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족도 살이 찐다
치치미즈
카페를 열기로 했으니 팔 메뉴를 정해야 한다. 미즈키는 노트 위에 어설픈 디저트 그림을 그려놓고 고민에 빠졌다. 일단 주력 메뉴는 핫케이크로 하고, 또 뭘 만들어 팔까. 미즈키는 다른 후보 메뉴를 훑어봤다. 프렌치 토스트나 샌드위치는 다른 가게에서도 파는 것이고 결이 비슷하니 무난할 것이다. 명색이 브런치 가게이니, 간단한 수제버거 같은 것도 추가할까. 아니면 좀 다르게 리조또나 라자냐 같은 것도 괜찮을 지도. 식사를 하진 않지만 디저트를 원하는 손님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쪽도 고민해야 하나. 푸딩은 만드는 족족 실패한 기억밖에 없는데 어떡하면 좋을까….
미즈키는 몸을 뒤로 기대며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이것도 저것도 썩 나쁘지 않다는 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동네 자영업자에게 묻고 발품을 팔아가며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메뉴가 많을수록 손님도 고르기 힘들어하고, 주방장도 외워야 할 레시피가 많아져 힘드니 서너 개로 한정하는 게 베스트다. 그리고 그 서너 개의 메뉴도 조리 과정이 비슷한 게 사장 입장에서는 가장 편하다. 그러니 핫케이크 브런치 가게를 운영한다면 토스트와 샌드위치, 수제 버거가 베스트이다만…. 역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단 말이지. 미즈키는 한숨을 쉬었다. 이왕 부업처럼 하는 거 이것저것 시도해보고는 싶은데, 현실적인 장벽이 있으니 그 안에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물론 이런 인간의 속물적인 고민은, 바로 옆에 있는 (아마도) 300살 먹은 요괴에게는 영 이해가 안 되는 부류였다.
“그냥 미즈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온 세상 사람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진작 난리가 났겠지.”
“흠, 왜 원하지도 않는 규칙에 얽매여 사는지.”
옆에 인간을 두고(사실 이쪽 인간도 그 길을 살짝 벗어난 지 오래이다만) 요괴는 소바를 후루룩 먹으며 그런 소리를 했다. 미즈키는 고뇌에 빠진 동거인을 앞에 두고 혼자 맛있는 걸 먹는 요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좋은 생각이 낫다며 몸을 일으켰다.
“떠오른 메뉴를 전부 너한테 먹여봐야겠어.”
“으므?”
“그리고 네가 별점 4점 이상을 준 걸 팔아야지.”
“설마 그걸 지금 해결책이라고 생각한 겐가?”
“문제 있나?”
게게로는 남은 소바를 후루룩 흡입하고 잠깐 생각했다. 하긴 문제가 될 건 없지. 오히려 미즈키가 만든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으니 이몸에겐 이득 아닌가? 단순한 요괴는 손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먹은 소바 그릇을 내려놓고 게게로는 미즈키에게 바짝 붙어서 물었다.
“뭐와 뭐 사이에서 고민 중인가?”
“음, 비슷하게 빵 종류인 수제버거를 할지 아니면 리조또를 할지. 그걸 못 정하겠어서.”
“버거…. 는 미국식 샌드위치라고 들었다만 리조또는 무엇인가?”
“아, 그건 먹어본 적 없구나?”
미즈키는 히죽이면서 부엌으로 들어왔다. 어떤 건지 보여주겠다며 손가락으로 까딱이는 모습에선 하늘을 뚫을 법한 자신감까지 느껴진다. 그 당당한 손짓에 홀려 게게로는 방금 전 해치운 소바 그릇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미즈키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장장 10여 분 간 사투를 벌인 결과 미즈키의 첫 리조토가 완성됐다. 처음 만든 요리치고 외양은 제법 그럴 듯했다. 한 번도 만들어본 적 없어 요리하는 내내 긴장했는데, 그럭저럭 괜찮은 모습에 미즈키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며 게게로 앞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따끈하게 올라오는 김 사이로 죽 비스무리하게 생긴 이국의 요리를 보고 게게로는 호오, 하고 탄성을 뱉었다. 게게로는 숟가락으로 리조토를 건드리다가 용기를 내 크게 한 숟갈 떠 입안에 넣었다. 김이 폴폴 나는 것을 식히지도 않고 가득 담은 유령족은 천천히 우물거리다가 눈을 반짝 뜨면서 말했다.
“음, 나쁘진 않군.”
“그래? 그럼 다행이,”
“그런데 간이 덜 됐군. 고로 3점을 주겠네.”
“뭐? 그럴 리가 없, 앗 뜨!”
게게로의 냉정한 평가에 미즈키가 숟가락을 뺏어 입에 넣었다가 도로 싱크대에 뱉어버렸다. 미즈키, 자네는 유령족이 아니네. 게게로의 나긋나긋한 타박은 입을 식히려고 세게 틀어놓은 물줄기 소리에 묻혀 미즈키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 뒤로 미즈키는 신상 메뉴를 고민할 때마다 무작정 게게로에게 먹이고 보았다. 아무거나 주는 대로 잘 먹게 생긴 겉모습과 달리 게게로는 섬세한 미각의 소유자였고, 호불호의 기준이 명확해 좋은 심사위원이었다. 미즈키는 그의 조언을 따라 레시피를 수정하거나 한정 메뉴를 정했다.
그렇게 삼 년 째가 되던 날이었다. 미즈키는 평소처럼 여름 한정 메뉴를 고민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또 버블경제니 뭐니 하면서 놀러다니는 사람이 많아져 미즈키의 가게도 평년에 비해 손님이 늘어났다. 그런 이들의 기대를 맞추려면 역시 이번 한정 메뉴는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 정해야 할 듯한데, 브런치 카페다 보니 그럴 듯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일반 음식점이었으면 소바 종류를 어레인지해서 만들어도 되었을 텐데. 미즈키는 각종 카페 잡지를 뒤지며 요즘은 무엇이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고 있나 찾아보았다.
“파르페라….”
그중에서 당연 미즈키의 시선을 끈 것은 파르페를 소개하고 있는 한 칼럼이였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디저트로, 최근 긴자를 중심으로 서서히 유행하기 시작한다는 내용이었다. 역시 이런 디저트 유행의 선두주자는 긴자인가, 처음으로 그곳에서 크림소다를 먹었을 때를 떠올리며 미즈키는 게게로를 불렀다.
“게게로, 너 파르페 먹어본 적 있어?”
“응? 그건 처음 들어보는 음식이로고.”
“식사는 아니고 디저트인데, 이렇게 생긴 거야.”
잡지를 펼쳐 게게로를 보여주자 게게로는 잡지를 가져가선 진지하게 칼럼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음식을 층층이 쌓아 만드는 겐가. 수고로워 보이는군.”
“어떻게 조리하느냐보다는 얼마나 신선한 과일을 수급하느냐가 문제일 것 같은데, 일일 한정 수량으로 팔면 나쁘진 않을….”
파르페에 관해 설명하면서 슬쩍 게게로를 보았다가 미즈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만났을 때는 홀쭉하던 볼살이 요새 들어 그의 아들만큼이나 통통해 보였다.
그냥 내 착각인가? 미즈키는 파르페 칼럼을 진지하게 읽는 게게로를 쳐다봤다가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 확실히 살이 쪘다. 무려 옆구리살이 잡힐 만큼. 미즈키는 머리에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음? 왜 그러나 미즈키?”
“게게로. 내가 설마 해서 말하는 건데….”
미즈키는 자신이 말하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 살찐 거 같다?”
유령족도 살이 찐다
“네, 쪘네요.”
요괴병원 원장은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되냐는 듯 피곤에 찌든 얼굴로 진단을 내렸다. 찬물을 냅다 뒤집어쓴 사람들처럼 미즈키도 게게로도 충격에 입을 떡 벌렸다. 어째 유령족이 아들을 낳을 후로 자꾸 이상한 일에 꼬이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원장은 안경을 벗고 미간을 문질렀다. 미즈키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요괴도 살이 찐다고요?”
“뭐 보통의 요괴는 요력을 필요 이상으로 흡수했을 때 살이 찌지만…, 유령족 나리는 인간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쪘네요.”
“그, 그렇게 많이 먹지 않았네!”
“맞아! 이 녀석은 다섯 숟갈 정도 먹으면 물린다고 젓가락을 내려놓는다고요!”
원장의 무신경한 말투에 게게로와 미즈키가 동시에 반박했다. 에헤이, 이 양반들이 노망이 들었나 왜 이렇게 고집이 세졌지. 원장은 다시 안경을 쓰면서 두 사람에게 말했다.
“혹시 인간 음식을 과식할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한 달에 한 번 정도? 한정메뉴나 신메뉴 결정할 때 별 네 개를 받을 때까지 먹였지.”
“음, 미즈키의 음식은 내 입에 잘 맞아서 웬만하면 두 번 만에 별 네 개를 주었지만.”
그러고 보니 저 인간 양반이 식사를 겸하는 카페를 한다고 했던가. 알 만하다고 생각하며 원장은 그들을 똑바로 바라본 채 말했다.
“바로 그 부분입니다. 정기적으로 인간 음식을 과식했으니 살이 안 찌고는 못 배기죠.”
“아하….”
“그럼 앞으로 인간 음식을 줄여야 하나?”
“인간 음식을 줄이는 게 만사가 아닙니다. 인간도 살이 너무 찌면 쉽게 지치고 능률이 떨어지듯이 요괴도 인간 음식을 과식해 체중이 늘어다면 오히려 요력이 떨어져 건강을 해칩니다.”
요는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소리군. 여전히 자신은 미즈키의 음식 외에 다른 인간 음식은 손을 대지고 않았다며 현실부정 중인 게게로와 달리 미즈키는 빠르게 납득하고 원장에게 물었다.
“혹시 요괴는 다이어트를 어떻게 합니까?”
“자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나!”
“현실은 현실이야 게게로. 일단 사실을 받아들여야 어떻게 해결할지를 찾지.”
“뭐 아주 간단하게는 단식이 있죠. 요괴는 한 달 정도 굶는다고 신진대사에 문제가 생긴다거나 하지 않으니 대부분 환자에겐 이 방법을 추천합니다.”
“그렇대 게게로.”
“뭣이라!”
잔인하기까지 한 진단을 덤덤하게 말하는 원장도, 그것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제게 전달하는 미즈키도 다 적처럼 보였다. 살이 쪘으니 그만큼 빼야 한다는 데엔 동의하지만 그러면 아예 미즈키의 요리를 먹지 말라는 건가! 게게로는 차라리 죽여달라고 읍소하고 싶었다. 다행히 게게로 편인 원장이 차선책을 알려주었다.
“뭐, 다른 방법도 있죠. 물 좋고 산 좋은 곳에 칩거하면서 거기에서 나는 것만 먹는다거나.”
“오오! 그건 조리해서 먹어도 되나?”
“뭐 그냥 굽거나 삶는 정도라면 괜찮겠죠.”
“좋아, 빨리 돌아가자 게게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미즈키가 자리에서 일어나 게게로를 끌고 병원 밖으로 나갔다. 계산을 잘 하는 그는 진료실을 나가기 전 동전 몇 닢을 내려놓고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원장은 미즈키가 낸 진료비를 바짓주머니 안에 쑤셔 넣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창문을 열고 밖을 향해 담배를 한 모금 빤 다음, 원장실과 접수처를 잇는 문을 열고 직원에게 말했다.
“다음 손님 들어오라고 해.”
예상에 없던 아버지들의 방문 소식에 키타로는 조금 분주해졌다. 먼지가 잔뜩 앉은 집을 빗자루로 쓸고 물걸레로 닦고, 두 사람을 위한 이불과 식기도 꺼냈다. 담배를 즐겨 피는 두 사람을 위해 인간을 도운 대가로 받은 돈으로 담배도 한 보루 사두고 재떨이도 미리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방석도 두 개나 미리 챙겨둔 뒤 키타로는 다소곳이 앉아 아버지들을 기다렸다. 집 청소를 도와준 네코무스메가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몇 년 만에 보는 거지? 3년 만인가?”
“미즈키 씨가 가게를 열었을 때 뵈러 간 게 마지막이니까, 그 쯤 되었네.”
“나도 빨리 뵙고 싶다. 미즈키 씨 핫케이크 진짜 맛있는데.”
네코무스메가 웃으며 말하자 키타로의 입에도 잔잔하게 미소가 걸렸다. 잠시 후 두 사람 분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더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키타로와 네코무스메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로 향했다. 캐리어며 보따리를 바리바리 싸고 온 아버지들이 마당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3년 전과 변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키타로는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가 생각보다 많은 짐에 움찔했다.
“잘 지내셨어요, 미즈키 씨.”
“응. 너는 별 문제 없었고?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어?”
“힘들 때도 있긴 하지만 버거울 만큼은 아니에요.”
“암, 누구의 아들인데. 어떤 고난이든 훌륭히 헤쳐나갔을 거라 믿는단다.”
“그래도 못 하겠으면 말 해. 하루종일 따뜻한 코타츠 안에서 뒹굴거리면서 어리광부리게 해줄 테니까.”
미즈키는 호쾌하게 웃으면서 키타로에게 작은 짐 몇 개를 맡겼다. 키타로는 짐 두세 개를 능숙하게 쌓아 한 번에 들어올렸다. 네코무스메도 마당으로 내려와 짐 옮기기를 거들었다. 네코무스메는 아버지들의 짐을 훑어보고는 물었다.
“그런데 꽤 이것저것 들고 오셨네요. 얼마나 머물다 가실 거예요?”
“음, 일단은 한 달 정도 신세를 질까 싶은데.”
“하, 한 달이요?”
미즈키가 툭 뱉은 말에 키타로는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이제 늦잠이나 끼니 거르기는 글렀네. 예민한 반응에 게게로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으나 키타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수고했어. 일단 이것 좀 먹고.”
짐 정리가 얼추 끝나자 미즈키는 소중히 들고 있던 보따리를 풀고 종이 상자를 열었다. 내용물을 본 네코무스메가 탄성을 터트리며 눈을 반짝였다.
“크레페잖아! 직접 만드셨어요?”
“출발 직전에 만들었지. 좀 뭉개지고 식긴 했는데, 한 번 먹어봐.”
네코무스메는 콧노래를 부르며 찬장에서 가장 예쁜 그릇과 접시, 찻잔을 꺼내 티타임을 준비했다. 그 사이 키타로는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한정 메뉴나 신상 메뉴를 정할 때마다 너희 아버지에게 이것저것을 먹였더니 살이 필요 이상으로 쪘다, 그래서 일종의 다이어트 겸으로 이곳에 지내면서 자연산 재료로 만든 음식만 먹기로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크레페를 먹던 키타로와 네코무스메는 조심스럽게 포크를 내려놨다. 미즈키가 다시 그들의 손에 포크를 쥐여주면서 자상하게 말했다.
“물론 너희한테는 해당 안 되는 이야기야. 어쩌다가 한 번 먹는 거잖아.”
“그런데 키타로는 미즈키 씨와 같이 살 때 더 많이 먹지 않았나요? 그런데 왜 아무 문제 없었을까요.”
“그야 키타로의 이유식 담당은 이 녀, 아니 게게로 담당이었으니까.”
미즈키가 게게로를 가리키면서 말하자 그는 당당하게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만들었다.
“도시에서 개구리와 곤충을 구하기가 그리 힘들 줄은 몰랐네. 길을 지나가는 어린애들에게 괴한 취급을 받기도 했지….”
“그래, 그래서 동네에 어떤 소문이 났는지 알아?”
다시 생각해 봐도 괘씸해 미즈키는 괜히 게게로의 볼을 잡아당겼다. 으엥, 미즈키이. 게게로가 우는 소리를 해도 미즈키는 봐주지 않고 꼬집은 채로 몇 번 흔들다가 놔주었다. 빨갛게 부은 부분을 게게로가 문지르는 동안 미즈키는 키타로에게 통보했다.
“그래서, 저 살이 다 빠질 때까지 이곳에서 지내기로 했어. 미안하다, 신세 좀 질게.”
“아, 네. 그럼 카페 일은 어떻게 하고요?”
“숲 입구에 오토바이를 대놨으니 괜찮아. 좀 더 멀어졌지만 수고 좀 해야지.”
미즈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게게게의 숲과 미즈키의 가게는 거의 반대 방향에 있다. 정말 아버지 살을 빼기로 작정하셨나 보네. 키타로는 다 먹은 크레페를 치우면서 나름의 결의를 담아 말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저도 도울 테니까.”
“하하. 그러니까 훨씬 힘이 되는걸. 안 그러냐 게게로?”
“우우, 괴롭지만 키타로까지 저리 가세하니…. 내 힘을 내보겠네.”
“아, 그래서 크레페 맛은 어때? 이번 한정 메뉴로 파르페랑 크레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데.”
방금 전까지 신나게 다이어트 계획을 이야기하다가 미즈키는 고개를 돌려 네코무스메와 키타로에게 물었다. 정말로 맛있어요, 대답하면서 삼킨 크레페 덩어리가 목에 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요괴의 다이어트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개인의 의지력이라는 진부한 대답은 차치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인간의 음식을 멀리하는 것이리라. 게게게 하우스로 거처를 옮김으로서 첫 번째 조건은 이미 갖추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열쇠는 무엇인가. 바로 깨끗한 물과 자연에서 나는 식재료다. 특히 새벽 이슬이 효과가 가장 좋다. 신성한 존재일수록 이슬만 먹고 살 수 있다고 하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에 살짝 비극이 있으니 게게로는 이슬이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살을 빼고 영력을 되찾아야 하는 마당에 개인의 음식 호불호가 대수랴.
그런 이유로 게게로는 벌써 보름째 이슬만 먹고 있었다. 물론 처음 며칠 동안 마셨을 때는 머리가 맑아지고 속이 개운해지는 느낌에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주일째 같은 음식을, 심지어 아무 맛도 나지 않고 양도 적은 이슬만 먹으니 질리기 시작했다. 게게로는 떨떠름한 얼굴로 열심히 모은 이슬을 마시면서 미즈키에게 은근슬쩍 수작을 걸었다.
“미즈키, 벌써 보름째네.”
“응. 그야 달력을 보면 알지.”
“보름 동안 아침으로 이슬만 먹고 버텼으니 이제 슬슬 상을 줄 때가 되지 않았나?”
미즈키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게게로를 쳐다보다가 불시에 옆구리를 꼬집었다. 아프다고 게게로가 깽 비명을 질렀으나 미즈키는 개의치 않고 옆구리를 주물거렸다. 여전히 살이 잡힌다. 에전에는 영혼까지 끌어모아야 잡힐까 말까 했는데 말이지. 미즈키는 살을 놓아주고 쓴말을 돌려주었다.
“아직 안 돼. 이만큼이나 잡히는데. 더 빠지면 생각해볼게.”
“크으윽…!”
미즈키가 손가락으로 표시한 제 살을 보고 게게로는 분한 신음 소리를 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게 다 미즈키가 실험이라는 명목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제게 먹인 인간의 음식 탓인데. 원인제공자는 여유롭게 아침용 오니기리나 먹고 있었다.
“그럼 다녀올게. 게게로가 반죽에 손 안 대게 조심하고.”
“다녀오세요.”
미즈키는 키타로에게 신신당부를 한 뒤 헬멧과 자켓을 걸치고 하우스 밖으로 나갔다. 누리카베가 그를 숲 입구까지 안내하러 나간 사이, 키타로는 방으로 돌아와 담배를 입에 물고 포스트 작업을 이어갔다. 게게로도 옆에 앉아 아들의 일을 도왔다. 게게로가 고민 끝에 미즈키의 곁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요괴 포스트는 부자가 공동으로 운영하고 의뢰를 받아 해결했다. 게게로는 편지 봉투를 찢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편지를 확인하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그러게요. 그 후로는 제가 전담했으니까요. 그 퇴마사는 요즘 어떻게 지낸대요.”
“그는 그대로 바쁜 일상을 보내는 듯하이. 3년 전에 미즈키를 위해 위조 운전면허증을 따온 후로는 이쪽도 감감무소식이라.”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요.”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편지를 분류했다. 들어오는 의뢰마다 내용이 다양했다. 누가 도토리를 훔쳐 갔다는 다람쥐와 케이블카 설치를 막아달라는 텐구들. 실종된 친구를 찾아달라는 초등학생과 아내가 요괴에게 홀려 밤마다 어딘가로 나가는 것 같다는 남자. 게게로는 그 남자의 편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키타로에게 보여주었다.
“이 이야기, 어떻게 생각하느냐?”
키타로는 아버지가 건넨 편지를 찬찬히 훑다가 어떤 대목에서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누가 봐도 아내가 수상한대요. 아내가 만난다는 사람도….”
“음, 요괴에게 홀린 사람은 아내가 아니라 남편 같구나. 지금 당장 상태를 봐야겠어. 잇탄모멘을 불러다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부자는 표지에 ‘승(承)’이라는 도장을 찍고 접수한 의뢰를 모아놓는 서랍에 넣었다. 게게로는 잇탄모멘을 부르러 창가로 갔으나 키타로가 그를 불렀다.
“뭐하시려고요 아버지?”
“잇타모멘을 불러 가려고 한다. 나고야라 시간이 꽤 걸릴 게야.”
“음, 그런데….”
키타로는 아버지를 위아래로 훑었다가 미즈키의 말을 떠올리고 결심한 듯 충언을 했다.
“살을 빼려면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윽.”
게게로는 뜨끔했다가 제 뱃살을 내려다보고 한숨을 폭 쉬었다. 그래, 식단만으로는 살을 뺄 수 없다. 몸을 조금이라도 더 움직여야 살이 빠지고 그 자리르 영력이나 요력이 대신할 것이다. 그러나 살이 찌니 몸이 무거워져 한 걸음이라도 아끼고 싶어지고 게을러져 종국에는 몸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어떻게든 편하게 이동하려고 하고 빠른 수단을 선택하게 된다. 홀쭉하던 시절 게게로라면 무작정 걸어서 갈 거리를 잇탄모멘의 도움을 받아 가려고 하는 것이 그 방증이다.
게게로도 그 만고의 진리를 모르는 건 아니다. 실제로 보름 동안 별 일이 없어도 게게게의 숲을 돌아다니고 매일 미즈키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그의 가게로 마중을 나갔다. 하지만 미즈키의 가게도 게게게의 숲도 모두 충분히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 아닌가. 도쿄에서 나고야까지 도보로 강행군을 해야 한다니, 게게로는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의 잔소리다. 게게로는 두 손 두 발 들고 창가에서 멀어져 현관으로 향했다.
“매우 피곤한 여정이 될 거 같구나.”
“그래도 인간 요리는 먹으면 안 돼요.”
“아비에게 너무나 매정하구나 아들아….”
부자는 미즈키가 놀라지 않도록 친절히 쪽지를 써놓고 긴 외출에 나섰다.
역시 아내는 요괴였다. 인간을 살찌워 잡아먹을 목적으로 내통자와 짜고 남자를 만나 사귀고 결혼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요괴는 남자와 함께 살며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원래 동료가 남편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남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내인 요괴를 꼭 안아주었다.
“미안해. 네가 요괴든, 인간이든. 나는 너를 사랑해. 그만큼 나를 사랑해서…. 식인을 포기할 만큼 사랑해줘서 고마워.”
“정말로…? 나는 널 잡아먹으려고 했는데도? 그래도 용서해주는 거야?”
요괴는 남자의 품에 안겨 흐느끼며 물었다. 남자는 요괴를 더욱 세 개 안아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설령 네가 인간을 먹고 사는 요괴라고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할 거야. 그야 내가 세상에서 가장 빛난다고 말해주었는 걸….”
요괴는 인간 사냥을 포기하고 대신 다른 육류를 먹음으로써 요력을 채우면서 살기로 했다. 이번 의뢰에서 키타로 부자가 한 일이라곤 납득할 수 없다며 길길이 날뛰던 요괴의 옛 동료를 손가락 대포로 혼쭐내는 것 정도였다.
이제는 필요 없다며 그가 제 손으로 뽑아버린 송곳니와 남자의 의뢰비 5천 엔을 받아 부자는 미즈키의 가게로 돌아갔다. 신호등을 기다리다가 키타로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운을 뗐다.
“미즈키 씨랑 살 때 비슷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어요.”
“그렇게 말하니 생각이 나는구나. 네가 학교에서 1차 산업에 대해 배운 날이었지.”
“‘소나 돼지는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건데, 미즈키 씨도 저를 잡아먹을 거예요?’라고 물었죠. 그때 미즈키 씨가 뭐라 대답했는지 알아요?”
“내가 귀가하자마자 울면서 내 품에 안겨 이르던 말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구나. 미즈키가 널 잡아먹으려고 한다고 와앙 울었지.”
“정확히는 ‘이런, 알아채버렸구나’라고 대답했죠. 놀리려고 한 말이었지만 그때는 정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호호호, 게게로는 웃으며 아들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미즈키의 곁에서 보호를 받고 매일 음식을 풍족하게 먹은 아기는 유년 시절의 자신과 달리 볼이 오동통했다. 미즈키가 볼살을 받치는 시늉을 하면서 ‘어이구, 이거 볼이 아주 그냥 흘러내리겠다’며 터트리던 너털웃음이 지금도 귀에 맴돈다. 미즈키는 그것이 제가 키타로를 잘 키우고 있다는 증거라며, 아이가 잘 먹을 때마다 뿌듯하다고 말했다.
역시 아이가 통통한 것과 어른이 살이 찌는 건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미즈키가 처음으로 살찌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그가 짓던 알쏭달쏭한 표정을 기억한다. 이런 애가 아닌데,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 역시, 인간이든 성체든 살찐 것은 그리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는 거지. 그러나 이번에 만난 요괴는 살이 점점 차는 남자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단순히 개인 취향의 문제인 걸까. 미즈키는 살이 붙은 남성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걸까?
“음, 키타로야. 아비가 하나 물어볼 것이 있다만.”
“네?”
게게로는 미즈키의 가게 근처 골목에서 멈추어 서서 몸을 한껏 숙이며 아들에게 귓속말했다.
“혹시 미즈키는, 살찐 아비를 귀찮아 하는 걸까?”
“…네?”
마치 잘못 들은 것 같다며 멍하니 굳은 얼굴에 게게로도 의문이 번졌다. 키타로는 괜히 주변을 둘러봤다가 까치발을 들어 아버지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 아버지께서 이슬을 모으러 가셨을 때 미즈키 씨가 제게 했던 말인데요….”
자신이 모르는 미즈키의 말을 들은 게게로의 눈이 개구리처럼 커졌다가, 이내 입술에 잔잔하게 미소가 걸렸다. 한껏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게게로가 나긋하게 물었다.
“그래, 미즈키가 그렇게 말했다고.”
“네. 다만 병원 선생님의 말을 듣고 반성을 많이 했다고, 내가 만족한다고 다가 아닌데 그걸 간과한 자기가 바보 같다고 그랬어요.”
“흠흠, 그렇단 말이지.”
칭찬을 들은 건 아닌데 게게로는 기분이 좋아져서 한결 가벼운 걸음걸이로 앞장서서 갔다. 또 미즈키 씨에게 엉겨붙겠네. 키타로는 반쯤 포기하고 그를 뒤따라갔다. 게타 소리 두 짝이 낭랑하게 골목에 울렸다.
“미즈키~. 들어가도 되나?”
“어, 게게로. 집으로 바로 갈 줄 알았는, 왁!”
부엌을 정리하던 미즈키는 갑작스런 게게로의 포옹과 애정공세에 크게 휘청거리다 바로 균형을 잡았다. 뒤따라 들어온 키타로에게 바로 인사를 한 다음 미즈키는 게게로의 머리를 밀어냈다.
“정리 중에 갑자기 껴안지 말라고 누누이 얘기했잖아!”
“후후, 미즈키. 내가 살이 쪄서 은근히 뿌듯했나?”
“뭔 소리야!”
“부정해도 소용없네. 키타로가 전~부 말해줬다네.”
“뭐? 키타로, 비밀로 해달라고 했잖아!”
미즈키가 얼굴을 붉히며 키타로에게 따졌지만 아들은 고개만 휙 돌리고 자리에 앉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와중에 게게로는 열심히 미즈키는 끌어안은 채 좌우로 흔들면서 들뜬 기분을 마구 표출했다.
“그랬군, 하긴 자네는 외식할 때마다 유독 뿌듯해 보이긴 했어. 우리가 먹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느낀 거로군?”
“당연한 거 아냐? 나도 키타로 아버지거든?”
이제 좀 떨어지라며, 아직 할 일이 잔뜩 있다며 미즈키는 다시 매몰차게 게게로를 밀어냈다. 한참 미즈키를 귀여워한 후에야 게게로는 그를 놓아주고 키타로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 어지러운지 머리를 한 번 턴 미즈키는 자신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부자를 바라보다가 못 이기겠다는 듯이 슬쩍 물었다.
“…뭐 먹고 갈래?”
“크레페! 나도 크레페가 먹고 싶네!”
너는 살을 빼야 한다며, 라고 잔소리를 할 뻔하다가 미즈키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벌써 삼 주 째 말도 안 되는 다이어트 계획에 장단을 맞추어주고 있는데 한 번 정도는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안 그래도 게게로에게 신상 메뉴를 맛보게 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미즈키는 시선을 키타로에게 돌려 물었다.
“키타로 너는?”
“저도 언제나 핫케이크요.”
“그래, 기다려봐. 오늘은 특별 서비스로 핫케이크 다섯 장에 크레페 두 개다! 과일이랑 생크림도 잔뜩 올려주지!”
“역시 미즈키가 최고일세!”
게게로는 한껏 들떠 박수를 쳤다. 철 든 아들은 갑자기 신이 난 아버지들의 기분을 따라가지 못하고 혼자 옅은 한숨을 쉬었다가 따라 미소를 지었다. 역시, 조금은 유치한 아버지들이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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