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치미즈] 너그러운 승낙

글 쓰는 곳 by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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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거절

본디 인간이라는 생물은 다 이런 것인가. 게게로는 자신의 품에서 연신 기침을 해대며 피를 쏟아내고 있는 남자의 등을 계속 쓸어내리며 생각한다. 알고 지내는 인간이라 봤자 기껏해야 눈앞에 있는 남자 한 명이 전부인데 어찌 인간에 대해 논할 수 있겠는가. 이러다 숨이 먼저 넘어가는 것은 아닌지 싶던 남자는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찐득하게 고인 검은 핏덩이를 내뱉고서야 겨우 기침을 멈추었다. 코끝에 불쾌한 잔향이 맴돈다. 게게로는 힘없이 주저앉는 남자의 몸을 자신의 품 안에 편히 기댈 수 있게 해주었다. 다리가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쉬이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고집 센 남자가 너무나도 쉽게 품에 기대어오는 것이 무척이나 기꺼우면서도 한없이 슬프다. 거의 혼절하다시피 잠이 든 남자를 더욱 세게 끌어안은 게게로는 남자 몰래 눈물을 삼킨다. 그래, 그뿐이다. 명명할 수 없이 가슴 속에서 들끓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는 아내 다음으로 그가 처음이다. 그리고 아마 마지막이겠지. 사랑스러우면서도 밉다. 고집을 꺾어주지 않는 남자가 미우면서도 그답다는 말이 절로 나와 결국 그런 면모까지 모두 다 사랑스럽다고 느낄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로구나. 그것을 너는 잘도 해 왔어.’

게게로는 먼저 저승으로 돌아간 아내를 떠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엉망이 되어버린 남자의 입가를 조심스럽게 닦아준 다음 남자의 몸을 제 아들이 있는 방까지 옮겨주었다. 생기라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창백한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무척이나 고요하다. 어느새 눈을 뜬 건지 가만히 누워있던 아이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게게로는 아이를 안아 올린다. 아이는 마치 남자를 그저 내버려 두지 말라는 듯, 무엇이라도 해보라는 듯 잔뜩 찡그린 얼굴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버지의 얼굴 여기저기를 두드렸다.

“그렇지…. 나도 미즈키를 잃기는 싫구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제아무리 고집이 세더라도 남자는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 한들 그것을 억지로 꺾는 것 따위, 게게로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래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게게로도 당연히 남자를 잃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남자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그의 뜻을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인간으로 죽고 싶어, 게게로.’

그것이 남자의 바람이라면, 게게로는 사랑하는 이의 소망을, 그것을 이루어줄 수밖에 없으니까.

 


 

몸도 성치 않은데 그냥 집에 있어 주면 안 되겠냐는 게게로의 말에 미즈키가 오늘이 마지막이라며 미소짓는다. 마지막이라는 뜻은 오늘이 직장을 나가는 마지막 날이라는 뜻으로, 오전에 정식으로 퇴직을 하게 되면 오늘 하루는 바삐 돌아다녀야 했다. 가지고 있는 것들이 그리 많지는 않아도 정리해야 할 것들이 있으니까. 하루에 몇 시간이나 걸어 다녀도 멀쩡했던 몸은 겨우 이십 분 거리에 있는 은행에 가는 것조차도 버거워했다. 가는 길에 몇 번을 멈추어 서 길가에서 숨을 골랐는지 세어보려다 포기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담배다. 하루라도 더 오래 살려면 피우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피우고 있다.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니까.

“…아, 죄송합니다.”

겨우 발걸음을 떼자마자 앞에서 걸어오던 사람을 보지 못하고 살짝 부딪친 미즈키가 사과를 건네며 고개를 든 순간, 그는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시커먼 덩어리와 시선이 마주쳤다는 확신이 들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미즈키의 온몸을 훑어내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것 앞에 모든 것이 까발려지는 느낌이 들어 몹시도 불쾌한 감각에 절로 숨통이 조여든다. 이것은, 인간이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금방이라도 또 무언가를 토해낼 것만 같던 미즈키는 필사적으로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길거리에서 갑자기 피를 토해내도 민폐다. 겨우 뱉어내는 것은 막았지만 코 밑으로 무언가가 걸쭉하게 흘러내리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미즈키는 정장 소매로 대충 코피를 닦아내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것은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겨우겨우 은행에 도착한 미즈키는 창구의 점원이 서둘러 달려오는 것을 보며 쓰게 웃었다. 괜찮으십니까? 그 질문에 미즈키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괜찮지 않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기에.

 

현금이 가득 들어있는 서류 가방이 제법 묵직하다. 이 정도 돈이면 두 사람도 제법 오래도록 쓸 수 있으리라. 키타로에게 개구리의 눈알과 같이 정서적으로 무리인 것들 대신 몸에 좋은 것들을 먹여주었으면 한다. 태어난 지 두 해가 지났지만 키타로는 여전히 갓난아기의 모습과 같다. 더 자라지 않는 키타로의 모습을 보고 혹시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기라도 한 건지 걱정하던 미즈키에게 게게로는 유령족은 장수족이니만큼 아주 느리게 자란다고 했다. 아마 100살이 지나도 인간으로 치면 겨우 10살 남짓의 모습일 것이라고. 그렇다면 어엿한 성인의 모습의 게게로는 도대체 몇 살이란 말인가. 차마 묻지는 못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무거웠던 발걸음이 제법 가볍다. 몸 상태가 좋아졌을 리는 없으니 그저 기분 탓이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게로와 키타로의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한결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미즈키는 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어떻게 죽게 될지는 그때 가봐야 알 수 있겠으나, 죽음 자체를 피할 수는 없다. 죽는 것이 두려운가 묻는다면 글쎄. 두려운지는 잘 모르겠다. 스스로 바란 적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 미즈키는 제 죽음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가. 어떤 생각을 하게 되고, 어떤 것을 느끼는가.

‘미즈키… 제발, 인간이기를 포기해주면 안 되겠는가?’

“……이런.”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하나뿐인 친구의 모습에 미즈키는 한숨을 삼킨다. 자신을 잃을 수 없다며 굵은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던 모습이 애처로웠다. 사랑스러웠고, 동시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죄책감이 들었다. 게게로에게 그런 감정을 들게 만든 것이. 미즈키는 그의 둘도 없는 인간 친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사랑스럽다거나 애틋한 감정은 하나뿐인 아내나 아들에게만 느껴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미즈키의 바람이다. 평생을 다 갚아도 모자란 죗값이다.

“미즈키.”

“게게로? 키타로도 왔구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마침 골목을 돌아보니 저 끝에 귀여운 아들을 안고 있는 게게로가 보였다. 어서 오라며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아아, 역시나. 그러지 말자, 그러면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억지로 삼켜야 했던 것들을 죄다 토해내게 만든다. 헛된 욕심이 자꾸만 고개를 쳐든다. 온갖 폼은 다 잡아놓고. 자신에게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하지만 감히 바라건대, 만약, 그래도 바라도 된다면.

너, 역시, 맛있는 냄새가, 난다.

“……미즈키!!”

미즈키는 순식간에 자신을 덮친 고통에 그대로 기도에 차오른 피를 뱉어낸다. 천천히 고개를 떨구니 그곳에는 자신의 배를 뚫고 나온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마치 남에게 일어난 것처럼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리 곧 죽을 거라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지만.

‘이렇게는, 아니지.’

강렬한 바람이 피부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곧이어 그야말로 현실과 동떨어진 소음이 난잡하게 귓가를 어지럽혔다.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진다. 당연하지만 게게로의 것은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는 비명보다는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그 순간 미즈키의 바람이 바뀐다. 그 비통한 울음소리에 바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쉼 없이 달린다. 다리를 멈추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하지만 달리는 것을 계속하는 것 또한 결국 죽음을 뜻한다. 결말은 같다. 미즈키는 끝없이 달리면서 외친다.

‘죽여줘! 나를 죽여줘!’

미즈키.

‘제발!’

제발.

‘나를.’

부탁하네.

‘나는…….’

죽지 말아주게.

“하… 으, 허윽…!”

번쩍 눈을 뜬 미즈키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분명 같은 꿈일 텐데 미묘하게 어딘가 다른 것 같다는 감각만이 피부를 타고 내려와 이내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뒤이어 정신을 차린 미즈키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를 낯선 곳이라는 걸 깨닫고 몸을 떨었지만, 뒤늦게 자신의 배 위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눈치채고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키타로…….”

다시는 못볼 줄 알았던 아들의 얼굴이다. 세상 모르게 곤히 자는 얼굴이 무척이나 평화롭기 그지없는, 귀여운 아들의 얼굴이다. 그런데 어딘지 어색해보인다 싶더니만, 키타로가 늘 입고 있던 선조의 영모로 짜인 조끼는 무슨 일인지 자신이 입고 있었다. 그것이 어찌하여 자신에게 입혀져 있는가. 짐작은 어렵지 않았으나, 생각을 다 마치기도 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는 장지문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키타로를 배 위에서 떨어트릴 뻔했다.

“미즈키! 자네 눈을 떴는가!”

“게, 게로…?”

분명 어마어마한 기세로 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방 안쪽으로 넘어온 것은 작고 앙증맞으며, 이제는 제법 그리운 모습이었다. 동그랗고 빨간 눈동자에 맨몸이 달린,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영락없이 이치에서 크게 벗어난 모습은 그야말로 요괴 그 자체. 폴짝폴짝 뛰어온 게게로이자 눈알 아버지인 그것은 서둘러 미즈키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너 왜 다시 눈알로…….”

“미안하네, 미안해. 미즈키, 정말로 미안하네…….”

“게게로.”

“자네의 바람을 이루어 줄 수 없게 되었다네. 나는 아직 준비되어있지 않았어. 아니, 평생을 가도 준비하지 못할 거야. 역시 자네를 잃는 것은 싫다네. 상상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어. 미즈키여, 이런 나를 용서해주게나.”

그는 미즈키가 무어라 말을 덧붙일 새도 없이 눈물과 함께 마음속에 한껏 고인 말들을 왈칵 뱉어내었다. 미즈키의 바람을 이루어주고 싶었다.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 없이, 인간으로서 죽고자 한다는 그의 절친한 벗의 바람을 이루어주고 싶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는 그의 생명이 바람 앞에 놓인 촛불과 같을 때 깨달았다. 미즈키여, 역시 나는 자네를 보내줄 수 없네. 자네에게 미움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게게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미즈키를 살리기로 했다. 살려야만 했다. 그래서 피를 주었다. 피를 주고, 살을 주었다.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었다. 겨우 되찾은 몸이 사라지더라도, 그를 살릴 수 있다면 몇십 번, 몇백 번이라도 버릴 수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깨달은 총명한 아이 또한 힘을 보탰다. 처음부터 응당 그랬어야 했다는 듯, 작은 아이는 쓰러져있는 또 다른 아버지에게 자신의 조끼를 입혀주었다.

“닷새나 눈을 뜨지 못했어. 혹시라도 내가 너무 늦지는 않았을지 매일 같이 후회했다네.”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통곡하며 꺼이꺼이 울고 있는 눈알을 바라보며 미즈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하하, 소리를 내어 웃는다.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무척이나 다정하고 상냥한 기운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은 네가 아니야. 나지. 정말로 너는 이런 나로 괜찮은 걸까. 그러나 미즈키는 구태여 그런 말을 하지 않기로 한다. 그런 말보다는 더욱 더 전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므로.

“살려줘서 고마워.”

“미즈키…….”

“게게로, 전에 내가 한 말은…… 그 뭐냐, 잊어버려.”

“자네가 한 말?”

게게로의 물음에 무언가 묘하게 멋쩍은 듯 시선을 피하고는 헛기침을 한 미즈키는 이내 부드럽게 그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역시 나는 너희와 오랫동안 함께 살고 싶어.”

자신의 말에 다시금 펑펑 눈물을 쏟아내는 게게로를 보며 미즈키는 다시금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런 몸으로 너무 울면 큰일 난다?


“그런데 미즈키여, 한 가지 미리 말해둘 것이 있는데.”

“뭐야, 갑자기.”

“그, 거울 보고 너무 놀라지는 말게나.”

게게로의 말이 무색하게 미즈키는 당장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다. 그러고는 조금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린다. 가뜩이나 나구라 마을에서 돌아온 이후로 훨씬 옅어지다 못해 푸른빛을 띠던 눈동자 색이 변했다. 그것도 하필 상처가 있는 왼쪽이. 이래서야 어디 일본인이라고 할 수는 있나. 푸른색, 붉은색 짝짝이 눈을 하고 있는 일본인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나마 그 와중에 머리까지 하얘지지는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이거 너무 쓸데없이 화려해진 거 아니야?”

“나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네만. 나랑 같은 색이라네. 키타로도 그렇고.”

아, 어쩐지. 방금까지 낯설게만 느껴졌던 붉은 빛이 이제는 완전히 익숙한 빛깔로 보인다. 그래, 그 붉은색이로구나. 기껍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생각이 막 바뀌어도 되나? 인간으로 죽고 싶었다가 평생 요괴로 살고 싶어지고, 쓸데없이 화려한 색이라고 생각했다가 저 녀석들과 같은 붉은색이라고 하니 더없이 좋았다.

“그래, 잘 어울리네.”

역시 살아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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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토닥이는 두더지

    이럴수가 뒷편이 있었다니 게다가 해피엔딩이라니 너무..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ㅜㅜ 당장의 자신의 눈앞에 놓인 시한부인생에 다가오는 죽음까지 짊어지는것도 어려울텐데 게게로에 대한 마음까지 삼키고 둘을 위해서 착착준비했을 미즈키생각하니 너무 눈물이에요..사실은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놓을 결심까지 미즈키가 얼마나 고민했을지ㅜㅜ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나서 너무 다행입니다ㅜㅜㅜㅜ미즈키를 위해 몸도 내어준 게게로의 마음과도 언젠간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ㅜㅜㅜ 한쪽 눈에 게게로와 키타로의 눈색까지 담게되서 정말 유령족에게 사랑받는 사람인게 팍팍 티날것같은 점이 더욱 좋은것같아요 ㅇ //// ㅇ 너무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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