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의 부탁

유령부자+미즈키

篝火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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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노전님(@professorcchan) 리퀘로 쓴 글입니다

  • 수신즈키 소재

인적이 드문 바닷가 모래밭에 게타 자국이 남았다가 사라진다. 평소의 카랑대는 맑은 소리가 아닌 퍽, 퍽 하고 모래에 파묻혔다가 빠져나오는 소리는 얼마 가지 않아 파도치는 소리에 잠겨 먹먹하게 지워진다. 곧 게타를 신은 발이 강 가장자리 끝부분, 조금만 발을 뻗으면 차디찬 물에 흠뻑 젖어버리는 곳까지 다가왔다.

오랫동안 발길이 끊긴 바닷가를 찾은 이방인은 놀랍게도 어린아이였다. 이제 초등학교 2, 3학년이나 되었을까. 앙증맞은 몸이었으나 머리카락으로 왼눈을 가린 탓에 나이에 맞지 않게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푸른 아동복 위에 걸친 노랑과 검정 줄무늬 조끼는 마치 꿀벌의 경고색처럼 보인다. 아이는 파도의 끄트머리에 쭈그려 앉아 맑게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다가 허공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이곳에 수신이 있다고요?”

“수신은 말 그대로 물을 관장하는 자. 바다에도, 강에도, 숲속 옹달샘에도 그는 존재하지.”

그의 고운 갈색 머리카락을 헤치고 나타난 존재는 무려 손발이 달린 눈알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귀신이라고 까무러칠 법한 외관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것을 머릿속에 데리고 다님은 물론 대화까지 나누고 있었다.

“수신의 도움을 받기는 싫은데…, 옥경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네요.”

소년은 자조하듯이 중얼거리고 한숨을 쉬었다. 바다는 그들의 속도 모르고 철썩댔다.

소년의 이름은 키타로, 본명보다는 ‘도시전설’이나 ‘게게게의 키타로’ 등으로 불리는 요괴이다. 또한 한때는 지상에 번성했던 요괴 일족, 유령족의 마지막 후예이기도 하다. 그의 머리카락에 매달려 다니는 눈알은 그의 아버지로, 어떠한 병에 걸려 육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눈알에 겨우 생명력을 담아 움직이고 있다. 현재 그들은 요괴 포스트를 통해 괴이한 사건에 골머리를 앓는 사람들을 돕는 한편, 인간과 요괴 사이의 균형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중이다.

그들이 이곳 폐어촌을 찾은 이유는 하나, 요괴 포스트로 들어온 의뢰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의뢰자는 친구가 사고를 당한 후 무언가가 친구의 영혼을 대신해 들어온 것 같다며 진상조사와 제령을 의뢰했다. 키타로 부자는 의뢰인의 친구를 보자마자 확실히 다른 것이 섞였음을 알아챘지만 그 정체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여기에서 사소한 문제가 하나 생겼다. 몸 안에 들어간 것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내면을 비추는 제구祭具인 옥경鈺鏡이 필요한데, 이 옥경은 세상에서 하나뿐이고 하필이면 이것을 가진 이가 수신이니, 결국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신을 찾아 옥경을 받는 수밖에 없다.

그저 수신에게 부탁하면 되는 일이니 간단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부자에게 수신은 여간 껄끄러운 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50여 년 전, 수신이 일으킨 물난리에 소중한 인간을 잃었다. 미즈키라는 그 인간은 눈알아버지의 하나뿐인 인간 친우였으며 키타로에겐 그를 성심성의껏 키워낸 또 하나의 아버지였다. 그만큼 부자에게 미즈키란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인간이었는데, 수신의 몸은 그들이 살던 2층집을 덮치고 기어코 미즈키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미즈키는 키타로를 안전하게 옥상으로 올리고 그대로 수신의 몸에 녹아 사라졌다. 모든 게 끝나고 바닥에 널브러진 그의 양복과 시계만을 겨우 찾아냈을 때 그들의 마음은 감히 상실을 겪어보지 않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고통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원수나 다름없는 수신에게 사정을 해서 옥경을 얻어와야 한단다. 운명이라는 게 이리도 가증스러운 것이다. 그렇다고 의뢰를 해결하지 않을 순 없으니 울며 겨자먹기로 그들은 수신의 행적을 수소문해 이 폐어촌까지 흘러들어왔다.

“그런데 옥경이 더 이상 수신에게 없으면 어떡하죠?”

“그렇다면 별 수 없구나. 다시 수소문을 하는 수밖에…. 수신이 우리에게 쉽게 옥경의 현 주인을 알려주지는 않을 테니….”

“애초에 성질이 나쁜 요괴였으니까요.”

수신이 키타로를 덮친 이유는 갓난쟁이가 자신에게 덤빈다는 얼토당토 않는 이유였다. 키타로가 수신을 찾아간 까닭은 두꺼비에게 돈을 꾸어가고 30년 째 갚지 않아서였는데. 감히 어린 요괴 주제에 자신에게 대들었다는 이유로 수신은 미즈키를 죽이고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온순한 키타로도 주먹이 떨릴 정도였다.

일단은 여기에 며칠 동안 머물면서 수신이 나오기를 기다려볼까. 키타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뉘일 법한 폐가를 찾아볼 심산으로 마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게타 자국이 다시 모래사장에 새겨질 때, 키타로를 덮칠 듯이 내달리다 후퇴하길 반복하던 파도가 멎었다. 바람이 꽤 강하게 부는데도 파도소리는 오히려 더 잠잠해졌다. 곧 요괴 레이더가 쭈뼛 서길래 키타로는 다시 해안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 멀리, 수평선에서부터 부글거리는 물거품 덩어리가 해안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눈알아버지가 키타로의 머리카락에서 나와 손바닥 위로 내려왔다. 둘은 그 자리에 붙박인 듯이 서서 다가오는 물거품을 가만히 응시했다.

물거품은 가까워질수록 커지더니 이내 사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수신이 올라오고 있다, 본능적으로 드는 생각에 키타로는 몸을 굳혔다. 눈알아버지가 키타로의 엄지를 꽉 잡고 다독였다. 침착해야 한다, 키타로. 우리는 오늘 그에게 부탁을 하러 온 게야. 키타로는 아버지의 속삭임에 고개를 속삭이면서도 살벌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적당히 모양새를 갖추자 물거품이 흩어졌다. 하얀 포말 속에 감추어져 있던 수신의 모습이 드러나자 키타로의 눈이 점점 커졌다. 눈알아버지의 동공도 점차 확장되어 눈앞에 있는 수신을 선명하게 담았다. 아아, 하고 소리를 낸 수신은 턱을 괴고 유령부자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너희가 소문의 게게게 뭐시기인가?”

“…키타로입니다.”

키타로가 먼저 이성을 붙잡고 수신이 부른 호칭을 정정했다. 그래, 아무튼. 수신은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대꾸하고는 여전히 턱을 괴고선 물었다.

“이렇게 조그만 녀석인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카와우소에게 들었다. 옥경이 필요해서 나를 찾고 있다고?”

“네. 마지막으로 옥경을 소유한 사람이 당신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닙니까?”

“그건 맞긴 하지. 지금도 내게 있다만…. 알지? 모든 일에는 대가가 필요하다는 거.”

수신이 이를 드러내고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 모양을 만들어 흔들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물의 신은 동시에 상업을 관장하기도 했기에 거래에 매우 민감하다. 수신이 키타로를 덮친 것도 자신이 준 도움에 비해 대가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키타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그렇죠. 옥경은 그 자체로 신기에 버금가는 물건이니 가볍게 빌려줄 수 없는 것도 압니다. 하여 당신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합니다만.”

“흠, 소원이라고? 그건 좀 거창한데….”

키타로의 말에 이번엔 수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민에 빠졌다. 음, 하며 한참동안 허공을 바라보던 수신이 키타로를 다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 좋아. 안 그래도 다른 사람 도움이 좀 필요한 참이었거든. 따라와.”

이번 일만 잘 끝나면 옥경이야 얼마든지 빌려줄게. 그렇게 말하면서 수신은 히죽 웃었다. 생전 미즈키를 꼭 닮은 미소에 키타로도 눈알아버지도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수신의 부탁

눈알아버지는 앞장 서 걷고 있는 수신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바랜 빛을 유지하던 생전과 달리 푸른빛이 감도는 흑발로 돌아갔다는 것을 제하면 살아있을 적과 꼭 같은 모습이었다. 귀나 눈의 흉터 위치도, 걸음걸이마저도 똑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수신은 제가 집어삼킨 모든 생명체를 녹여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그렇다면 수신이 미즈키의 껍데기를 취한 것인가? 하지만 수신의 자아를 유지한 채 육신만 미즈키의 것으로 재구성했다면 키타로를 알아봤어야 한다. 옥경을 빌려달라는 것도 무시하고 과거의 고압적인 태도로 내쳤어야 하는데, 이 수신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 순순히 거래에 응했다.

그렇다면 미즈키가 정말로 살아서 수신의 자리를 이은 것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도 애매하다. 역시나 키타로에 대한 기억에 공백이 있다. 몇 번 말을 섞으며 질의응답을 한 결과, 이 수신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도, 그 전에 무엇이었는지도. 수신은 그 질문을 받고는 짜증스럽게 턱을 긁적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몇 번을 말해. 나는 신이기 전의 기억이 없어. 유일하게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엇던 건 미즈키라는 이름이랑 치수의 능력뿐이야.”

“우리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가?”

“그거야 물 요괴들에게 질리게 들었지. 근 스무 해 동안은 네 이야기만 줄기차게 들었어. 아, 카와우소나 갓파 건은 유감이야.”

“죄송합니다.”

카와우소 건이라면 당당하게 어깨를 펼 수 있지만 갓파 혹사 사건은 이들도 할 말이 없었다. 굳이 책임을 따지자면 갓파에겐 시급 오이 3개면 된다며 그들의 노동력을 값싸게 팔아치운 네즈미오토코에게 있지만, 수신의 시선에서 보면 인간과 요괴의 욕심으로 자신의 자식 같은 물 요괴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은 셈이었다. 사건의 전말을 들은 수신이 당장 분개하여 인간의 마을에 해일을 일으키지 않은 게 요행이었다. 키타로는 빠르게 도게자를 박을 기세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수신은 해안가에 쩌렁하게 울리게 폭소를 터트리더니 그럴 필요 없다며 손을 저었다.

“뭐, 어쨌든 잘 해결되었잖아. 갓파들에게 들어보니 너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데.”

“예에….”

“그치만 그 네즈미오토코라는 녀석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바다 속에 다섯 시간 정도는 담가버려야지.”

수신은 주먹을 움켜쥐며 이를 갈았다. 키타로는 속으로 다섯 시간은 너무하니 세 시간을 줄여달라고 딴지를 걸었다. 네즈미오토코가 들었다면 너무하다가 항변했을 생각이었다.

다 왔다. 수신은 길 끄트머리에 서서 마을 쪽을 가리켰다. 키타로는 가늘게 눈을 뜨고 폐어촌을 바라봤다. 폐어촌이라고 하지만 5층 짜리 건물도 심심치 않게 보일 만큼 꽤 크고 번성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 마을은 지금 집 곳곳이 무너지고, 골목마다 나무 판자나 생필품 같은 것이 널브러져 있어 처참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사람이 빠져나간 게 아니라, 거대한 재앙을 맞이해 모든 것이 휩쓸려 간 것 같은 모양새였다. 키타로보다 통찰력이 더 깊은 눈알아버지는 바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꿰뚫어보았다.

“수해를 입었군.”

“30여 년 전에 큰 쓰나미가 일어났어. 방파제를 넘고 이 마을을 바로 덮쳤지. 인구의 절반이 휩쓸려 가고 절반은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마을을 떠났어.”

수신은 5층짜리 건물을 하나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건물은 지하 주차장이 있는데, 저 안으로도 물이 밀려들어갔어. 그때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한 사람들이 저 안에 갇혀 익사했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모습에 키타로는 얼굴을 찌푸렸다. 수신은 씁쓸한 낯으로 소매 안으로 손을 넣으며 마을로 걸어갔다. 꽤 크고 나름 이 지역 거점이었는데, 도시와 떨어져 있어서 소식이 다른 지역으로 전해지지 않았어. 속보도 나지 않았고. 수신은 발에 채이는 잔해를 주워들어 갓길로 치우면서 말을 이었다.

“바다로 떠내려온 시신이나 잔해는 내가 수습했는데, 이곳은 내 힘이 미치지 않아서 정리를 다 끝내지 못했어.”

“그러니까 이곳을 정화하는 게 대가라는 건가요?”

“오, 눈치가 꽤나 빠른데?”

수신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인간일 때와 다르게 날카로워진 송곳니가 눈에 들어왔다. 키타로가 시선을 돌리자 미즈키도 따라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말이 좋아서 정화지 사실은 쓰레기 청소야. 망할 전대 놈, 사고를 치고 다닌 건 그 녀석인데 왜 내가 수습을 해야 하는 거야.”

“전대라니?”

수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에 키타로와 눈알아버지의 관심이 대번에 쏠렸다. 오히려 수신이 그보다 더 당황하면서, 자신이 23대인데 몰랐느냐고 되물었다. 수신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도 놀랍거니와 수신이라 불리던 이가 지금까지 스물 셋이나 있었다는 것도 눈이 튀어나올 만한 소식이었다. 부자의 반응에 수신은 멋쩍은지 뒷머리를 긁적었다. 그 행동까지 전생의 미즈키와 쏙 닮았다.

“아니, 그 뭐냐. 다른 신들이랑 달리 우리는 좀 특이한 편이라서. 익사자 중 가장 생존의지가 강한 자가 신력을 이어서 수신이 돼. 그러다 보니 생전에 성질이 고약했거나 이기적이었던 자가 계속 수신 자리를 이어받아서, 수신은 인성파탄자라는 선입견이 생겼다더라고.”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라고 키타로는 속으로 대꾸했다. 전대 수신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빌려가 쌓인 빚만 현재 가치로 무려 10만 엔이다. 고작 50엔 100엔이 아닌데도, 채무자인 주제에 녀석은 감히 자신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며 딱 세 번 찾아온 키타로를 위협하고 미즈키를 삼켰다. 그럼 그날 집어삼켜진 자 중에 미즈키 씨가 가장 살고 싶어했구나. 그래서 미즈키 씨의 영혼이 수신의 자리를 이어받았구나. 다른 난봉꾼이 아닌 미즈키가 자리를 물려받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왜 그때 희생된 사람이 미즈키여야 했냐는 울분이 몰려왔다. 쓰디쓴 약을 삼키듯 키타로는 단전에서 스물거리는 꺼림찍한 감정을 삼켰다.

“그대는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이였으니까….”

감동에 젖은 눈알아버지가 실수로 의미심장한 말을 흘렸다. 수신이 바로 무슨 소리냐고 물었으나, 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말을 바꾸었다. 수신은 수상해하면서도 곧이곧대로 아버지의 말을 믿고는 마을 입구를 가리키며 둘에게 명령했다.

“알았지? 그러니까 깨끗하게 치워 줘. 옥경을 얻어야지 않겠어?”

얄밉고 건방진 성격도, 역시 어디 가지 않았다.


마을 안쪽은 억울하게 수해로 죽은 사람들의 원망이 빼곡하게 묻어 있었다. 미즈키가 그 원한을 주어 깨끗한 물로 환원해 물줄기로 돌려보내는 사이 키타로는 머리카락과 영모 조끼를 동원해 건물 외벽이나 거리로 튀어나온 생필품, 나무 등을 옮겼다. 짐을 양손에 한가득 올리고 지나가는 키타로를 보고 양심의 가책을 받았는지 미즈키가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밀었으나, 키타로는 거뜬하다며 상냥하게 거절했다. 사실은 아직 미즈키의 모습을 한 수신을 똑바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며 장하고 미안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줄 것 같은데, 그릇만 똑같을 뿐 내용물은 비어버린 미즈키는 더 이상 자신을 다정하고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는다. 그것을 아직 키타로는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다.

한낮에 시작한 청소는 해가 저물 때 즈음이 되어서 끝났다. 수신은 내일 마저 하자며 키타로와 눈알을 불러 해안으로 돌아갔다. 해안가를 따라 위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거대한 절벽이 하나 있었다. 그 안으로 계속 조각난 파도가 들이치고 있었다. 미즈키는 능훅하게 바위를 타고 가다가 키타로와 눈알을 돌아보며 멈추었다. 게다를 신은 발은 바위를 타기에 적합해 보이지 않았고 실제로 키타로는 몇 번 씩이나 물에 젖어 미끄럽고 울퉁불퉁한 바위 위에서 휘청거렸다. 키타로가 제 바로 뒤까지 따라왔을 때, 수신은 손을 내밀어 그를 낚아챘다. 한손은 등허리를, 다른 한 손은 오금을 받쳐 들고 미즈키는 쭈그려 앉아 눈알을 제 어깨 위로 올렸다. 미즈키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키타로는 바로 시선을 돌리면서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

“무슨 소리야. 너 휘청거리는 거 내가 다 봤다.”

수신도 제가 왜 이 어린 유령족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지 딱 잘라 설명할 수 없어 일부로 무신경하게 대꾸했다. 수신은 아량이 넓은 이가 아니다. 거래는 언제나 깐깐하게 따져서 체결했으며 물 요괴나 바다에 사는 인간 외에는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그런데 왜 오늘 처음 본 이 요괴가 자꾸 눈에 거슬리는 걸까. 마치 손가락 끝에 파고든 가시처럼 따끔거려서 거듭 시선을 두게 된다. 나이 든 갓파나 인어에게 진지하게 상담을 신청해봤자 ‘우리 수신님이 드디어 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호들갑을 떨 게 뻔하니 수신은 끙 앓는 소리만 한 번 내고 해식동굴로 들어갔다.

파도가 계속 절벽에 부딪혀 흉터를 내고, 그 흉터 안으로 끊임없이 바닷물이 철썩이면 암벽이 점차 깎여 세로로 길쭉하고 좁은 구멍이 생긴다. 인간은 그런 지형을 해식동굴이라 하며 이따금 구경을 하러 모였다. 이곳 역시 어촌 마을이 번성했을 때는 심심치 않게 관광객이 모이던 동굴이었으나 모두가 떠난 지금은 맞이해주는 이 없이 버려져 있을 뿐이다.

어촌의 비극적인 소식을 뒤늦게 접한 수신은 이곳을 거처로 삼아 해가 저물 때마다 돌아와 몸을 뉘였다. 신이고 요괴이니 잠을 청하거나 쉴 필요가 없음에도 수신은 인간일 적의 습관을 담습했다. 전대 수신들은 어땠을지 모르나 요괴들의 반응을 보아 자신이 유별난 타입인 듯하다.

생의 의지가 강하면 언젠가 기억을 되찾는다는데, 이 자리를 물려받은지 어언 50년이 되어가는데도 수신은 여전히 전생의 기억이 나지 않아 갑갑했다. 한편으로는 이대로 다음 수신이 태어날 때까지 기억을 찾지 않았으면 한다. 만일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달리 최악의 인간이었다면 그 시절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기에.

동굴 안은 좁고 어두워 요괴의 시력이 아니면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울퉁불퉁한 동굴 속에서 그나마 평평한 자리를 골라 앉거나 누웠다. 일을 시켜놓고 찬 바닥에 재워서 미안하네, 염치를 아는 수신은 물풀을 엮어 만든 이불을 가져와 자리에 깔아주었다. 게게게 하우스에서 쓰는 지푸라기나 들풀을 엮어 만든 이불만큼 푹신하진 않지만 그래도 바닥가에서 추위를 물리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철썩, 쏴아아, 쿠우우, 요란한 파도 소리가 정적을 가득 메운 탓일까, 키타로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수신이 입을 다물어버렸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눈알아버지가 이를 알아채고 수신을 불렀으나, 그는 물소리에 묻혀 못 들은 척 입구 쪽을 바라보며 휘유, 휘파람을 불었다. 잠시 후 갈매기가 날아와 살이 오른 굴과 물고기 등을 가득 잡아왔다. 수신은 그것을 생으로 거리낌없이 삼켰다가 부자를 보고 머쓱하게 웃었다.

“미안. 여기는 물가라 불이 없어.”

“그래도 상관 없네. 유령족의 위장을 앝보지 말게나.”

키타로는 입맛이 없다며 굴을 마다하고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등을 보고 누운 아이를 보고 수신은 그 폭실한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이성이 제지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손을 들어 키타로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것이다. 오늘 처음 만난 뭍요괴에게 이렇게 정을 붙여버릴 줄이야. 혹시 나는 금방 마음을 열어버리는 성격인가.

수신은 남은 굴을 눈알아버지에게 주었다. 우습게도 눈알 주제에 야무지게 치아도 달려 있는지 눈알은 아주 작은 조각으로 굴을 뜯어먹었다. 이렇게 맛있는 굴을 대접받을 줄 몰랐다며 좋아하는 그를 보니 자신도 같이 실소를 흘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상하다, 이렇게 허물 없이 가까워지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이 부자를 보고 있으면 애틋한 그리움이 밀물처럼 속절없이 몰려왔다. 마치 잊어버린 단꿈에 젖어 눈물을 흘리고 싶어지는 기분.

어렵사리 수신은 입술을 뗐다.

“눈알···이라고 부르면 되나? 너는 오래 살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들었겠지?”

“암. 이몸은 도쿠가와가 에도에 막부를 세우는 모습도 보았단 말이지.”

“그러면 그만큼 발도 넓었을 테고.”

수신은 성격에 맞지 않게 말을 질질 끌었다. 이게 뭐라고 가슴이 떨리고 손에 땀이 차는지. 스스로의 한심함에 수신이 혀를 차는 줄도 모르고 눈알은 태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자랑을 했다.

“물론일세. 이몸을 모르는 요괴는 이 열도 어디에도 없다네. 인어도 내 친구지.”

“그거야 대단한데. 아무튼 잘 됐어. 이번에는 이쪽이 부탁하고 싶은 게 있거든.”

“흐음?”

수신의 부탁에 구미가 당겼는지 눈알이 이쪽을 바라본다. 저 앵두처럼 빨간 눈을 보고 있으면 꼭 누군가가 떠오를 듯 싶다. 하지만 결국 벚나무 아래 흐릿한 인영일 뿐, 그 상은 제대로 맺히지 않고 금방 흐트러져버린다. 꼭 누군가가 던진 돌멩이가 물웅덩이에 떨어져 그 위로 비친 하늘이 흔들리듯이.

바싹 마른 입안을 한 번 축이고서야 수신이 본론을 꺼냈다.

“내 기억을 찾아줘.”

수신의 부탁은 간단명료했다. 그의 전생 기억을 찾아달라. 수신은 그 말을 한 뒤 부끄러운지 계속 말을 빙빙 돌렸다. 다른 이들은 이쯤에 전생의 기억을 찾는다는데 나는 아직도 이름 외에는 기억나는 게 없다. 딱히 일하는 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그런 것뿐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만일 내 기억을 찾아주거나 아는 이를 소개시켜준다면 수신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창을 한 번 정도, 아니 두 번 정도 빌려줄 수 있다.

말을 마친 수신은 긴장되는 얼굴로 눈알아버지를 바라봣다. 눈알아버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의 조바심도 강해졌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의 요괴와 아는 사이라고 했지. 혹시 전생의 나나 전대와 안 좋은 인연으로 맺어져 있어서 싫다고 하면 어쩌지? 그가 거절한다면 수신은 영영 기억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도 50년 간 살면서 이런저런 요괴를 만나봤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자신을 처음 본다고 답하기만 했다. 겨우 찾은 단서는 친구인 카와우소를 만나러 온 카마이타치가 시큰둥하게 해준 말이 전부였다.

“그냥 유령족에게 의뢰를 넣지 그래? 게게게의 키타로라는 녀석은 요괴와 인간의 공존을 원한다면서 이쪽과 저쪽의 부탁을 들어준다는데.”

“게게게의 키타로?”

발음이 낯설지가 않다. 이전에도 자주 불러봤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혀가 굴러가며 뱉어지는 이름이 이상했다. 카마이타치는 짐을 마저 싸면서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녀석들, 예전에는 인간에게 신세를 졌다고 들은 것 같기도? 어라, 너 설마 요괴가 아니라 인간이었던 거 아니야?”

생각해봐, 수신은 그 녀석이 집어삼킨 것 중 생존의지가 가장 강한 것이 계승하는 방식이니까 인간이어도 무리가 아니지. 말을 마친 카마이타치는 수면을 흔들고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그때부터 수신은 제 정체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요괴가 아니라 인간이었던 걸까. 그래서 다른 요괴들이 처음 보는 얼굴이라고 하는 걸까. 그런데 그렇다면 키타로에게 물어도 모른다고 하지 않을까.

그러나 처음 얼굴을 보자마자 수신은 확신을 했다. 우리는 서로 아는 사이다. 왜냐하면 어린 유령족을 보자마자 껴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며, 그들 역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한 상대와 재회한 것처럼 얼굴을 굳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만 기뻐하는 관계면 어떡하지. 수신은 소매 안에서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눈알아버지의 떨어지지 않는 허락을 기다렸다. 마침내 굴을 다 먹은 눈알아버지가 조개 껍데기를 내려놓으면서 무겁게 말했다.

“…구태여 찾을 필요 없네.”

“그, 그 말은….”

역시 나는 글러먹은 녀석이었나. 수신이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구니 눈알이 그의 어깨 위로 올라와 뺨을 두드렸다. 시선을 돌리자 눈알이 비밀을 이야기하듯 다정하게 속삭였다.

자네 기억의 반절은, 내가 가지고 있으니.


셋이 힘을 합치니 폐어촌은 금방 복구가 되었다. 하얗게 정화된 혼들은 날아가며 고맙다고 손을 흔들었다. 키타로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다음 수신을 향해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저도 약속을 지켰으니, 당신도 약속을 지켜야죠.”

“그래, 옥경 말이지?”

수신은 서운해하는 기색 없이 허공에 손짓헀다. 기모노의 소맷자락에서 떨어져 나온 물방울이 손바닥 위에 뭉쳤다. 둥글게 뭉친 물이 벗겨지면서 낡은 청동거울이 그의 손에 떨어졌다. 뒤편에 파도 무늬가 새겨진 청동거울을 키타로에게 건네면서 수신이 물었다.

“사용법은 알고 있으려나?”

“새벽 이슬로 앞면을 닦은 다음 비추고자 하는 대상 앞에 촛불을 두고 비추면 돼요.”

“알고 있네.”

수신은 눈썹을 팔자로 내리면서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아버지가 가르쳐 주어서 그 정도는 알고 있다고 키타로는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그냥 모른다고 거짓말을 할 걸 그랬나, 그랬으면 당신이랑 같이 있을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늘어났을 텐데. 그러나 키타로는 자신을 키운 양아버지처럼 거짓말이 서툴렀다. 떨어지지 않는 키타로의 발걸음을 재촉한 사람은 야박하게도 눈알아버지였다.

“그러면 얼른 가자꾸나 키타로. 그 아이가 기다리고 있을 게야.”

“네. 그러면 잘,”

키타로는 잘 있으라고 인사하려다가 급히 말을 정정했다.

“다음에, 또 봐요.”

방금까지 풀죽어 있던 수신이 그 한마디에 환하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래, 너도 몸 성히 잘 지내고.”

길지 않은 밤, 눈알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수신은 그들을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 키타로는 자신의 품을 떠나간 아이이며 그에게는 수신으로서 보살펴야 하는 자와 해야 하는 과업들이 있었으므로. 눈알 역시 수신과 미즈키는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할 거 같다며 기다리기로 했다. 대신 키타로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자신도 도와주겠다고. 아버지들은 담배 한 개비에 약속을 걸었고 그때는 미처 마무리짓지 못한 이별에 매듭을 지었다. 아마도 곧 키타로 역시 미즈키와 작별하게 되겠지. 그렇다면 그 순간을 한없이 미뤄두는 대신 그날을 받아들이기 위해 기다리는 쪽이 더 나으리라.

“많이 컸구나….”

수신의 중얼거림은 바닷바람에 묻혀 미련없이 바닷가를 떠나는 키타로에게 닿지 않았다. 그러나 그 뿌듯함과 섭섭함은 언젠가 키타로에게 닿으리라. 수신 역시 홀가분하게 걸음을 옮겨 물속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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