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족의 인간 (中)
게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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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게로는 뿌듯한 마음만큼 가득 찬 산딸기 바구니를 들고 거처로 향했다. 이걸 들고 집으로 돌아가면 모두가 반겨줄 것이다. 미즈키는 ‘웬일로 네가 이렇게 열심히 따왔냐’고 감탄할 테고, 이와코는 ‘고마워요 당신’하면서 눈물을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들 앞에서 어깨를 당당히 펴고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자네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네’라며 이와코에게 다시 한 번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이와코는 다시 자신과 사랑에 빠질 것이며, 그렇게 둘째 계획을…. 귀가하는 게게로의 입꼬리는 아주 귀에 걸릴 정도였다.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바보 같은 표정이 된 게게로를 보고 지나가던 땅두더쥐 요괴가 제 새끼에게 수군거렸다. 얘야, 저런 요괴가 되면 안 된다.
게게로는 자신을 보고 바보라고 부르는 놈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직 사랑을 몰라서 그러는 게야. 언젠가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면 그대들도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모든 것이 행복하게 느껴지겠지! 웃음이 나오지 않을 리 없을 걸! 그리고 이 말은 게게로가 미즈키를 만난 이후 술을 마실 때마다 꺼내는 잔소리이기도 했다. 미즈키여, 나도 예전에는 이 세상이 한심하게 보였네. 도무지 사랑스럽게 봐줄 수 없었지. 하지만 내 아내는 나와 달리 사랑으로 넘치는 존재라네. 그를 만나고 나는 무언가를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그제야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지! 그대도 분명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나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열 살까진 이 술주정을 얌전히 들어주던 미즈키는 그 후로 제 말을 도무지 귀담아 들어주질 않았다. 인간의 반항기란 무섭구나, 하지만 그대는 언젠가 알게 되겠지. 나와 이와코가 사랑으로 기른 인간이니까 말이야.
휘파람을 부르며 마당으로 들어가니 툇마루에 누워 자고 있는 이와코가 보였다. 게게로는 그와 그의 배를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우리 아기, 건강하게 자라고 있구나. 하지만 어머니를 너무 괴롭히지 말렴. 게게로는 부인을 행복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툇마루 아래, 신발 놓는 곳을 보고는 잠깐 멈칫했다. 지금쯤 귀가했어야 할 미즈키의 신발이 없었다. 누레온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건가? 하지만 누레온나가 분명 유시 전에는 돌아올 거라고 했는데.
게게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마루에 바구니를 내려놓고 무릎 걸음으로 이와코에게 다가갔다. 부드럽게 손으로 뺨을 감싸자 이와코가 살며시 눈을 떴다. 다녀왔어? 그녀가 조금 지친 목소리로 웃으면서 게게로를 마주본다. 게게로는 사랑스럽게 웃으며 이와코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녀왔네, 그대.”
“어서 와. 어라? 미즈키는?”
“역시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건가? 벌써 유시 끝무렵이건만.”
“뭐? 이제 술시가 다 되어가는데?”
이와코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가 윽, 소리를 내면서 다시 누웠다. 아이가 놀라 울음을 터트린 모양이다. 게게로는 이와코의 뺨에 입맞춤을 하곤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술시 전에는 집에 돌아와야 해. 밤에 나타나는 요괴는 모두 성질이 고약해서 인간을 괴롭히거나 먹으려 드니까. 이와코가 미즈키에게 첫날부터 빠짐없이 하던 말이었고 미즈키는 단 한 번도 그 말을 어기지 않았다. 요괴들이 잡일을 부탁하더라도 술시 전에는 돌아가야 한다고 늘상 말하던 그였는데. 어째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10년이다. 요괴에게는 찰나만큼 짧은 시간이지만 인간에게는 긴 시간이고, 어느 새 인간이 제 곁에 있는 것이 익숙해진 게게로에게도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그 10년. 게게로가 미즈키를 가족의 일부이자 제 아들처럼 대해온 10년이자, 미즈키가 게게로에게 있어 아내와 곧 태어날 자식만큼이나 소중한 존재가 된 10년.
게게로는 낮아진 목소리로 이와코에게 말했다.
“미즈키를 찾아 오겠소.”
유령족의 인간 (下)
“미즈키?”
히노엔마가 게게로의 질문에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환하게 웃었다. 히노엔마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아, 알지. 너희 부부가 키우는 인간 남자. 인간 남자가 아직 남아 있는 줄 알았으면 내가 데려다가 귀중하게 키워줬을 텐데.”
“그대는 인간을 식량으로만 보지 않은가.”
“쳇. 설마, 내가 그놈을 납치했다고 생각해서 온 거야?”
히노엔마가 버럭 성을 냈다. 그러면 남성의 정기를 빨아먹는 그대 외에 누가 또 미즈키를 납치하겠는가…. 게게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즈키를 싫어하는 요괴도 있지만, 게게로와 이와코의 눈치 때문에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그런 미즈키에게 안 좋은 의미의 호감과 혐오를 표현하는 이는 이 마을에서 단 셋 정도인데, 그중 하나가 히노엔마다. 게게로가 히노엔마를 의심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히노엔마는 억울하다는 듯이 싸릿비로 땅을 탕탕 두드리면서 항변했다.
“어린 인간 남자가 술시가 되도록 밖에 있다는 걸 알았으면 내가 먼저 밖에 나가서 염탐하고 있었겠지! 아아! 대체 누가 데려간 거람?”
“뭐…. 반응을 보니 자네가 아닌 건 확실한 모양이군.”
“알았으면 썩 꺼져. 이 참새들도 같이 데려가던가.”
히노엔마는 싸릿비로 곡식 낟알을 노리는 참새를 쫓아내면서 말했다. 게게로는 그 기세에 살짝 풀이 죽어 참새들에게 말했다. 그만 하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게나. 밤은 그대들에게도 위험한 시간이야. 참새 남매가 짹짹대며 게게로의 어깨에 붙었다. 누이 쪽이 속삭였다.
‘눈이랑 귀에 흉터 있는 인간을 찾고 있어?’
“혹시 짐작 가는 구석이 있는가!”
히노엔마는 자신의 마당에서 물러나지 않고 참새와 대화를 시작한 게게로를 탐탁잖게 쳐다봤다. 이번에는 남동생 쪽이 게게로의 왼쪽 어깨에 내려앉으며 말했다.
‘그 인간은 있어, 누레온나의 창고에.’
“누레온나가 가두었나?”
‘서둘러. 누레온나의 새 식구가 그를 먹으려고 해.’
누이 쪽이 날개를 파닥이며 경고했다. 게게로는 고맙다고 큰 소리로 외치며 몸을 돌렸다. 히노엔마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뭐야, 뭔데. 무슨 일인데.”
“이만 가보겠네!”
“야!”
히노엔마가 발을 굴렸으나 이미 게게로는 그의 마당을 떠난 뒤였다.
머리가 찡하고 울린다. 아무래도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모양이다. 얌전한 녀석들 같았는데, 대체 왜…. 미즈키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으려다가 손이 묶여 있음을 깨달았다. 젠장, 입에서 저절로 욕이 나왔다. 아무래도 물귀신들이 기절시킨 다음 묶어둔 것 같다. 십중팔구 잡아먹으려고 이러는 거겠지. 유령족과 함께 산 후로 자신에게 불쾌함이나 적대감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요괴는 있어도 직접적으로 해하려는 이는 없어 방심하고 말았다. 항상 조심했어야 했는데, 방심하고 말았다.
팔을 크게 뒤틀었으나 손이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꽉 조이는 바람에 거친 새끼줄에 살갗이 스쳐 따가웠다. 손가락을 꼼질대 매듭을 풀어보려 했으나 잘 잡히지 않았다. 미즈키는 그들이 제 옷을 뒤지지 않았기를 바라며 손을 틀어 오비를 더듬었다. 다행히 오비 매듭 사이에 숨겨둔 단검이 남아 있었다. 혹시 몰라 이와코가 호신용으로 준 단검이었는데, 역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귀신이라 그런지 이런 부분에서 어설펐다. 덕분에 빠져나갈 구멍은 하나 생겼다.
미즈키는 손을 이리저리 틀어 새끼줄을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다시 오비 매듭 사이에 단검을 숨긴 다음 손목을 매만졌다.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다. 미즈키는 앉은 채로 주변을 살폈다. 부엌 뒤쪽 창고인 듯 동물 사체가 쌓여 있었다. 켜여이 쌓인 멧돼지 위로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으나 창살이 네 개 박혀 있었다. 저걸 단검으로 자르거나 손으로 뜯어낼 수 있을까.
미즈키는 창문 밖을 유심히 살피다가 날이 어둑해진 것을 보고 절망했다. 저 상태면 최소 술시다. 해가 지는 술시부터는 위험한 요괴가 지나다닌다며, 이와코와 게게로는 절대 그 시간에 밖에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미즈키도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얻은 교훈과 지식이 있었기에 그 말만은 철저하게 지켰다. 누레온나네에 왔을 때가 신시였는데 벌써 술시라니. 미즈키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밖에도 안에도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요괴밖에 없다니. 심지어 누레온나의 집에서 게게로의 집까지는 전력질주를 해도 일각이 걸린다. 그 사이에 요괴에게 잡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긍정적인 생각을 해보자면 게게로가 자신을 찾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술시가 되도록 귀가하지 않았으니 곧 이쪽으로 오리라. 그런 생각을 하다가 미즈키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지금쯤이면 누레온나가 와 있을 텐데, 내 기운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고? 누레온나가 자신에게 쌀쌀맞게 굴더라도 그럴 요괴는 아닌데.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을 때 밖에서 게게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고했네. 비키게나 누레온나.”
“왜 이러실까. 너희 인간이 집에 들어가지 않은 건데 왜 애먼 우리를 탓하나.”
누레온나는 여전히 제겐 잘못이 없다는 듯 뻔뻔하게 굴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누레온나 탓은 아니다. 누레온나의 새 식구들이 멋대로 벌인 일이니까. 그러나 미즈키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멀쩡히 인간의 기척이 창고 쪽에서 느껴진다는 걸 알면서 저리 시치미를 뗀다고? 이래서 요괴는 믿으면 안 돼. 미즈키는 어머니가 옛날에 해준 말을 곱씹었다. 아직 미즈키가 세 살일 때, 그들은 한 요괴를 만났다. 그 요괴는 미즈키네에게 친절했고, 이따금 먹을 것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의인 줄 알고 부모님은 요괴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러나 앙상했던 몸이 회복되자마자 요괴는 가족을 잡아먹으려 들었다. 아버지가 미끼가 되지 않았으면 모두 죽을 뻔했다면서, 어머니는 미즈키의 왼쪽 눈가에 남은 흉터를 매만지며 말했다. 00아, 요괴를 믿지 마렴. 그들은 언제나 너를 잡아먹을 궁리만 하고 있단다. 그들은 우리를 미워하지만, 그들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아.
설마 게게로도 누레온나의 말을 믿고 가버리는 거 아닐까. 그러면 난 어떻게 되지? 이대로 가만히 물귀신에게 잡아 먹혀야 하나? 물귀신은 먹잇감을 녹여 먹는다는데. 미즈키는 서둘러 멧돼지 시체를 밟고 올라가 창살을 살폈다. 다행히 창살은 낡아 조금만 흔들면 빠질 것 같았다. 미즈키는 창살을 잡고 위에서 창고를 둘러봤다. 땔감 옆에 도끼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크기로 보아 창문 밖으로 가지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즈키는 멧돼지 시체에서 내려와 도끼를 집어 들었다. 이게 있으면 사악한 요괴를 만나도 저항은 할 수 있겠지. 미즈키는 가만히 숨을 골랐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잘 살아 남았잖아. 미즈키는 멧돼지 시체를 잡고 올라가려고 했다.
밖에서 다시 소란이 들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창고 문이 부서지면서 새하얀 실타래 같은 것이 창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절반 정도 올라온 미즈키는 놀란 나머지 가죽을 놓치고 아래로 떨어졌다. 으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등에 닥칠 충격을 기다리는데 폭신한 무언가가 그를 잡아주었다. 미즈키는 꾹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떠 상대를 바라봤다. 아, 왜 이와코가 울보라고 놀렸는지 알 것 같다. 미즈키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늦었잖아, 게게로.”
저렇게 눈물을 퐁퐁 흘리고 있으면서 그렇게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게게로는 유카타 소매로 눈가를 슥 훔치고는 미즈키의 품에 파고들듯이 안겼다.
“정말로 먹힌 줄 알았단 말일세….”
“안 먹혔잖아. 그럼 된 거 아냐?”
덩치만 커다랗지 하는 짓은 영락없는 강아지다. 낑낑대는 그를 달래다가 뒤에 서 있는 누레온나와 마주쳤다. 물귀신들에게 둘러쌓여 있는 누레온나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무표정에 미즈키는 몸속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자신을 싫어해서 감금을 묵인했는지, 아니면 정말 이곳에 있을 줄 몰라서 놀란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미즈키의 눈을 오랫동안 응시한 후에야 누레온나가 물귀신들을 돌아보며 타박했다.
“손님에게 무례하게 굴면 안 되지.”
“하지만 햇볕 냄새가 났어.”
“햇볕 냄새가 나는 건 먹어도 된다고 했잖아.”
누레온나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물귀신들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게게로는 미즈키를 등에 업은 채로 문쪽으로 걸어가 여느 때보다도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키게. 난 이제 집으로 돌아갈 테니.”
“흥. 아무튼 난 관계 없어. 알지?”
“그건 차차 알게 될 걸세.”
게게로는 더 말하지 않고 물귀신을 통괴해 지나갔다. 한 물귀신이 미련이 남은 듯 미즈키의 발목을 잡았으나 게게로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려 딱밤을 놓았다. 온몸이 물로 된 귀신을 때리는 게 가능하구나, 엉뚱한 데에서 감탄한 미즈키는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저기, 화났어?”
“그럴 리가 있나.”
게게로는 즉답했지만 미즈키는 그의 분노가 아직 풀리지 않았음을 그 한마디로 바로 깨달았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 있다면 자신이 아닌 누레온나에게 화가 났다는 점이었다. 만약 정말로 내게 화를 냈다면…. 이와코 씨 눈치가 있어서 죽이진 않겠지만 쫓아낼지도.
이미 술시도 거의 다 지나가 하늘에는 달과 별이 제 빛을 뽐내고 있었다. 머리 위로 희뿌옇게 지나가는 은하수가 운치를 더했다. 하지만 밤하늘의 무수한 반짝임도 그들 가는 길을 환히 비춰주진 못했다. 요괴인 게게로에겐 낮과 다를 게 없겠지만, 인간인 미즈키에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길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거나, 작은 요괴가 튀어나오면 미즈키는 화들짝 놀라며 게게로의 등에 몸을 바짝 붙였다. 그러다가 단순한 들짐승이거나 먼지요괴처럼 하찮은 것임을 알게 되면 바로 몸을 뗐다. 게게로는 그 긴장하고 부끄러워하는 움직임 모두를 선명하게 느꼈다. 게게로는 어느 새 화가 가라앉아 나른해진 목소리로 미즈키를 달랬다.
“괜찮네. 여차하면 내가 다 해치워줄 테니.”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더 무서운데.”
미즈키가 어색하게 웃었다. 게게로는 그의 무거운 마음을 알아차렸다는 듯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이번 일은 그대 탓이 아니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말게.”
“어어…. 그래도 누레온나가 그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참 슬픈 일이다. 그 누구도 쉽게 믿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건넬 수 없다는 건. 세상엔 여전히 나쁜 놈이 있지만, 그보다 좋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실감하고 있었는데. 미즈키는 방금 전 제가 한 가정을 떠올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게게로는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내가 무엇보다 염려하는 건, 자네가 이번 일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거야. 난 그게 제일 두렵네.”
미즈키와 비슷한 고민을 게게로도 하고 있었다. 이번 일로 미즈키가 요괴에게 상처 받아 영영 떠나버린다면 그것이 더 슬플 일이다. 수백 번의 호의보다 한 번의 악의가 더 해롭다는 것을 게게로는 알고 있었다. 미즈키는 여전히 호의보다 악의에 더 익숙한 사람이었고 그런 미움을 받을 때마다 태연한 척 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깊은 상처를 입곤 했다.
게게로는 이 작은 인간이 보여주는 온갖 희노애락이 재미있었고 그가 해코지를 당하고 돌아와 하루종일 제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이와코와 함께 그 앞을 지키며 미즈키가 나와주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곤 했다. 그렇게 계속 들여다 보고 관심을 주니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게게로는 그가 이 세상을 조금 더 좋아하기를 바라게 되었고 그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좋은 것을 잔뜩 보며 상냥한 사람이 되었으면 했다.
아무래도 누레온나의 일은 다른 요괴들과 상의해 결정해야 되겠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등 뒤를 노리는 저 텐구도. 게게로는 경고하듯 등 뒤를 흘겨봤다. 새빨간 점처럼 빛나는 오른쪽 눈을 보고 텐구가 날개 소리를 펄럭이며 사라졌다.
“어서 가지. 그대를 찾느라 내 아내도 먹고 싶은 산딸기를 바라만 보고 있을 테니.”
“그럼 네가 빨리 가든가.”
“호오, 그 말 진심이렸다?”
“아냐, 잠깐만, 야!”
갑자기 제자리에서 아득하게 뛰어오른 게게로 때문에 미즈키는 질겁하며 유카타 자락을 꽉 쥐었다.
“저기, 게게로. 정신 사나우니까 그냥 가만히 앉아 있지?”
“그, 그치마안…. 유령족의 경우 아이를 낳다가 죽는 경우가 종종 있었단 말일세. 이러다가 아내가 잘못되면….”
“걱정도 많으셔. 사토리나 로쿠로쿠비가 알아서 하겠지.”
“으윽, 그래도 말일세….”
산실 앞을 정신 사납게 왔다갔다 하는 게게로를 지적했으나, 미즈키 역시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불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으로 질겅대면서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는 모습을 보면 누가 보더라도 긴장했음을 바로 알아챘으리라. 다만 남겨진 사람이 그 배로 걱정에 사로잡혀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안에서는 이와코가 끙끙대는 소리와 로쿠로쿠비, 사토리가 뭐라 뭐라 하며 출산을 돕는 소리가 났다. 유령족은 모두 이런 건지 아니면 이 아이가 유독 그런 건지, 산통이 시작된 지 다섯 시진이 넘어가고 있는데 아이는 태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두 산파와 산모, 그리고 가족만 진땀을 빼고 있었다.
끝이 다 뭉개질 때까지 담배를 질겅대던 미즈키는 입안으로 들어온 담뱃잎 조각을 뱉어낸 다음, 물고 있던 것을 버리고 새 담배를 꺼냈다. 게게로가 벌벌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나도 한 대 줄 수 있나?”
“불 못 피울 텐데, 괜찮아.”
“지금은 긴장을 덜어줄 게 필요하네.”
미즈키는 또 다른 담배를 꺼내 게게로에게 주었다. 게게로는 그것을 익숙하게 받아 입술로 물었다가, 이상하다는 듯이 미즈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미즈키, 담배를 어디에서 배웠는가? 난 가르쳐준 기억이 없는데?”
“아? 아아, 시라누이가.”
그놈, 참 좋지 못한 것만 가르치는군…. 게게로가 살벌하게 중얼거리자 미즈키가 뭐라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내 앞에서 잘만 담배를 피워댄 주제에. 고개를 돌리고 중얼거리자 게게로가 바로 반박했다. 인간에게 담배가 해롭단 걸 알게 된 후론 피우지 않았네만! 게게로의 호통과 함께 산실에서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울렸다.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괴로워하는 신음에 게게로가 문을 바라보며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이와코! 이와코! 괜찮은가? 어, 빨리 의사를!”
“사토리!”
“걱정 마셔. 이제 머리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과연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진 사토리였다. 미즈키가 묻기도 전에 대꾸하고는 계속 이와코를 달랬다. 게게로는 산실 앞에 주저앉아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다. 선조님, 선조님. 제 아내와 아이를 지켜주세요. 미즈키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중얼거리는 게게로를 내려다 보다가 같이 쭈그려 앉았다. 나는 누구에게 빌어야 하나. 누군가는 가장 급할 때 신을 찾고, 게게로는 조상을 찾는데. 미즈키는 찾을 조상도 신도 없었다. 제 뿌리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살아온 환경 탓에 신을 믿기도 어려웠다.
대신 미즈키는 돌아가신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빌었다. 괘씸하게 인간을 괴롭힌 요괴를 위해 소원을 빌어서 죄송해요, 하지만 이분들은 절 도와줬는 걸요. 여전히 절 나쁘게 보는 이들도 있지만, 이들처럼 저를 친구로 대하는 이들도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안 될까요?
“으아앙! 아앙! 으아아아앙!”
벅차게 숨을 내쉬듯 우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산실 문을 넘어 마당까지 퍼지는 울음소리에 게게로도 미즈키도 환히 미소를 지었다. 태어났다. 아이가, 그렇게 드물다는 유령족의 아이가. 이와코와 게게로의 자식이. 그리고 미즈키의 동생이.
“여보!”
“잠깐! 그렇게 막 문을 열면!”
미즈키가 말릴 새도 없이 게게로는 산실을 열고 이와코에게 뛰어 들어갔다. 아이의 몸을 닦던 로쿠로쿠비가 기겁하며 게게로를 발로 찼다. 바람에 흔들려 떨어지는 낙엽처럼 게게로는 힘없이 나가 떨어져 맞은편 벽 쪽으로 굴러갔다. 어이구, 하고 이와코에게 물을 먹이던 사토리가 혀를 찼다. 그는 게게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온 미즈키를 보고 온화하게 말헀다.
“자, 저게 유령족의 새끼다. 귀중한 경험을 하는구나 인간.”
“새끼가 아니라 아기라고 해야지.”
미즈키는 사토리의 단어에 딴죽을 걸며 조심스럽게 로쿠로쿠비와 이와코에게 다가왔다. 벽에 맞고 튕겨나온 게게로도 벌떡 일어나 사토리를 밀어내고 이와코 옆에 앉았다. 그는 이와코의 손을 잡고 울음을 터트렸다.
“이와코여, 몸은 괜찮은가? 어딘가 아프진 않은가? 고생했네, 그리고 고맙네.”
“너도….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아이는?”
이와코가 두리번대며 여전히 우는 아기를 찾았다. 모쿠모쿠비가 하얀 포대에 둘둘 만 그들의 아기를 보여주었다. 배 앓아가며 낳은 새 식구를 본 순간, 이와코와 미즈키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이와코 씨 유전자 어디 갔어요.”
“어쩜 이렇게 아빠를 빼다 닮았을까!”
“저 녀석 혼자 낳았다고 해도 믿겠네.”
“그, 그래도 이 갈색 머리카락은 내 아내를 닮았네!”
어디를 닮았네, 누구를 닮았네, 들떠 조잘거리는 부부를 보고 미즈키는 기쁨과 동시에 불편함을 느꼈다. 분명 잘 되었는데, 경사스러운 일인데. 왜 이렇게 불편한 건지. 이제 진짜 자식이 태어났다고 이러나. 미즈키는 불현듯 깨달았다. 그들은 미즈키를 자식처럼 키웠지만, 미즈키는 친자가 될 수 없었다. 이제 그들에게 피를 나눈 자식이 태어났으니, 미즈키의 자리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 하나. 씁쓸하게 웃는데 이와코가 아기를 미즈키에게 내밀었다.
“미즈키, 이제 형이네?”
“네?”
“동생인데 한 번 안아 봐야지.”
미즈키는 얼떨결에 작은 생명을 끌어안았다. 으와, 우와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아기가 포대에서 팔을 꺼내 휘적였다. 짧고 오동통한데다 작기까지 한 손. 너무 작아서 손톱과 손가락 마디가 존재하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게게로나 이와코 씨도 그렇고, 나도 이렇게 작은 시절이 있었다고? 미즈키는 이 작고 뜨거우며 물렁한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해 허둥거렸다. 사토리가 다가와서 자세를 교정해줬다 왼손으로는 엉덩이를, 오른팔로는 목을 받치듯 안아주니 열심히 꼼질거리던 움직임이 가라앉았다. 으우, 다시 아기가 손을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내밀자 억센 손아귀로 잡아온다. 이렇게 작고 하찮아 보이는데, 이런 힘이라니. 미즈키는 저도 모르는 새 상기된 얼굴로 아기를 바라봤다. 로쿠로쿠비가 부부에게 물었다.
“그래서, 애 이름은 정했어?”
“음, 키타로鬼太郞로 지을까 하네.”
“게게로에 키타로라니. 부자가 쌍으로 이상한 이름인 걸.”
게게로와 로쿠로쿠비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미즈키는 고개를 숙여 아기에게 속삭였다.
“안녕, 키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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