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반점의 봄

게나조

篝火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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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협 AU

  • 사파의 검성 게게로, 이와코 + 게게로의 친우 미즈키 + 미즈키의 양자 겸 점소이 키타로

  • 폭력 묘사 주의

영웅호걸이 기세를 떨치는 난세에 가게 사장과 점소이로 살기란 여간 고단한 일이 아니다. 천마만 없애면 태평성대가 된다더니, 영웅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세를 불린 깡패들과, 전쟁에서 돌아온 이들이 명성만을 믿고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세상은 더욱 살기 팍팍해졌다. 덕분에 민초는 천마가 설치던 시절과 별 다를 바 없이 몸살을 앓고 있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당연히 가게 점소이와 주방장이었다. 가게에서 밥 먹다가 지들끼리 치고박아 살림살이를 박살내는 건 일상이고, 길거리에서 쌈박질을 해 행인을 겁주고, 피칠갑을 한 채 자리에 앉아서 위압감을 조성해 다른 손님이 못 들어오게 훼방놓고, 툭하면 점소이의 멱살을 붙잡고 소리를 지른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힘이 없는 사람들은 외부인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믿지 못하며 제 몸 하나 건사하기 위해 가슴팍에 날붙이를 하나씩 품고 다니니, 인심은 메마르고 모두가 날을 바짝 세워 사소한 일에도 생사결을 시전한다. 나를 건드리지 마라, 건드리는 순간 네 가슴팍에 칼을 꽂아버릴 거다. 이것이 바로 시대정신이니 날이 갈수록 모두가 불행해지고 서로를 믿지 못했다.

딱 예외인 곳이 있으니, 바로 곡창이라는 동네의 수목반점이라는 국수집이다. 이곳에서는 정파의 신검도 사파의 문주도 세가의 도련님이며 가주도 모두 고개를 숙이고 주인과 점소이를 깍듯이 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처럼――.

“이 개자식아!”

주인장의 도끼가 날아오기 때문이다.

바로 눈앞에 꽂힌 도끼를 보고 팽가의 도련님이 힉, 소리를 내며 침을 삼켰다. 방금 전까지 점소이를 붙잡고 윽박지르다가 결국 변을 당했다. 왼쪽 눈을 머리카락으로 가린 소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제가 목소리를 낮추라고 했잖아요.”

세가의 사람을 대한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형식만 갖춘 존칭이었다. 이런 하대 아닌 하대가 익숙하지 않은 도련님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도끼를 수거하러 온 사장, 미즈키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 이,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이런 무엄한 짓을 하는 거냐?”

“누구긴요, 손님이시죠. 여기서는 황제 폐하고 원시천존이고 다~그냥 손님입니다요. 그, 냥, 손, 님.”

미즈키는 일부로 ‘그냥손님’을 끊어 말하며 강조했다. 그는 태연하게 도끼를 뽑아들곤 어깨에 걸치면서 팽 도령을 내려다봤다. 분명 무공을 익힌 자가 아닐 텐데도 느껴지는 위압감이 장군감이었다. 아니, 고작 국수가게 사장 주제에 무슨 깡따구가…. 팽 도령은 재빨리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팽가의 사람이 모욕을 당했으니, 다들 겁에 질려서 숨을 참고 있을 것이다. 분명 그래야 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간을 내놓고 다니는지 아무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한 손님은 사장을 향해 국수가 언제 나오냐고 성화를 부리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내 고기국수 언제 나오냐고! 기다리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어 뒤지겠네!”

“원망할 거면 영업 방해하는 이 도련님을 원망하든가. 이놈 때문에 지금 네놈의 소중한 국수가 못 들어가고 있으니까.”

미즈키는 뻔뻔하게 팽가 도련님을 가리키며 그의 탓을 했다. 그러자 가게에 있던 눈동자들이 모두 팽가 일행에게 몰렸다. 아무리 명망 높은 세가라 할지라도 사람의 시선이 몰리면 수치를 알고 공포를 느끼게 되는 법, 팽가는 저들끼리 눈치를 보다가 도련님에게 속삭였다.

“도련님, 그냥 가시죠. 여기 놈들이 배우질 못해서 예의를 모르나 봅니다.”

“쳇, 이 촌동네에서 가장 맛이 좋다길래 기대를 해봤더니.”

팽 도령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미즈키가 그를 제지했다.

“어디 가시나? 사과 해야지.”

“뭐라고?”

“사과요 이 새파란 놈아.”

너 방금 내 양아들 멱살 잡았잖아. 결국 이마에 핏대를 세운 미즈키가 다시 도끼로 팽가가 앉아 있던 식탁을 내리쳤다. 식탁이 쩍 소리가 나면서 갈라졌다. 순간 도끼날에 실린 푸른 기운에 팽가 일행이 눈을 홉떴다. 그들은 고개를 돌려 다시 미즈키를 보고는, 그의 왼쪽 팔뚝을 보았다. 도끼를 휘두르느라 걷어붙인 소매 탓에 손목이 보였다. 그 손목을 한 바퀴 두르듯 새겨진 문신은 무림에 발을 좀 담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것이었다. 팽가가 그를 가리키며 새된 소리를 냈다.

“네, 네, 네 놈…!”

“알았으면 빨리 좀 사과하시지? 내 성질머리가 슬슬 한계라서 말이야.”

“아버지, 그냥 여기까지만 하시죠. 어차피 녀석들 사과할 생각이 아니라….”

사냥꾼에게 쫓기는 토끼들처럼 팽가가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다. 어휴, 저렇게 도망칠 거면서 허세는 있는 대로 다 부리긴. 노란 옷을 입은 소년이 혀를 차면서 미즈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형씨~, 이렇게 된 김에 교자도 좀 부탁해! 미즈키는 제 양아들, 키타로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흘렸다.

“저놈들, 관아에 신고하려나?”

“글쎼요, 팽가가 그 문신을 못 알아볼 리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면서 키타로는 미즈키의 왼쪽 손목에 새겨진 문신을 흘겨보았다. 미즈키는 한숨을 내쉬며 덩달아 문신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너네 아버지가 새긴 거라 지울 수도 없고. 미즈키는 가만히 키타로의 등을 두드렸다.

“주문 밀렸다. 어서 국수 삶고 만두 찌자.”

“네, 미즈키 씨.”

두 사람의 바쁜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수목반점의 봄

수목반점의 부자는 특별한 하루 일과가 하나 있다. 평범한 가게 사장이나 점소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 바로 무공 수련이다. 어슴푸레한 새벽, 남들은 장사 준비를 시작할 시간에 부자는 동네 뒷산에 올라가 목검을 맞댄다. 둔탁한 나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잠깐 끊기면 미즈키가 키타로의 팔과 어깨, 허리를 잡고 품새를 고쳐준다.

“어깨만 쓰지 말고, 이렇게. 허리까지 같이.”

“팔꿈치가 너무 올라가 있어. 그렇게 하면 타격을 해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한 문파의 사부와 제자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엄격한 훈련 모습이다. 친아버지가 이렇게 해도 서러울 텐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양아버지의 훈련은 얼마나 가혹하게 느껴질까. 그러나 키타로는 우는 소리 한 번 없이 미즈키의 수련을 받아들이고, 그의 가르침을 모두 제 것으로 삼았다.

그러는 미즈키는 뛰어난 검수인가 하면 그건 아니다. 미즈키는 그저 혼란한 세상을 살기 위해 도끼를 던지고 휘두르는 법을 배운 나무꾼 집안의 장남이자 고기국수집 사장에 불과하다. 엄청난 스승 아래서 무공을 배우긴 했지만 천재가 아니고서야 고작 3개월 만에 무엇을 깨칠 수 있을까. 동네를 돌아다니는 한량 같은 무인과 제대로 맞붙는다면 필히 미즈키가 질 것이다. 어줍잖게 검기 같은 것을 낼 수 있고, 공력도 제법 갖추고 있지만 그것의 제대로 된 사용법을 알려줄 사람은 이제 그의 곁에 없다. 미즈키가 그의 양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어디 가서 점소이라고, 고아라고 하대당하지 않도록 그들을 위협할 수 있는 기술을 알려주는 것과, 그의 친부가 쓰던 검법을 그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정확하게 전수해주는 것 뿐이다.

“끝! 이제 운기조식하고 가게 준비하러 가자.”

미즈키의 호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키타로가 목검에서 손을 놓았다. 손가락과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이 찢어져 새로 피가 새어나오고 있다. 미즈키는 허리춤에서 꺼낸 수건으로 투명한 피를 닦아준 다음 먼저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명상에 들어갔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미즈키도 공력은 늘고 있다. 하지만 제 옆에서 가쁜 숨을 가라앉히며 운기조식에 들어간 저 아이만큼 빠른 속도는 아니다. 고작 열 살인데 키타로의 공력은 벌써 1갑자(60년)을 바라보고 있다. 어마무시한 상승세이다. 만약 마교가 기승을 부리던 시대였다면 어떻게든 납치해 키울 1순위 상대였으리라.

‘마교라….’

미즈키는 10년 전을 회상했다. 건달이 패악질을 부리는 지금이 차라리 낫다 싶을 만큼 그 시절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한 번 마을에 마교가 나타나면 살아 도망치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하룻밤 새에 서로 다른 성에 있는 마을 서너 개가 사라지고, 그들을 잡으러 간 협객들이 행방불명되고, 구파일방의 한 곳은 마교와의 전쟁을 선포했다가 그들이 보낸 자객 한 명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할 뻔헀다. 지금은 모두 품에 날붙이 하나 품고 다니는 정도이지, 10년 전에는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미즈키는 나무를 베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 했다. 마교에게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는 그들의 시커먼 손아귀가 아들의 목까지 부러뜨리지 않을까 매일을 눈물로 보냈으리라. 다행히 미즈키는 운이 좋아 마교를 마주친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마교에게 쫓기긴 했지만 천운이 도와 그를 살려주었다. 그때 만난 사람이 눈앞에 있는 아이의 친부이다.

후, 아이가 깊은 숨을 내쉬면 정수리에서 올라오던 뜨끈한 김이 가라앉는다. 외눈을 뜬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풀이며 먼지를 털어냈다. 이제 가시죠, 미즈키 씨. 아이가 그를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막 명상을 마친 미즈키도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집으로 내려가는 길 내내 미즈키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얌마 너는 아직 멀었어, 너네 아버지는 말이다, 제1초식만으로도 장정 열이 힘을 합쳐야 벨 수 있는 나무를 쓰러트릴 만큼 무식하게 강한 놈이었다고. 류가의 전 당주 알지? 그놈을 몰아낸 것도 너네 아버지야. 진짜 일당백이었지, 사파라서 정파 놈들의 눈에 난 거지 아주 우리 마을의 영웅이었다니까.”

“네에, 그 얘기만 벌써 스무 번째 들었어요.”

키타로가 조용히 딴지를 걸었지만 미즈키의 친우 자랑 겸 잔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그놈은 분명히 돌아올 거야. 나랑 약속까지 했으니까. 그러니까 너도 네 아버지가 물려준 기술을 갈고 닦아서 아버지 앞에서 자신 있게 보여드려야지. 그건 그 녀석이 남긴 소중한 거니까.”

그러면서 미즈키는 왼 손목의 문신을 쓰다듬었다. 그 문신은 키타로의 아버지, 그러니까 게게로라는 자가 몸 담고 있던 유령족이라는 사파 일족의 증표 비스무리한 것이었다. 미즈키는 유령족도 모르고 살아온 범부였지만, 단 둘밖에 남지 않은(지금은 키타로가 있어 셋이다. 과연 정말로 셋일지는 의문이지만) 유령족으로부터 친우인데다 그들 특유의 검법과 기공술을 익혀 자손을 키우고 있으니 사실상 유령족 일원으로 봐도 무방하다.

떠나기 전날, 게게로는 미즈키의 왼손에 공력을 담은 먹물로 문신을 새기면서 말했다.

‘자네와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니,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가는 것일세. 그러니 나를 원망하지 말게나.’

‘뭐, 됐어. 이제 와서 마음 돌리기에는 늦은 것 같고. 그런데 이건 왜 새기는데? 난 유령족도 아니잖아.’

‘어찌 자네가 유령족이 아닌가. 나의 공력을 받고 가르침을 받고 친우가 되어 나의 아이를 맡게 될 테니, 그대는 충분히 유령족에 이름을 올릴 자격이 있네. 유령족 마지막 후예인 내가 그리 정했으니 선조도 이해해줄 것일세.’

작업이 끝나자 게게로는 손수 손목에 붕대를 감아주며, 조금 상기된 웃는 낯으로 미즈키에게 속삭였다.

‘이제 나는 어디에 있든 그대와 함께할 걸세.’

‘됐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네 아내랑 몸 성히 돌아오기나 해.’

미즈키는 쑥쓰러워하며 거칠게 손을 빼냈다. 그러지 말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무사히 돌아오라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그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주고 말을 할걸. 그날 새벽에 아내와 단 둘이 길을 떠나게 두지 말걸. 같은 시간에 일어나 키타로를 안고 잘 가라고 손 흔들어 줄걸. 후회는 끝을 모르고 점점이 이어지지만 미즈키에게는 지금 당장 꾸려나가야 하는 생활과 키워야 하는 자식이 있다. 친우가 남기고 간 자식. 그녀석은 걔가 이렇게 훌쩍 자랐다는 걸 알까. 네 재능을 넘길 만한 엄청난 잠재력을 품고 있다는 걸 알까. 제 친자식도 아닌데, 미즈키는 돌아온 게게로에게 키타로를 자랑할 생각에 벌써부터 입꼬리가 춤을 춘다.

뒷문으로 들어가 전날 우려낸 육수를 확인하고 재료를 손질한다. 창고에 재료가 얼마나 남았는지 세고 온 키타로가 부족한 것을 알려주면 미즈키는 수레를 끌고 새벽 장에 나가 한참동안 가격으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돌아온다. 젠장, 또 배추 값이 올랐어, 이놈들은 대체 왜 농경지를 못 살게 구는 거야. 오늘도 사파 같지 않은 사파를 욕하면서 미즈키는 전리품과 함께 가게로 돌아왔다. 그렇게 한 시진 동안 전쟁 준비를 마치면 진짜 전쟁이 시작된다.

진시, 가게 문을 열면 이 순간만을 기다린 동네 사람들이 메뚜기 떼처럼 밀고 들어와 주문을 해야 정상인데, 오늘은 관아에서 온 졸병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팽가 그놈들이 고자질했나 보군.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관아만 해도 걸어서 꼬박 이틀은 걸리는 곳인데, 양아치처럼 굴어도 꼴에 팽가 사람인지 경공으로 날래 다녀갔나 보다. 자신을 노려보는 산적 같은 대장을 보면서 미즈키는 익숙하게 인사했다.

“네네, 오랜만입니다요.”

“또 무림인에게 시비를 걸었나?”

“시비를 걸다뇨. 그 놈들이, 아니, 그 사람들이 먼저 제 아들 멱살을 잡고 사과도 안 하길래 갚아준 겁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못 들어보셨습니까?”

미즈키는 호칭을 좀 더 겸손한 쪽으로 변경한 다음 눈썹을 까딱였다. ‘보통은 점소이나 국수집 사장이 세가에게 복수를 하진 않지.’ 대장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생 초짜가 하나 있는지 두 놈 정도가 뒤에서 기웃거리며 미즈키와 대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미즈키는 몸에서 힘을 빼고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도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러니까 성질 좀 죽이라고, 미즈키. 이 동네에서 들어오는 신고의 반은 자네 얘기라고. 남들은 다 칼로 배때지 쑤시고 싶은 걸 참고 대접하는데 자네는 대체 왜 그러나?”

대장이 삿대질하며 잔소리를 했으나 미즈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참지 않는 이유? 그 정도야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차고 넘쳤다. 내 아들이 손찌검을 당했으니까, 그놈들이 사람 귀한 줄 모르고 함부로 대하니까, 우리라고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참지 않아도 된다고, 이를 드러내도 된다고, 게게로가 알려주었으니까.

미즈키는 이 모든 게 귀찮은 양 달관한 표정으로 손목을 내밀었다.

“그래그래, 빨리 오랏줄이든 뭐든 묶어서 데려가려고. 그런데 이번엔 무슨 죄목으로 심문하려고?”

어차피 이곳 관아는 미즈키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만에 하나라도 사파의 검성이 돌아와 그들이 미즈키와 그 자식에게 한 짓을 알게 되면 이번에야말로 가루가 남지 않을 만큼 박살이 날 테니까. 포졸들은 그게 분한지 미즈키를 노려봤다. 대장은 콧김을 한 번 내고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했다.

“안 잡아가. 네놈 털어봤자 뭐 먼지 한 톨이라도 나오겠나. 이쪽이 역으로 털리지 않으면 감지덕지지.”

“호오, 드디어 포기하셨나?”

미즈키가 느물거리며 웃자 대장은 쳇, 혀 차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면서 돌아갔다. 미즈키는 소득 없이 돌아가는 포졸들을 향해 ‘초계국수라면 얼마든지 만들어줄 수 있다고!’라고 놀리듯이 말하곤 몸을 돌렸다. 아버지가 걱정되었는지 키타로가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고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여전히 무서운가 보네. 미즈키는 키타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괜찮아, 오늘도 별일 없었어. 빨리 준비하러 가자.”

“네에.”

키타로는 여전히 안심이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러나 당신이 괜찮다고 말한다면 믿겠다는 듯이 그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붉은 앞치마를 메고, 소매를 걷고 주방칼을 든다. 곧 수목반점 굴뚝 위로 맛있는 연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캬하! 역시나 낮에 그런 일이 있었구먼. 고생이 많았어.”

“내가 무슨 고생을 해. 헛걸음한 그놈들이 더 불쌍하지.”

네즈미가 호탕하게 웃으면 미즈키가 피식 실소를 흘리면서 술잔을 부딪쳤다. 해가 저물고 장사가 끝나면 미즈키의 오랜 친우들이 술이며 안주를 가지고 나와 회포를 나눈다. 거의 매일 만나는데도 할 이야기가 뭐 그리 많은지, 한밤의 술자리는 금방 끝나는 법이 없었다. 화제는 주로 이상한 손님 뒷담이었고, 그 사이사이로 게게로와 10년 전 이야기가 곁들여졌다.

사요가 옆에서 꽃빵을 우물거리며 말을 보탰다.

“그치만 저희는 늘 걱정이라고요. 정파에서 미즈키 씨를 납치해서 게게로의 위치를 불라고 고문했을 때는….”

“에이, 언젯적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사요 아가씨.”

“아가씨라뇨, 미즈키 씨야말로 언젯적 호칭으로 저를 부르시는지.”

미즈키의 넉살스러운 대꾸에 사요가 소매를 가리고 후후 웃었다. 아무 무늬 없는 소박한 삼베 옷을 입고 어른들 사이에서 술을 즐기는 그를 보면 이곳의 실세였던 류가의 아가씨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만약 게게로가 류가를 뒤엎지 않았으면 사요는 류가의 안주인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 성 안에 틀어박혀 인형처럼 지냈을 것이다.

그해 여름에는 참 이상한 일이 많았다. 마교가 나타난 것이며 게게로를 만난 일도 그렇고, 백여 년 동안 이 마을을 지배하던 류가의 민낯이 드러나고 그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류가로부터 더러운 돈을 받던 관아가 게게로를 잡으러 왔다가 오히려 당하고, 게게로를 도우러 관아로 몰래 들어간 미즈키가 실종된 그의 아내를 찾고, 키타로가 태어남과 동시에 천마가 무림에 전쟁을 선포하고,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 게게로 부부가 먼 길을 떠났다. 그 모든 게 불과 석 달 만에 일어났다니, 누군가 들으면 꿈이라도 꾸었냐고 비웃을 일이었다.

“이 자식들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밖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어? 빨리 들어가지 못해?”

자경단원의 등장에 세 사람은 동시에 얼굴을 굳혔다. 특히 사요는 그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노골적으로 싫을 티를 냈다. 말이 좋아 자경단이지 실장은 치안 유지를 핑계로 삥이나 뜯는 반 양아치 집단이다. 특히 저놈은 미즈키를 무척이나 싫어했는데, 제가 짝사랑하는 사요가 잘 따르는 사람이라는 이유였다.

역시나 자경단원은 미즈키와 네즈미 사이에 있는 사요를 발견하자마자 실실 웃으면서 다가왔다.

“어이구, 사요 씨. 날이 이제 춥고 어둡습니다. 제가 댁까지 안전하게….”

“사요 씨는 내가 데려다줄 테니 순찰이나 돌고 오쇼.”

자경단원이 뻔뻔하게 사요에게 손을 내밀자 미즈키는 그 작자의 입에 꽃빵을 물리며 일갈했다. 입이 막혀 욱욱거리던 자경단원은 꽃빵을 거칠게 뱉어버리고는(아이고, 저 맛있는 걸 우째 다 안 먹고, 라고 네즈미가 혀를 찼다) 미즈키를 싸늘하게 쏘아봤다. 곧 그가 허, 하면서 기가 차다는 소리를 냈다.

“어쭈, 한 대 칠 기색인데?”

“아고, 형씨 왜 이래. 한 잔 걸치고 순찰 돌아? 저 형씨 건드려봤자 당신만 뼈 부러져.”

네즈미가 그의 팔을 잡고 말렸으나 자경단원이 강하게 내치자 그대로 땅바닥에 굴렀다. 사요가 그를 일으켜주는 사이 미즈키와 자경단원 사이의 긴장감은 배가 되었다. 에이씨, 이 새끼 마주칠 줄 알았으면 미리 도끼를 들고 나오는 건데. 속으로 미즈키가 생각하는 사이 자경단원은 코웃음을 치면서 다시 시비를 걸었다.

“왜, 또 나 한 대 때리고 게게로인가 뭐시긴가에게 불려고? 그러면 죽은 사람이 나와서 날 패준대?”

같은 동네 사람끼리 싸우면 안 되는 이유는 서로의 역린을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네즈미와 사요가 동시에 숨을 삼키면서 미즈키 쪽을 돌아봤다. 미즈키의 은인이자 키타로의 아버지인 게게로의 생사, 그것은 이 마을에서 금기였다. 바로 미즈키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다시 지껄여봐.”

평소처럼 가벼운 도발이었으면 미즈키 역시 그가 사요에게 열 번 찝적거렸다 열 번 차인 일을 읊어주며 응수했으리라. 그러지 않았다는 건 지금 폭발 전 화산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저 눈치 없는 자경단원은 처음으로 자신이 우위를 점했다고 착각하고는 혀로 업보를 쌓았다.

“왜애, 정말로 게게로가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해? 지랄은. 진짜 십만대산에서 목숨을 건졌으면 진작 돌아왔지, 왜 10년 동안 감감무소식이겠어. 그 시체 산에 부부가 나란히 묻혀서 그런 거 아ㄴ,”

쨍 하고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자경단원의 뺨을 스치고 접시 조각 하나가 날아갔다. 순간이었지만 푸른 기공력이 담긴 접시였다. 우둘투둘하게 갈라진 접시 단면에 긁혀 그의 뺨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덜덜 떨면서 정면을 보니 미즈키가 다른 접시 조각을 들고 공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얼굴에는 살기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저건 맞으면 죽는다, 본능이 속삭이던 순간 네즈미와 사요가 뛰어들어 미즈키를 진정시켰다.

“미즈키 씨 잠시만요!”

“아이고 형씨 오늘따라 왜 이러셔!”

네즈미는 작은 몸으로 미즈키를 밀면서 자경단원에게 눈짓을 주었다. ‘살고 싶으면 제깍 튀어라.’ 다행히 이번엔 눈치가 빨랐던 자경단원은 줄행랑을 쳤다. 미즈키에게 게게로의 생사를 걸고 입을 털다가 맞았으니 다른 단원에게 하소연해도 맞을 짓을 했다는 말밖에 더 듣지 못하리라. 눈앞에서 자경단원이 사라지자 미즈키의 노기는 가라앉았으나 묵직하고 꺼림찍한 공기는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미즈키는 후, 하고 깊은 한숨을 쉰 뒤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네즈미에게 부탁했다.

“미안, 사요 씨 좀 집까지 데려다줄래.”

“어, 어어. 그러지. 내일 보자고 형씨.”

“안녕히 주무세요 미즈키 씨.”

사요는 꾸벅 인사를 하곤 네즈미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미즈키는 한참 동안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무언가 고장이 난 것처럼 힘없이 주저앉았다. 손에서 접시 조각이 빠져나와 쨍,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머릿속으로는 저 난장판을 치워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모든 게 부질없다고 느껴졌다.

곱씹어 보면 자경단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십만대산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5년 전에 돌아왔다. 아무리 복귀가 늦은 자라도 8년 안에는 귀환했다. 그런데 게게로 부부는 10년이 지났는데도 목격담은커녕 생사 확인도 되지 않는다. 3년 전 게게로의 아내, 이와코가 몸 담았던 사파의 일당이 찾아온 적이 있어 물어보았지만 그들 역시 모른다는 소리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십만대산 앞 협곡이었다니, 천마를 마주하기도 전에 죽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그게 맞는데.

“미즈키 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면, 소란 때문에 깼는지 키타로가 문 뒤에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목소리에 졸음기가 없는 걸 보니 진작 일어나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이 앞에서 거친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움에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미즈키는 급히 바닥에 떨어진 조각을 모아 한쪽으로 치우고 키타로에게 다가갔다. 꼭 끌어안아줄 생각으로 손을 내밀었는데, 키타로가 몸을 물리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감정 표현 없는 저 애가 겁을 먹을 만큼 내가 잘못했나, 후회가 들려는 순간 키타로가 꺠끗한 붕대와 가위를 가져와 미즈키의 손가락에 서투르게 두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손을 내려다보니 검지와 손바닥에서 피가 점점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까 조각에 베인 모양이다. 주방 일을 하는 사람이 손을 다치다니, 낭패다.

미즈키는 쩝 하고 아쉬운 소리를 내면서 키타로의 손을 물리고 대신 붕대를 감았다. 전란의 시대를 살아본 적 없는 아이는 붕대 묶는 것도 어설펐다. 미즈키는 붕대를 다시 풀고 키타로에게 깨끗한 헝겊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키타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쏙 주방으로 들어갔다. 문득 스쳐간 아이의 표정에서 당황이 섞여 있었다. 미즈키는 알 수 있었다. 무려 10년 동안 제 손으로 키운 아들이다. 친아들은 아니지만 그만큼의 정이 쌓였다고 단언할 수 있었고, 그래서 미즈키는 저 무뚝뚝한 아이가 작은 머리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키타로, 네 부모님은 말이야.”

키타로가 가져온 헝겊을 상처 위에 대고, 능숙하게 한 손으로 붕대를 말면서 미즈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미즈키 앞에 서서 응급처치를 보고 있던 키타로가 고개를 바짝 들었다.

“반드시 돌아올 거야. 몸 성히 올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꼭 돌아올 거야. 네 부모님은 무림제일이니까.”

키타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작은 손으로 미즈키를 끌어안았다. 부모의 검법을 제대로 이어야 한다는 미즈키의 고집으로 굳은살이 박인 작은 손. 과연 나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그 녀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일까, 미즈키는 순식간에 망망대해에서 닻과 돛과 노를 잃고 헤매는 사람이 되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미즈키는 바쁘게 그릇을 나르는 제 앞을 가로막고 선 검사 일행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가슴팍에 곱게 새겨놓은 자수의 문양을 보고 미즈키는 제 운명을 직감헀다. 유독 게게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는 문파의 상징이다. 미즈키는 그릇을 손님 앞에 내려놓은 다음 그들을 도전적인 눈빛으로 응시했다. 다행히 그들은 미즈키의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왼쪽 손목을 볼 수 있겠나.”

이거 숨겨도 소용이 없겠구먼. 미즈키는 주변을 둘러보아 사람들을 안심시킨 다음 순순히 손목을 내주었다. 그래도 정파는 명분과 격식에 못 죽어 안달이니, 얌전히 말을 듣는 게 오히려 더 쉽게 끝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번에 파견나온 이들은 미즈키를 곱게 다룰 심산이 아닌지, 손목을 내밀자마자 자국이 남을 만큼 거칠게 팔뚝을 움켜잡더니 소매를 뜯어내듯이 걷어올렸다. 미즈키도 당황해서 몸을 움찔하며 도망치려는 시늉을 하게 되었다.

“어이, 이봐!”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어느 새 뒤로 돌아간 자가 혈을 눌러 제압했다. 몸에서 힘이 빠지는 동시에 목구멍이 꽉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위험하다는 경고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급히 공력을 돌리려고 했지만 역시 그쪽도 막아버린 듯 공력이 단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억지로 운기를 해봤자 혈이 뒤틀려 주화입문이 올 뿐이니, 모든 힘을 풀어버려야 하네. 게게로의 말을 떠올리고 미즈키는 즉시 운기를 멈추고 놈들의 동태를 살폈다. 문신을 내려다보는 놈들의 눈빛이 살벌하다못해 당장 미즈키의 목을 칠 판이다. 이번에는 게게로를 잡아 묵사발을 내려고 아주 작정을 했나 보다. 미즈키는 게게로에게 들었던 이 문파의 더러운 짓들을 떠올리고 이를 갈았다.

미즈키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주문을 받던 키타로가 양아버지를 보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미즈키를 돕고 싶어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키타로가 나서는 순간 놈들은 그마저 끌고 가 호된 짓을 할 것이다. 미즈키는 손짓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다음 주방 쪽을 가리키고 내쫓는 시늉을 했다. 키타로는 머뭇거리면서도 발소리 하나 없이 조용히 움직여 주방으로 대피했다. 다행히 일당은 미즈키의 문신을 쳐다보느라 키타로가 있음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유령족인가?”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이 물었으나 미즈키는 혈이 막혀 목소리를 내기도 버거웠다. 대장은 그런 미즈키의 뺨을 한 대 후리더니 혈을 풀어 대답만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미즈키가 크게 휘청거리자 양쪽에서 사람이 달려들어 팔을 붙잡았다. 이건 완전히 죄인 취급이잖아…. 미즈키는 억울함을 담아서 대꾸했다.

“그럴 리가 있겠냐. 이런 힘 하나 없는 주방장이.”

또 따귀를 맞았다. 이번에는 반대쪽이 홧홧하게 타올랐다. 빌어먹을 자식, 주방장 하나 다루는 데 공력을 담아 장풍을 쏘듯이 때리는 게 어딨냐. 미즈키는 혀로 볼 안쪽을 훑었다. 역시나 이에 쓸려서 피가 묻어나왔다. 피를 모아 바닥에 뱉어버리자 대장이 미즈키의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피부가 당겨지면서 저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대장은 미즈키의 눈앞에 형형하게 빛나는 제 눈동자를 들이밀며 속삭였다.

“평범한 주방장은 반 갑자 이상이나 되는 공력을 갖고 있다거나, 유령족의 문신을 새겨 놓고 다니지 않는다.”

그는 미즈키를 내팽개치듯 놓아주고는 일당에게 명령했다.

“끌고 가. 혈은 숨 끊어지지 않을 정도만 놔두고 막아버려. 바로 본산으로 돌아간다.”

승산이 없는 싸움이잖냐. 미즈키는 비통해하며 눈을 감았다. 게게로가 해준 말대로라면 미즈키 역시 제대로 먹거나 자지 못하고 주야 없이 고문을 당할 것이다. 게게로야 유령족이라서 버텼다지만 반 갑자가 넘는 공력을 갖고 있다는 것 외엔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미즈키가 그것을 버틸 수 있을지.

미안 게게로. 네가 돌아올 때까지 키타로를 잘 키우겠다는 약속, 못 지킬 것 같아. 미즈키는 체념하면서도 손님들에게는 금방 돌아올 거라는 말과 함께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남기면서 끌려갔다.

현장에 남겨진 사람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 같은 마음이 되었다. 다들 발을 동동 굴리면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수군거렸지만 실제로 그들을 쫓아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라고 네즈미는 생각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키타로를 제외하면 무공이라고는 책으로도 배운 적 없는 민초이다. 그렇다고 아직 열 살 밖에 되지 않은 키타로에게 네 양아버지를 구하라며 사지로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들의 대화를 듣자 하니 상대의 목적은 게게로인 듯한데, 게게로를 닮은 키타로를 보내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모두가 곡소리와 한숨만 내고 있었다. 이러다 미즈키 씨가 죽겠네, 우리도 힘이 있었다면. 다들 걱정과 분함을 뱉었지만 그럴수록 스스로를 향한 한심함과 가진 자를 향한 원망만 늘어났다. 왜 저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를 괴롭히지. 왜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거지. 그저 바짝 엎드려서 사는 것밖에 할 수 없나? 왜 우리는 미즈키처럼 분개하며 싸우는 법을 진작 배우지 않았는가.

부정적인 마음이 켜켜이 쌓여갈 때 행색이 남루한 부부가 가게로 다가왔다. 나무 막대기 하나를 지팡이처럼 짚으며 다가온 이들은 초상집 같은 분위기에 어리둥절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드디어 익숙한 사람을 찾았는지 그들은 인파를 제치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렇게 네즈미 앞에서 멈추어 선 그들은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제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고 고개를 든 네즈미는 전신의 털이 쭈뼛 서는 감각에 입만 벌리고 제대로 된 소리를 내지 못했다. 길게 드리워진 머리카락과 꾀죄죄한 차림으로도 가릴 수 없는, 선함이 가득한 선명한 눈동자.

“게, 게게로 나리?!”

게게로,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한 이름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쪽빛이 바라고, 붕대를 칭칭 두르고, 초췌해 보였지만 그들은 한때 이 마을의 영웅이자 키타로의 친부모인 게게로와 이와코가 맞았다. 주방에 숨죽이고 있던 키타로는 아버지의 이름에 가만히 고개를 내밀었다. 게게로는 네즈미를 향해, 낮지만 불안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미즈키는 어디에 있는가.”

이거, 다른 의미로 큰일이 났다. 네즈미는 훤히 드러난 이마 위로 땀방울 하나를 흘렸다.


목에서 피맛이 진하게 났다. 신음을 내고 싶어도 목이 죄다 갈라져 앓는 소리를 내기만 해도 따끔거리다못해 칼에 베인 듯한 고통이 터져나와 입술을 짓씹었다. 사람 두 명이 앉으면 꽉 찰 만큼 좁고 어두운 방에는 창문도 없어 날짜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 오랜 장사로 몸에 익은 시간 감각이 대략 사흘이 지났다고 짐작만 했다.

그 사흘 동안 미즈키는 독을 제외하고 상상할 수 있는 고문을 거의 다 겪어봤다. 정파 놈들이 사람을 이렇게 다뤄도 되는 거냐고 쏘아 붙이기도 해봤지만 강도만 높아졌다. 그냥 어디 있다고 거짓말이라도 할까, 그런 생각을 했지만 곧바로 포기했다. 무슨 말을 하든 이들은 미즈키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유령족의 문신을 새기고 있는 남자를 자유롭게 풀어줄 리 없지 않은가.

그래도 게게로와 엮인 것 자체를 후회하지 않는다. 그와 만나고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고, 세상을 보는 방법도 달라졌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 녀석 덕분에, 미즈키는 키타로를 만났다. 자신이 보호하고 기르며 가르쳐야 하는 사랑을.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바로잡으려고 애를 썼다. 놈들이 원하는 건 하나다. 미즈키가 게게로의 위치를 부는 것, 불지 않는다면 그대로 죽는 것. 만약 미즈키가 그대로 기절해버린다면 손을 쓴 다음 대충 먼 공터에 매장시켜버릴 것이다. 그때까지 기력이 남아 있고 의식이 완전히 점멸하지 않는다면 기적적으로 탈출할 수 있다. 무조건 버틴다. 버티면 어떻게든 살 수 있다.

호흡을 가다듬고 있으니 깨어난 것을 귀신같이 알고 고문관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제는 저 얼굴이랑 정이 들 판이다. 미즈키는 인상을 쓰면서 놈에게 말을 건넸다.

“이봐, 이제 소용없다는 걸 슬슬 알 때도 되지 않았어?”

그러나 도발의 말을 고문관은 듣지 못한 척 넘긴다. 그는 무미건조하고,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창백한 낯으로 미즈키를 보며 똑같은 것을 물었다.

“그 사파는 어디 있지?”

“그러니까 모른다니까요. 저도 그놈 얼굴 보고 싶어 미치겠습니다.”

고문관은 미즈키의 넉살 좋은 대꾸에 말이 안 통한다는 듯 고개를 흔들다가 뒤에 있던 조수에게 말했다. 집게 가져와라, 손톱은 다 뽑아버리고. 조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보따리를 풀어 작업 준비에 들어갔다. 형형하게 빛나는 날붙이들을 보고 미즈키는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다. 미친 놈들아, 장사하는 사람 손톱을 뽑으면 뭐 어떻게 먹고 살라는 거야.

조수는 마치 정해진 동작을 수행하는 강시처럼 무뚝뚝하게 집게를 건넸다. 고문관은 잡게를 한 번 보고는 미즈키의 팔을 풀어 탁자 위에 올렸다. 고문관이 팔을 잡고 있는 사이 조수가 탁자에 메인 끈으로 팔을 묶었다. 미즈키가 발버둥쳤으나 다른 조수가 어깨를 눌러 저항을 반감시켰다. 그는 굳은 살이 박인 검지를 곱게 잡고, 집게를 손톱에 물렸다. 뽑힌다, 미즈키는 다가올 고통에 대비해 눈을 질끈 감았다.

갑자기 고문실 문이 날아갔다. 산산이 부서진 문에서 갈라져 나온 조각이 고문관과 조수, 그리고 미즈키에게 쏟아졌다. 고문관이 집게를 빼고 휘둘렀으나 반격은 허무하게 막혔다. 침입자는 손쉽게 집계를 뺏은 다음 고문관의 면상을 한 손으로 잡아 벽에다가 내동댕이쳤다. 퍽 하는 소리가 나 미즈키는 다시 눈을 꾹 감았다. 실눈을 뜨고 보니 다행히 고문관은 이마에 거대한 혹을 달고 기절했을 뿐 두부가 되진 않았다. 하마터면 한동안 다진고기를 못 먹을 뻔했군. 미즈키는 이상한 데에서 안도했다.

조수까지 일사천리로 해결한 침입자는 그대로 미즈키에게 다가왔다. 낯익다 못해 그리운 기척에 미즈키의 눈이 점점 동그래졌다. 그는 고문으로 초췌해진 미즈키의 뺨을 쓸고, 10년 전 자신으로 인해 생긴 눈가와 귀의 상처를 손가락 끝으로 더듬다가, 조심스럽게 미즈키를 구속시킨 모든 밧줄과 가죽끈을 풀었다. 미즈키는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으나 그가 먼저 미즈키를 끌어안았다. 얼마나 고생했는지 둘 다 수척해져서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도 미즈키는 마냥 반갑기만 했다. 온 힘을 다해 등을 끌어안고 싶었으나 여전히 혈이 막혀 옴싹달싹하지 못했다. 미즈키는 그나마 자유로운 입을 움직여 그에게 10년 만에 인사를 건넸다.

“기다렸어, 멍청아.”

곧 미즈키의 어꺠가 축축해졌다. 여전히 울보인 그의 친우는 코 훌쩍이는 소리까지 내며 그의 어깨에 이마를 마구 문질렀다.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네 미즈키.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네…. 이런 일까지 당하고…, 정말 미안하네.”

괜찮아,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잖아. 미즈키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으나, 갑자기 몰아닥치는 수마에 말을 잇지 못하고 게게로에게 몸을 맡겼다.


미즈키가 병상에서 일어나자마자 마을에 축제가 열렸다. 마을 사람 모두 가장 좋은 옷으로 치장하고 음식을 만들어 서로 나눠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자들은 대낮부터 술에 취해 왁자하게 웃었고, 여자들은 다른 마을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나누며 새처럼 재잘거렸다.

그리고 이 축제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수목반점의 식구들, 미즈키와 게게로, 이와코, 그리고 키타로는 식당 밖에 앉아 10년 동안 쌓인 이야기를 풀고 있었다. 아직 세 어른 다 몸이 성하진 않지만 이런 즐거운 날을 미룰 수는 없었다. 모처럼 마시는 달달한 술에 먼저 취기가 오른 게게로가 눈가가 발개진 채 우는 소리를 했다.

“자네가 그 치들에게 잡혀갔다는 얘기를 듣고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네! 겨우 고생해서 자네와 키타로가 기다리는 마을에 아내와 돌아왔는데, 가장 보고 싶었던 자네를 볼 수 없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래서 남은 힘을 다 끌어모아서 그곳으로 향한 거예요. 사실 저나 이이나 더 이상 축지를 못 쓰는 상태여서, 경공으로 날아갔더니 시간이 좀 지체되었네요.”

“아니, 그러다가 두 사람 다 쓰러졌으면 어떡하려고!”

“그게 중요한가! 미즈키 자네의 목숨이 걸린 일이거늘!”

그러면서 게게로는 또 탁상 위에 엎어져 눈물로 호수를 만들었다. 그만 울라고 미즈키가 부끄러워하며 호통을 쳐도, 아내가 어깨를 쓸면서 위로해줘도 게게로의 주사는 멈추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를 마주한 키타로는 어색한 기분에 쉽게 어른들의 대화에 끼지 못하고 음식을 야금야금 먹고 있었다. 이와코는 아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어 복실거리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고생하며 살아온 자신들과 달리 살이 오른 뺨과 부드러운 살결과 머리카락은 미즈키가 그를 모자람 없이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였다.

자신을 더듬는 어머니의 손에 키타로의 몸이 저절로 굳었다. 이와코는 키타로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점점이 박힌 굳은살을 보았다. 굳은살이 생기고 상처가 아문 위치가 자신이나 게게로와 비슷했다. 미즈키가 유령족의 검법을 가르쳤다는 증거였다. 저 사내는 필히 자신의 가르침이 부족하지 않을까, 자신에게 이 아이를 가르칠 자격이 있을까 고민했을 것이다. 이와코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들이 검법을 잇든, 잇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가든, 자신들의 후손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세상을 지킬 가치가 충분했으므로. 그것은 게게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몰라보게 자랐구나, 키타로.”

이와코는 가득 키타로를 안아주었다. 키타로는 머뭇거리다가 어머니를 세게 끌어안았다. 자신과 비슷한 기운이 그가 자신의 부모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미즈키의 품만큼 안온했고, 왠지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올 거 같았다. 모자의 상봉을 보던 미즈키가 이와코에게 자랑하듯이 말했다.

“그 녀석, 될성부를 놈이에요. 벌써 공력이 1갑자 가까이 모였다니까요.”

“뭐시라?! 키타로, 이 아비의 뒤를 이어 제일검이 되겠구나!”

“딱히 제일검이 될 생각은 없는데요.”

키타로의 퉁명스러운 말에 게게로는 ‘뭐시라?!’라면서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 됐다. 미즈키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저 애는 내가 점소이로 키우는 바람에 국수랑 만두밖에 모르는 바보가 되었다고 놀렸다. 장차 미즈키의 가게를 잇든, 게게로를 이어 검성이 되든, 키타로는 제 옆에 이들이 계속 같이 있어준다면, 언제나 기쁠 것이라고 조용히 생각했다.

곡창의 수목반점, 괴팍한 주인장이 있다고 소문한 그 가게에 10년 만에 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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