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과 울렁임
치치미즈
hahaha님(@hahaha1453464) 맞교환 연성
K패치 남고생. 모든 설정은 2010년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봄. 봄이란 무엇인가.
만물이 생기를 띠고 꽃이 피고 새 학기가 시작되는 계절이다. 그럼 봄에 가장 아름다운 꽃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역시 나 같은 학생은 대부분 벚꽃이라고 하겠지. 3월 하순부터 4월 중순까지 만개하여 은은한 분홍빛으로 모든 사람을 홀리는 벚꽃을 보았다면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으리라. 대부분은 장미가 봄의 여왕이라고 하지만 특히 나 같은 고등학생은 벚꽃이 더욱 익숙하겠지!
올해도 어김없이 등굣길을 따라 심어진 벚나무가 꽃을 피웠다. 쌀쌀한 날씨에 두터운 코트를 걸치고 힘겹게 오르막길을 오르다가도 바람의 손짓에 떨어져 흩날리는 벚꽃잎을 보면 내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난다. 아, 삶이란 이토록 황홀한 것이야!
그러나 우리의 공부벌레 모범생 미즈키 군은….
“또 뭘 멍 때리고 있어.”
―라며 내 앞에 산더미 만 한 교과서와 문제집을 꽝, 하고 내려놓은 것이다. 아무래도 미즈키 군에게 벚꽃이란 봄의 아름다움이나 청춘을 곱씹게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중간고사 알리미 정도밖에 안 되는 모양이다.
청춘과 울렁임
“미즈키, 저것 보게나. 이쪽 창가의 벚나무도 꽃을 피웠어.”
작년에 병을 앓아 시름시름하던 벚나무다. 잘라내느니 마니 난리를 친 게 엊그제 같은데 그 무서운 병마를 이겨내고 올해도 건강하게 꽃을 맺었다. 환기를 시킨다고 창문을 열었다가 닫는 걸 깜빡하면 수업 시간에 종종 내 자리로 벚꽃잎이 떨어진다. 그 보드라운 잎을 만지며 교사 몰래 큭큭 웃는 게 졸음이 밀려오는 봄을 버티는 유일한 버팀목이거늘 미즈키는 내 말에도 창가에 시선 하나 주지 않는다.
“어어 그래 중간고사도 이제 2주 남았다.”
그러면서 내 앞에 수학 교과서와 문제집을 펼쳐놓고 노트를 연 다음 샤프를 딸깍대며 보충수업 준비를 한다. 이 박정한 남자, 좋은 대학을 가는 게 인생의 최고 목표라니 얼마나 공허한가. 그러면 미즈키는 노트를 돌돌 말아 내 머리를 탁 한 대 때리고는, ‘좋은 대학 가는 게 목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려고 가는 거다’라고 딴지를 건다. 나나 그나 이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고교생임은 자명한 듯하다.
“집중해. 이번에 수학 60점대 못 넘기면 너랑 같이 점심 안 먹을 테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그럴 수 있거든.”
매정하게 말하고 미즈키는 지난 번 내가 틀렸던 30번 문제를 가리켰다. 수렴을 응용해서 풀어야 하는 문제로, 수렴은 내가 현 단계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개념이다. 0에 끝없이 다가가지만 0이 될 수는 없다니, 이게 대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미즈키는 제롬의 역설이나(미즈키가 제논의 역설이라고 정정해줬다) 여러 예시를 들어서 설명해주었으나 머리에는 하나도 안 들어왔다. 미즈키는 포기하지 않고 내 풀이과정에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고 왜 오답이 나왔는지 새로 식을 써가며 알려주었다. 그 성의를 생각해 나는 미즈키의 풀이를 노트에 받아적었다.
머리가 좋다고 잘 가르치는 건 아니지만, 미즈키는 괜찮은 선생님이다. 다른 선생이나 해설집은 생략하는 부분까지 찾아내 일일이 해설해준다. 덕분에 수학 머리 없는 나도 이해와는 별개로 미즈키의 수학 수업만은 지루해하지 않고 끝까지 집중한다. 하지만 수업 진도를 잘 따라간다는 것과 막혔던 수학 문제를 잘 푼다는 건 또 다른 문제. 나는 같은 실수는 하지 않지만, 대략 10개의 다른 실수를 한다는 단점이 있다. 자신만만하게 내민 내 풀이를 보고 미즈키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x제곱의 풀이는 가르쳐준 대로 했으니 괜찮은데, 대체 왜 상수 변환이 저렇게 된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미즈키는 다시 빨간 펜을 들었다.
노트를 빼곡하게 채운 빨간 펜이 절반 넘게 사라진 뒤에야 미즈키에게서 풀려났다. 한 시간 동안 수학문제를 풀다니 이건 고문이야….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리니 문제집과 노트를 차곡차곡 정리한 미즈키가 톡 쏘아붙였다.
“수학 성적이 반타작도 안 되는데 당연한 거 아냐?”
“하지만 미즈키, 다르게 생각해 보게. 2주 만에 성적을 20점이나 올리는 게 가능한 일인 것 같나? 차라리 90점인 국어 성적을 98로 올리는 게 더 쉬워 보이네만.”
내 말투를 할아버지 말투라고 뒤에서 킥킥거리는 녀석들과 달리 미즈키는 한 번도 내 말씨를 지적하지 않았다. 아마 본인도 어릴 적 할머니 손에서 자라 익숙한 탓이리라. 내 하소연을 들은 미즈키가 무슨 말이냐며 반박했다.
“아니지, 네가 수학 반타작도 안 나오는 이유가 뭔지 알아? 공부를 안 해서 그래. 그래서 그런 사람은 기초 공부만 해도 성적을 확 올릴 수 있다고.”
“흐음. 그럼 왜 90점을 98점으로 올리는 건 힘들지?”
“당연한 거 아냐? 상위 5%를 상위 1%로 올리는 건데?”
단추구멍에서 바늘구멍으로 이동하는 건데 당연히 어렵지. 미즈키는 오늘도 내게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아는 게 많고 응용도 잘 하는 미즈키. 주변 사람들에게 그는 ‘공부 잘 하는 모범생’ 혹은 ‘재수탱이’지만 글쎄. 내가 아는 미즈키는….
“이제 담임 들어오겠다. 그럼 이따, 으악!”
“미즈키…. 거긴 바닥이 미끄럽다고 지난 주에도 선생이 경고했건만….”
일주일 전 청소담당이 왁스를 한가득 쏟아버려 미끄러워진 곳을 당당하게 밟고 미즈키가 크게 휘청거렸다. 바로 어제도 선생이 주의를 준 곳인데 또 거기를 지나가다니. 이번에는 내가 심장을 부여잡고 있는 미즈키를 향해 한숨을 쉬었다.
이렇듯 우리의 모범생 우수 청소년 미즈키는, 일견 허당에 개구진 부분이 존재한다. 그리고 모두가 그걸 안다. 모르는 사람은 미즈키, 당사자 뿐이다.
미즈키가 왜 이렇게 내 수학 성적에 연연하는지, 그 해답은 1교시가 지나가자마자 알 수 있었다. 미즈키를 피해 음악실로 도피하려는데 2학년 수학 담당 선생이 나를 붙잡았다.
“게게로, 시험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겠지.”
“음, 미즈키가 잘 챙겨주고 있습니다.”
“그럴 거야. 이번에 네 성적을 두고 미즈키랑 내기를 했거든.”
학생 성적을 두고 다른 학생이랑 내기를 하는 선생도 문제지만, 그 내기를 받아들이는 미즈키의 승부욕도 참 문제다. 그 녀석은 얕보이고 있다는 느낌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친구인 내가 선생에게 무시당하는 게 썩 기분이 좋지 않았으리라. 대화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안 봐도 눈에 선하다. 미즈키는 흥미가 없어 그런 거지 배우면 금방 성적이 뛸 거라고 얘기했을 거고, 선생은 머리가 안 좋아서 어떻게 해도 안 된다는 식으로 놀렸겠지. 모든 선생님이 대인배인 학교가 아니고서야 고등학교에서부턴 성적에 따라 차별이 시작된다. 나는 어느 쪽이냐면 예체능 계열이라는 이유로 거의 학교에서 방임당하는 학생이다. 그리고 미즈키는 최상위권 대학을 보내기 위해 온 학교가 들러붙어서 케어해주는 쪽에 가깝다. 그러니 선생들 입장에선 버림패면서 미즈키의 온 관심을 받고 있는 내가 손톱 옆 거스러미 같은 존재일 것이다.
이 수학 선생도 나를 거슬려하는 쪽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툭하면 학생을 놀리고 괴롭히기로도 일대 학군에서 유명한 선생이다. 잘 가르치면 그만이라는 입시 논리로 모두 쉬쉬하지만 1학년 때부터 미즈키가 이 선생에게 당한 것만 열 손가락으로 꼽고도 넘친다. 그러니 어찌 사람을 좋게 볼 수가 있나. 누가 봐도 쌀쌀맞게 대하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느물대며 다가오는 게 거북하기 짝이 없다. 그가 미즈키의 열의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니 문득 멀미가 일듯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가 송충이 눈썹을 들썩거리며 말했다.
“그래, 둘이서 잘 해 봐. 이번에도 40점따리 맞고 성적도 왕창 깎이겠지만. 그런데 넌 예체능으로 가니까 수학 성적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잖아?”
그러더니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혼자 복식호흡으로 웃으면서 복도를 쌩하니 지나쳤다. 오늘 수학 수업이 5교시라서 다행이다. 점심 먹기 직전 배고픔으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4교시나 학교 갈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7교시였다면 내 인내심이 한계에 달해 옥상으로 탈출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지나가자마자 나는 바로 교실로 돌아갔다. 3분 동안 나를 찾아 헤맸는지 미즈키가 까치집이 되어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뒷문을 돌아봤다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책상을 쾅 치면서 일어났다.
“얌마 게게로! 너 여태 어디 있다가…!”
“미즈키! 내게 빨리 수학을 가르쳐주게나!”
“어, 엥?”
“어서! 지금도 쉬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네!”
“어, 어. 그런데 너 웬일로 적극적이냐?”
“나는 원래 적극적이었다네!”
“아…하, 그러셔.”
미즈키는 수상해 하면서도 내 열의가 마음에 들었는지 비싯비싯 웃고 있었다. 곧 그가 노트와 문제집을 펼쳤다. 나는 냉큼 앞자리에 앉아 그의 풀이를 눈에 담았다.
“미즈키, 살려주게나….”
“뭐 벌써 죽는 소리를 해. 이제 절반 왔는데. 일어나.”
“히이잉…. 미즈키는 인간의 마음을 몰라….”
“대체 그건 어디서 배운 말투야.”
미즈키는 넉다운 된 나를 보고 한숨을 푹 흘렸다. 하지만 쉬는 시간도 없이 내리 세 시간 동안 수학과 과학을 붙들고 있으니 머리가 지끈거려 버틸 수가 없다. 이미 내 심신은 한계에 달해 휴식을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책상에 머리를 박고 일어나지를 않으니 미즈키는 어깨를 흔들다가 포기해렸다. 흥, 하고 한숨 쉬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린다. 이 고집쟁이를 어떻게 달래 일으켜 세울까 고민하는 태도다. 이럴 때 미즈키는 두 가지 방법을 쓴다. 첫 번째, 한참 멀었다고 윽박지르면서 일으켜 세운다. 둘째, 동정심을 유발하는 표정과 말투로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 하지만 절대 넘어가면 안 된다. 미즈키는 잘생겼고 똑똑하고 모범생이지만 동시에 교묘하고 악랄한 인간이다. 이건 다 나를 수학의 길로 끌어들이기 위한 작전이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다!
“그럼 좀 쉴까.”
읭?
나를 일으키기 위한 계략이 아니라 진심인지 책을 덮고 필통에 연필을 넣는 소리가 들린다. 슬며시 고개를 드니 미즈키는 책을 켜켜이 쌓고는 아예 바닥에 내려놓기까지 했다. 내가 믿지 못하고 그 행동을 가만히 시선으로만 좇고 있으니 피식 웃으면서 나와 눈을 맞춘다.
“그래도 세 시간이나 했네. 수고했어.”
“정말 쉴 건가?”
“네가 힘들다고 징징댔잖아.”
부끄러움을 숨기려고 예민하게 구는 얼굴은 대체 언제 미워 보일까. 배시시 웃으면서 아예 책상까지 접으려는데 미즈키가 제지했다. 수업 끝난 거 아니다. 살벌하게 말하고는 핸드폰을 꺼낸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해 그의 옆으로 다가가 쭉 고개를 내밀었다. 웬일로 미즈키가 밀어내지 않고 나를 가만히 둔다. 이건 설마, 더 치대도 된다는 뜻일까? 사람 좋아하는 고양이마냥 턱 밑으로 머리를 밀어넣어 고롱거리니 미즈키가 핸드폰을 살짝 높이 들고 말했다.
“가만히 좀 있어. 너 뭐 먹을 거야?”
“음? 뭔가 시킬 건가?”
점심은 이미 먹었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니 미즈키는 한 프랜차이즈 카페 홈페이지에 들어가 검색을 하고 있었다.
“날이 더워서 빙수나 시켜먹을까 싶어서. 체리 들어간 거면 되냐?”
“체리는 언제나 환영이네!”
반색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가 미즈키의 턱과 부딪쳤다. 우리는 각자 충돌한 부분을 부여잡고 소리 없는 비명을 부르짖었다. 미즈키가 눈가에 눈물을 달고 소리를 빽 질렀다.
“야! 좀 생각이라는 걸 하고 움직여라!”
“머리가 쪼개져서 죽을 뻔한 사람은 나일세!”
서로 니가 잘못했네 마네 따지면서 왁왁대대다가 뜬금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바닥에 엎어져 배를 잡고 한참이나 웃었다. 미즈키와 같이 있으면 항상 이렇게 된다. 별 것 아닌 일로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싸우다가, 갑자기 폭소를 터트렸다가, 그러다가 왠지 이상한 기분과 함께 화제를 돌린다. 이번에도 우리는 가쁜 숨을 고르며 천장을 바라보다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아, 다시 가슴이 울렁거린다. 미즈키가 다시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면서 물었다.
“그래서, 체리 토핑 올라간 거면 돼?”
“완전 좋다네.”
곧 시원한 체리 빙수가 우리 앞에 도착했다. 사이 좋게 한 입씩 떠먹다가, 나도 체리 좀 나눠 먹자고 다퉜다가, 아예 체리 할당제로 정하고 다시 얌전히 먹다가, 하나 더 먹었네 마네 실랑이를 벌이면서 달달한 휴식 시간을 마무리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또 몇 점 내기를 했나.”
저번에 나는 수학 선생의 예상을 깨고 65점이나 받았다. 목표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며 미즈키가 나를 자랑스럽게 들어올리려다가 허리를 삐끗해 넘어졌다. 덕분에 병원에 간다 무슨 검사를 받아야 한다 난리투성이었던 게 기억난다. 정작 허리를 삔 당사자는 ‘이 정도야 뭐 찰과상 수준이지’라며 한 시간 만에 병상을 털고 일어났지만.
“80점 내기.”
80점. 처음 들어보는 숫자에 나는 경악했다.
“그건 아무리 미즈키에게 선생의 자질이 있고 내게 숨겨진 비상한 머리가 있다고 해도 무리일세!”
나는 수업 시작과 동시에 드러누워 항의했다. 미즈키는 한심해하는 낯짝으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그러든가 말든가 문제집을 다시 가져왔다. 마트 장난감 코너에 엎어져 떼를 쓰는 아이와 그를 버려두고 가는 부모와 같은 대치 구도였다. 미즈키는 일부로 샤프를 세게 딸깍거리면서 나를 재촉했다. 그런다고 이몸이 일어날 쏘냐! 호두턱을 만들며 시위를 이어가자 미즈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샤프를 내려놓고 낵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번에 성적 맞추면 내가 수학여행 때 원하는 거 다 해줄게.”
“수학여행!”
그 매력적인 네 글자에 나는 항변하던 것도 잊고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역시 고등학교 청춘의 꽃이라면 수학여행과 문화제 아닌가! 심지어 이번 수학여행은 방학 중으로 일정이 잡혀 한여름에 놀러가게 된다. 미즈키는 ‘더워 뒤지겠는데 무슨 8월에 수학여행이야’라며 투덜댔지만 공지가 나온 날부터 일주일 동안 근처 지역의 유명한 관광지와 맛집 등을 검색하고 있던 것을 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조가 어떻게 짜일지 모르겠지만 나와 미즈키는 이번에도 한 팀이 될 것이다. 그 3박 4일동안 미즈키에게 이것저것 시킬 수 있다니! 의욕을 확 끌어올리는 매력적인 제인이었다.
몸을 돌리니 미즈키는 이미 내 문제집과 노트를 꺼내 놓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미 승리를 확신하는 얄미운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이쪽도 그냥 휘말려줄 생각은 없었다. 수락하기 전 나는 간단한 제안을 걸었다.
“세 시간에 한 번씩, 30분 간 휴식 시간을 보장해줄 것.”
“오케이. 대신 30분 지나면 바로 공부 모드로 돌아올 것.”
“빨리 각서 먼저 쓰게나. 분명 성적을 올리면 수학여행 때 이몸의 종이 되겠다고 했겠다?”
“아니 원하는 거 다 들어준다고 했지 종이 된다는 말은 없었거든?”
그리고 각서는 원래 법적 효력이 없댔어 바보. 미즈키가 메롱 하고 혀를 내밀었다. 건방지고 귀여운 혀를 덥석 잡아 쭉 당기자 급히 책상을 짚으면서 눈살을 찌푸린다. 뭐라 웅얼거리긴 하는데 혀가 잡혀 있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아마 ‘뭐 하는 거야 놔 멍청아’라고 말하는 거겠지. 자꾸 투덜거리는 미즈키의 눈앞에서 나는 일부로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방금 뱉은 말, 꼭 지켜야 하네.”
“…너야말로!”
혀를 놓아주니 잔뜩 인상을 쓰면서 역으로 화를 냈다.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승부가, 지금 펼쳐지려 하고 있다――.
내 자랑인 바보털이 축 쳐져 버스를 따라 덜렁거렸다. 옆자리에 앉은 미즈키는 괜히 미안하고 민망한 마음에 방금 전 휴게소에서 산 호두과자를 집어 내 입에 막무가내로 쑤셔넣었다.
“뭘 그렇게 쳐져 있냐. 75점도 대단한 거야.”
“그런 식으로 말해도 전혀 위안이 되지 않네.”
“애초에 그 선생이 시험을 어렵게 낸 거야. 평소 같은 난도였으면 80점 충분히 할 수 있었어.”
“칭찬은 고맙네만 나는 매우 우울하다네….”
“…너 어째 할아버지 말투가 더 구수해진 거 같다?”
미즈키가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웨지감자 중에 가장 큰 조각을 내 입에 쑤셔넣었다. 아직 기분이 덜 풀렸지만 그가 하나씩 내 입에 넣어주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맛있기도 해서 얌전히 받아먹는다. 내가 엄마 새냐, 이제 네가 먹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미즈키는 갑자기 투정을 부리면서 내 무릎 위에 온갖 간식을 올려두고 팔짱을 꼈다. 정작 그 중 내가 사달라고 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전부 미즈키가 축 처진 나를 위로하고 싶어서 사온 거다. 아무리 수학여행 용돈을 따로 받았어도 미즈키에게는 거금이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자 음침하게 앉아 있는 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는 간식을 흘끗 봤다가 얼굴을 펴고 천천히 간식을 우물거렸다. 배가 채워지니 마음의 구름이 조금 걷히는 것 같다. 미즈키도 내 마음이 풀린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아쉽게도 기말고사에서 수학 성적을 80으로 올리는 데에는 실패했다. 분명 미즈키에게 배운 것인데 내용을 이해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나는 눈물이 터질락말락 하는 얼굴로 미즈키를 바라봤다. 미즈키는 얼굴을 한 번 구겼으나 바로 표정을 풀고 나를 안아줬다. ‘괜찮아, 이번엔 70점만 넘어도 잘 본 거야.’ 필사적으로 나를 위로하면서 등을 쓰다듬던, 또래보단 크지만 나보단 작은 손의 단단함과 온기를 기억한다.
미즈키의 말대로 기말고사는 전반적으로 난도가 갑자기 높아져 대부분 학생의 평균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평균 10점이 깎였는데 남들은 20점씩 깎여 오히려 성적이 더 좋아진 학생이 있었다. 그런 탓에 즐거운 나들이를 가는 것임에도 다들 우중충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나마 얼굴을 편 사람은 미즈키뿐이었다. 역시 전국구에서 노는 우등생답게 그는 이번에 윤리에서 겨우 5점 정도 깎였다. 미즈키는 그것이 이번 시험에서 제일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라며 시험이 끝나자마자 날 붙잡고 성을 냈지만. 아무튼, 미즈키가 인상을 쓰고 있는 이유라면 성적이 아니라 나의 우울함 때문이렸다.
“잘 했어. 다 잊고 오늘은 그냥 신나게 놀자고.”
여전히 내 기분이 신경 쓰이는지 미즈키가 다시 어깨를 토닥이면서 일부로 더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렇게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는 미즈키는 영락없는 또래 소년처럼 보인다. 애늙은이가 아니라, 구김살 없고 나가 놀기 좋아하며 무모한 내기나 장난 같은 것에 목숨을 거는 바보 같은 남학생. 그는 나와 있을 때만 소년의 모습을 띠고 개구짐을 유감없이 표출한다. 어쩔 때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콩콩 뛴다.
버스는 모지코 역을 돌아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인솔 교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학생들에게 내리라고 지시했다. 재빨리 과자를 치우고 자연스럽게 손을 잡은 채 내린다. 거대한 건물이 눈앞에 위용 있는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규슈 수학여행 첫 관광지는 바로 간몬해협뮤지엄이다. 간몬해협의 지리적 특징을 이용한, 건물 안에서 통째로 해협을 즐기는 컨셉의 박물관이라고 한다. 다른 박물관들과 달리 4층에서 표를 구해 2층으로 내려가며 관람하는 방식이었다.
짧은 박물관 소개를 들으며 4층으로 올라가자 인솔 교사는 우리에게 두 시간 가량의 자유시간을 주었다. 대부분은 2층에 있는 카페와 거리를 구경하러 내려갔고, 일부는 3층으로 내려가 관람을 했다. 우리 역시 여유롭게 관람하는 학생 중 하나였다. 전시물 하나 허투루 놓치는 법 없이 미즈키는 꼼꼼하게 보고 인상적인 것을 노트에 메모했다. 수학여행에도 노트를 가져와 필기를 하다니, 이러니 전국구 클래스구나. 미즈키는 100년 전 간몬해협 모습을 구현한 모형 앞을 지나가면서 말했다.
“개항기에는 요코하마, 고베 다음으로 큰 항구였대.”
“세토내해에서도 옛날에 시라누이가 목격되었다는군.”
옆에서 흘끗 본 안내판에 있던 문구를 떠올려 말하자 미즈키가 싱긋 웃었다.
“넌 역시 요괴 이야기를 제일 좋아하는구나.”
“으음, 아마도 민속학을 연구하는 우리 누님 때문일 걸세.”
먼 친척인 이와코 누님은 대학에서 민속학을 전공한 요괴 전문가다. 어린 시절부터 이와코 누나한테 요괴나 귀심, 괴담 이야기를 듣고 살았으니 그런 쪽에 흥미가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내가 쓰는 소설도 미스터리나 오컬트 장르를 주력으로 하고 있으니.
“그러면 다음에는 시라누이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써 봐. 그럴려면 여기에서 많이 공부해 가야겠네.”
“음, 시라누이와 퇴마사의 공조 같은 느낌으로 하면 될 거 같군.”
“그거 좋은 생각인데. 나중에 쓰면 나한테 먼저 보여줘라.”
비꼼도 비아냥도, 건성으로 하는 대답도 아니다. 미즈키만큼 나의 소설을 좋아하고 진지하게 받아주는 사람은 가족 외에 없다. 그는 언제나 내 첫 독자이고, 그 사실은 내가 데뷔한 후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내일이 벌써 마지막 날이네. 먼저 자리에 누워 발가락을 꼼지락대던 미즈키가 아쉬운 듯이 중얼거렸다. 그제야 이 달콤한 시간이, 미즈키와 단 둘이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들고 선생의 눈을 피해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보는 날이 내일이면 끝난다는 사실이 가슴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아직 해변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던 발에 묻은 모래알과 물기가 메말라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러게, 라고 맞장구를 치며 입안을 혀로 훑었다. 여기에서도 바닷물 맛이 났다. 물놀이가 끝나고 사이 좋게 나눠 먹은 하드의 소다맛도.
오늘 마지막 장소는 바다였다. 규슈의 광할한 바다는 여름이라는 날씨에 무색하게 서늘해 기분 좋게 땀과 열기를 식혀 주었다. 선생은 두 시간이 자유시간을 주고는 어딘가로 훌훌 떠났다. 아이들은 너도 나도 바다로 뛰어들어 서로에게 물을 뿌리면서 놀았다. 우리는 그들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해변을 따라 걸었다. 먼저 내기를 제안한 사람은 이번에도 미즈키였다.
“모래성 게임해서 지는 사람이 아이스크림 사기. 어때?”
“모래성 게임이라니?”
뭐야, 어릴 때 그런 것도 안 해봤어? 미즈키는 타박했지만 기분이 하나도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미즈키는 말만 얄궂게 하고 실은 알려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인 걸 아니까. 순수한 악의 없이 그저 나를 귀여워하고 좋아해서 무심코 튀어나오는 반응임을 잘 알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네, 시범을 보여줘야지. 미즈키는 으스대는 투로 물기가 젖은 땅에 쭈그려 앉아 모래를 모았다. 나도 같이 쭈그려 앉아 미즈키가 모래로 산을 쌓는 것을 바라봤다. 곧 그는 적당한 나뭇가지를 주워와 모래산 정상에 꽂아놓고 말했다. 요컨데 번갈아 가며 산의 모래를 가져가다가, 나뭇가지를 쓰러트린 사람이 지는 게임이었다. 작년에 그가 알려준 젠가와 비슷한 게임이었다. 정교한 컨트롤로 나뭇가지를 건드리지 않는 게 쟁점이었다. 나는 손바닥을 비비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지고 나서 무효라고 하기 없네.”
“너야말로 지고 나서 연습 게임 아니냐고 딴지 걸지 마.”
적당한 도발과 신경전을 나눈 다음 게임을 시작했다. 나나 미즈키가 신중파라 모래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미즈키는 이 게임을 여러 번 해봤는지 손가락 끝으로 모래를 살살 긁어 모아 위기를 쏙쏙 피해갔다. 나도 지지 않고 모래를 톡톡 건드리는 식으로 빼내왔다. 거의 뼈대가 드러날 정도가 되었음에도 나뭇가지는 쓰러질 기미가 없었다. 이번에 승자는 나였다. 미즈키의 검지 손가락이 실수로 나뭇가지 밑을 건드리고 말았다. 지지대를 잃은 가지는 맥없이 내 쪽으로 쓰러졌다. 양팔을 번쩍 들며 쾌재를 부르는 나와 달리 미즈키는 하늘이 무너진 표정으로 쓰러진 가지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나 당초 내기와 달리 아이스바를 산 사람은 나였다. 이미 규슈로 오는 길에 미즈키에게 많이 얻어먹었으니 이번에는 내가 그를 위해 한 턱 쏠 차례였다. 내기는 내기라며 계속 지갑을 꺼내는 그와 함지랑을 벌이다 겨우 지폐를 내밀었다. 아이들 싸움을 허허 웃으며 지켜보던 사장의 미소가 여전히 아른거린다. 그가 아이스바를 주며 우리에게 한 말도 기억한다.
“지금 즐길 수 있을 때 충분히 즐겨라. 대학에 들어가면 모두 뿔뿔이 흩어지니까.”
갑자기 그 말이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간다. 그러면 고등학생 때 만난 인연은, 어른이 되면 모두 흩어져 찾을 수 없다는 건가? 이 행복과 만족이 영원히 이어지는 게 아니라 한순간의 꿈이고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는 사탕이라고? 나는 뉘였던 몸을 일으켜 내 옆에 있는 미즈키를 내려다봤다. 미즈키는 손깍지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전 투숙객이 붙이고 간 야광 스티커가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미즈키는 나를 흘끔 곁눈질해 보고는 다시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미즈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나 역시 입을 열 기회가 없어 한참 우물쭈물하다가 도로 누워버렸다. 얌전히 배 위에 손을 모으고 무료하게 양이나 세는데 미즈키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게게로.”
“어, 응? 응?”
꼴사나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미즈키는 이렇게 얼빠진 대꾸를 좋아하지 않는다.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미즈키는 미동도 없이 입술만 움직여 소리를 냈다.
“재밌었어?”
“으음, 재밌었네.”
“그럼 다행이네. 너 다른 사람들이랑 섞여서 노는 거 그닥 좋아하지 않잖아.”
“여기 아이들이랑 잘 어울리지 못해서 그렇지 왁자하게 노는 건 좋아하네. 그리고 미즈키가 있는데 지루할 틈이 있을 리가.”
“그래, 그거 영광이네.”
영광이라는 말이 내게는 어색하게 들렸다. 미즈키에게 네가 내 옆에 있어서 즐겁다는 말은 포상이나 칭찬처럼 들리는 건가? 그의 입에서 나온 낯선 단어를 곱씹는 새에 미즈키가 또 물었다.
“넌…. 고향에 내려간 뒤에도 나랑 연락할 거야?”
명치에 잽을 날리듯 간결하고 묵직하게 뱉은 말에 나는 헛숨을 들이키다 사레에 들릴 뻔했다. 맞다, 고향. 고교 생활이 끝나면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 고향은 아직도 이런 곳이 있나 싶은 시골로, 주변에 있는 고등학교가 전부 폐교해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도쿄에 사는 먼 친척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다. 대학에 큰 뜻도 없어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갈 가능성이 다분히 높고, 진학을 하더라도 고향 쪽에 있는 대학으로 가게 될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벌써 겁 먹을 필요 없다는 주의인 미즈키가 이런 말을 하다니, 그도 슈퍼 사장의 말을 듣고 일말의 불안을 느꼈나 보다. 으음, 나는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열심히 눈동자를 굴렸다. ‘당연하지, 고향에 내려간 뒤에도 계속 미즈키에게 편지할 걸세’라고 말하면 끝인데, 왜 바보처럼 입술이 열리지 않는 걸까. 그제야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슈퍼 사장의 말을 듣고 우리의 이별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원이 좋다고 말하는 주제에 그와의 마지막을 상상하고 준비하고 있었던 걸까? 내 대답은 점점 미뤄지고, 미즈키의 불안이 스멀거리며 몸집을 부풀리는 게 피부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뭐라도 답을 해줘야 하는데, 초조함에 입술은 밀랍을 바른 양 더욱 굳어갔다.
“아오, 답답한 놈.”
인내심이 고갈된 미즈키가 결국 성을 내며 몸을 홱 돌렸다. 어, 음, 여전히 나는 바보처럼 말을 더듬거리기만 하고 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빼꼼히 쳐다보곤 내가 해야 했던 대답을 꺼냈다.
“네가 안 해도 내가 편지 보낼 거다, 뭐.”
“주, 주소는 아는가?”
“몰라? 그러니까 졸업 전에 닥달해서 얻어내야지.”
뭐 정 안 되면 방학 때마다 이곳저곳 네가 살 만한 곳을 쏘다니면서 찾아다녀야지. 미즈키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지만 나는 일본 열도를 돌아다니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다. 하물며 내 고향은 도쿄에서 차로 하루를 꼬박 새 달려야 하는 곳에 있다. 속앓이 하는 사람처럼 끙끙 앓다가 겨우 말을 뱉었다.
“아, 안 헤어질 걸세!”
“바보.”
겨우 본심을 얘기했더니 돌아오는 게 타박이다. 역시 미즈키는 내게 너무 각박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번에는 내 쪽으로 다시 돌아 눕는다. 어둠 속에서 남들보다 푸른 미즈키의 눈이 선명하게 반짝인다.
이렇듯 미즈키는 내게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툭하면 화를 냈다가 영문 모를 구석에서 화를 풀고 아무렇지 않게 장난을 쳐온다. 툴툴대는 듯한 언행은 모두 나를 생각하는 것이고 내가 우선이라는 양 움직인다. 겉과 속이 영 다르다. 그런데 이런 새침데기가 왜 싫지 않고, 계속 이 사람과 손을 잡고 싶은 걸까. 하다고 귀엽지 않은 사람이 어째서 이렇게 귀엽고 다정해서 내 모두를 주어도 아깝지 않게 느껴지는 걸까.
가만히, 미즈키를 향해 손을 뻗어본다. 미즈키는 고개를 돌리거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나의 손길을 받아들인다. 에어컨 바람에도 식지 않는 열대야의 공기에 달아올라 끈적하고 뜨뜻한 뺨을 어루만지다가 엄지를 뻗어 입술을 만져본다. 다른 손가락을 더욱 내밀어 우둘투둘하게 상처 난 귀를 만져도 미즈키는 나를 똑바로 응시한다. 곧 그도 따라 손을 내밀어, 누운 탓에 흘러내린 내 앞머리를 들추어 가려져 있던 왼눈을 감상한다.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의 사랑스럽다 생각하는 부분을 어루만졌다.
“약속한 거다?”
주문을 외우듯 미즈키가 속삭인다. 순식간에 이곳은 리조트 2인실이 아닌 벌레가 울고 반딧불이가 떠도는 풀밭이 된다. 나는 여름에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꼭 보러 갈 걸세. 매일 편지도 보낼 걸세.”
그러니까 계속 헤어지지 말고 영원히 함께 있자. 설령 우리가 느끼는 이 울렁임을 명명하지 못하고 어물쩍 넘겨버린다고 해도.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맞춰본다. 그 누구도 눈을 감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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