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족의 인간 (上)
게나조
유령족 <> 인간 상황 반전 AU
멸종위기에 놓인 인간 미즈키와 그를 어린 시절부터 키운 유령족 가족
길어서 끊어가기로 함…
“저, 저리 가!”
그것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날카롭게 외치며 손을 휘적였다. 이와코는 가만히 웅크려 앉아 그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얼마나 오랫동안 헤맸는지 옷은 끄트머리가 헤지고 찟긴데다 먼지투성이었다. 마찬가지로 흙먼지가 잔뜩 묻은 얼굴엔 보이지 않는 생채기가 자잘하게 나 있었다. 특히 왼쪽 눈에는 눈썹 위부터 시작해 눈 아래까지 세로로 길게 이어진 흉터가 있었다. 산을 타면서 자주 넘어졌는지 다리와 팔에 풀독이 오른 자국이나 멍자국이 간간히 보였다. 유령족은 하루종일 산을 타고 들판을 쏘다니고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도 저런 흉터가 남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건 인간이구나. 이와코는 직감했다. 과거에는 유령족과 함께 지상에서 살았지만 욕심을 부리다가 멸종해버린 생물체.
그것이 인간임을 이와코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이전에 인간을 만나본 적이 있었고, 조부에게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사실 이와코도 이번이 고작 세 번째였다. 그보다 오래 산 요괴들도 인간을 만난 건 열 번이 채 되지 않으니 그 정도면 많이 만나봤다 할 수 있다. 그들은 작은 충격에도 쉽게, 그리고 크게 다쳤다. 자가 치유 능력도 형편없었다. 뭔가를 잘못 먹거나 치료 시기를 놓치면 병에 걸려 평생 고통을 받았고 심하면 그것으로 죽기까지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을 만난 요괴 중 그 누구도 저렇게 작고 어린 개체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와코는 어린 인간을 마주했을 때 두려움이 앞섰다. 설마 내가 안았다가 갈비뼈 같은 게 부러지진 않겠지? 의외로 무는 힘이 세서 내 팔에 거대한 구멍을 낸다든가(솔직히 이건 전자에 비해 무섭지 않았다. 다쳐봤자 바로 치유하면 그만이니까). 이와코가 고민하는 사이 어린 인간은 카랑카랑하게 소리를 질렀다.
“가, 가라고! 그거 내가 안 훔쳤다니까?!”
“훔치다니?”
대체 어째서 저런 착각을 하는 걸까. 이와코는 그게 궁금해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아무래도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마을에서 무언가가 도난을 당한 모양이다. 혹시 요괴들이 저 어린 인간을 범인으로 지목해서 쫓기고 있는 걸까? 설마 팔다리에 난 멍은 요괴에게 맞아서 생긴 걸까. 이렇게 작고 약한데 때리다니, 너무하네. 이와코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이와코는 인간이 좋았다. 늙은 요괴들은 인간은 아둔하며 욕심만 많다고 했지만 이와코가 만난 인간은 베풂을 알고 남을 도와주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도 이와코를 처음 만났을 때는 경계하며 험한 말을 했지만, 안전하다는 걸 확인한 후로는 이와코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모두 오래 전에 죽었다. 고작 3, 40년 만에. 이상한 걸 먹지도 않고 상처가 나면 제때 치료를 받았는데도 점점 메말라가고 기력이 없어지더니 죽었다. 훌쩍이는 이와코에게 할머니는 말했다. 인간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백 년을 못 넘긴다고, 그러니 인간을 발견해도 너무 마음을 주지 말고 나무처럼 꽃처럼 무심하게 지나가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어떻게 그들을 못 본 척 지나갈 수 있는가. 이렇게 잔뜩 다치고 겁을 먹어 타인에게 마음을 주는 여유조차 갖지 못하는 이를.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번에는 어린 개체이니 좀 더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와코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인간이 더 놀라며 뒷걸음질쳤다.
“오, 오지 말라니까!”
“괜찮아. 네가 훔치지 않았다는 거 알아.”
“요, 요괴가 뭘 안다고.”
인간이 툭 던진 말이 가슴 아팠지만 이와코는 차분하게 그를 진정시켰다.
“내가 같이 범인을 찾아줄게. 그러면 이제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어때? 괜찮지?”
인간은 움직임을 멈추었지만 여전히 이와코를 신뢰하지 못하는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힘을 좀 써야겠는데. 이와코는 한숨을 푹 쉬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상한 요괴가 가는가 싶어 안심하던 것도 잠시, 인간은 이와코의 머리카락에 칭칭 감겨 허공에 떴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게 불안한지 인간은 으아악! 하면서 비명을 질렀다. 이와코는 그대로 인간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걱정 마. 내가 도와줄게.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
“쳇, 누가 인간의 말따위 듣는다고.”
많이 괴롭힘당한 모양이네. 이와코는 씁쓸했다. 사라져가는 종족을 같이 보호하지 못할망정 괴롭히다니. 일단은 저 인간을 씻기고 상처를 낫게 하는 게 먼저였다. 이와코는 남편이 기다리고 있을 오두막으로 향했다.
유령족의 인간
“그, 그대, 지금 뭘 데리고 온 건가?”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고양이와 놀아주고 있던 그는, 이와코가 데려온 인간을 보자마자 경악했다. 진흙탕에서 뒹굴다 온 새끼고양이마냥 꼬질꼬질한데다 눈에는 경계심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이건 뭐 겁 많은 새끼 고양이보다 손 대기 더 힘들겠구료. 그가 중얼거리자 이와코가 말했다.
“세상에, 요괴들이 이 어린 인간을 때리고 쫓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치료하려고 데려왔어요.”
“네가 왜?”
“굳이 그래야 하오?”
인간 아이와 남편이 동시에 말했다. 이와코가 당연하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하죠! 인간은 작은 상처에도 쉽게 병들어 죽는다고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안타깝잖아요.”
“뭐야, 동정하는 거야?”
이와코의 말에 인간이 이를 드러내며 화를 냈다. 이와코가 치료를 해주고 거둬준다는데 왜 저렇게 불만이 많은 건가. 인간이란 분수도 만족도 모르는 아둔한 생물이로고. 남편은 이와코의 머리카락에 칭칭 감겨 놓으라고 악을 쓰는 인간을 보고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빨리 두고 오라고 하고 싶지만 그의 아내는 이타적인데다 고집도 셌다. 인간을 구하기로 마음 먹었으니 옆에서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으리라. 그는 한숨을 쉬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대 뜻을 내 어찌 거스를까.”
“그러면 따뜻한 물을 좀 받아주겠어요? 일단 깨끗하게 씻은 다음에 약을 발라야 할 것 같아요.”
“약이라면 분부쿠챠가마너구리 요괴의 일종가 잘 알고 있을 테니, 잠깐 다녀오리다.”
“그래요, 부탁해요. 이봐! 가만히 있으렴!”
이와코가 인간을 내려놓고 머리카락을 풀자마자 그는 집 뒤쪽 수풀로 숨으려고 했다. 그러나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도로 이와코에게 잡히고 말았다. 인간은 길게 늘어난 팔을 보고 겁을 먹었는지 여우에게 잡힌 토끼처럼 덜덜 떨었다. 이와코는 늘어난 팔을 끌어당겨 인간을 안았다. 인간은 이와코에게 안겨 집으로 들어가면서 중얼거렸다.
“잡아먹힐 거야, 우리 할머니랑 아빠처럼 잡아먹힐 거야….”
“어머, 누가 잡아 먹는다고 그래.”
“너희가 그랬잖아!”
아이는 바락 소리를 지르면서도 무서운지 방금 전처럼 팔을 휘두르는 등 위협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와코는 다시 인간을 내려놓고 그의 어깨를 잡은 채 마주보며 앉았다. 여전히 잡혀 있는 탓인지 인간은 도망치지 않았지만 옷자락을 꾹 잡아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인간은 불안정한 목소리로 이와코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이, 인간들이 땅을 망쳤다고 죽, 죽였잖아. 우리 아버지도 할머니도, 죽었는데….”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아이는 어깨를 들썩이다가 눈물 한 방울을 보였다. 약해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금방 해진 소매로 눈을 닦았지만 눈가가 새빨개 운 자국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이런 사건을 볼 때마다 이와코는 인간과 요괴가 무엇이 다른 건지 알 수 없다는 회의감에 사로잡혔다. 요괴와 유령족을 몰아내고 몰살에 가까운 수준으로 몰아붙인 건 인간의 잘못이다. 그걸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과거의 인간이 저지른 잘못을, 멸종해하고 있는 지금의 인간에게 지울 수 있는 걸까. 그것을 이유로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인간을 죽이고 괴롭히는 건 나쁜 게 아닐까.
이와코는 여전히 부드럽게 인간의 어깨를 감싸안은 채, 단호한 목소리와 다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널 괴롭히는 요괴가 있으면, 내가 혼내줄게. 네 아버지와 할머니를 죽인 요괴도 꼭 벌을 받게 해줄게.”
그 말은 진심이었다. 잘못한 이는 요괴든 인간이든 벌을 받아야지. 이 어린 인간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긴 이라면 누구든지 따지지 않고 이자를 받아낼 것이다. 단순히 다친 인간이 걱정되어 데려온 마음은 이 인간을 보호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번졌다. 아무에게도 손을 내밀지 못해 가시를 세우고 경계하는 인간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싶었다. 누군가 물을지도 모른다. 그 인간이랑 무슨 관게이길래 그리도 싸고 도냐고. 그 말대로 이와코와 인간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지만, 글쎄. 원래 인연이라는 건 그렇게 시작하는 법 아닌가. 자신과 남편이 그러했듯.
인간은 이와코의 말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와코는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참고로 이건 빈말이 아니야. 우린 유령족이고, 요괴들 사이에서 우린 꽤 유명한 편이니까 누가 그랬는지 금방 알아낼 수 있어.”
“왜 굳이…?”
인간 역시 이와코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와코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그냥, 난 인간이 좋으니까.”
인간이 이상하단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마침 남편이 욕실에서 나왔다.
“여보~물 다 받았네.”
“아, 고마워요. 자, 빨리 씻으러 들어가자!”
“아, 잠깐.”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을 못 물어봤네. 인간은 이름이 있다며? 네 이름은 뭐야.”
굳이 이름이 있어야 하나, 남편이 중얼거렸다. 인간은 이와코와 남편의 눈치를 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미즈키야, 그냥 다들 미즈키라고 불렀어. 드디어 인간의 신뢰를 얻은 이와코는 기쁜 마음에 자신의 이름과 남편까지 알려주었다. 나는 이와코, 저 사람은 내 남편이야. 미즈키는 이상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물었다.
“네 남편은 이름이 없어?”
“이름이 구태여 필요한가. 왜 인간은 모든 존재에 이름을 붙여 분별하려 드는지 모르겠구먼.”
미즈키는 구시렁대는 남편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대뜸 말했다.
“그럼 게게로라고 불러도 돼?”
남편은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라는 표정으로 미즈키를 쳐다봤다. 남편의 은은한 당황과 달리 미즈키는 그러면 안 되냐는 낯빛이었고 이와코는 마음의 문을 빨리 열어준 인간에게 무한한 기쁨과 반가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남편이 대답하기 전에 이와코가 말했다.
“좋은데요! 안 그대로 다들 당신을 제멋대로 불러서 곤란한 참이었다고요. 이번에 당신도 이름을 갖는 건 어떤가요?”
“뭐…. 그대가 그러자고 하자면 나야 말릴 이유가 없지.”
남편, 게게로는 별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등을 돌렸다. 그래도 이름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게게로, 게게로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 미즈키는 이와코에게 잡혀 욕실로 끌려갔다. 알아서 씻을 수 있다는 미즈키와 씻겨 주겠다는 이와코가 한참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이 집도 꽤나 시끌벅적해지겠구나, 게게로는 고양이풀을 꺾어 흔들면서 생각했다.
유령족 부부가 어린 인간을 거두었다는 소문은 하루 만에 온 요괴 사이에 퍼졌다. 가장 먼저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러 온 이는 생쥐인간이었다. 생쥐 인간은 어떤 놈인지 얼굴 좀 보러 왔다며 으름장을 놓았다가 인간의 얼굴을 보자마자 당황했다. 알고 보니 생쥐인간이 앞장서서 미즈키를 괴롭힌 장본인이었다. 생쥐인간은 곧장 이와코의 머리카락에 매달리는 형벌을 받았다. 앞으로는 안 그러겠다는 약속을 네 번이나 받아내고 미즈키를 괴롭힌 공범 이름을 분 다음에야 생쥐인간은 풀려났다. 그 후로는 새로운 소문이 돌았다. 눈에 흉터가 있는 어린 인간을 건드리면 이와코의 분노를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스나카케바바는 이와코가 미즈키에게 정을 주는 것을 걱정했다. 인간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백 년을 못 넘긴다. 일찍 정을 떼는 게 좋을 거야. 이와코는 안다고 대답하면서도, 그래도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인간을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와코의 고집을 아는 스나카케바바는 금방 이와코를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대신 게게로를 불러다가 인간이 무엇인지 교육시켰다. 덕분에 게게로는 인간이 개구리 눈알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즈키는 자신을 데려온 이와코보다 제가 ‘게게로’라고 이름 붙인 남자가 더 신기했다. 이와코와 달리 그는 매일 느긋하게 집안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훌쩍 사라지곤 했다. 항상 느긋한 그는 온천욕을 좋아했고, 쏘다니지 않는 것치고 아는 요괴가 많았다. 특히 눈물이 많았으며 아내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랐다. 며칠 동안 두문불출하는 것은 물론이고, 툭하면 카라스텐구의 술을 들고 와 미즈키에게 먹이려고 했다. 인간은 성인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하자 그럼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했다가 이와코에게 혼난 건 덤이었다. 그 대화 덕에 미즈키는 요괴에게 성년의 개념이 없음을 깨달았다. 워낙 오래 살아서 어른의 기준이 없는 걸까. 그렇게 혼난 뒤 어느 날, 게게로는 툇마루에 앉아 빨래를 개우는 미즈키에게 물었다.
“그러면 인간은 언제 성년이라는 게 되는 건가?”
“스무 살이면 성년으로 인정하지? 나는 아직 일곱 살이니까…. 10년 넘게 남았네.”
“백 년을 못 살면서 태어난 지 스무 해가 넘어야 제대로 된 사람으로 인정하다니, 인간의 기준은 알 수 없구료.”
이렇게 할아버지 같은 말투를 쓰는 것도 신기했다. 하긴, 적어도 백 년 넘게 살았을 테니 할아버지가 맞나. 빨래를 개우는 미즈키를 한참 쳐다보더니 게게로가 다시 물었다.
“그대가 굳이 빨래를 개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네가 안 하고 있잖아.”
“내 아내에겐 경어를 쓰면서 나는 왜 그냥 부르는가?”
“존칭을 듣고 싶으면 위엄을 보여 봐. 그렇게 매일 한량처럼 있지 말고.”
“위엄을 보이는 건 어떤 건가?”
으음, 미즈키는 손을 멈추곤 허공을 쳐다봤다. 미즈키에게 있어 ‘위엄 있는 사람’이란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였다. 할머니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밤마다 미즈키를 끌어안고 옛날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버지는 과묵했지만 아들을 사랑하는 게 느껴졌다. 만약 제 아들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면 자신을 미끼로 삼아 모자가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유약하지만 강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후에도 살아남기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특히 미즈키를 우선으로 삼았다.
“일단 강하고, 다정하고, 내 주변 사람을 챙기는 사람?”
환청처럼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이 귓가에 울렸다. 나는 죽어도 너는 살아야 해. 꼭 저들을 피해서 살아 남아야 해. 주문을 외듯 밤마다 미즈키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던 그 말.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미즈키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어머니에게 묻고 싶어졌다. 우리가 왜 살아남아야 하나요.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해요.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나 막상 어머니와 헤어지고 외톨이가 되자 미즈키는 두려워졌다. 죽고 싶지 않아. 미즈키는 요괴에게 잡혀 죽고 싶지 않았다. 미즈키는 그때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걸릴 때마다 맞고 발에 채였지만 굴하지 않고 먹을거리를 찾아다녔다. 요괴가 잘 찾지 않는 늪지대에서 잠을 청하고 잡히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도 빨리 달렸다. 살고 싶기보단, 단지 죽고 싶지 않아서.
이제는 이와코와 게게로가 자신을 보호해주고 있지만, 미즈키는 종종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밤이 되면 요괴가 자신을 쫓아와 죽이는 꿈을 꾸었다. 요괴가 드나드는 이곳이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멀리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 안락함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계속 상상으로 끝났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편해도 되나? 아버지와 할머니를 죽인 요괴의 도움으로 살아남아도 나는 괜찮은 건가?
“헤어진 사람들을 생각하는 겐가.”
게게로가 다 꿰뚫어 봤다는 투로 말했다. 흥, 요괴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안다고. 미즈키는 무시하고 다시 빨래를 개웠다. 자신을 거둬준 이와코에게는 감사하지만, 아마 이 호의도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요괴는 변덕스러워서 언제 인간을 괴롭힐지 모르니까. 할머니가 들려준 옛날 이야기에서도 그랬다. 길을 잃은 인간에게 하룻밤 묵을 방을 내주었다가 밤에 간을 빼먹는다거나. 저 부부도 언제 본심을 드러낼지 모른다. 그떄까지 납작 엎드려서 저들의 호의를 이용하자. 그리고 날 버릴 낌새가 보이면 도망치자. 그때까지는 저들이 좋은 대로 내버려둬야지. 미즈키는 빨래를 쌓으면서 다짐했다. 절대 이들의 다정함에 넘어가지 말자. 현혹되지 말자.
“자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건 유감이네. 요괴들 중에도 어울려 살려 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는 놈들이 있다네. 모든 요괴를 대표할 순 없지만, 우리의 사과를 받아주겠나.”
미즈키는 이해할 수 없는 기분으로 게게로를 돌아봤다. 게게로는 여전히 툇마루에 앉아 한가롭게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 손길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도 모두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미즈키는 말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왜 요괴가 인간에게 사과를 하지. 요괴들 말을 들어보면 인간이 그들의 종족을 엄청나게 괴롭힌 거 같은데. 그러면 인간인 내가 반대로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용서를 받았는데도 미즈키는 찝찝함을 떨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인간에게 멸종당했으면서 인간을 구해준 이들을 등쳐먹으려고 한 건가?
“내 아내가 말했지. 인간은 짧은 수명만큼 생각이 짧아 어리석은 짓을 곧잘 하지만, 그만큼 제 어리석음을 빨리 깨우치고 반성하며 더 나아질 수 있는 종족이라고.”
게게로는 말을 잇더니 미즈키를 바라보며 은은하게 웃었다.
“그러니 자네는 분명 올바른 사람으로 자랄 수 있을 거야. 아픔을 알고 잘못을 아는 사람이니까.”
“흥, 입에 발린 말 해봤자 오늘은 당고 없어.”
“너무하구료….”
미즈키의 단호한 말에 게게로는 바로 우는 소리를 냈다. 아무튼 그렇게 알아. 냉정하게 말하면서도 미즈키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맞나? 저런 사람들을 이용할 대로 이용해 놓고, 나 혼자 잘 살겠다고 도망치는 게 맞나?
그래서 미즈키는 유령족 곁에 조금 더 머물기로 했다.
“미즈키여, 인간은 원래 다 자라도 이 정도인가?”
“네가 무식하게 큰 거라고, 임마.”
미즈키는 제 옆에 선 게게로를 올려다보면서 투덜댔다. 그래도 이 정도면 꽤 큰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대체 유령족은 왜 이렇게 큰 거야? 여전히 게게로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들어야 한다니. 심지어 이와코도 미즈키보다 조금 더 컸다. 요괴들에게 물어물어 키 크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건 다 해봤으나 열일곱 살 후로는 성장이 아예 멈추어버렸다. 젠장, 가오가 안 사는데. 괜히 의식하고 싶지 않아 미즈키는 게게로와 떨어져 앞장섰다. 미즈키~어딜 그리 바삐 가나. 게게로가 장난스럽게 물으면서 뒤따라왔다.
“따라오지 말라고!”
“설마 그건가? 성년이 되기 전에 온다는 반항기…!”
“뭐래 진짜.”
미즈키는 콧방귀를 뀌고는 저벅저벅 걸어갔다. 오늘 미즈키는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불어난 강 때문에 망가진 둑을 고치고, 누레온나가 보살피는 어린 요괴를 잠깐 보살펴야 했으며, 이와코에게 먹일 산딸기를 따야 했다. 다섯 달 전 임신한 이와코는 영 음식을 입에 대질 못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지렁이 국수도 못 먹고 헛구역질 하는 이와코 때문에 발만 동동 굴리던 중에 드디어 산딸기가 먹고 싶다고 오늘 아침에 말했다. 게게로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미즈키는 발 빠르게 산할아버지에게 달려가 산딸기가 나는 곳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 대가로 누레온나의 아이들을 보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따라와. 후딱 강둑 쌓고 놋페라포네 애들 봐준 다음에 산딸기 따러 가야 한다고. 산세가 험해서 해가 지면 올라가지 못한단 말야.”
“그러고 보니 미즈키는 밤눈이 어두웠지. 요괴는 그런 거 없다네.”
‘그래, 요괴라서 아~주 좋겠다.“
미즈키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강가로 향했다. 장마철에 접어들면서 미즈가미가 통제력을 잃자 강이 자주 불어났다. 그래도 바로 작년에 강둑을 보수해서 올해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엊그제 밤에 내린 비에 기어코 강이 범람해 강둑을 무너뜨리고 근처에 사는 요괴들의 집을 쓸어버렸다. 때문에 원치 않게 보수 공사가 결정된 것이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온 동네 요괴가 나와 강둑 보수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역시나 생쥐인간은 슬쩍 빠져서 응원만 하고 있었다. 미즈키와 게게로는 바로 다스키를 메고 작업에 들어갔다. 미즈키가 다가가자 반어인이 반가워하며 말을 걸었다.
“어머, 너 미즈키 맞지? 언제 그렇게 훌쩍 자랐대?”
“훌쩍은 무슨. 요 몇 년 동안 계속 컸는데.”
그런데도 아직 게게로보다 작고 말이지. 미즈키가 큰 바위를 들어올리며 말하자 옆에서 진흙을 모으던 수귀가 낄낄 웃었다.
“이와코가 새 식구라고 소개하고 다닌 게 고작 10년 전인데. 인물이 훤해졌네.”
“그러니까. 무슨 땅두더지 같은 몰골이었는데 말이지!”
그 말에 요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와하학 웃음을 터트렸다. 미즈키도 따라 어색하게 웃었다. 요괴 사이에서 10년을 사니 제게 살갑게 말을 붙이는 그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이전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동시에 유령족 부부가 없었다면 진작 이들에게 사냥당했을 거라 생각하면 등골을 타고 오한이 내달렸다. 좋든 싫든, 혹은 밉든, 그들은 미즈키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다. 미즈키가 요괴들과 잡담을 나누며 둑을 쌓는 사이 게게로는 혼자 반대편 강둑의 절반을 완성했다. 게게로가 그들을 돌아보며 잔소리했다.
“그대들, 그렇게 하면 해가 질 때까지 반의 반도 완성하지 못할 걸세.”
“네에, 군기반장님.”
“역시 유령족은 다르네. 벌써 저만큼 만들 줄이야.”
“그러고 보니 요즘 이와코는 어때? 입덧이 심하다고 들었는데.”
이와코의 입덧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게게로가 풀죽은 표정이 되었다. 아 저거 또 시작하겠다. 미즈키는 미래를 예측하고 최대한 게게로에게서 먼 자리로 옮겼다. 그의 예상대로 게게로는 냉큼 근처에 있던 나마하게의 어깨를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
“입덧이 심할 때는 무엇을 먹이면 되는 겐가? 개구리 눈알도 지렁이 국수도 안 먹으니 저러다 몸이 약해지면 어쩌나, 그게 제일 걱정이라네. 그뿐인가? 잠도 잘 못 자니 그렇게 아름답던 얼굴이 날이 갈수록 버석해지고 있다네. 아 그래도 내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저러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몸이 크게 상할까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네. 어떻게 하면 고통이 줄어들겠나?”
“아니, 그걸 내가 아나? 삼신할미에게 물어봐야지?”
“이러다 우리 아내가 잘못되면…, 나는…, 나는…!”
급기야 게게로는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기 시작했다. 매우 진지하고 심각한 상황임에도 요괴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어휴 또 시작이네. 생쥐인간이 투덜대면서 돌을 날랐다. 미즈키는 강둑을 쌓으면서 대답했다.
“그래도 오늘 산딸기가 먹고 싶다고 했잖아. 금방 나아지겠지. 이와코 씨는 강하니까.”
“그래! 그래서 일이 끝나자마자 산딸기를 잔뜩 따러 갈 걸세. 일 년 내내 먹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말이지!”
단순한 게게로는 그 성격만큼 금방 밝은 얼굴과 희망찬 목소리로 외쳤다. 3초 만에 기운을 되찾은 게게로는 그 기세로 순식간에 반대편 강둑을 복구했다. 역시 유령족이야, 요괴 백 명보다 훨씬 낫다니까. 게게로의 작업을 보면서 감탄하는 요괴 사이에서 미즈키는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저녀석, 진짜 대단한 놈이 맞긴 했구나. 일을 마친 게게로는 가볍게 손을 털면서 물밖으로 나갔다.
“그러면 나는 이만 산딸기를 따보러 가겠네. 미즈키여, 누레온나의 아이들을 부탁하겠네.”
“어, 네가 가보게?”
“당연한 거 아닌가. 아내를 보살피는 것이 남편의 임무인 법.”
게게로는 결연하게 말하고는 제자리에서 훌쩍 뛰어올랐다. 점처럼 보일 만큼 높이, 그리고 멀리 뛰어오른 게게로는 이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타누키가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 저리 팔불출이라서 원, 미즈키가 옆에서 게게로를 변호했다. 그래도 무심한 것보단 낫지 않아요? 그러자 타누키가 버럭 짜증을 냈다.
“안 좋아! 분명 제 새끼도 엄청 싸고 돌 텐데, 그러면 버릇이 나빠지지 않겠어? 안 그래도 손이 적은 유령족이라 다른 종족 놈들도 오냐오냐 할 텐데.”
“아…. 그거 때문에?”
“그래. 그러니까 미즈키 너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라. 혼내야 할 때는 혼내고.”
“음…. 지금도 잔소리는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미즈키는 바로 오늘 아침 그에게 퍼부은 다섯 가지 잔소리를 떠올렸다. 일어나면 이불 좀 개워라, 마당에서 헐벗고 반신욕 좀 하지 마라, 따라오지 마라, 이와코 씨 힘들게 자꾸 배에 귀 좀 대지 마라, 그만 빈둥거리고 빨리 일하러 가자…. 손을 꼽으며 잔소리 목록을 늘여놓는 미즈키를 보고 타누키가 측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애쓴다….”
“너라도 알아줘서 고맙다….”
미즈키가 한숨을 내쉬자 주변에 있던 다른 요괴들이 어깨를 한 번씩 토닥여 주었다.
강둑 보수는 해가 살짝 기울고 나서야 끝이 났다. 더 있으면 너무 더워서 작업이 안 되니 쉬었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모이기로 하고 요괴들은 제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일을 마친 미즈키는 누레온나의 집으로 향했다. 이번 홍수로 많은 동물과 요괴가 익사하면서 그 원혼으로부터 새로운 물귀신들이 나왔다. 누레온나는 그들이 진정한 요괴로 부활할 때까지 물귀신을 보살피는 역할을 맡았다. 늪에 있는 그의 오두막으로 향하자 누레온나가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고마워, 미즈키. 또 근처에서 홍수가 났대서, 원혼이 물귀신이 되어버리기 전에 거둬와야지.”
“장마철이라고 바쁘네.”
“말도 마. 게다가 요즘은 언제 비가 올지 몰라서 급하게 떠나야 할 때도 있고 그래.”
누레온나는 잠시 미즈키를 바라보다가 툭 한마디 던졌다.
“인간이 땅을 어지럽혀놔서 이렇게 된 거야. 알지?”
“네에, 알다마다요.”
그 인간이 멸종에 놓인 지 200년이 지나가고 있는데도 땅이 회복되려면 아직 200년이 더 남아 있다는 것도. 미즈키는 뒷말을 삼키고 누레온나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대여섯 명 쯤 되는 물귀신들이 앉아 있었다. 말이 좋아 물귀신이지, 아직 진짜 요괴는 아닌지라 물덩어리에 지나지 않은 생김새였다. 인간이다, 그들은 동시에 미즈키를 돌아보며 웅얼거렸다. 아마 인간이라고 수근대는 것이겠지. 미즈키는 담담하게 부엌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난 이와코 씨네 미즈키야. 누레온나가 돌아올 때까지 너희를 봐주기로 했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감자! 감자가 먹고 싶어!”
“소바가 당기는 걸.”
생전 사교성이 좋았던 녀석 둘이 팔(로 보이는 물기둥)을 번쩍 들면서 냉큼 말했다. 미즈키는 찬장을 뒤져 소바면과 감자를 찾았으나 문제가 있었다. 잘 씻은 감자를 종이로 감싸 아둥이에 던진 다음 냄비를 올려 물을 끓였다. 물기둥 하나가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미즈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소리 없이 물을 흘리며 등 뒤로 다가갔다. 소바를 익히는 데 정신이 팔린 미즈키는 물귀신이 등 뒤에 바짝 붙은 줄도 모르고 주변이 조금 서늘해졌다고 생각했다. 물귀신이 몸을 구부려 미즈키의 잘린 왼쪽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너 먹을 건데….”
미즈키는 까닭 모를 오한과 함께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물귀신이 미즈키의 다리를 붙잡아 거실로 끌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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