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삽니다

부자의 겨울옷

치치미즈

篝火 by 므루
54
1
0
  • 창작 요괴가 나옵니다

에츄우, 게게로는 요란하게 재채기를 한 후 코를 훌쩍였다. 이로리 앞에 앉아 신문을 읽던 미즈키는 집을 쩌렁하게 울리는 재채기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게게로의 머리카락을 빤히 바라보았다. 때 맞추어 털갈이하는 개나 고양이처럼 묘하게 결 좋은 은발이 더욱 풍성하고 빽빽하게 보인다. 하기사 이제 10월 말이니 겨울에 접어들 때지, 담담히 생각하는 미즈키의 시선이 이번에는 게게로의 옷에 머문다. 매일 입다 못해 피부 그 자체가 되어버린 유카타는 낡고 헤져서 이곳저곳이 해졌을 뿐만 아니라 옷감이 얇아지기도 했다. 게게로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 저 옷을 놓아주어야 할 때이다. 어떤 형태가 제일 편하려나, 저번에 사준 양복은 갑갑해 했으니 역시 안감이 들어간 기모노를 사주는 게 낫겠다. 하카마를 같이 입으면 방한은 더 잘 되겠지. 이 참에 넉넉하게 세 벌 정도 사줘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미즈키는 방 안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키타로를 돌아봤다. 키타로의 푸른 아동복은 윗옷은 긴소매지만 아래는 짜리몽땅한 반바지라 겨울에는 시리게 보인다. 심지어 맨발에 게다 차림이니 누가 본다면 이 겨울에 아이를 방치한다고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돌 게 뻔하다. 아무리 요괴라서 추위를 안 탄다고 해도 이건 좀 아니지. 미즈키는 게게로의 옷을 사는 겸 키타로에게도 겨울옷을 맞춰줘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즈키? 어디 가는 겐가?”

두꺼운 셔츠 위에 얇은 코트를 걸치는 미즈키를 보고 게게로가 그를 시선으로 좇으면서 물었다. 아버지의 물음에 키타로도 고개를 들고 양아버지를 빤히 바라봤다. 미즈키는 툇마루에 앉아 신발을 신으면서 두 사람에게 일렀다.

“아, 모처럼 주말이니까 너희 겨울 옷 좀 사러 가려고. 곧 있으면 겨울이잖아. 그 차림으로는 추울 테고.”

“요괴는 추위따위 타지 않으니 상관없네만.”

“나 참, 방금 전에 그렇게 재채기를 해놓고는.”

게게로를 가볍게 비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갑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는 사이 키타로가 쪼르르 달려와 게다를 신었다. 키타로, 같이 가려고? 미즈키가 허리를 낮추어 묻자 마당으로 내려온 키타로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정말로 옷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서 따라오는 게 아니라 미즈키랑 같이 있고 섶이서 그런 것이리라. 그래도 미즈키는 자신이 하자는 대로 포르르 따라오는 키타로가 고맙고 대견했다. 미즈키는 키타로를 양팔로 끌어안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무 작고 말랑해 매 순간 노심초사하던 갓난아기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안아들면 팔이 제법 묵직해진다. 제 양아들이 잘 먹고 자랐다는 증거이다. 이게 바로 아버지의 뿌듯함인가, 미즈키는 흐뭇한 미소를 띠고 게게로에게 물었다.

“넌 어떡할 거야, 게게로? 우리 아들은 나랑 같이 쇼핑하러 간다는데.”

“으윽….”

아내와 함께한 시간에 미즈키와 같이 산 시간까지 합쳐 도합 약 30년 가량을 인간 세상에서 지냈지만 게게로는 여전히 인간이 득실거리는 곳은 딱 질색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즈키, 키타로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기회를 날려버릴 만큼 고집스럽지도 않았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고, 곧 방에 들어갔다가 나온 게게로는 하오리와 타비를 손에 들고 있었다. 수싸움에서 이긴 미즈키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입고 빨리 와. 곧 있으면 사람 몰려서 힘들 거야.”

부자의 겨울옷

유령족 부자와 동거하기 전까지 의복은 미즈키에게 있어 큰 돈을 지출해야 할 만큼 중요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높은 직급이 아닌 이상 동기들은 모두 비슷한 가격대의 정장을 돌려 입었고, 미즈키 역시 넥타이만 사나흘에 한 번씩 다른 것으로 바꿀 뿐 사정은 비슷했다. 겨울엔 목도리에 장갑, 코트만 있으면 그럭저럭 버틸 만 했다. 잘 때는 유카타 한 장만 걸치고, 외출 시에는 항상 적당한 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이었다. 머리만 조금 신경 써서 다듬는다면 모를까 그 외의 치장은 미즈키에겐 아무래도 좋은 것들이었다. 그렇게 사치를 부릴 시간에 조금이라도 일을 하고 아껴서 비상금을 모으겠다는 마인드였다.

그러나 그들과 한집 살림을 시작하면서 의복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키타로에게는 언제나 더 좋은 것, 더 예쁜 것을 입히고 싶었다. 부모의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키타로가 좋아할 법한 아동복을 쇼윈도에서 발견하면 발길이 멈추었다. 그러면 가격표를 한 번 확인하고 제 통장의 잔고를 확인한 다음에, 저것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한 옷을 사주어야겠다고 다짐하며 퇴근하기를 반복했다.

게게로의 경우, 그는 단벌신사인가 의심이 갈 만큼 매일 같은 옷만 입었다. 마찬가지로 같은 옷을 여러 번 입는 미즈키가 보더라도 심하다 싶을 정도였다. 하루는새 옷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이것도 아직 입을 만 하다며 옷자락을 들어 보이는데, 밑단은 다 뜯어져서 속히 새 것이 필요해 보이는 상태였다. 다음날 미즈키는 퇴근길에 동네에 있는 옷가게를 겸하는 포목점에 들러 감색 유카타를 하나 사주었다. 비록 급하게 산 거라 게게로에게는 조금 짧았지만 그는 미즈키가 처음으로 사준 옷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동안 그 유카타만 입고 다녀 다시 미즈키의 호통을 들었다.

그렇게 계절이 지나가며 모인 부자의 옷은 어느 새 미즈키의 것을 뛰어넘을 만큼 많아졌다. 게게로가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미즈키는 이상하게 성에 차지 않았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사람처럼 미즈키는 그들에게 더 좋은 옷을 선물해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미즈키…. 따라나온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네만 이미 옷은 충분히 있지 않은가….”

“겨울 옷은 없잖아. 지난 겨울에 네가 우산 주러 회사까지 온 다음 날, 둉료들이 기겁했다니까. 어떻게 이렇게 추운데 외투도 없이 맨발로 다닐 수가 있느냐고.”

“그야 이 몸은 유령족이니까…. 유령족에게 그 정도 추위는 아무것도 아닐세.”

“보는 내가 추워서 그런다, 보는 인간인 내가.”

게게로의 구시렁거림을 막무가내로 봉쇄해버리고 미즈키는 시내 백화점으로 발을 내디뎠다. 도쿄 시가지에 있는 백화점만큼 으리으리하진 않지만(애초에 그곳은 미즈키의 봉급으로는 절대 무리였다) 그래도 동네 포목점보다 질이 좋은 옷을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할인행사를 하기에 그 무렵에 보다 싼 가격으로 물건을 건질 수 있다. 역시나 이번에도 겨울맞이 할인행사를 진행한다는 광고가 정문에 대자로 붙어 있었다. 미즈키는 날짜를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오늘은 첫째날도 마지막날도 아닌, 그 중간 애매한 날이다. 덕분에 사람은 많지 않겠다며 미즈키는 추운 날씨 탓에 상기된 얼굴로 웃었다. 게게로는 붉어진 미즈키의 볼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에게 끌려갔다. 뭘 넋을 놓고 있는 거야, 이쪽이야.

천장에 달린 거대한 샹들리에와 전구에서 나오는 강렬한 주홍빛에 게게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인간이 전기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인공적인 빛은 게게로에게 있어 독이나 다름없었다.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멀 것 같고 두통이 이는 것 같다. 게다가 백화점이라는 곳에 사람은 어찌나 많은지. 아주 잠깐이라도 손을 놓치면 미아가 될 것 같아 게게로는 필사적으로 미즈키의 손을 잡고 그를 따라 종종걸음을 쳤다. 들러붙지 마, 걷는 데 힘들잖아. 미즈키가 타박했지만 게게로는 더욱 더 힘을 주어 손을 잡았다. 그것을 인간세상이 익숙지 않은 요괴의 어리광이라고 생각했는지 미즈키는 가만히 웃기만 할 뿐이었다.

남성 의류는 3층, 아동복은 4층이다. 미즈키는 3층에 먼저 올라가 기모노 코너를 찾았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양복을 입는 시대이지만 다행히 기모노 매장은 없어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미즈키는 게게로를 기모노 매장 앞으로 데려가 말했다.

“자, 네가 원하는 걸로 골라봐.”

“이, 이건 너무 비싼 것 아닌가?”

“뭐 내 옷보다는 가격이 나가겠지만. 그래도 이왕 사는 거 튼튼하고 좋은 게 낫지 않겠냐.”

미즈키의 무심한 말에 게게로는 어깨가 축 처졌다. 나를 귀하게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미즈키, 그 반의 반만큼이라도 자네에게 신경을 쓰는 게 어떻겠나. 게게로는 몇 년 동안 입어 보풀이 일어나기 시작한 미즈키의 코트를 보면서 한숨을 삼키고 두 사람과 함께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무엇을 찾느냐는 직원의 말에 미즈키는 익숙하게 게게로를 가리키며 겨울용 기모노와 하카마를 사러 왔다고 대꾸했다. 직원이 게게로의 사이즈와 특별히 좋아하는 디자인을 묻는 동안 대답은 모두 미즈키가 담당했다. 게게로는 그저 한 발 뒤에서 팔짱을 끼고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방관하고 있었다.

곧 직원이 이 옷 저 옷을 들며 어떤 것이 마음에 드는지 물었다. 딱히 옷을 살 생각이 없는 게게로는 두어 번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으나, 직원이 쩔쩔매며 보여준 소색에 가까운 세 번째 기모노를 보고는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직접 옷을 받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던 게게로는 고개를 숙여 미즈키에게 속삭였다.

“혹시 여기에서 입어볼 수도 있나?”

“아, 안 맞을 수도 있으니까. 저기요, 혹시 피팅 가능할까요?”

이번에도 직원에게 직접 물어보는 건 미즈키의 담당이었다. 안내를 받고 탈의실로 들어간 게게로는 낡은 유카타를 벗고 새 기모노를 입어본 다음 탈의실 내부에 걸린 거울을 보았다. 미즈키가 여름에 자주 입는 줄무늬 셔츠와 비슷한 색상이 제게도 잘 맞는 듯하여 내심 마음에 들었다. 지금쯤 미즈키라면 ‘평소 입던 거랑 다른 색인데?’라며 게게로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게게로는 그 반응을 생각하며 후후, 웃었다.

탈의실에서 나온 게게로를 보고 미즈키는 솔직히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여태껏 청색 계열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흐릿한 무채색 계열도 생각보다 그와 잘 맞았다. 미즈키는 어쩐지 낯설어진 게게로의 모습에 볼이 빨개질 것 같았다. 역시 데리고 오길 잘했네, 다음에 또 살 일이 있으면 저런 색 계열도 고민해봐야겠다. 서둘러 마음을 고쳐먹고 미즈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뭐야, 잘 어울리잖아. 그게 마음에 들었어?”

“음, 꽤나 상등품인 것 같군. 걸리적거리는 것도 없고. 좋은 것으로 골라주어서 고맙네.”

“아, 아닙니다. 그게 마음에 드신다면 이건 어떠신가요?”

그러면서 직원은 냉큼 다음 기모노를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비슷한 색상에 갈색 체크무늬가 들어간 기모노였다. 눈을 깜빡이며 기모노를 보던 게게로는 으으음, 하면서 다시 그것도 유심히 살펴봤다. 그러고 보니 미즈키의 정장 중에 이것과 비슷한 무늬가 들어간 게 한 벌 있었지. 어쩐지 모든 옷을 미즈키 기준으로 고르고 있었지만 게게로는 자각하지 못했다. 게게로는 다시 새 옷을 들고 미즈키에게 쪼르르 달려가 물었다.

“이것도 입어봐도 되나?”

“되지, 그럼. 그리고 앞으로 나한테 일일이 묻지 마. 직원이 있잖아.”

“자네가 제일 편한 걸 어떡하란 말일세.”

게게로는 우는 소리를 내다가 도움을 주려고 직원이 있는 건데 계속 나한테만 말하면 저 분이 얼마나 무안하겠냐고 타박을 한참 들은 뒤 도로 탈의실로 들어갔다. 이번 기모노는 솔직히, 미즈키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게게로는 무늬가 들어간 옷이 잘 받지 않는 스타일인 모양이다. 그나마 입고 온 하오리를 걸치니 나아 보였다. 앞으로도 저 녀석한텐 절대 줄무늬 들어간 옷은 입히지 말아야겠다고 미즈키는 다짐했다.

겨우 두 벌 입어봤을 뿐인데도 게게로는 굉장히 지쳐 보였다. 이 녀석치고는 오랫동안 밖에 나와 있는데다 그 장소도 인간이 바글거리는 백화점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겨우 어르고 달래 검정색 기모노와 보라색 하오리도 입혀본 다음 미즈키는 결제를 하려다가 한 구석에 걸린 하카마를 보았다. 검정 바탕에 아래에는 소금을 뿌린 것처럼 하얀 잔무늬가 들어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하카마였다. 미즈키는 한참동안 하카마를 바라보다가 결제 중이던 직원에게 황급히 물었다.

“혹시 저 하카마는 얼마인가요?”

“저 하카마요? 지금 할인해서 50엔입니다.”

50엔이라…, 50엔이면 아동복 두 개를 구매할 수 있는 가격이다. 아쉽게도 다음을 기약하고 미즈키는 기모노 세 벌만 결제했다. 지갑이 반으로 줄었지만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이 옷으로 게게로 녀석이 조금 더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다면야. 묵직한 종이봉투를 들고 키타로는 게게로에게 맡긴 채 미즈키는 서슴없이 4층으로 올라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던 중 게게로가 물었다.

“그런데 미즈키. 자네 옷은 사지 않는 겐가?”

“나? 나야 항상 직장에 있는데 뭐…, 새로 맞출 필요가 있나?”

미즈키는 별 걸 다 묻는다는 투로 대꾸하고는 4층에 도착하자마자 미즈키는 키타로보다 들뜬 발걸음으로 바로 눈앞에 있는 매장으로 들어갔다. 미즈키, 우리 부자를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다만…, 게게로가 한숨을 쉬는 것도 모르고 미즈키는 멋진 로보트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면서 게게로를 재촉했다.

“어이, 게게로! 이거 봐봐, 너네 조끼랑 똑같은데?”

설렁대는 걸음으로 다가간 게게로는 미즈키가 가리킨 스웨터를 보고 덩달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노랑과 검정이 교차하는 가로 줄무늬 스웨터는 그의 말대로 영모 조끼와 닮은 꼴이었다. 이견 없이 아버지들은 빠르게 스웨터를 들고 직원에게 사이즈가 있는지 물어봤다. 아쉽게도 키타로에게 딱 맞는 사이즈는 없지만, 다른 것보다 사이즈가 크게 나온 옷이라는 말에 한 치수 더 작은 옷을 부탁하고 키타로에게 입혀봤다. 꼬물대며 옷을 입은 키타로를 보고 두 아버지는 다시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키타로는 아버지들이 자신을 놀리는 줄 알고 으으응, 하면서 성을 냈다. 우려와 달리 키타로에게 적당한 사이즈라 바로 결제까지 마치고 둘은 직원이 자기들을 수상하게 바라보는 것도 모르고 흐뭇하게 매장을 나왔다.

게게로와 달리 아직 어린 키타로는 옷 고르기에 협조적이지 않았다. 겨울 옷들은 두꺼워서 불편한지 입어보자고 사정해도 도리질을 치니 하나를 고르는 데도 꽤나 애를 먹었다. 게다가 아직 소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나이라 그런지 꼭 새빨간 색이나 샛노란 색같은 눈에 띄는 컬러를 고집해서 무채색파인 미즈키는 키타로가 고른 옷을 볼 때마다 당황했다. 키타로, 정말 그걸 입을 거야? 라고 물어보면 금방 성을 낼 것처럼 토라진 표정을 하니 달라는 대로 입혀보고 사는 수밖에 없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만. 미즈키는 키타로가 사고 싶다고 칭얼거리기 전에 핫핑크색 코트를 결제하면서 아들 몰래 식은땀을 닦았다.

양손 가득 종이봉투를 들고 미즈키는 환하게 웃으며 백화점을 나왔다. 외출한 김에 저녁도 먹고 갈까? 미즈키가 한 가게를 가리켰다. 라멘과 텐동을 판다는 간판을 보고 게게로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무덤덤한 미즈키가 오늘은 묘하게 소풍 온 어린아이처럼 들떠 보인다. 아마 두 사람의 옷을 잔뜩 사는 겸 오랜만에 나들이를 나와서 그런 거겠지. 게게로는 미즈키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가면서 키타로에게 소곤거렸다.

“키타로야, 조만간 우리도 미즈키에게 선물을 하나 주어야겠구나.”


“거미아낙 있는가?”

게게로는 크게 소리치며 온갖 포목으로 치장해 화려한 3층 기와집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사는 요괴 거미아낙은 제가 뽑은 실로 각종 비단과 옷을 만들어 요괴와 일부 인간에게 비싸게 팔아먹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 역시 게게로의 오랜 친우 중 하나, 아내와 게게로의 신혼복을 마련해준 요괴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번에도 제게는 보다 싼 가격으로 미즈키를 위한 의복을 지어줄 거라고 그는 확신했다.

몇십 년 만에 듣는 친구의 목소리에 놀랐을까, 2층에서 우당탕 소리가 나더니 거미아낙이 거의 굴러떨어지듯이 내려왔다. 어이구,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다급함이 느껴졌다. 곧 거미아낙은 고개를 들어 게게로를 쳐다봤다. 그는 안경을 치켜 세웠다가, 고쳐 썼다가, 눈을 비볐다가, 안경을 닦고 먼지를 후후 불어 털었다가, 몇 번 눈을 깜빡였다가, 그러고서야 제 눈앞에 있는 것이 십여 년 전에 소식이 끊어진 유령족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눈물을 글썽이며 여덟 다리를 활짝 벌렸다.

“세상에, 정말로 살아 있었군! 소문만 무성해서 미처 찾아갈 생각을 못했는데, 정말 살아 있었어!”

“후후, 그간 무탈히 잘 지냈나, 거미아낙.”

게게로는 다정하게 거미아낙을 안아 등을 쓸어주었다. 크흥, 거미아낙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고 눈물을 닦은 다음 주절거렸다.

“당연하지. 이와코가 사라졌다더니 그 다음에는 자네마저 실종되고, 여기에 있다니 저기에 있다니 소식만 들리니 내 어찌나 답답했는지 아나! 이렇게 잘 지내는 모습을 보내 안심이 다 되는군.”

“걱정 끼쳐서 미안하군. 미안하지만 오늘은 자네에게 긴히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일세.”

“암, 말만 하게나. 하루종일 공장을 돌려서라도 가장 고급스러운 옷으로 지어주겠네! 자네가 입을 옷인가?”

“음, 내가 아니라 같이 지내는 인간이 입을 옷이다만. 양복 한 벌과 기모노 한 벌, 이렇게 맞추어줄 수 있는가?”

게게로가 뜸을 들이며 말하자 거미아낙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역시 이와코가 죽고 인간과 같이 살고 있다는 소문은 여기까지 닿지 않았나. 게게로가 설명을 하려는데 거미아낙이 가만히 폭탄을 떨구었다.

“아, 그 후처에게 줄 옷인가 보군. 그런데 후처가 인간이었을 줄은 몰랐는데.”

“후처라니?”

당황하는 기색 없이 순수하게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게게로가 물어보자 거미아낙이 더 황당해하며 물었다.

“그 소문 못 들었나? 자네가 후처를 들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깔렸네.”

“그 후처가 미즈키라는 겐가? 하지만 우리는 그저 같이 키타로를 키우고 있는 사이일세. 내가 미즈키에게 잠시 신세를 지고 있지.”

낯빛 한 번 바꾸지 않고 태평하게 말하는 모습에 거미아낙은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릴 뻔했다. 보통은 그것을 반려나 동반자 사이라고 부른다네, 라고 대꾸하고 싶지만 게게로가 수긍할 거 같지 않아 거미아낙은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 인간, 신체 치수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있나?”

“어, 키는 한 이만하고, 허리랑 가슴팍은…, 이 정도 되나? 그럴 걸세. 그리고 허벅지는….”

게게로는 손으로 자신의 어깨 부근을 가리킨 다음, 누군가를 안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면서 양손을 움직여 미즈키의 신체를 가늠했다. 그 정도면 부부가 아닌 게 이상한 수준이다만, 거미아낙은 속으로 대꾸하면서 다시 물었다.

“그렇게 하면 정확한 수치를 몰라서 옷이 안 맞을 수 있는데, 혹시 그 사람 옷을 가져왔나? 아니면 나중에 그를 직접 데려오든가.”

“오, 옷을 가져올 생각을 미처 못 했군. 하지만 미즈키를 데려오는 건 곤란하네. 깜짝 선물이니까.”

그러면 다음에 다시 오겠네. 게게로는 웃으면서 거미아낙의 포목점을 떠났다. 허, 웃기는 양반일세. 거미아낙은 허탈하게 웃다가 뒤통수를 긁적이면서 들어갔다. 이왕 온 거 옷감 정도는 고르고 갈 것이지. 하여튼 유령족, 요령없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게게로는 사흘 뒤 미즈키의 옷을 몇 벌 들고 다시 나타났다. 그는 미즈키의 겨울 정장과 잠옷용 유카타를 각각 하나씩 가지고 와 거미아낙에게 보여주었다. 거미아낙이 옷의 치수를 확인하는 동안 게게로는 옆에서 참고해야 할 것들을 알려주었다. 미즈키는 줄무늬를 특히 좋아한다든가, 조금 헐렁하게 입는 편을 선호한다든가, 바지를 입으면 벨트를 어디까지 채우는지 등.

조언을 들으면서 거미아낙 역시 꼼꼼하게 질문했다. 주로 어떤 색의 옷을 입는지, 타비나 하오리도 맞출 것인지, 특별히 기피하는 옷감이 있는지 등. 그러나 게게로는 무엇 하나 명확하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미즈키는 옷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게게로가 그와 4년 동안 지내면서 알게 된 취향이라고는 줄무늬와 무채색 계열이라는 게 전부였다. 생각보다 미즈키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군, 게게로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지자 거미아낙이 남는 다리로 등을 토닥이면서 말했다.

“괜찮네, 인간과 요괴는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한두 가지 정도 있는 법이니까. 이 기회에 후처에 대해 알아가면 되지 뭐.”

“그러니까 미즈키는 내 후처 같은 게 아니라….”

“흥, 웃기는 소리. 옷을 직접 지어서 선물해주는데 고작 친우라고?”

거미아낙은 코웃음을 치면서 재단을 하겠다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게게로는 1층에서 오랫동안 거미아낙의 말을 곱씹었다. 친우라면 옷을 직접 지어 선물해주지 않는다고? 그런가, 그런가? 하지만 친우든 연인이든 반려든 소중하다면 뭐든 좋은 것을 쥐어주고 싶은 것 아닌가? 미즈키도 분명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 부자의 옷을 사준 것일 텐데. 게게로는 알쏭달쏭해하며 한참 동안 응접실 안을 맴돌았다.


맞춤복을 제작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게게로가 부탁한 미즈키의 새 겨울옷은 한 달이 거의 다 지나가고서야 완성이 되었다. 미즈키가 사준 겨울옷과 비슷한 유백색 천에 연지회색 하카마, 청록빛에 체크 무늬가 들어간 하오리가 한 쌍이었다. 다른 한 옷은 휴색 위에 적토색 세로 줄무늬가 들어간 정장 한 벌이었다. 여기에 거미아낙은 빳빳한 새 타비와 평소에 메고 다니는 것보다 좀 더 다홍색에 가까운 넥타이까지 넣어주었다. 자네와는 오래 알고 지냈으니, 서비스라고 생각하시게나. 거미아낙은 수많은 눈을 찡긋하면서 게게로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게게로는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포목점을 나왔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왔건만, 집에는 미즈키가 없었다. 벌써 초승달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데도 집에는 낙서를 하다 잠든 키타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게게로는 봉투를 미즈키의 방에 내려놓은 다음 키타로에게 다가갔다. 미즈키가 사준 노랑검정 스웨터를 입은 모습에 게게로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아닌 척해도 그 옷이 가장 마음에 들었나 보다. 게게로는 아들을 살살 흔들어 깨웠다. 아우, 아들이 오른쪽 눈을 끔뻑이면서 일어났다. 잘 잤니, 다정하게 물은 다음 게게로는 아들을 제 무릎 위에 앉히며 물었다.

“키타로야, 미즈키는 아직 안 왔는가?”

“미쥬…? 으응. 미쥬우?”

아버지의 물음에 키타로는 눈을 비비다 말고 이리저리 둘러보며 미즈키를 불렀다. 돌아오는 답이 없자 목소리에 울먹임이 섞이기 시작했다. 미쥬우…, 미쥬…. 한참 동안 어눌한 발음으로 양부를 찾던 키타로가 결국 울음을 와앙 터트려버렸다. 게게로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키타로를 안고 달래주었다. 쉬이, 아들아. 미즈키가 아무래도 오늘 늦나 보구나. 그러니 너무 울지 말자꾸나.

게게로는 거미아낙의 포목점을 찾아가기 전, 그러니까 사흘 전 미즈키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앞으로는 계속 밤 늦게 올 거야, 연말이 다가와서 할 일이 산더미거든. 그러니까, 봄이 오기 전에 이불에서 솜을 빼내는 것처럼 말이야. 미즈키는 아직 인간 회사에 익숙하지 않은 게게로를 위해 와타누키에 비유해 설명한 뒤 잽싸게 집을 나갔다. 그 결산이라는 게 아직도 끝나지 않은 듯하다. 고작 백 년도 채 못 사는 종족에게 왜 이렇게 할일이 많은 겐지. 게게로는 한숨을 쉬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일단은 키타로에게 밥을 차려줘야 한다.

키타로에게 밥을 먹이고 이불 위에 재운 지 두 시간이 지났음에도 미즈키는 소식이 없었다. 게게로는 툇마루에 앉아 하염없이 미즈키를 기다리다가 어느 새 짙어진 하늘을 보고 문득 불안해졌다. 설마, 오늘 길에 사악한 요괴에게 당한 건 아닐까? 게게로를 만난 후 미즈키는 요괴에게 쉽게 홀리고 이형이 꼬이는 체질이 되었으니 충분히 일 리 있는 가설이다. 더군다나 인간과 함께 사는 게게로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요괴도 있으니, 게게로에게 타격을 준다고 미즈키를 공격할 수도 있다.

게게로는 바로 게다를 불러 집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걸 생각 못하고 바보처럼 미즈키가 늦게 온다며 기다리고만 있었다. 게게로는 도로로 나가 미즈키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골목을 두어 개 돌고 큰 길로 나와 숨을 골랐다. 요괴는 인간처럼 쉽게 지치지 않는다. 그러니 이 가쁜 숨은 단순히 힘들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다. 미즈키가 혹여 잘못되었을까봐, 영영 자신이 손쓸 수도 없는 곳으로 사라졌을까봐. 게게로는 흔들리는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어라, 게게로?”

바로 그 자리에, 평소의 귀갓길 위에 미즈키가 서 있었다. 잔뜩 혹사당하고 왔는지 눈가에 거뭇한 기운을 달고 있는 미즈키는 게게로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미동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는 그에게 바로 달려갔다. 아무리 봐도 게게로의 상태가 이상하다. 자신을 보고도 아무 말도 없고, 마치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다 눈에 초점도 제대로 맞지 않는다.

설마, 키타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내가 연말에 월말 결산이 겹쳤다고 자꾸 늦게 귀가하고 소홀히 한 사이에 안 좋은 사건이라도 일어난 걸까. 심장이 쿵 떨어질 만큼 겁이 나 미즈키는 게게로의 양 어깨를 잡고 사납게 흔들면서 외쳤다.

“게게로! 괜찮아?!”

“…미즈키.”

“그래, 나야. 미즈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지? 설마 키타로가 이상한 요괴에게 납치되었다든가…, 우왁! 무거워!”

갑자기 쏟아지는 게게로의 상체를 버티지 못하고 미즈키가 휘청거리며 뒷걸음질쳤다. 게게로는 으스러질 정도로 미즈키를 끌어안고 어깨에 제 이마를 부볐다. 역시 평소보다 더 서늘하지 않은가. 미즈키는 계속 제게온몸을 부비는 게게로를 어르고 달래 떼여냈다. 가까이에서 보니 눈가도 새빨갛다. 그걸 알아차린 순간 게게로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미즈키는 당황해서 다시 그를 달랬다.

“지, 진정해! 다 괜찮을 테니까, 일단 무슨 일인지….”

“자네가, 다른 요괴한테, 히끅, 잡혀간 줄 알고….”

“…허어?!”

게게로의 울음 속에 작게 들리는 말을 들은 미즈키는 푸하학,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쪽은 심각했다고 울상이 된 게게로가 성을 내고 있지만 그 반응이 귀여운 것을 어떡하랴. 귀가가 늦음을 알고는 있지만 소식이 없으니 겁이 났나 보다. 미즈키는 게게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 달래듯이 게게로를 진정시켰다.

“그랬어, 내가 늦어도 너무 늦어서 걱정이 되었어~.”

“미즈키, 나는 키타로가 아닐세….”

“그래요, 덩치 큰 키타로 씨.”

이쪽의 속도 모르고 자신을 놀리는 데 여념이 없는 미즈키에게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아무 일도 없었다니 몸에서 힘이 쭉 빠질 만큼 안심이 되기도 했다. 겨우 미즈키에게서 떨어진 게게로는 미즈키가 새로 사준 하오리의 소매가 젖을 때까지 눈가를 벅벅 문질러 닦으며 중얼거렸다.

“기껏 자네의 새 옷이 완성되어 한아름 들고 왔는데…. 하마터면 상복이 될 뻔하지 않았는가.”

어느 새 염력으로 집안에 있던 종이봉투를 가져온 게게로가 그것을 미즈키에게 내밀었다. 상복이라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미즈키는 딴지를 걸려다가, 꽤나 묵직한 느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에게 서류가방을 맡기고 종이가방 안을 들추어 보자 근사한 양복과 기모노가 각각 한 벌씩 들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으로 옷감을 만져보니 부들부들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최소 50엔, 아니 70엔도 할 거 같은데…. 대체 어디에서 이런 돈이 났나 싶어 고개를 드니 게게로는 피부가 쓸려서 새빨개진 눈으로 아이처럼 순수하게 웃었다.

“자네에게도 새 겨울옷을 선물해주고 싶어 아는 요괴에게 부탁했다네. 어서 돌아가서 한 번 입어보게나. 분명 자네 마음에 쏙 들 게야.”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져도 될까. 내가 구한 사람보다, 구하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은데. 나는 이렇게 행복한 일상과 사랑을 누려도 되는 걸까. 천천히 내려가는 고개와 가려진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었는지 게게로는 너른 품으로 미즈키를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자, 어서 돌아가세나. 키타로가 자네를 기다리고 있어.”

“…응.”

정말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구나, 나는. 미즈키는 따뜻하다못해 현실감이 없기까지 한 행복에 겨우 미소를 지으면서 그를 따라 집으로 돌아갔다. 세 사람의 조금 작지만 온기가 넘치는 집으로. 게게로의 애정이 담뿍 담긴 새 겨울옷을 양손에 가득 든 채.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