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가 흐르는 강 (上)
치치미즈
평소처럼 오토바이를 끌고 가게로 향하던 중 누군가가 ‘엇’하면서 미즈키를 불렀다. 언뜻 들은 거지만 익숙한 목소리길래 오토바이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이웃인 시라누이였다. 미즈키는 노루발을 내린 뒤 다가오는 시라누이에게 인사했다.
“이 시간에는 웬일이야? 가게는 어쩌고.”
“가게는 당분간 휴업이야. 날이 추워져서 해변에서 폭죽놀이 하는 사람이 줄었거든. 미즈키 공은 이제 출근 중인가?”
“그렇지. 그나저나…. 벌써 그럴 때인가.”
미즈키는 오늘 아침 라디오로 들은 기상예보를 떠올렸다. 도쿄는 이번 주 주말에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니 외출 시 주의하라는 내용 뒤로 훗카이도는 1미터가 넘는 눈이 내린다는 속보가 따라왔다. 이쪽은 눈을 볼까 말까하는데 어디는 눈이 사람 키만큼 내리고, 같은 나라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기온 차가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 예보를 들으며 목도리를 짜던 게게로가 중얼거렸다.
‘훗카이도라, 언젠가는 가보고 싶군.’
아내를 만나기 전까진 이리저리 방랑했을 이미지였기에 미즈키는 그 말이 더욱 신기하게 들렸다.
‘너도 가본 적 없어?’
‘나는 가보지 않았네만 내 어머니가 그쪽 출신이었네. 어머니가 혼슈로 내려오기 전만 해도 유령족이 꽤나 많이 살았다는데, 이제는 없다고 봐야겠지.’
아마 그럴 거다. 메이지 유신 시절에 훗카이도를 개발한다면서 많은 삼림을 베어내고 토착민을 강제 이주시키거나 없앴으니, 유령족이라고 무사할 리 만무하다. 어쩌면 그때 싸그리 류가에게 잡혀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생각을 하니 치가 떨리고 인간이라는 게 죄스럽게 느껴졌다.
‘그곳은 겨울마다 눈이 와 온 세상이 하얗게 덮인다는데. 나도 그런 눈을 한 번 보고 싶구만.’
그리 말하는 게게로의 눈은 마치 꿈속을 헤매는 듯 아련했다. 그런 눈이라면 미즈키도 궁금했다. 11월부터 5월까지 끝없이 눈이 내리는 곳, 모든 것이 하얗게 새버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는 곳.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로만 접했던 그 풍경을 언젠가 미즈키도 보고 싶었다. 그 환상에는 눈을 보기 힘든 지역에서 나고 자란 탓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휴업하는 겸 북쪽으로 놀러갔지. 2000년이 오면 세상이 멸망한다잖아? 그러니 마지막으로 눈이나 원없이 구경할까~싶었지. 진귀한 풍경이었어.”
미즈키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시라누이가 불쑥 훗카이도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요괴가 그런 종말론을 믿어?”
“믿는 건 자유니까.”
1999년 멸망설을 두고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미즈키는 저도 모르게 어린애처럼 들떠서 물었다.
“정말로 사람 키만큼 눈이 내렸나?”
“어디 그뿐일까. 하루종일 눈을 치워도 치운 만큼 쌓이니 사람들이 아예 나오지를 않아. 그곳 토박이들은 매월 초마다 한 달 치 식량과 물을 구매해 창고에 쌓아두고 산다는데, 그래야 할 거 같더군. 서양식으로 지은 집은 눈이 문과 창을 모두 막아버려서 탈출이 불가능했어. 나도 내가 불 요괴가 아니었다면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야.”
시라누이는 마지막에 농담을 덧붙이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아예 일상 자체가 불가능할 만큼 내리는 눈이라니, 왜 훗카이도 지역 의원들이 도로에 열선을 깔아야 한다고 TV에 나와 주장하는지 알 것 같다. 그 정도라면 외부와 아예 교류를 못할 테니까. 실제로 혈액은행에서 근무할 당시 훗카이도로 출장가야 하는 일이 있으면 그곳이 고향인 직원에게 맡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한 번은 보고 싶네…. 눈 오는 거.”
한 번 내리면 꼼짝없이 한 달 동안 갇혀 있어야 할 만큼 내리는 거대한 눈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미즈키는 아련하게 흐리기만 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적당히 바쁜 하루를 흘려보내고 가게를 청소하고 있으니 평소처럼 게게로가 마중을 나왔다. 그에게 겨울 한정 뱅쇼를 한 잔 만들어 주고 마저 부엌을 닦는데 그가 말했다.
“미즈키, 미안하지만 한 달 동안 집을 비워야겠네.”
“뭐어? 요괴는 연말 휴가도 없나…. 알았어. 이번에는 어디 가는데?”
연말에 요괴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는 거야 자주는 아니어도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기에 미즈키는 시큰둥하게 물었다. 그나저나 한 달이면 꽤 오래 집을 비우겠네. 어디 열도 끄트머리라도 가나, 홀로 생각하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지역은 예상 밖의 동네였다.
“오타루일세. 들어봤나? 운하로 유명한 곳이라는데.”
“오타루? 정말?”
오타루라면 훗카이도에 있는 도시 중 하나가 아닌가. 지금이야 서서히 그 위상이 떨어지고 있다지만 운하와 철도로 지금도 유명한 곳이다. 특히 운하 지역은 여러 뮤직비디오나 드라마에 나올 만큼 아름답다. 그러나 미즈키가 상상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라 눈이다. 자신을 덮어버릴 만큼 한가득 오는 눈. 그곳도 북쪽이니 대규모 폭설이 쏟아질 것이다. 그걸 직접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번에 같이 본 영화 기억나지? 여주인공이 ‘잘 지내나요~’하고 외치던 거. 그거 촬영지가 오타루래.”
“아아 그 영화! 정말이지 그 장면은 정말이지 눈물 없인 볼 수 없었지. 그런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생물은 인간밖에 없을 거야.”
영화의 히로인 중 한 명인 히로코가 설원에서 죽은 이츠키를 향해 외치는 장면을 떠올리고 게게로가 다시 눈물을 찔끔 짜냈다. 말없이 접시를 찬장 안에 넣던 미즈키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결심을 마친 사람의 얼굴로 게게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 말야, 나도 같이 가도 돼?”
모래가 흐르는 강 (上)
그냥 집에 있을 걸 그랬다. 미즈키는 오타루역에 내라자마자 살을 에는 추위에 싸늘한 눈동자로 거리를 바라보며 후회했다. 눈은 무슨, 그 사이 녹았는지 거리에 흰 기운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고, 옷을 겹겹이 입어 뚱뚱해진 사람들이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고 갈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오타루의 추위를 모르는 미즈키는 스웨터에 안감을 넣은 코트 차림으로 무방비하게 내렸다가 봉변을 당했다. 미즈키는 선 채로 꽁꽁 얼어붙어 게게로에게 짐짝처럼 들려 숙소로 향했다. 게게로는 한손으로 어깨에 들린 미즈키를 고정하고 다른 손으로는 거대한 캐리터를 끌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표표하게 거리를 걸어갔다. 미즈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라도 가리고 싶었지만 너무 추워 주머니에서 손을 꺼낼 수도 없었다. 그저 게게로가 일초라도 빨리 숙소로 들어가 내려주었으면 하건만, 게게로는 이 강추위 속에서도 세월아 네월아 동네 산책하듯 걷고만 있다.
숙소 주인은 아이고, 소리를 내면서 그들을 안내했다. 미즈키는 따뜻한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다 죽어가는 소리를 내며 코타츠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온몸을 구기다시피하며 들어간 미즈키는 이내 흐아아, 소리를 내면서 인상이 풀어졌다. 대체 오타루 사람들은 이런 한파를 어떻게 뚫고 삿포로로 출근을 할까. 미즈키는 고롱대면서 열심히 몸을 녹였다.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는 말을 방증하듯 게게로는 목도리와 하오리를 벗어 반듯하게 걸어 놓고는 발만 쏙 집어넣어 찬기를 녹였다.
“다시는 오타루에 안 올 거야….”
“오고 싶어했던 사람은 미즈키 자네가 아닌가.”
“그치만 이건 사람이 살 수 있는 날씨가 아니잖아.”
“나도 춥다고 느끼기는 참으로 오랜만이군. 그간 도쿄의 날씨에 익숙해져버렸어.”
미즈키는 손님맞이용으로 코타츠 위에 놓여 있던 귤을 집었다. 누운 채로 열심히 조물거리다가 까서 입안에 넣으니 새콤하면서 단 맛이 입안에서 퍼지며 추위가 더욱 사르르 녹았다. 게게로도 귤을 집어 조심히 까 흰 껍질을 모두 벗겨내고 주홍빛이 도는 알맹이를 하나씩 뜯어 먹는 손길이 느긋하고 조심스럽다. 그렇게 한참 따뜻한 방바닥에서 몸을 녹이던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일어나 방에 딸린 온천으로 향했다.
김이 후끈하게 올라오는 물에 몸을 담그니 열네 시간의 강행군과 가혹한 날씨에 굳어버린 몸이 완전히 풀어져 흐물거렸다. 몸을 담그자마자 으어, 하고 감탄사를 뱉었더니 옆에서 게게로가 핀잔을 주었다.
“미즈키, 무슨 아저씨 같군.”
“난 원래 아저씨야. 아니, 이제는 할아버지지.”
미즈키는 자신의 나이를 세어보려다가 포기했다. 벌써 70년 즈음 되었나, 이러다가 정말 순식간에 백 살이 되겠는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칠순이 되니 백 살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게게로가 미즈키의 표정을 살피다가 흐뭇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어떤가, 역시 계속 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허 참, 내가 죽으면 가장 먼저 울면서 나 찾을 사람이.”
농담으로 한 말인데 게게로가 바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눈물이 터지기 3초 전, 미즈키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맞아, 1999년에 멸망한다고 누가 그랬잖아, 그런데 정말 그날에 맞추어서 지구가 멸망할까?”
“나는 아직 미즈키랑 하고 싶은데 많은데!”
이런, 주제를 잘못 골랐다. 기어코 터져버린 눈물보에 미즈키는 제 이마를 가만히 칠 뿐이었다.
뜨거운 물에 현기증이 일기 전 목욕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오니 식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종일 열차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운 그들은 무서운 속도로 장어덮밥과 새우텐동을 해치웠다. 배도 부르고 등도 따시고, 천당이 따로 없었지만 미즈키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았다. 미즈키는 바깥을 살폈으나 눈이 내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미즈키는 찬바람이 방을 채우기 전 창문을 닫으며 서운한 소리를 했다.
“오늘은 눈이 안 올 모양인가 보네.”
“아무리 북쪽이라도 겨울 내내 눈이 오지는 않겠지. 오더라도 조금만 쌓이는 날이 있을 테고. 사소한 것에 일희일비하지 말게나.”
녹차로 입가심을 하던 게게로는 잠깐 눈동자를 굴리더니 히죽 웃으면서 덧붙였다.
“아하, 그러고 보니 미즈키는 눈구경이 목적이었지.”
“딱히 그것만 목적인 건 아니거든.”
“오호라, 설마하니 이몸을 도와주려는 갸륵한 의도는 아닐 테고.”
“갸륵하다니!”
어린 애를 기특해하는 것 같은 말씨에 미즈키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이부자리에 누웠다. 몰라, 나는 피곤하니까 잘래. 눈 오면 꼭 깨워라. 그러면서 이불로 등을 돌려 눕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애 같았다. 어린 시절 부모님 속을 꽤나 썩였겠군. 게게로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바닷가를 휘젓고 다니는 어린 미즈키를 상상하다가 다시 후후 웃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절에 만났어도 둘은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음날에도 미즈키가 기대하는 눈은 내리지 않았다. 미즈키는 전날의 실수를 반면교사 삼아 셔츠와 스웨터, 조끼와 카디건을 겹겹이 싸 입고 재킷을 걸치공 양말도 두 겹이나 신었다. 중무장을 한 미즈키와 달리 게게로는 어제와 똑같은 차림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기모노를 한 겹에서 두 겹으로 늘렸다는 정도였으나 보통 사람에겐 똑같이 추워 보였다.
그들의 목적지는 오타루 운하 하류였다. 의뢰의 주인공은 그곳에 사는 수달 가족, 이 주 전 오타루에 사는 인어가 반지를 잃어버려 하염없이 우는 모습이 눈에 밟혀 도움을 청했다. 요괴포스트에 의뢰를 넣었지만 다른 건과 겹치는 바람에 게게로가 맡게 되었다. 미즈키는 팔짱을 낀 채 덜덜 떨면서 게게로에게 물었다.
“그럼 운하에 떨어진 반지만 찾으면 되나. 이거 원, 사막에서 바늘 찾는 수준이네.”
“그래서 내가 다른 요괴에게서 가져온 것이 있지.”
게게로는 소매를 뒤적이다가 소리굽쇠처럼 생긴 물건을 꺼냈다. 미즈키는 신기해하는 눈으로 쳐다보며 설명을 들었다.
“땅요괴에게서 빌린 굽쇠라네. 보석을 끌어당기는 능력이 있지. 땅요괴들은 이걸로 금과 은을 찾아 자신의 동굴에 보관한다네.”
“헤에, 뭔가 서양의 드워프 같은 녀석들이군.”
“드워프가 뭔지는 모르겠다만, 그 반지에 단백석이 박혀 있다고 하니 이걸로 찾을 수 있을 걸세.”
단백석이라면 오팔을 말하는 것이다. 다이아몬드처럼 비싼 보석은 아니지만 영롱하여 옛날부터 치유의 힘이 있다고 알려진 광물이다. 마즈키는 호기심이 동해 게게로에게 슬며시 물었다.
“단백석은 치유의 힘이 있다는데, 진짜야?”
“인간들은 그런 말을 믿나?”
졸지에 바보가 되어버렸다. 미즈키는 아니면 말라며 성을 내고는 길도 제대로 모르면서 앞장섰다. 그쪽이 아니라 이 길일세, 게게로는 미즈키의 손을 덥석 잡아 골목으로 이끌었다.
수달 가족은 인간으로 변장해 작은 오르골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수달 아버지가 게게로에게 의뢰 내용을 이야기하는 동안 미즈키는 가게를 둘러봤다. 평범한 오르골보다는 장식용으로 화려하게 꾸민 오르골이 많았다. 예쁜 뿔을 자랑하는 사슴이 들어있는 스노우볼 모양 오르골을 보고 미즈키는 저도 모르게 눈을 반짝였다. 만져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리자 귀에 익은 클래식이 맑은 소리와 함께 흘러나왔다. 조금 더 기억을 곱씹어 보니 회사에서 점심시간마다 나던 그 클래식 음악이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오르골로 들어보니 꽤 아름다운 노래였다. 다음에 제목을 찾아봐야겠다며 미즈키는 다른 오르골 전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게게로는 굽쇠를 들고 수달 사장의 설명을 유심히 들었다. 반지를 잃어버린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 운하 하류 인근이지만, 물살이 워낙 세서 운하 밖 항구까지 반지가 떠밀려갔을지 모르니 그곳도 추가로 조사해주었으면 한다. 우리 수달 가족이 찾지 못한 것으로 보아 강바닥 깊은 곳에 묻혔을지 모른다. 게게로는 수달의 말에 주의하겠다고 말하면서 한 가지 질문을 했다.
“그 반지, 인간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편지에 적혀 있었던 거 같은데.”
“오오! 그것도 읽으셨습니까. 소중한 반지냐고 물어보니 백 년 전 명을 달리한 인간이 선물한 단백석을 반지로 만들어서 가지고 있었는데, 상어에게 쫓겨 부랴부랴 운하로 들어오다가 잃어버렸답니다. 진주가 너무 많이 생겨서 인간의 눈에 띄기 일보직전이니, 부디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반지는 없어져도 단백석만 찾으면 된다는 거군. 게게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인어를 생각했다. 백 년 전 잃어버린 친구를 기억하기 위해 그 유품을 반지로 만들어 소중히 간직하던 인어. 친구의 선물을 잃어버렸을 때 얼마나 심장이 철렁했을까. 게게로는 오르골을 만지작거리며 아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미즈키를 돌아봤다. 만약에 그때 미즈키를 잃었다면. 혹은 미즈키의 수명이 보통 인간과 같아 몇 년 후에 명을 달리했을 거라면…. 가사 상태에 빠졌을 때도 미즈키가 잘못될까봐 잠도 잘 수 없었는데, 상상도 하기 싫어 게게로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수달 사장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형씨, 괜찮으십니까?”
“아아, 이몸은 괜찮네.”
게게로는 바로 아닌 척하며 수달의 가게를 나왔다.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미즈키는 가게를 나왔다.
골목에서 나와 정류장에서 오타루 운하 하류로 가는 버스를 찾기 위해 벽에 붙어 있는 운행표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읽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정류장인지 운행표가 낡고 빛바래 글자를 읽기 어려웠다. 미즈키는 눈을 비비고 다시 글씨를 읽으면서 중얼거렸다.
“아오, 아무리 낡아도 그렇지 이렇게 안 읽힐 일인가.”
“어쩔 수 없군.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으니. 미즈키, 업히게나.”
“뭐? 아니 난 괜찮….”
미즈키의 의견은 간단히 묵살되었다. 게게로는 문답무용으로 미즈키를 업을 다음 제자리에서 도약했다. 순식간에 위로 솟구친 게게로는 가볍게 근처에 있는 전봇대에 착지했다. 순식간에 6m 위로 올라온 미즈키는 겁에 질려 게게로의 등에 착 달라붙었다. 종종 요괴를 따돌려야 한다는 명목으로 짐짝처럼 업혀 공중부양을 한 적은 많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미즈키는 떨리는 목소리에 애써 힘을 주며 게게로에게 간청했다.
“게, 게게로. 우리 그냥 얌전히 걸어가거나 버스 타고 가면 안 될까.”
“그건 안 되네.”
“왜, 왜애. 그렇게 급한 일도 아니, 와아악!”
운하 방향을 확인하자마자 게게로는 각력만으로 다시 뛰어올라 3층 주택 위로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뛰어서 앞쪽 건물로, 다시 뛰어서 옆쪽 건물로. 마치 에도 시대 닌자처럼 게게로는 지붕과 지붕, 전봇대와 가로등을 가로질러 운하로 달려갔다. 그 속도와 아찔함을 맨정신으로 받아내지 못한 미즈키는 얌전히 기절하는 쪽을 택했다.
애석하게도 오늘은 반지를 찾는 데 실패했다. 운하 양쪽에서 굽쇠를 강쪽에 대고 흔들어봤으나 가넷이나 사금 외에는 아무것도 달려오지 않았다. 게게로는 아쉬워하며 굽쇠에 붙은 것을 주머니에 담았다. 미즈키는 그보다 오타루가 개발된 지 100년이 지났는데도 운하에서 사금이 나온다는 게 제일 신기했다. 나중에 도쿄로 돌아가서 금은방에 맡겨야겠군. 속물적인 생각을 하다 단백석을 찾지 못해 시무룩해하는 게게로를 위로해줬다.
“운하 한가운데에 묻혀서 안 끌려나오는 걸 수도 있잖아. 내일은 한적할 때 나와서 배를 빌려 타고 조사해보자.”
게게로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느긋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그럴 때도 있고 이럴 때도 있다는 마인드인 녀석이 왜 이렇게 시무룩하지. 미즈키는 그를 달래주고자 근처에 있는 유리 가게도 들르고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꽤 근사한 식사도 했다. 게게로는 미트볼 스파게티를 보고 눈을 반짝이며 면을 흡입했다. 스파게티는 포크로 면을 둘둘 감아 먹는 거라고 알려주자 서툴게 포크질을 하더니 냅다 혀를 길게 내밀어 면을 집어먹으려 하길래 다급히 접시를 뺏었다가 둘 다 웃음을 터트렸다.
“미트볼 스파게티라니 굉장했네. 자네도 가게에서 저것 좀 팔아주면 안 되나?”
“그렇게 맛있었어? 이번 여행 끝나고 돌아가면 신메뉴로 추가해 볼까.”
“역시 미즈키가 최고라네!”
게게로가 활짝 웃으면서 미즈키를 뒤에서 업히듯이 끌어안았다. 뭐 그런 걸로 최고래, 미즈키는 겸연쩍게 웃었지만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비록 목표했던 반지는 찾지 못했지만 최고의 둘째 날 저녁을 즐기고 두 사람은 숙소로 돌아갔다.
식사는 하고 오셨느냐는 주인의 말에 근처에서 해결했으니 식사를 차릴 필요 없다고 말한 뒤 그들은 바로 온천으로 향했다. 술을 한두 잔씩 걸치며 뜨끈한 물에 추위와 피로를 녹이던 중 미즈키가 입을 열었다.
“내일은 일이 있어서 따로 다니는 게 나을 거 같아.”
“음? 다른 볼일이라니.”
미즈키는 무거운 마음으로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혈액은행 다니던 시절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있었는데, 몇 해 전에 돌아가셨대.”
신입 시절부터 미즈키를 유독 아낀 사람이었다. 영업에 필요한 기술이나 술자리 팁 등을 알뜰하게 알려주고, 미즈키가 성과를 올리면 누구보다도 기뻐하던 사람이었다. 모두가 승진과 성공에 눈이 먼 조직에서 그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에 순수하게 기뻐하는 사람이었다. 나구라에서 돌아온 미즈키가 부장과 사장에게 잔뜩 까이고 문책형 보직 이동을 한 뒤에도 종종 찾아와 점심을 같이 먹곤 했다. 은근히 문제아 취급을 당하고 있던 미즈키에게 그건 네 탓이 아니라고,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천운이라고 위로해줄 만큼 쓸데없이 사람 좋은 선배였다.
그 사람은 정년을 5년 남기고 노환이 온 부모를 간병해야 한다며 돌연 은퇴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하코다테 출신이라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훗카이도 지역으로 출장 갈 인물을 구할 때 한 번도 자진한 적이 없어서 아무도 몰랐다. 은퇴 후에는 갑자기 소식이 끊겨버렸고, 미즈키도 은퇴 준비를 하랴 카페 준비를 하랴 바쁘다는 핑계로 선배의 근황을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오타루 여행 계획을 짜던 중 영업부 동기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선배가 노모를 보살피던 중 말기 암이 발견되어 손을 써볼 틈도 없이 3년 전에 죽었다고, 자신도 몇 달 전에야 그 소식을 건너건너로 들어 알았다고.
“늦었지만 가봐야지. 여기 오기 전에 선배네 조카 전화번호는 받아서 연락은 해놨어. 미즈키라고 하니까 들어본 적 있다고 하더라. 대체 내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했으면.”
미즈키는 웃기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했지만 표정은 말이 아니었다. 게게로는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일정을 물었다.
“그러면 하코다테에서 하룻밤 묵고 올 겐가?”
“그럴 수도 있고. 일단은 도착해서 시간 보고 결정하려고.”
“그렇군. 반지 찾는 것은 걱정 말게나. 내일 새벽에 배를 타고 나가 확인해 볼 걸세. 시간이 남는다면 자네를 보러 갈 수도 있겠군.”
“말도 안 돼. 기차 표 끊는 법은 알고? 설마 또 지붕 타고 하코다테까지 올 건 아니지?”
게게로가 가만히 웃길래 미즈키는 제발 농담이라고 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다급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재미있어 게게로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대꾸했다가 제대로 말하라며 물세례에 당했다. 그 길로 유치한 물장구가 이어졌고, 두 사람은 홀딱 젖어서 온천에서 나왔다.
요깃거리로 나온 센베와 모나카를 우물거리며 두 사람은 가만히 티비를 보았다. 뉴스에서는 고베 대지진의 후유증이나 사린 가스테러 사건의 뒷이야기 등 흉흉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지난 9월에 종영한 <사랑한다고 말해줘>를 재방송하거나 퍼시픽리그 플레이오프 재방송이 틀어져 있었다. 또 어느 쪽에서는 무라야마 담화를 두고 자유민주당과 입헌민주당의 인사가 나와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채널을 돌리면 올해 홍백가합전에서 어떤 가수가 나올지 패널들이 추측을 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미즈키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뭐랄까, 좀 이상하지 않아? 어느 쪽에서는 사람이 죽고 재해가 일어나는데, 또 어느 쪽에서는 그런 것은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듯이 재밌는 드라마를 보거나 화려한 무대를 보고 있잖아. 이게 그, 되게 말로 설명하기는 복잡한데.”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했네. 세상이 갈라진 것 같다는 뜻이지?”
“바로 그거야.”
미즈키가 손가락을 튕기며 맞장구를 쳤다. 게게로는 센베를 반으로 갈라 좀 더 큰 쪽을 미즈키의 입에 물려주면서 말했다.
“사람이 언제나 슬픔과 분노로만 살 수는 없는 걸세. 때로는 저 사소한 웃음과 즐길거리가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원동력이 되지. 하지만 그것에만 매몰되면 세계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직시하지 못하고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버린다네.”
“요컨대, 균형이 중요하다?”
“그렇지.”
미즈키는 입에 가득찬 센베를 삼키고는 먼저 잠자리로 들어갔다.
“뭐, 무라야마 총리가 먼저 우리가 잘못했다고 인정한 건 좋다고 생각해.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거기에 유령족이 포함되어 있었다면 좋을 텐데. 미즈키는 마지막 말을 삼키고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려 눈을 감았다. 곧 조용한 숨소리가 시끄러운 티비소리에 섞여 들리기 시작했다. 게게로도 티비와 불을 끄고 미즈키 옆에 누워 그를 바라봤다. 잘려나간 귀와 왼눈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흉터, 그리고 유카타를 입어야 언뜻 보이는 가슴팍의 화상 자국. 폭력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그와 토키야가 바라는 평화의 시대는 아직 요원하다. 그러나 소음과 갈등은 단지 평화로 나아가기 위한 관문에 불과할 뿐. 그 앞의 미래에도 미즈키가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게게로는 눈을 감았다.
다음 날,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나온 미즈키는 탄성을 뱉으며 게게로를 깨우러 달려왔다. 눈이 한가득 내려 마당에 잔뜩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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