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쿠토 신의 신부님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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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류가, 류가. 사요는 불만스럽게 발에 채이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모난 돌에 맞아 발이 따가웠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늘은 수학여행 마지막 날, 이번 일정이 끝나면 사요는 버스를 타고 끔찍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깊은 산골에 위치한 그의 고향은 그야말로 감옥이다. 류가 그룹의 외동딸이니 하고 싶은 것을 잔뜩 하는 철부지로 자랐을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 명예와 영광과 재산을 쥐고도 사요가 제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사요에 관한 모든 결정권은 어머니가 쥐고 있었고, 그 선택은 모두 사요의 자유를 박탈하는 부류였다. 그는 어머니의 허락 없이는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혹여 몰래 떠나려고 하면 마을 사람들이 밀고해 촌장의 부하들이 잡으러 나왔다.
사요가 혹여 류가가 아닌 다른 것을 우선할까봐 어머니는 사요를 끝없이 감시하고 정신적으로 조종하려 했다. 그의 강박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 주변에 고등학교가 없으니 진학을 금지하겠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고졸도 아니고 중졸로 학력을 마무리하고 남은 생을 마을에 갇혀 보내라니! 다행히 아버지가 어머니와의 이혼을 각오하고 담판을 지은 덕에 사요는 인근 도시의 고교에 입학했으나, 이대로면 대학 진학은커녕 대도시 상경도 영영 불가능할 거 같다.
고등학교 수학여행도 이번이 아니면 가지 못한다고 겨우 사정해서야 허락받았는데 앞으로는 얼마나 더 나를 옥죌까. 이대로면 어머니가 돌아가시거나 자신이 류가의 안주인이 되어 주도권을 잡을 때까지 자유는 꿈도 못 꿀 판이다. 사요가 무겁게 한숨을 흘리거나 말거나, 인솔교사와 가이드는 신사 입구에서 설명하랴 아이들을 집중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가이드가 하얀 토리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통 토리이는 새빨간 색이지만 이곳 하쿠토白兎 신사는 하얀색인데요, 이건 이곳에서 모시는 신인 이나바노시로우사기因幡の白兎를 모시기 때문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하얀 토끼는 이나바로 건너가기 위해 상어를 속였다가 물어뜯겨 백사장에서 울고 있었는데요, 마침 아름다운 공주에게 청혼하러 가던 세 형제가 이 토끼를 보게 됩니다. 두 형은 토끼에게 바닷물로 몸을 씻고 바람이 잘 부는 데에서 엎드려 있으라고 했으나….”
“사요 짱, 왜 그래? 어디 아파?”
가이드의 설명은 흘려들으면서 우울한 낯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사요가 걱정되었는지 반장이 물었다. 사요는 괜찮다고 대꾸했지만 사실은 정말로 괜찮지 않았다. 돌아가면 꼼짝없이 어머니에게 잡혀 살아야 하는데, 우울하지 않을 리가. 하지만 주변의 걱정을 사는 것도 좋지만은 않은지라 사요는 애써 가이드의 말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이런 설화 때문에 이나바노시로우사기는 피부명을 고쳐주는 의신醫神이자 남녀를 이어주는 연애신戀愛神으로 알려져 있답니다. 그럼 들어가 볼까요?”
사요는 일행을 따라 하쿠토 신사로 들어갔다가 본당 앞에 있는 작은 석등을 바라보았다. 토끼 신을 모시는 곳이어서 그런지 곳곳에 토끼 조각상이 있었다. 사요는 마을에 있는 작은 사당처럼 생긴 석등을 한참 바라보다가 가이드가 한 말을 떠올렸다. 남녀를 이어주는 연애신이라, 사요에겐 별나라 이야기이다. 어머니는 사요의 결혼 상대까지 정해두고 혼약을 강요할 테니까.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 정도는 스스로 정하고 싶은데, 사요는 한숨을 쉬면서 자도 모르게 석등 앞에 합장을 했다.
누군가에게 시집 가야 한다면 토끼 신님, 부디 저를 신부로 맞이해주세요.
어쩌면 그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으리라.
『아가씨, 그거 진심이야?』
중저음에 듣기 좋은 남성의 목소리가 사요를 불렀다. 사요는 이리저리 돌아보다가 『여깁니다, 여기』라며 한숨 쉬며 독촉하는 소리에 정면을 바라봤다. 방금 전 합장한 석등 위에 토끼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흰토끼를 모시는 신사에 어울리지 않게 검은 털에 입가와 가슴팍에만 하얀 털이 난, 푸른 눈의 토끼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빨간 토끼 눈은 알지만 푸른 토끼 눈은 처음이네, 더 자세히 훑어보니 오만 곳이 상처투성이였다. 귀에도 눈에도 가슴팍에도 흉터가 있는데 신기하게도 모두 왼쪽이었다. 사요가 대답을 하지 않자 토끼는 다시 말을 걸었다.
『아가씨, 그거 진심이냐니까?』
“네? 뭐가요?”
『뭐어? 아가씨가 그랬잖아. 신부가 되고 싶다고.』
아무리 내가 인간에게 호의적이어도 그건 좀…. 토끼는 말을 얼버무리며 정말로 곤란하다는 말을 했다. 사요는 토끼의 말을 곱씹다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그럼 당신이 하쿠토 신사의…?”
『아아, 왜? 흰토끼가 아니라 웬 시커먼 토끼가 나와서 실망하셨나?』
토끼는 끝자락이 뜯겨져 나간 귀를 뒷발로 긁으면서 시큰둥하게 말했다. 토끼는 어딘가 시니컬하고 비꼬는 듯한 말투를 구사했으나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사요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직접 나와주셨는데, 이 기회에 아주 제대로 어필해서 이 신세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사요는 헐레벌떡 단호하게 말했다.
“아뇨, 아니에요! 그리고 시집가고 싶다는 건 진심이에요!”
『엑, 진짜? 어이, 인간 아가씨. 아무리 장난이라도 신에게 시집가고 싶다느니 그런 말하면 천벌받….』
“이대로 어머니에게 꼼짝없이 묶여서 살 바에야 차라리 신의 반려가 되어서 천벌을 받겠어요!”
그 말을 시작으로 사요는 자신의 집안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 제 어머니가 얼마나 폭정적인 사람인지, 제 고향이 얼마나 숨막히는 곳인지, 자신이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 신세인지 낱낱이 말했다. 문득 신에게 인간 세상의 부조리함을 폭로하면서 구제를 바라는 신화 속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사요의 하소연을 곤란한 낯으로 한참 들은 토끼는 잠깐 동안 말이 없다가 한숨을 폭 쉬었다.
『뭐, 알았어. 그렇게까지 벗어나고 싶다면야. 맞이해줄게, 신부로.』
“정말이죠!”
『당연하지. 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단 정식으로 혼인하는 건 아가씨가 인간 기준으로 성년이 된 다음이야. 이건 나도 양보 못 해.』
그 말과 동시에 사요는 눈을 떴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그는 어느 새 하쿠토 신사가 아닌 도쿄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 있었고, 창가에 고개를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모든 게 꿈이었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뭐야, 그냥 꿈이었잖아. 하긴 신이 진짜로 있을 리가 없지. 사요는 다시 우울한 얼굴로 점점 가까워지는 도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쿠토 신의 신부님(上)
집안에 조금씩 악재가 겹치고 있다. 아직 미성년자인 사요도 그것을 감지할 만큼 수학여행 이후 집안 분위기가 갈수록 흉흉해지고 있다.
처음은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유언에 따라 당주는 큰아버지가 되었으나 재산 상속 과정에서 다른 형제 및 아버지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회사의 지분과 당주 후계 문제만을 언급하고 다른 것은 과감하게 생략한 할아버지의 유언 때문이었다. 회사를 유지하는 데 성공한 아버지나 회장이 된 어머니, 차차기 당주 자리를 확정받은 토시코 이모와 달리 아무것도 받지 못한 히노에 고모가 변호사를 고용한다느니 소란을 떨었으나 법에 따라 형제들이 균등하게 나누어 갖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첫 번째는 가족 간 해프닝으로 넘길 수 있었으나 두 번째는 파장이 조금 컸다. 류가에게 납품하던 한 회사가 불법 동물실험을 십여 년 간 지속해 왔음이 탄로난 것이다. 이에 해당 회사와 거래를 하던 모든 기업이 이 사실을 알고도 방조했느냐가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고, 그중에서도 덩치가 가장 크고 가장 많은 거래를 했던 류가에게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구사일생으로 류가제약은 무죄를 입증할 증거를 공개해 비난에서 벗어났으나 사람들은 류가 역시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실험을 하고 있는 거 아닌가 끊임없이 의심을 했다. 류가제약의 주가가 떨어진 것은 덤이었다. 일부 임원은 이때를 노려 어머니가 회장이 되는 바람에 스캔들에 휘말린 거라는 얼토당토않는(아무리 어머니를 미워하는 사요지만 이 의견만큼은 동의할 수 없었다) 소문을 퍼트리고 다녔다.
그리고 결정타는 두 번째 사건에서 파생된, 사요의 파혼 소동이었다. 사요의 예상대로 할아버지는 사요가 태어나자마자 다른 기업과 혼약을 잡아두었다. 그러나 이번 동물실험 게이트에 류가가 휩쓸리자 자신들의 이미지를 걱정하는 건지 그쪽이 먼저 혼인 서약을 한 번 더 생각해봐야겠다고 통보해왔다. 그 기업을 사로잡는다면 해외 수출도 문제없이 진행할 수 있을 터였다. 겨우겨우 동물실험 게이트에서 빠져나오고 그쪽에게 빌듯이 하고서야 혼약은 유지되었으나 이로써 언제든 깨져도 이상하지 않은 약혼이 되었다.
계속되는 악재에 어르신들은 나구라 신을 모시는 사당에 가서 빌기도 했으나 어째서인지 그 뒤로도 이사의 횡령이나 타 계열사의 장부 조작 파문 등이 터지면서 회사는 지독한 침체기에 빠졌다. 결국 당주를 결단을 내려 직접 나구라 신의 음성을 듣기로 했다. 우습기 짝이 없는 신내림 의식이 길게 이어졌고, 이윽고 삼촌은 평소보다 더 파리해진 얼굴로 신사 마당으로 내려왔다. 독촉 끝에 나온 신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하쿠토 신사의 이나바노시로우사기가 사요를 원하고 있으니 그 바람을 들어주기 전까지는 회사에 악운이 잇따를 거라는 내용이었다.
친척들은 물론 분가의 사람들까지 나서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신이 왜 사요를 원하는 거냐고 언성을 높였다. 옆에서 그를 돕던 오사다 이모부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이나바노시로우사기는 온갖 병을 치료하는 신인 만큼 제약의 영역에서도 꽤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신입니다. 아무래도 저희가 제약 사업으로 일어난 집안이라 나구라 신도 막아주지 못한 것 아닌지….”
“하지만 나구라 신은 우리를…!”
분가의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였고 어머니는 오사다를 구원의 동앗줄마냥 바라봤다. 그러나 오사다는 이번 건은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나바노시로우사기는 연애를 관장하는 탓에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높습니다. 기싸움을 해도 장기적으로는 우리 쪽이 더 큰 손해를 입을 겁니다.”
평소에는 어머니의 충실한 노예처럼 구는 오사다 삼촌도 이번에는 그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지 못헀다. 그만큼 사안이 매우 중대하고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신이 해달라는 데 어떻게 할 수가 있나. 류가는 결국 약혼자에게 파혼을 요청했다. 먼저 파혼 카드를 내밀었던 측은 어떤 불만도 없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도저도 못하는 사이, 두 번째 신의 전언이 도착했다. 한 달 뒤 당주는 더욱 새파래진 얼굴로 집안 사람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다음 묘월 첫 보름날 묘시에 사요를 데려오겠다고 한다.”
다른 어른들의 침울한 속은 모르겠고, 사요는 그저 들떠서 신이 말한 묘월 첫 보름날 묘시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버지는 결국 사요가 시집가는 날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신에게 시집을 보낸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어머니와 언성을 높였다. 무슨 21세기에 신을 믿느냐며, 아버지는 이래서 외부와 교류하지 않는 시골 마을은 안 된다면서 성을 내고 돌아가버렸다.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아진 것은 유감이지만 사요는 이 집안을 벗어날 기회를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예정된 묘월 보름날 묘시, 양력 3월 15일 오전 다섯 시 경, 사요는 하얀 기모노를 입고 나와 본채의 마당에서 홀로 이나바노시로우사기의 전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초봄이라 새벽 다섯 시는 어둑했다. 사요는 와타보우시를 고쳐 쓰면서 토끼들이 종종걸음으로 제게 다가오는 모습을 상상했다. 주인이 검은 토끼니까, 전령도 검은 토끼로 이루어져 있을까. 아니면 하양과 검정이 섞인 귀여운 얼룩무늬 토끼들일까.
토끼들은 어디까지 왔을까, 마당 가장자리로 걸어가 마을을 내려다봤다. 논밭이 펼쳐진 아래는 평소와 달리 일꾼이 보이지 않는다. 사요가 시집가는 날이니 묘시가 지나기 전까지 외출을 금하라고 당주가 마을 사람들에게 당부한 탓이다. 이 마을에서 류가로 산다는 건 거의 왕처럼 모든 권력을 손에 넣는다는 것과 같다. 심심풀이로 누군가의 따귀를 때리거나 물건을 훔쳐도 이 마을 사람들은 원한을 품지도 아랫마을로 내려가 경찰에게 고발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있기에 이 마을이 있고 너희가 그나마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것이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면서 할아버지의 윗세대부터 오랜 시간 나구라를 길들이고 세뇌시킨 결과이다. 그렇게 산다면 편하겠지만 사요는 이제 진저리가 났다. 그가 원하는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가만히 검푸른 빛이 내려앉은 논밭을 바라보는데 멀리서 주홍불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뭐지, 이 시간이면 가로등 불이 꺼질 때인데. 의아함에 사요가 좀 더 상체를 내밀어 바라보니 그 작은 주홍불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방향은 어떻게 봐도 본채 쪽이었다. 느리지만 거침없이 이곳을 향해 전진해오는 빛을 자세히 보면 그 밑에 모여 있는 동그라미가 있었다. 특이하게도 동그라미 위에 두 개의 길쭉한 무언가가 달려 있었다. 그런 것이 옹기종기 모여 주홍색 등불 몇 개를 들고 있었다.
설마, 토끼인가?
사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행렬을 바라봤다. 가까워질수록 그 동그라미는 선명해졌다. 처음에 의심한 대로 그 행렬은 토끼 무리였다. 고운 기모노를 입은 토끼들이 두 발로 서서 호롱불과 가마를 들고 저택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요는 다시 마당 가운데로 돌아와 토끼 행렬을 기다렸다.
정말로, 데려온다고? 토끼 신이 진짜로 존재한다고?
이나바노시로우사기가 듣는다면 경을 칠 일이지만, 오사다 삼촌과 어머니가 진지하게 신부 이야기를 할 때는 믿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바람이 플라시보 효과를 일으켜서 일이 잘 되었다고 짐작했고, 신의 전령을 기다렸던 것도 사실은 스스로를 속이기 위해서였다. 신이 존재할 리 없다고, 그 꿈은 사실 제 망상이 낳은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기모노를 입은 토끼들은 어떻게 보아도 꿈일 수가 없었다. 사요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멍하니 토끼들이 올라오는 것을 바라봤다.
마침내 토끼 행렬이 열어둔 대문을 넘어 본채의 마당까지 들어왔다. 네 마리 토끼가 으샤으샤하면서 다가와 가마를 내려놓았다. 그 앞에 서 있던 흰 토끼가 후리소데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읽었다.
“우리는 이나바노시로우사기님의 신부를 맞이하러 왔다! 그대가 이나바노시로우사기님의 신부 될 류가 사요인가?”
작은 몸집에 비해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 토끼가 이렇게 우렁차게 묻는데도 집안 사람들은 나오거나 고개를 내밀지도 않는다. 사요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제가 류가 사요입니다.”
“흠, 생년은 정해년 진월 스무일 묘시에 부는 류가 카츠노리, 모는 류가 오토메가 맞는가?”
“정해년…, 이요?”
낯선 연도법에 사요가 되묻자 가마 뒤에 있던 갈색 토끼가 쪼르르 달려와 흰 토끼에게 귓속말했다. 흰 토끼는 서력으로 정정해 사요에게 다시 물었다.
“2007년 4월 20일 오전 다섯 시에서 오전 일곱 시 사이에 태어나신 분이십니까?”
“아, 네네.”
“그대는 이나바노시로우사기님의 신부로서 선계에 가게 될 겁니다. 인계에는 한 달에 한 번씩만 들를 수 있습니다. 이에 동의하고 신부가 되시겠습니까?”
사요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말했다. 한 달의 한 번이면 엄청난 혜택 아닌가, 그리고 사요는 토키야나 네즈미, 반 친구들이 아니면 인계에 올 일이 없다. 세상에 누가 그런 어머니와 집안을 보러 한 달에 한 번씩이나 오겠는가! 한편으로는 하쿠토 신이 참 정중하고 배려심이 깊다고 생각했다.
사요의 동의를 받은 토끼들은 가마에 신부를 태웠다. 가마 안은 생각보다 좁았으나 몸을 접어서 타야 할 만큼 작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가마를 한참 동안 타고 있어야 한다면 온몸이 조금 뻐근할지도.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가마의 내부가 넓어지더니 두 발을 쭉 펼 만큼 큰 공간이 생겼다. 신의 기술이란 참으로 오묘하구나. 사요는 들뜬 마음에 혹시나 싶어 두 손을 모으고 아침거리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사요의 맞으편 자리에 찹쌀떡 세 덩어리가 나타났다. 심지어 떡 그릇 옆에는 따뜻한 녹차도 있었다. 안정적인 가마 안에서 사요는 떡 세 덩어리를 모두 먹고 녹차로 입가심까지 마쳤다. 가마꾼 하나가 사요에게 물었다.
“떡은 어떠십니까?”
“아주 맛있어요. 약과 관련된 신이시라더니 음식 만드는 솜씨도 일품이시네요.”
사요가 칭찬을 하자 가마꾼이 웃으면서 말했다.
“인간의 몸으로는 선계의 힘을 버틸 수 없어, 문을 넘기 전에 선계의 음식을 먹이는 게 관례입니다. 이야, 부엌칼도 쥐어본 적 없을 거 같은 애한테 어떻게 요리를 시키겠냐며 작은 손으로 열심히 떡을 빗던 나리의 모습이 눈에 선하구먼요.”
“자네, 하쿠토 님에게….”
“아니, 다들 같이 놀려놓고 왜 저한테만 뭐라 하십니까?”
다른 가마꾼이 지적을 하자 어린 가마꾼이 억울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구나, 나를 위해 신께서 직접 만드신 거구나. 어쩜 이렇게 상냥하실까…. 사요는 가마 문을 살짝 열어 바깥을 보았다. 한평생 살아온 고향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모두들 안녕히 계세요, 저는 제 행복을 찾아 토끼에게 시집을 가겠습니다. 사요는 미련없이 가마 문을 닫았다.
가마가 땅에 내려왔다. 도착했다는 말과 함께 가마 문이 열렸다. 처음 말을 걸어준 어린 가마꾼이 사요의 손을 잡아주었다. 가마에서 나온 사요는 눈앞의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분명 앞에 있는 하얀 토리이는 이전에 수학여행 마지막 날 본 하쿠토 신사의 토리이였으나 주변이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허허벌판에 갈대가 흩날리고 있었는데, 이곳에는 여러 나무와 풀이 심어져 있어 과수원 같은 분위기였다. 토리이 너머로는 긴 계단이 있었고 그 양옆으로 차밭 같은 것이 펼쳐져 있었다. 그 사이를 토끼들이 바구니를 든 채 분주하게 오가며 과실과 잎사귀를 수확하고 있었다. 이나바노시로우사기가 약을 관장하는 신이니, 아마 저것들은 모두 약재일 것이다.
행렬 맨 앞에 서 있던 토끼가 다시 후리소데에서 종이를 꺼내 토리이 앞에 서서 외쳤다.
“신부님 입장이오―――!”
그 말에 모든 토끼들이 일손을 멈추고 일렬로 서서 사요를 맞이헀다. 사요가 토리이를 넘어 계단을 올라가자 가마 행렬의 토끼들이 주변을 둥글게 에워싸 그를 호위했다. 작은 토끼들이 옹기종기 제 발치에 모여 있는 경험은 실로 진귀한 것이었다. 사요는 토끼들의 인사를 받으며 신사로 향했다.
신사 앞에선 달달한 냄새가 났다. 이렇게 많은 약재가 있으니 한약방처럼 쓴 냄새가 옅게라도 풍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어린 가마꾼을 호통쳤던 토끼가 사요의 어깨에 올라타 귓속말했다. 사실 신부님이 쓴 냄새를 싫어하면 어쩌나 싶어 전날까지 아주 쓸고 닦았습죠. 그 익살스러운 말투에 사요는 웃음이 나왔다. 처음 대화할 때는 영 내키지 않아하더니, 그래도 나를 많이 신경 쓰고 내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했구나.
“신랑, 이나바노시로우사기노미즈키 입장하오―――!”
안쪽에서 우렁찬 소리가 나왔다. 신사의 본채 문이 열리면서 모든 토끼가 고개를 숙였다. 사요도 따라 고개를 숙여야 하나 싶었지만, 신부인데 그래야 할까 싶은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고 신사를 보았다.
그런데, 신랑님은 어디 계시지?
아무리 봐도 신랑이 없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니, 한참 아래에서 “여깁니다.”하고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조금 내려 신사의 바닥 쪽을 보니, 검은 기모노를 갖추어 입은…. 그때의 작고 검은 토끼가 앉아 있었다.
“…토끼 모습이네요.”
“…토끼 신이니까요.”
어쩐지 목소리가 민망함을 최대로 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토끼는 한숨을 깊게 쉬고는 깡총깡총 뛰어 사요 앞으로 다가왔다. 목을 쭉 빼고 있는 게 안쓰러워 사요는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들어드릴까요?”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쪽저쪽에서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권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 토끼 신은 조용히 하라고 일갈도 못하고 얌전히 사요의 손 안으로 들어왔다. 토끼를 품에 안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사요가 활짝 웃으면서 이름을 말했다.
“사요라고 불러주세요.”
“저는 미즈키로 충분합니다.”
미즈키, 물과 나무라, 파릇함과 생명력이 느껴지는 좋은 이름이다. 미즈키라고 자신을 칭한 이나바노시로우사기는 푸른 눈으로 사요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건 정식 혼인이 아닙니다. 당신이 인간 나이로 성년이 되었을 때, 그때도 지금과 같은 마음이라면 기꺼이 당신을 신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다. 앞으로 2년 뒤면 사요는 성인이 된다. 그리고 선계의 일이 아무리 힘들다 할지라도 사요는 견딜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작고 귀여운 토끼신이 신랑이고 토끼들이 제 핀구들이라면 소소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요는 더욱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 잘 부탁드려요. 신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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