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치미즈] 사랑을 하는 남자

이 맞선, 나는 인정할 수 없다네!

글 쓰는 곳 by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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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키군, 자네 잠깐 나 좀 보고 가게나.”

6시 정각, 칼같이 퇴근 준비를 마친 미즈키가 사무실을 떠나는 것보다 먼저 누군가 그의 발걸음을 강제로 멈추게 한다. 미즈키는 속으로 혀를 차고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방을 든 채로 자신을 부른 부장을 따라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간다. 그런 미즈키를 흘긋 바라본 남자는 그의 앞에 종이가 끼워져 있는 파일을 내민다. 미즈키는 그것이 무엇이냐는 물음 대신 먼저 그것을 양쪽으로 펼쳐보고는 탁, 소리가 나도록 바닥에 내려놓았다.

“못합니다.”

“그냥 나가주기만 하면 돼. 그러다 눈이 맞으면 겸사겸사 혼례까지 치르는 거고. 자네도 그럴 나이가 됐지 않은가.”

뭐라는 거야, 이 망할 영감탱이가. 미즈키는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주먹을 있는 힘껏 쥔다. 파일 안쪽에는 어떤 여성의 사진과 함께 남자의 거래처로 보이는 회사에 대한 정보가 간단히 적혀져있었다. 남자의 말마따나 자신이 ‘그럴 나이’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가족도 아닌 회사 상사의 영업에 이용되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어 말도 안 나온다.

“아시잖아요, 저한테 아들이 있다는 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리 전해뒀다네. 그래도 괜찮다고 하더군. 얼마나 좋은가. 게다가 그 아이는 자네의 친아들도 아니고 친구의 아이라며.”

남자의 말에 곧바로 ‘아뇨, 그 아이는 제 아이입니다.’ 라고 반박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였지만 미즈키는 어디까지나 그 아이에게 있어서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이다. 미즈키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나, 그 사실을 다른 누군가에게 들을 때마다 속이 쓰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부탁 좀 하겠네, 미즈키군.”

부탁은 얼어 죽을 부탁. 속으로 혀를 차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이것은 엄연히 명령이다. 상사의 횡포이며, 부하 직원에게 너무나도 불리한 처사이다. 그러나 미즈키는 결국 그 횡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런 불합리한 대우를 받더라도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는 직장이 있어야만 했으므로.


 

“다녀왔습니다.”

“어서 오게, 미즈키.”

집에 오는 길 내내 무거웠던 어깨가 집에 발을 들이자마자 가벼워진다. 다녀왔다는 인사에 어서 오라며 말해줄 이들이 있다는 것이, 자신을 반겨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나 행복한 일인 줄은 몰랐다. 가방을 내려놓은 미즈키가 얼른 손을 씻고는 자리에 누워있는 아이에게 다가가자,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는 반갑다는 듯 무어라 옹알이를 하며 작은 손을 뻗는다. 아직 제대로 말을 할 줄 모르는 아이여서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마냥 좋았다. 미즈키는 자신의 손가락을 아이의 손에 쥐어주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잘 있었어? 키타로.”

미즈키의 말에 키타로가 마치 그의 말에 대답을 하듯 손가락을 쥐고 있던 손을 흔든다. 그 모습에 다시금 웃음을 터트리는 미즈키를 보며 근처 아이의 머리맡에 서 있던 이 또한 웃는다. 겨우 주먹만 한 크기 정도 될까. 새빨간 빛을 띠고 있는 눈알에 사람의 몸이 덜렁 붙어있는 모습이 참으로 기괴하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형의 존재가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즈키는 그것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 익숙하다는 듯 손을 뻗어 살며시 검지로 눈알을 톡톡 두드려본다.

“키타로 보느라 고생했어, 게게로.”

“제 아이를 아비가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고생은 내가 아니라 자네가 더 했겠지. 오늘도 수고했네, 미즈키.”

“아무렴, 말도 마. 그 망할 부장놈…….”

넥타이를 풀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미즈키의 팔꿈치에 식탁 위에 있던 가방이 절묘하게 부딪쳐 그대로 가방이 넘어진다. 평소와는 다르게 제대로 닫혀있지 않던 가방 속에서 검은 표지의 파일이 툭 하고 튀어나오는 것을 발견한 ‘게게로’라 불린 눈알이 가볍게 식탁 위로 뛰어올라 파일을 열어본다.

“이, 이것은…….”

“아아, 짜증나서 급하게 쑤셔놓고 나왔더니 제대로 안 잠겨있었구나.”

“미즈키여, 이것은 대체…….”

“나보고 선을 보라고 하더군, 그 아가씨와.”

그 아가씨는 무슨 죄야? 서른 후반의 늙은 아저씨와 맞선이라니. 하여튼 부장놈. 그렇게 그 쪽 사람을 잃기 싫었으면 자기가 선을 보던가. 왜 나한테 보래? 미즈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유카타 한 장만을 덜렁 들고 욕실로 향한다. 식탁 위에 꽁꽁 얼어붙은 눈알을 내버려두고서는.

‘미즈키가 맞선을? 이 아가씨와…? 차, 참으로 참해보이는 아가씨이긴 하다만……. 아니, 그보다 미즈키에게는 나, 나도 있고? 무엇보다 우리 사랑스러운 키타로가 있지 않은가!’

게게로는 어찌할 줄 모르며 두 손을 꽉 쥐고는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폴짝, 식탁 위에서 뛰어내린 눈알의 주위로 스멀스멀 하얀 연기가 모이더니 이내 새하얀 인간의 팔 다리가 연기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다. 어느새 완전한 인간의 형태로 모습을 바꾼 게게로는 단숨에 미즈키가 있는 욕실로 달려가 문을 벌컥 열고는 소리친다.

“미즈키, 자네 이거 바람일세!!”

“아익, 깜짝이야! 우와, 뭐 하는 거야! 야! 게게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던 미즈키는 갑자기 나타난 새하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요괴-의 등장에 마치 봉변을 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짜 가는 것이냐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다리를 붙잡고 울며불며 고집을 피우는, 저보다 한참이나 큰 남자를 떼어놓고 오는 것에 벌써부터 하루치 체력을 다 쓴 기분이다. 미즈키는 무겁디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움직이기 시작한 전철의 창문을 통해 시시각각 바뀌는 풍경을 멍하니 눈에 담는다.

‘게게로 녀석,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다 큰 어른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하는 말이라고는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도 하지 않을 법한 생떼다. 자기가 있는데 대놓고 바람을 피우냐는 거라느니, 키타로에게는 다른 보호자는 필요 없다느니…….

‘애초에 바람을 피운다는 게 무슨 소리냐니까? 웃기지도 않아, 그 녀석. ……사람 속도 모르고.’

게게로가 생난리를 피우지 않더라도 애초에 미즈키는 그 맞선에 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 키타로와 함께 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몇 시간이나 빼앗기게 되는 것이 매우, 몹시도, 불만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설령 회사에서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맞선을 받아들일 생각은 정말, 전혀, 눈곱만큼도 없었다.

얼핏 자신의 모습이 창문에 비친다. 서른 후반의 나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곧 영면에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노인마냥 희게 변해버린 머리카락, 첫인상을 제법 사납게 만들어버리는 눈가의 선명한 흉터, 남들과는 다르게 움푹 패여 있는 귀. 보라, 이 얼마나 볼썽사나운 남자의 모습인지. 꽃다운 나이에 이런 얼굴의 아저씨를 들이미는 게 말이 되나. 염치가 있어야지.

마침 내려할 역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열린 문 밖으로 나선다. 얼굴도 얼굴이지만 무엇보다 미즈키에게는 키타로가 있다. 미혼이지만 애가 딸린 남자. 누가 좋다고 하겠어. 핑계를 대기에도 좋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미즈키는 생각보다 더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어 절로 고개를 든다. 우뚝 솟은 호텔의 입구에 서서 저 멀리 하늘 높이 솟은 호텔의 끝을 가늠하려다 포기한다. 부장이 왜 이 거래처 사람을 놓치기 싫어했는지 아주 조금은 이해가 갔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호텔 안, 레스토랑에 안내받아 도착한 곳에는 이미 상대방이 먼저 앉아있었다. 미즈키는 서둘러 시계를 확인해본다. 시계는 약속시간보다 1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모양인지 제 쪽을 돌아보는 여성에게 미즈키가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제가 더 일찍 나와 있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제가 너무 빨리 도착했죠?”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자리에 앉은 두 사람에게 직원이 다가와 음식을 가져다드리겠다는 말을 건넨다. 상대는 이런 곳이 제법 익숙했던 모양인지 이런저런 요구사항을 직원에게 건넨다.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즈키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할지 고민한다. 상대방이 부담스럽지 않게, 편하게 거절의 말을 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가. 그러나 미즈키가 입을 열기도 전, 무언가 결의에 찬 단단한 표정으로 맞은편의 여성이 먼저 말을 꺼낸다.

“미즈키 씨, 저를 차주시겠어요?”

“……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은가…….”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아버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나뿐인 유령족의 후예는 꿈나라를 자유로이 여행 중이다. 미즈키가 집을 나가자마자 키타로를 데리고 요괴의 숲을 찾은 게게로는 연신 숲을 빙글빙글 돌며 중얼거린다. 미즈키가 가버렸다. 누군지도 모르는 처자와의 선 자리에. 만약, 만에 하나라도 미즈키가 그 처자와 눈이 맞기라도 한다면 나는, 키타로는 어찌해야한단 말인가.

‘아아, 나는 참으로 한심하구나.’

사랑을 할 줄 모른다 말했던 이에게 언젠가 자네에게도 그런 운명의 사람이 찾아올 거라 몹시도 자신 있게 말했던 유령족 남자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한 때에는 게게로도 진심으로 바랐다. 미즈키에게 진정으로 사모하는 사람이 생기기를. 그 사람에게 마음껏 사랑받으며 행복하기를. 마치 자신과 이와코가 그랬던 것처럼. 그 땐 정말 그러기를 소망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제는. 게게로는 미즈키의 ‘운명의 사람’이 자신이었으면 한다.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채우지 않기를 바란다. 미즈키와 함께한지도 벌써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불로불사에 가까운 유령족에게 있어서 8년은 그저 찰나와도 같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미즈키와 함께 보낸 8년은 매일이 반짝이고 소중해서. 마치 아주 오래전 아내와 함께 있었을 때 이후로 다시 느껴보는, 다시 느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 아름다움에 목이 멜 정도였다. 게게로는 어렵지 않게 자신이 미즈키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다. 자신을, 아내를, 아들을 구해준 단 하나뿐인 벗. 너무나도 소중해 만에 하나라도 그가 잘못될까봐 두려워 감히 손도 대어본 적 없는 친애하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인 사람.

그 마음이 점점 더 커져만 가서 그 마음에 대해 꺼내볼 생각조차 못하고 있던 것에 대한 후회가 뒤늦게 몰려온다. 싫다, 싫구나. 미즈키를 빼앗기는 것이 너무나도 싫다. 그런 게게로를 보며 두 명의 요괴가 동시에 혀를 찬다. 살다 살다 그 대단하신 유령족 나리가 저렇게 멍청한 꼬락서니를 할 줄이야. 보다 못한 모래할멈이 꽥 소리를 지른다.

“청승 그만 떨고 그럴 시간에 이리 오기나 해!”

냅다 소맷자락을 잡아 자신을 질질 끌고 가는 모래할멈을 보며 게게로는 얌전히 끌려가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아, 그래서 그런…….”

“아버지도 참. 몇 번이나 싫다고 말씀 드렸는데. 이렇게 훌륭한 분의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어서 어쩌죠?”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저야말로 이렇게 흉하게 생긴데다가 애까지 딸려있는 남자가 나오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어떻게 드려야할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미즈키 씨도 참. 농담을 잘하시네요. 미즈키 씨가 흉하게 생기신 거라면 저희 아버지는 범죄자처럼 생기셨게요?”

“네? 아하하, 재밌는 말씀을 하시네요.”

와인으로 살며시 목을 축인 미즈키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빙긋 미소 지었다. 다짜고짜 자신을 차달라는 말을 건네는 맞선 상대를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고 말았다. 그녀는 앞뒤 없이 얘기를 꺼낸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과를 하고는 제대로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해주었다. 이미 그녀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다는 것. 현재 그 사람이 외국에 나가 유학중인 틈을 타서, 상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아버지가 멋대로 선 자리를 주선한 것. 그럼에도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 미즈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아아, 그래. 이 사람 마치 게게로 같구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마음껏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의 게게로와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표정을 짓게 되는 걸까. 보는 사람마저도 기분 좋아지는 그런, 표정을. 그래서일까. 평소라면 절대 그럴 일이 없었을 텐데 툭, 하고 담고 있던 것을 꺼내놓고 싶었던 까닭이.

“저도, 그런 사람이 있는데요…….”

“어머! 정말요?”

“그…… 아마, 저 혼자만의 마음일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저 막연히 상대방이 먼저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은 만큼, 그 진심에 응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한편으로는 그녀가 조금 부러워서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눈물이 많아요. 주사도 우는 건데, 그냥 평소에도 툭하면 잘 울어요. 웃을 때는 조금 맹해 보이는 얼굴도 꽤 귀엽다고 생각하게 된지가 제법 된 것 같습니다. 전혀 그렇게 안 생겼는데 말투는 어찌나 늙은이 말투인지. 가끔 웃길 때가 있어요. 아, 그 친구는 목욕을 좋아합니다. 좋은 탕에 몸을 담그는 일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다더군요. 그래서 저도 한 번 해봤는데요. ……하하, 좋았습니다.”

“미즈키 씨, 정말로 그 분을 좋아하시는군요.”

엄청 보기 좋은 얼굴을 하고 있어요. 그 말에 뒤늦게 쑥스러움이 몰려온 미즈키는 한두 번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금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그래서…… 최대한 티가 안 나게 하려고요.”

“혼자만의 생각이라서?”

“네. 그 친구가 불편할까봐요.”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는 상대가 돌연 사랑을 고백해오는 것만큼 당황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더군다나 게게로에게는 아름다운 아내도 있다. 그러니 미즈키는 그의 ‘친구 자리’를 지키기로 한다. 그것만큼은 양보할 생각이 없다.

“……그래도, 좋아합니다.”

“―실례하겠네만.”

훌쩍 건네진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미즈키의 얼굴에 한 순간 경악이 스친다. 한 쌍의 남녀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어느 새인가 다가온 장신의 남성이 무거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서 있다. 미즈키는 남자의 정체에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은 기분이 든다.

“게, 게게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은데 갑자기 끼어들어 정말로 송구하네만, 내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이 있어서 그러니 양해를 부탁드리네, 아가씨.”

“아, 네…….”


평소 즐겨 입던 낡은 푸른색 유카타가 아닌 검은색에 황금색 실로 용이 수놓아진 유카타에 그의 눈 색 만큼이나 짙은 붉은색 하오리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 퍽 낯설다. 부스스하고 가벼워 보이는 머리도 깔끔하게 빗어 넘긴 모양새가 세련된 느낌을 준다. 평소의 모습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멋을 낸 게게로의 모습에 미즈키는 할 말을 잃었다. 그 모습은 뭐냐고, 네가 여기 왜 있는 거냐고. 묻고 싶은 말들이 산더미인데 그보다 먼저 혹시라도 그가 제 말을 들었을까봐. 평생 감추고자 했던 마음을 들켰을까봐, 그 생각이 무겁게 마음을 짓누른다.

“아가씨, 미즈키는 말일세. 아주 성실해. 정의롭고 착한 사내지. 내가 봐왔던 그 어떤 사람보다도 좋은 사람이라네. 아이도 잘 돌볼 줄 알아. 머리도 좋아서 계산도 빠르고 요리도 할 줄 알지. 그리고 이 정도면 아주 미남 아닌가?”

“후후, 네.”

“미즈키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우리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거야. 아내의 마지막도 미즈키가 지켜주었지. 나는 우는 것 밖에는 할 줄 몰랐는데. 우리 아이, 이름은 키타로라고 하는데 미즈키가 키워줘서 그런지 닮았어. 총명하고 착해.”

“너 도대체 무슨 말을…….”

“그래서, 그래서 말이야. 미즈키가 없으면 안 된다네.”

“…….”

“아가씨가 정말 좋은 사람처럼 보여서 더더욱 미안하네만, 키타로도 키타로고……. 아니, 내가. 다른 것은 다 핑계네. 이 내가 미즈키가 없으면 안 돼. 이 녀석의 곁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 싫다네. 빼앗기고 싶지 않아. 누구보다도 아껴주고 싶어. 사랑해주고 싶다네. 그러니 이 자리는 없었던 걸로 해주면 안 되겠는가?”

게게로의 말에 그녀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미즈키를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이 얼굴을 붉히고 있는 그를 보며 그녀가 말한다.

“혼자만의 마음이 아닌 모양이에요, 미즈키 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미즈키의 앞에 게게로는 어쩔 줄을 몰라 식은땀을 흘리며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미즈키, 하고 말이라도 붙여보려고 하면 인정사정없이 쏘아보는 눈빛이 너무나도 차갑고 날카로워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미, 미안하네. 하지만…… 하지만 미즈키여, 아까 한 말은 전부 다…… 내 진심이야.”

그것만은, 부디 없었던 일로 해주지 말게나. 게게로의 말에 미즈키는 한숨을 내뱉으려다 삼킨다. 아, 정말. 사람 속도 모르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한껏 쪼그라든 어깨가 퍽 애처로워 보인다. 흡사 비오는 날 쫄딱 젖은 강아지 꼴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참 웃기게도 미워보이지가 않다. 방금 저의 인생에 해체 방법이 없는 거대한 폭탄을 냅다 던진 남자인데.

“게게로.”

“으, 응.”

“너 이제 어쩔 거냐?”

“……뭘, 말인가?”

“덕분에 나는 이제 앞으로 평생 장가도 못 가게 됐는데?”

“내, 내가 행복하게 해주겠네.”

“풉.”

게게로의 대답에 미즈키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큰 웃음을 터트린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호쾌한지. 너 설마 이와코 씨한테도 그렇게 프러포즈 한 건 아니지? 그 말에 입을 일자로 꾹 다문 게게로를 보며 미즈키는 눈꼬리에 눈물까지 매달아가며 웃는다.

“아하하, 그래, 알았어. 그렇게 해.”

“음?”

“좋다고.”

자신을 보며 활짝 웃고 있는 미즈키를 보며 게게로는 무심코, 그러나 아주 행복한 마음으로 생각한다. 미즈키여,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자는 그렇게 웃지 않는다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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