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삽니다

시간의 무게

게나조, 치치미즈

篝火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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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거 세계관, 트윗 기반

  • 치치미즈

어느 날 요괴병원 원장은 유령족 사내와 그의 반려 인간을 만났다. 그들의 아들이 독립한 후로는 처음이었기에 원장은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반려 인간 미즈키는 어째선지 혼란스러워 보이는 표정이었고, 게게로는 그의 기분과 상관 없이 내심 들떠 보였다. 원장은 인간 기준에선 불행할지도 모르는 사건이 일어났음을 직감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래서…, 환자는 어느 쪽입니까?”

“접니다.”

살짝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미즈키가 손을 들며 자리에 앉았다. 원장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바짝 세우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현기증을 앓는 환자처럼 띄엄띄엄 말했다.

“아무래도 제 몸에…, 뭔가 이상이 생긴 거 같아서요.”

“정확히 어떤 이상인가요?”

수많은 요괴를 상대해보았지만 인간을 진찰해본 적은 없는 원장이었기에 그는 덩달아 긴장하여 미즈키의 말을 들었다. 미즈키는 떨리는 눈동자로 원장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면서 입을 뗐다.

“제가, 늙지 않습니다.”

“미즈키는 30년 전부터 계속 이 모습이었다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난 지 60년이 넘으면 주름이 생기고 머리카락이 하얗게 샌다고 하더군.”

원장은 게게로의 말을 듣고는 미즈키를 찬찬히 살폈다. 그들의 말대로 미즈키는 30년 전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었다. 요괴야 그게 당연한 일이지만 인간은 아니다. 원장은 인간을 직접 진찰한 적은 없으나 요괴 문제로 상담을 받으러 온 인간은 종종 만났기 때문에 미즈키의 상태가 인간 기준으로 비정상적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게 하나 있었다. 원장은 순수한 궁금증에 물었다.

“안 늙는다는 건 좋은 거 아닙니까? 다른 인간들은 안 늙겠다며 온갖 발악을 하던데….”

“아뇨, 아뇨 선생님. 제겐 하나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미즈키는 도리질을 치면서 언성을 높이다가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풀이 죽은 목소리에 원장은 어떻게 그를 달래야 할지 몰라 등 뒤로 식은땀을 뺐다. 미즈키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다음 전보다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전, 평범한 인간으로 죽고 싶습니다. 평범하게 늙어가다가 여든 무렵에 죽고 싶었습니다.”

이 인간이 특이한 걸까, 아니면 원래 인간은 이런 심리가 기본이고 그들이 유독 죽음을 두려워한 것일까? 원장은 궁금증을 밀어넣은 채 미즈키의 말을 받아적으며 게게로를 흘긋 보았다. 반려 인간의 심란한 마음과 달리 게게로는 그와 영원불멸하게 살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들뜬 듯했다. 평범한 인간으로 죽고 싶어하는 미즈키가 반려요괴의 마음을 알면 과연 어떤 반응일까. 그것도 문득 궁금해졌다. 원장은 그들에게 물었다.

“혹시 짐작가는 부분이 있나요? 혹시 요괴의 신체 일부를 먹었다거나.”

“먹은 건 아니다만, 유령족의 피를 뒤집어쓴 것도 해당이 되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원장은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을 누르고 물었다. 유령족이 지상을 차지한 인간에게 꾸준히 사냥당해 멸족했다는 건 요괴 사이에 상식처럼 퍼진 일이니 그도 알고 있다. 유령족의 피를 따로 보관한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오래 전에 사라진 일족의 피를 뒤집어쓴 거지? 그건 그렇다고 쳐도, 유령족의 체액은 요괴에게도 맹독인데 어떻게 저 인간은 살아 있는 거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인간을 해부해서 혈액과 신체를 분석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게게로의 전기에 당할 것 같으니 원장은 차분한 척 물었다. 그러나 게게로와 미즈키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원장은 딱 졸도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세상에, 유령족의 혈액을 인간에게 주입한 다음 그것을 정제해 약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그걸 위해서 유령족을 거리낌 없이 사냥하다가 이 지경이 된 거고? 원장은 처음으로 인간의 수명이 기껏해야 80밖에 안 된다는 게 한스러워졌다. 너무 빨리 사라지는 바람에 100년 200년을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이득만 좇다가 모든 걸 망치는 종족이라니. 대체 이런 게 왜 아직까지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유령족의 피를 직접 섭취한 건 아니고 뒤집어 썼다…, 이겁니까?”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묻자 게게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도 불로를 할 수 있는 겁니까? 미즈키가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원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이런 사례는 300년 동안 수많은 요괴와 그들에게 얽힌 인간을 치료해온 원장도 처음 보는 사례였다. 일단은 혈액 검사랑 조직 검사를 한 번 해보도록 하죠. 원장의 피로한 목소리에 미즈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를 걷어 붙였다.

잠시 후 검사실에서 나온 원장은 미즈키처럼 혼란스러운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양손을 모으면서 심호흡을 했다.

“음…, 미즈키 씨에겐 그닥 좋은 소식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게….”

원장은 다시 고개를 떨구며 푹 한숨을 쉬었다. 대체 누구의 장단에 맞추어 설명을 해야 하는지. 원장은 멋부리기 위해 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일단 미즈키 씨는 요괴가 된 게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미즈키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아, 이젠 나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원장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수명이, 음, 아주 많이 늘었습니다. 역시 유령족의 피가 영향을 끼친 것 같네요. 이게 25년 전에 키타로 군에게서 채취한 유령족의 세포 조직이고 이게 미즈키 씨의 세포 조직인데….”

원장이 두 개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모세혈관이 어쩌고 조직 변화가 어쩌고 설명을 했으나 미즈키에게도 게게로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미즈키는 점차 정신을 잃어가는 듯했고 게게로는 무신경한 표정이었지만 아무튼 제 인간 친구의 수명이 늘어나 함께 할 시간이 더 많아졌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게게로는 장황하게 이어지는 원장의 말을 끊고 물었다.

“그래서, 몇 년 정도 는 겐가?”

“뭐, 사고를 당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적어도 400년은 살겠죠?”

400년. 그 시간은 인간인 미즈키에게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친우가 기뻐하며 잘 되었다는 식으로 말했기에, 미즈키는 차마 절규할 수 없었다.

시간의 무게

일주일 후 원장은 게게로의 다급한 연락을 받고 그가 살고 있는 인간의 집으로 향했다. ‘水木’이라고 각인된 현판을 지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게게로가 안절부절못하고 마당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겨울이었고, 마당에 깔아둔 풀은 모두 생기를 잃고 희멀건 상아색으로 메말라 땅바닥에 붙어 있었다. 그 풀을 무심히 밟으며 원장은 마당을 가로질러 게게로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원장은 그 인간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직감했다. 아니나다를까 게게로가 원장의 어깨를 잡으며 당장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미즈키가…, 미즈키가 일어나지를 않네.”

“일단은 진정하시고요. 언제부터입니까?”

“자네를 만나고 사흘 후였네….”

역시나, 원장은 속으로 대답하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일단은 상태를 보도록 하죠. 원장은 짚이는 구석이 있었으나 일단은 미즈키를 직접 보고 상태를 파악하기로 했다. 그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향하면서 원장은 게게로에게 다시 물었다.

“병원을 다녀온 뒤로 미즈키에게 뭔가 변화는 없었습니까? 가끔 멍하니 앉아 있다든가, 죽으려고 시도한다든가.”

“눈에 띄게 기력이 없어진 느낌이긴 했네. 하지만 그저 수명이 늘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서라고, 금방 익숙해질 거라고 생각했다네….”

게게로는 말끝을 흐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역시나, 라고 원장은 생각했다. 이런 일이 드물지는 않다. 인간을 요괴로 만들었다가 인간을 잃어버린 요괴는 그 사례를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이번 일은 게게로의 탓도 아니고 미즈키가 완전히 요괴가 된 것도 아니지만, 상황 자체는 비슷하다. 원장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깨끗한 요와 이불 속에 미즈키가 누워 있었다. 그는 게게로의 말대로 잠에 든 사람처럼 고요히 눈을 감고 있었다. 원장은 그의 옆에 앉아 손목의 맥박을 짚었다. 그의 심장은 아주 천천히 뛰고 있었다. 온 신경을 집중하지 않으면 박동을 느끼지 못할 만큼 느리고 희미했다. 수명이 늘었다고 해도 비정상적인 심박수였다. 원장은 손을 내려놓고 청진기를 꺼내 미즈키의 가슴팍에 댔다. 호흡하는 소리도 심장 소리처럼 얕고 느렸다. 살아 있다는 모든 신호가,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연약했다.

원장은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사假死 상태네요.”

“가사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미즈키는 자신이 앞으로 400년을 더 살아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사에 빠진 거예요.”

원장은 한숨을 푹 쉬고 게게로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다시 천천히 설명헀다.

“인간은 종종 그럽니다.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을 마주했을 때 여러 방향으로 회피를 시도합니다. 의도적으로 기억을 지우거나, 몇 달 동안 두문불출하거나, 이처럼 깊은 잠에 빠지듯 가사 상태에 들어가기도 하죠.”

원장의 담담한 설명에 게게로는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버렸다. 게게로는 미즈키의 고요한 얼굴을 쳐다봤다가, 그의 볼을 한 번 쓸어내린 다음, 하늘이 무너진 사람같은 얼굴로 원장을 바라봤다. 원장도 마음 같아서는 그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요괴가 된 인간을 고친 사례는 전무하다. 요괴에게 현혹되어 이쪽으로 건너온 인간은 그대로 미쳐버려 스스로 생을 마감하거나, 자신을 사로 만든 요괴를 죽이거나, 인간을 해치다가 악한 요괴로 몰려 살해당했다. 원장은 착잡한 얼굴로 미즈키와 게게로를 바라봤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미즈키가 스스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이렇게 만든 요괴를 죽이거나, 인간을 해치다가 악한 요괴로 몰려 살해당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즈키가 스스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고양이 손이라도 빌릴 수 있다면. 원장은 한숨을 쉬고 게게로에게 조언했다.

“한 가지, 미즈키 씨의 마음을 돌릴 방법이 있긴 합니다.”

“그게 뭔가?”

게게로의 눈에 다시 이채가 돌며 선명하게 반짝였다. 좋은 방법인지는 모르겠다만…. 원장은 그렇게 운을 떼며 요괴 하나를 소개시켜주었다.

“바쿠의 힘을 빌려보죠. 미즈키 씨가 꿈을 꾸게 만드는 겁니다. 혹시 모릅니까. 당신이 슬퍼하는 꿈을 꾼다면 그가 마음을 바꾸어 돌아올지.”


미즈키는 마당에 서서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더라. 미즈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집을 바라봤다. 자신의 기억보다 미묘하게 낡은 집이 낯설었다. 가만히 안쪽을 바라보고 있자 게게로가 나왔다. 게게로는 기지개를 켜고는 마당으로 내려왔다. 미즈키는 손을 들어 게게로에게 인사했으나 그는 자신을 무시하고 빗자루를 집어들었다. 미즈키는 어이 없는 표정으로 게게로의 마당 청소를 바라봤다. 게게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당을 꼼꼼하게 쓸고는 뒤쪽 수돗가에서 호스를 가져와 텃밭과 나무에 물을 주었다.

미즈키는 마당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버드나무를 바라봤다. 이게 있으면 웬만한 요괴는 얼씬도 못 할 거라고 말하던 게게로의 뿌듯해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저게 언제 저렇게 자랐지. 눈앞의 버드나무는 100년을 산 것처럼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치 미래로 온 것 같은데. 미즈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면서 시선은 게게로를 좇았다.

물주기까지 마친 게게로는 미즈키를 찾지도 않고 다시 쌩하니 집안으로 들어갔다. 오냐, 언제까지 이렇게 무시할 건지 두고 보자. 이쯤 되니 오기가 생겨 미즈키는 게게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키타로는 진작 독립해 집안에 없었다. 게게로는 밥솥에서 어젯밤에 짓고 남은 것으로 추정되는 밥을 뜬 다음 반찬 몇 가지를 꺼내 간단하게 식사를 마쳤다. 잘 먹었습니다, 듣는 이 하나 없음에도 인사를 나눈 게게로는 밥그릇을 정성스럽게 닦은 다음 다시 밖으로 향했다.

이번에 게게로가 향한 곳은 창고였다. 게게로는 창고의 불을 켜 잡동사니를 뒤졌다. 미즈키는 부러진 식탁 위에 걸터앉아 게게로의 창고 정리를 지켜봤다. 손으로 먼지를 훑다가 문득 그것이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내리니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가 앉아 식사하던 그 식탁이었다. 하룻밤 사이 100년이 지나가버린 것처럼 식탁은 다리가 부러지고 군데군데 흠이 파여 몰골이 흉했다. 대체 지난 밤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미즈키는 여유롭게 손을 털면서 밖으로 나가는 게게로의 등을 빤히 쳐다보다가 후다닥 빠져나왔다.

게게로의 일상은 단조로웠다. 빨래를 널고, 때가 되면 끼니를 챙겨 먹고, 장을 보는 겸 동네 마실을 다녀왔다가 낮술을 하기도 했다. 야, 낮술하는데 친구를 안 부르는 건 너무하지 않냐. 미즈키가 옆에서 훈수를 두었으나 게게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혼자 술을 홀짝였다. 어쩐지 그 모습이 청승맞아 미즈키는 부엌에서 제 잔을 꺼내 한 잔 가득 따랐다.

날이 저물고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무덤가에서 두레박불과 도깨비불이 뛰어다니고, 달빛을 좋아하는 요괴가 가로등불 밑으로 하나씩 모이기 시작했다. 게게로는 아침 때처럼 저녁 밥그릇을 정성스럽게 씻은 다음, 부엌 선반에서 담배와 주전부리 몇 개, 술잔과 병을 챙겨 어딘가로 향했다. 마치 성묘를 가는 사람 같은 준비물에 미즈키는 아내를 보러 가는 건가, 싶어 따라갔지만 게게로가 향한 곳은 어느 방이었다. 게게로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앞에 선 미즈키는 차마 그 안으로 따라 들어가지 못했다. 게게로가 무릎을 꿇고 앉은 간이 사당에 걸린 영정사진의 주인공은, 미즈키 자신이었다.

게게로는 미즈키의 사당 앞에 앉아 익숙하게 향을 피우고, 잔에 술을 채우고 음식을 올렸다. 합장 두 번을 하고, 고개를 숙인 다음 제 몫의 잔에 술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단순한 일상이었다. 오늘은 연어장을 해 먹었다, 키타로가 까마귀를 통해 편지를 보냈다, 최근에 인간 친구가 생긴 모양이다. 날이 좋아 오랜만에 이불 빨래를 했다, 자네가 좋아하는 이불은 여기저기 튿어졌지만 아직은 덮고 잘 만하다.

두서 없이 이야기를 뱉어내던 게게로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는 천천히 영정을 쓰다듬었다. 그는 막힌 숨을 내쉬고는 제 곁을 떠난 미즈키에게 말을 걸었다.

“키타로도 나도 자네를 기다리고 있다네…. 그런데 너무 길구려…. 백 년이 너무나도 길어….”

심장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줄을 매지 않고 절벽으로 낙하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미즈키는 제 귀를 박박 씻어내 방금 들은 말을 없던 것 취급하고 싶었다. 게게로는 유령족, 요괴이며 장수종이다. 마음만 먹으면 영원불멸할 수 있다. 백 년이 일 년처럼 느껴질 유령족이, 지금 백 년이 너무나도 길다고 말하고 있다.

한두 잔 만에 취기가 올라왔는지 게게로는 아예 영정을 껴안고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떨구고 있었다. 미즈키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누군가가 우울에 젖어 만든 삼류 연극을 보는 듯했다. 유령족이 고작 인간을 잊지 못해서, 백 년을 기다리지 못해서 너무 길다며 울고 있다니. 만약 이 상황을 꾸며낸 사람이 있다면 당장 튀어나오라고 윽박지른 후 멱살을 잡고 당장 게게로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하고 싶었다.

원래대로 돌려놓으라니, 게게로를 망가뜨린 사람은 너 아닌가?

누군가가 그렇게 말을 했다. 어쩌면 미즈키 스스로가 자신에게 한 말일지도 모른다. 미즈키는 화를 내는 것을 멈추고 훌쩍이는 게게로를 보았다. 미즈키를 기다리는 게게로. 그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일상을 지키고 있는 게게로. 그러나 백 년이라는 시간에 짓눌려 이따금 친구를 찾으며 울고 있는 게게로.

아아, 그럼 내 잘못이구나. 너를 백 년 씩이나 혼자 둔 내 탓이구나. 네가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는데. 장수종은 모든 걸 기억하지만 기억에 짓눌리지 않는다는 누군가의 말만 믿고 안일하게 있었구나.

미즈키는 쪼그리고 앉아 게게로를 한참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신기하게 손가락이 서늘하고 축축한 뺨에 닿았다. 게게로는 낯선 온기에 화들짝 놀라 이쪽을 바라봤다. 시선이 맞닿는다는 느낌이 든다. 미즈키는 양손으로 게게로의 볼을 꽉 잡고 시선을 맞춘 채 약속하듯이 말했다.

“난 여기 있어, 게게로.”


눈을 뜨자, 울음을 겨우 참고 있는 게게로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게게로는 미즈키의 푸른 눈을 보자마자 반색을 하면서 그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미즈키! 돌아왔구나!”

“켁, 잠, 잠깐 게게로, 숨막혀어….”

하마터면 게게로의 완력에 갈비뼈가 부러질 뻔했다. 미즈키의 신체는 아직 인간이니까 조심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원장이 게게로를 환자에게서 떼어내며 타박했다. 그들 옆에는 처음 보는 요괴가 긴 주둥이를 흔들면서 기뻐하고 있었다. 코끼리 같이 생긴 그것은 주둥이로 미즈키를 쓰다듬어주었다. 칭찬하는 건가? 미즈키는 주둥이를 조심스럽게 잡아 아래로 내리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

“당신은 일주일 가까이 가사 상태였습니다.”

“가, 가사요?!”

길고 묘한 잠을 잤다는 자각은 있지만 가사 상태였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러니까 저 녀석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구먼. 미즈키가 게게로를 흘긋 바라보자 그는 나쁜 짓을 한 어린애처럼 어깨를 움찔하더니 시선을 피했다. 원장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여기 있는 바쿠의 힘을 빌렸죠. 바쿠는 꿈을 먹는 요괴로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꿈을 꾸게 만들기도 하거든요. 당신을 깨울 수 있는 꿈을 매일 주입했습니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네요.”

아, 감사합니다. 바쿠를 향해 고개를 꾸벅이자 바쿠는 우우, 소리를 내면서 모습을 흐리며 사라졌다. 원장 역시 진료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보수는 나중에 까마귀를 통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를 배웅하고 나니 집에는 다시 미즈키와 게게로만 남았다. 게게로는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계속 우물거리며 손가락을 꼼질댔다. 게게로, 하고 나지막히 제가 붙인 이름을 부르자 게게로는 더 울상이 되어서 미즈키의 손을 잡았다.

“저기, 미즈키여.”

자네가 가사 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생각해 봤네. 게게로는 볼썽 사납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앞으로도 자네랑 계속 살 수 있다고…, 내 기분만 생각했던 것 같네. 미처 자네의 기분을 고려하지 못했어.”

“어….”

갑자기 진지해진 분위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미즈키가 얼을 타는 동안 게게로는 말을 이었다.

“자네가 가사에 빠졌다는 말을 들은 뒤에야…,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게 자네에게는 죽음보다 무서운 일임을 알게 되었네.”

“아…, 음…, 그렇긴 한데…”

“만약에 남은 시간이 무섭다면 내가 그대를 죽여주겠네.”

뜸 들이는 것도 없이 갑자기 치고 들어온 게게로의 살벌한 다짐에 미즈키는 잠시 할 말을 찾아 아득한 정신 속을 헤맸다. 이것도 요괴가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인가? 이 녀석이 원래 누군가를 죽인다는 말을 하는 편이 아닌데? 보통은 내가 같이 있을 테니 괜찮다고 하지 않나? 하지만 이것도 게게로 나름의, 장수종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서툴고도 최고의 사랑 표현이라면 그마저 기껍게 받아들이고 싶다. 하지만 미즈키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니다.

게게로, 미즈키는 다시 다정하게 그를 부르며 꿈속에서처럼 양볼을 잡아 시선을 마주쳤다. 일주일 동안 얼마나 많이 운 건지 눈가가 새빨갛게 짓물렀다. 못난이가 다 되었네. 미즈키가 눈가를 유카타 자락으로 살살 닦아주며 놀렸다. 게게로는 손을 내치지도 않고 눈앞의 미즈키를 소중하게 바라봤다. 미즈키는 그의 눈을 응시하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너랑 같이 살 거야. 백 년이든 이백 년이든, 계속 같이 살자.”

“지, 진짜인가?”

“당연하지. 거짓말은 안 한다고.”

“하지만 그때는 꺼내준다면서 내일 해주겠다고….”

“야아, 그게 언젯적인데!”

게게로가 30년 전 일을 언급하면서 놀리자 미즈키는 바로 호통을 치면서 게게로를 끌어안았다. 게게로는 참았던 울음을 전부 터트리면서 손끝에 흙 하나 묻히지 않겠다는 청혼 같은 대사를 뱉었다. 그 말에 미즈키는 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그 유령족의 반려 인간이 영원한 수명을 얻어서, 두 사람이 함께 평생을 살게 되었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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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칭찬하는 불사조

    므루님 저예요 달양갱이에요... 너무 좋아서 감상 남겨요 므루님 글에 나타나는 다소 자기중심적이었지만 결국 반성하게 되는 게게로나, 그런 게게로를 위해 선뜻 같이 장수하겠다고 하는 미즈키나 너무 상냥하고 다정해서 좋았어요 특히 미즈키는 삶에 대한 회의도 짙었을 테고 워낙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아왔을 테고 후손의 몸을 빼앗아가며 억지로 살아가려 했던 토키사다까지 봤으니 인간의 한계를 넘어 장수한다는 게 썩 좋게 받아들여지진 않겠죠 그래서 가사상태에까지 빠졌을 테고요... 그런데 게게로가 외로워하고 슬퍼한다는 걸 보고 마음을 돌렸다는 게 미즈키답게 사랑이 가득해서 좋았어요 게게로는 인간이었던 적이 없고, 장명이 당연한 삶을 살아왔으니 미즈키의 혼란에 공감할 수 없고, 오히려 염원이 이루어진 것이잖아요 게게로에게 미즈키의 장수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기회였을 텐데 미즈키를 위해서 포기하려는 각오를 했다는 것까지도 게게로의 사랑이 잘 느껴져서 좋았어요 므루님 글의 치치미즈는 서로를 너무너무 사랑하네요ㅠㅠㅠㅠㅠㅠ 얘들아 행복해줘ㅠㅠㅜㅜㅜㅜㅜ 좋은 글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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