 여전히 그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인상을 쓴 채 헐떡이고 있었다. 미즈키는낑낑대며 이불을 걷어내고 손을 꺼내 맥을 짚었다. 맥이 불안정하고 가쁘게 뛰고 있었다.

사요 씨, 죄송합니다. 미리 사죄의 말을 올리고 잠옷 대용으로 입는 유카타의 가슴팍을 벌리고 오비를 느슨하게 풀었다. 몸을 옥죄는 옷은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고 호흡을 방해해 신체가 긴장 상태를 유지하게 만든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고개를 똑바로 한 뒤 베개를 고쳐 더 편한히 누운 자세로 만들어준다. 팔은 몸 옆에 자연스럽게 모인 자세로 두고 위로 아래로 바쁘게 돌아다니며 손발을 주물러준다. 신체 말단을 주무르면 혈이 트여 일시적으로나마 맥박이 돌아온다. 손발이 어느 정도 따뜻해지자 미즈키는 다시 그의 얼굴 옆에 앉아 상태가 호전되기를 기다린다.

다행히 일련의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맥은 정상 궤도로 돌아오고 있었지만 사요는 여전히 인상을 쓴 채 꿈속을 헤매고 있다. 어찌 이렇게 지독한 악몽이 있을까. 야심한 밤이라 맥을 부르러 가도 늦지 않을까 싶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뒷발로 선 채 사요의 곁을 지키는데 그가 잠꼬대를 했다.

“싫어요, 엄마, 싫어요…. 안 할래요….”

사요는 류가에 있던 시절로 돌아갔다. 가지런히 둔 손으로 가슴팍까지 올린 이불을 틀어쥐고 사요는 어린 아이처럼 사납게 도리질을 했다. 싫어, 싫어. 한참을 싫다고, 안 하겠다고 떼를 쓰던 사요가 갑자기 “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코끼자 훌쩍이면서 사요는 기가 죽은 목소리로 색색대면서 흐느꼈다.

“잘못했어요, 엄마, 사요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아니 죄송해요.”

닿지 않을 사과의 말을 웅얼거리는 소녀를 미즈키는 측은하고 갑갑한 마음으로 내려다봤다.

인간 기준으로도 스물 이전은 매우 어린 나이라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친우의 아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사요가 자신의 집안이 얼마나 갑갑한지 설명하면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고 이야기할 때만 해도, 굉장한 집안이라고 생각할 뿐 그것이 신의 신부가 되면서까지 도피해야 하는 수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체 어떤 곳이었기에, 어린 아이가 제 어미에게 울면서 사과하고 빌어야 하는 것인가.

직접 말하지 않는 이상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요에게 그 집안과 어머니는 살아있는 지옥이었으리라. 제 존재를 신에게 바쳐 말살해야만 탈출할 수 있는 지옥.

미즈키는 몸을 둥글게 말아 사요의 목덜미에 바짝 붙였다. 그리고는 일부로 몸을 부풀려 가며 천천히 호흡을 뱉었다. 제 느지막한 호흡과 고동이 사요의 것과 섞이면서 흐느낌이 잦아들어가기 시작했다. 눈물 맺힌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사요가 겨우 악몽에서 벗어나 눈을 떴다.

“괜찮으십니까.”

“아, 미즈키 님.”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사요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즈키가 바로 일어나 사요의 몸 위에 앉았다. 악몽에서 깨어났지만 진정이 되지는 않는지 사요는 말없이 미즈키를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이 달달 떨리는 게 털과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미즈키는 악몽을 꾸었냐고, 무슨 꿈이었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했다.

“인간에게 잡힌 적이 있었습니다.”

“네?”

“그들은 잡은 토끼들을 아주 좁은 철장에 가두었습니다. 고작 다섯 번 밖에 못 뛰는 우리에, 무려 열 마리 남짓 되는 토끼가 갇혀 있었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하면….”

사요의 마을에도 토끼를 키우는 집이 있어서 안다. 충분히 넓지 못하다면 한 우리 안에 토끼를 두 마리 이상 넣으면 안 된다. 토끼는 영역을 중시하기에 같은 우리에 넣어두면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 싸울 수도 있다고, 토끼 치는 할머니가 한 말이 떠올랐다.

“모든 토끼가 성이 나 있었습니다. 심신이 성한 녀석이 하나도 없었죠. 이건 그때…, 같은 토끼에게 물어뜯겨 난 상처입니다.”

미즈키는 제 귀를 가리키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주 오래 전 이야기를 회상하듯이,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이 끔찍하거나 아프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양. 그러나 사요는 알 수 있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공간에서 나보다 더 강한 이에게 물어뜯기고 미움받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그렇게 마음에 입은 상처가 얼마나 오래 가는지.

사요는 손을 뻗어 미즈키의 잘려나간 귀를 만졌다. 미즈키는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위로해주려는 의도임을 알았기에.

“많이 아파겠다…. 우리 미즈키 님.”

사요는 미즈키를 꼭 끌어안고 모로 쓰러지듯이 누웠다. 부드러운 이불이 그들을 감쌌다. 미즈키는 사요의 손목에 턱을 부비며 물었다.

“수면에 좋은 차를 가져다드릴까요. 안정제도 처방해드리겠습니다.”

‘아뇨, 지금은 괜찮아요 미즈키 님이…. 따뜻해서.“

곧 사요는 미즈키의 심장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에 들었다. 미즈키는 선잠을 반복하며 사요의 곁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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