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치미즈] 또 한 번의 생

환생한 미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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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식당을 폐업해야 할 것 같았다.

미즈키는 책상 앞에서 자판기를 두드렸다. 원래 어머니가 운영하던 가게였으나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하고 쓰러지신 후부터 미즈키가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물려받았다. 병간호로 오픈하는 시간과 날짜가 불규칙했음에도 단골손님들 덕에 연명해 온 가게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단골 손님만으로 겨우 명줄을 붙들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들어오는 수입보다는 가게 유지 비용이 더 나갔다. 미즈키 혼자만이라면 어떻게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살겠다만 사기 피해로 인해 진 빚을 갚기엔 이 정도 수입으론 무리였다.

미즈키는 요리에 취미가 없었고 가게 운영 역시 어머니를 위해서였을 뿐으로, 작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가게를 이어가야 한다는 의지도 꺾였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잃었고 연을 이어가는 친척도 없다. 가진 것이라곤 병든 어머니와 빚뿐인 주제에 사랑은 과분했다. 처자식도 없고 친구들은 모두 도쿄니 뭐니 대도시로 떠났고 미즈키만이 홀로 남았다. 모두 정리하고 대도시로 떠날까. 미즈키는 한숨을 내쉬고는 시계를 봤다. 4시. 오픈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어머니를 간병하느라 하루 종일 가게에 있을 수 없어 미즈키는 저녁부터 새벽까지만 가게를 열었다. 이른바 심야식당이었다. 오픈 시간이 시간이다보니 손님은 주로 저녁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러 오는 사람들이었고, 가게의 메뉴도 간단한 일식과 안주류가 전부였다.

조그마한 동네라 오는 손님은 한정적이었다. 미즈키는 가게를 물려받은 지 2주 만에 모든 단골 손님의 이름과 얼굴을 외웠다. 처음 보는 손님은 명절에나 가끔 보고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백발의 남자가 사케 한 병을 시켰을 때 그 사람에게 자꾸 눈길이 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처음엔 머리 색만 보고 할아버지인 줄 알았다. 하지만 마주한 얼굴은 노년이라기보다는 중년이었다. 볼수록 청년 같은 느낌도 났다. 기모노에 나막신을 신었고 키가 컸다. 남자는 안주 하나 시키지 않고 술 한 병을 비웠다. 휴대폰을 보지도 않았고, 노트북을 꺼내지도 않았고, 음악을 듣지도 않았으며, 책이나 신문을 읽지도 않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신기한 남자였다. 남자는 허공을 응시하거나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술만 마셨다. 어딘가 붕 떠 보이는 사람이었다.

“미즈키?”

계산을 할 때가 돼서야 남자가 한 말이었다. 미즈키는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카운터의 이쑤시개 옆에 둔 명함통을 떠올리고는 명함 한 장을 뽑아 건넸다. 네, 미즈키입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가 들었을 때 마주한 남자는 피식 웃었다. 씁쓸함이 묻어났다. 비웃는 건 아닌 듯했다.

“또 오세요.”

미즈키는 남자가 가게에서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창 너머로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봤을 때는 체격이 꽤 있었는데 멀리서 보니 호리호리해 보였다. 신기루 같기도, 허깨비 같기도 했다. 또 올 것 같지 않았다.

백발의 남자는 이틀 뒤에 또 왔다. 그리고 또 이틀 뒤에 왔다. 그는 이삼 일마다 한 번씩 와서 사케 한 병을 시켰다. 조용히 술만 마시고 나갔다. 웃지도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 미즈키는 어머니의 가게를 물려받기 전에는 어떤 회사의 영업맨으로 일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봤다. 조용히 술만 퍼붓는 이런 부류 역시 접해 봤다. 십중팔구 실연이거나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경우였다. 하지만 실적이 걸려 있지 않는 한 오지랖을 부리는 건 미즈키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미즈키는 남에게 관심이 없었다. 타고 나기에도 그랬고 본인 일만 신경 쓰기에도 벅차기도 했다.

“서비스입니다.”

유독 손님이 적은 날이어서였을까. 남자가 처음으로 술을 한 병 더 시켜서였을까. 어머니의 두 번째 기일이 머지않아서였을까. 미즈키는 남자의 앞에 모듬 튀김을 담은 접시를 내려놓았다.

“고맙네.”

하지만 남자는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미즈키가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허공을 부유하던 남자의 시선이 미즈키에게 가라앉았다.

“차였습니까?”

“음?”

“빈속에 술만 마시면 속 버려요.”

쓸데없는 소리. 불필요한 오지랖. 알았지만 미즈키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어쩐지 자꾸 신경이 쓰이는 남자였다. 미즈키는 남자의 앞에 놓인 술병을 가져와 자신의 잔에 따랐다.

“미즈키입니다.”

미즈키가 자신의 술잔을 남자의 술잔에게 가져다댔다. 도자기로 만든 잔 두 개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남자의 잔에 담겨 있던 술에 파문이 일었다.

“게게로일세.”

“게게로 씨.”

고작 이름을 부른 것뿐이었다. 게게로가 갑자기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조용히 술을 마시던 것처럼 우는 것도 조용히 울었다. 커다란 사백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미즈키는 당황해서 대뜸 손에 집히는 대로 행주를 잡아서 건넸다가 내리고 휴지를 뽑아서 다시 건넸다.

“다 큰 어른이 눈물이 이렇게 많아서야.”

툭 던졌다가 또 눈물바람이 나 미즈키는 오늘따라 제멋대로인 제 입을 탓하며 위로의 의미로 게게로의 팔을 서너 번 두드렸다. 어색했다. 미즈키는 꿀꺽 잔을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튀김이 눅눅해졌을 것이다. 다시 튀겨 오겠다며 허둥댔다. 오픈 주방이라 게게로가 훌쩍거리며 그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선에 어쩐지 왼쪽 눈두덩이가 간지러워졌다. 어릴 적 생긴 흉터가 있는 자리였다.

“헤어졌다네.”

기름이 끓는 소음 사이로 게게로의 목소리가 울렸다.

“최근 일입니까?”

“오래전 일일세.”

“잊히지 않던가요.”

“잊을 수 없는 사람이네. 잊어서는 안 되지.”

“그런 소중한 사람과 어쩌다 헤어진 겁니까.”

“그럴 일이 있었다네.”

치지직. 기름이 끓는 소리. 미즈키는 튀김옷을 입힌 고구마가 기름에 뜨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끓는 기름에서 느껴지는 열기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어쩐지 공감할 수 없는 얘기구만. 미즈키는 생각했다.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것이 사람 마음. 겪어보지 못했으니 알 길이 없다.

“자, 튀김입니다.”

공감하지 못하니 위로할 수도 없다. 미즈키는 고구마튀김을 게게로의 앞에 가까이 놓는다. 그가 먹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게게로에게 필요한 것은 갓 튀긴 고구마튀김보다 추상적이고 고차원적인, 미즈키는 줄 수 없는 무형의 감정. 혹은 그 감정의 대상. 어느 쪽이든 미즈키로서는, 이 가게에서는 제공할 수 없고 그런 곳도 아니다.

이후 게게로는 조용히 술을 마셨고, 미즈키는 설거지를 하고 장부를 정리했다. 물가가 늘어서 걱정이었다. 낮 시간에 할 일을 알아봐야 하나. 그냥 가게를 정리하는 게 역시 나으려나.

가게를 나서기 전, 게게로와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에 같이 술을 마셔서 좋았네.

네, 언제든. 또 오세요. 미즈키는 습관적으로 인사했다. 고개를 들었을 때 게게로는 없었다. 창밖으로도 신기루 같은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저번에 같이 술을 마신 적이 있던가? 애초에 이걸 같이 마셨다고 할 수 있나….

말투도 그렇고 역시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다. 미즈키가 만나보지 못한 부류의 인간. 그래서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걸까. 미즈키는 계속 간지럽던 왼쪽 눈두덩이를 긁었다.


이후로 미즈키는 손님이 없는 날이면 게게로의 술 친구가 되어주었다. 연애 상담은 덤이었다. 그동안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면, 게게로의 그 사람은 게게로와 오래전에 피치못할 일 때문에 헤어졌다. 두 사람은 친구였다. 게게로는 벗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게게로는 그 사람을 벗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헤어지기 전부터 그렇게 느꼈는지, 헤어지고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런 감정이 생긴 건지는 본인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줄곧 소중한 존재였다네. 처음 만났을 때만 제외하고. 그때는 그가 정말 싫었다네. 갇혀 있던 나를 구해주겠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내게서 정보를 빼내려는 거짓말이었지. 어린 소녀의 진심을 철없는 아이의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그런 남자였어.

“그건 좀… 너무한데요.”

“너무하지. 그 사람,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미즈키?”

“네, 너무합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게게로가 웃었다. 웃는 것도 조용하다. 힘 없는 웃음. 맥이 탁 풀리는 웃음.

“그런데… 결국엔 다음 날 나를 도와줬지. 나를 구하겠다고 위험한 곳을 고민 없이 뛰어들고, 소녀를 탈출시키려고 적의 소굴로 들어가고….”

게게로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중얼중얼 외는 얼굴이 추억에 젖어들었다. 미즈키는 게게로의 말을 알아들으려고 뇌를 쥐어짜는 대신 이해를 포기하고 게게로의 얼굴을 구경했다. 분명 그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그런 얼굴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이라면, 감정이 언제 생겼는지, 그 감정을 언제 자각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의 추억만으로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 사랑인 걸까? 사랑이란 건 그렇게 괴롭게 하면서도 속절없이 행복해지게 만드는 것일까? 미즈키는 게게로가 조금 부러워졌다.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복이야. 미즈키는 왼쪽 눈두덩이를 긁었다가 왼쪽 가슴께를 긁었다. 어쩐지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생각을 읽은 듯 게게로가 불쑥 물었다.

“요새는 담배 안 피우나?”

“어머니가 쓰러지신 후로는… 집에 환자도 있고. 요식업이다 보니.”

“그런 데서는 성실하군.”

“뭐. 쉽진 않네요.”

지금도 겨우 버티고 있다. 아마 가게를 접으면 곧바로 다시 골초로 복귀할 것 같았다.

“게게로 씨는?”

“피우고 싶은데 참겠네.”

“왜요?”

“일어나기 싫네.”

미즈키의 가게는 실내 흡연 금지다. 가게가 협소해서 흡연 구역이 따로 없다. 담배를 피우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게게로 씨 게으름뱅이군요.”

미즈키는 자기가 한 농담에 자기가 웃었다. 웃기지도 않은 농담. 초등학생도 안 할 농담. 안 웃기다. 근데 어이가 없어서 웃겼다. 미즈키가 키득거렸다. 어리둥절한 게게로의 사백안을 보니 더 웃겼다. 결국 못 참고 푸하하 웃었다. 게게로가 나막신을 신은 발로 미즈키의 정강이를 툭 쳤다. 미즈키도 게게로의 다리를 찼다. 게게로가 픽 웃었다.


새로운 손님이 왔다. 툭 불거진 커다란 앞니와 타원형 얼굴이 쥐를 연상하는 얼굴이었다. 미즈키와 눈이 마주치자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게겟!” 외쳤다.

“편한 곳에 앉으세요.”

“네네.” 쥐를 닮은 남자가 넓지도 않은 가게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정말 하는 짓도 생쥐 같군. 남자는 중얼중얼거리며 의자를 꺼내 앉았다. 게게로 씨가 어딜 그렇게 계속 가나 했더니. 닮긴 닮았군. 새 손님은 먹성이 좋았다. 곱배기로 두 그릇을 먹고 나갔다. 계산할 때 이쑤시개를 뽑아 앞니를 쑤시던 그는 명함통을 보더니 이쑤시개를 떨어트렸다. 본인이었나…. 중얼거린다. “네, 선생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미즈키가 묻자 화들짝 놀라서 이쑤시개를 줍는다. “내, 내가 선생…. 아니, 아닙니다. 아무것도.” 허둥지둥하다가 미즈키를 물끄러미 보는 커다란 눈. 미즈키가 멀뚱히 시선을 받아내자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쉰다. “역시 없군요. 기억은.”

“네? 뭐가 없었나요? 저희 가게가 만족스럽지 못하셨는지…”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네, 실례했습니다.”

헐레벌떡 나가는데 뒷모습도 역시 쥐를 닮았다. 게게로 이후로 신기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미즈키는 꿈을 꿨다. 눈을 떠도 꿈은 사라지지 않고 선명했다. 자는 사이 흘린 땀이 식어서 오한이 들었다. 악몽이라고 해야 할지. 유쾌한 꿈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악몽을 자주 꿨다고 어머니께 듣긴 했지만, 꿈이란 건 깨고 나면 연기처럼 금세 흩어지기 마련이었다. 어떤 꿈을 꿨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괴로워했었던 기억조차 없었다. 어른이 된 후로는 꿈 자체를 자주 꾸지 않았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미즈키는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고, 그 꿈은 깨고 나서도 쉽게 현실에서 씻겨나가지 않았다. 무의식의 심해에서 떠오른 이 빙하는 의식의 수면으로 올라온 이후 다시 가라앉지 않았다. 일관성도 없었다. 어떤 날에는 미즈키는 군인이었다. 의미가 없는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했다. 총을 쏘고 나면 버려지는 탄피. 그것조차 못한 한 사람의 목숨.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일생, 일생이 대의 아래서는 흩어지는 낙엽이 되는 것을, 산산히 부서지는 옥이 되어야 하는 것을, 보고 듣고 겪는 꿈이었다. 어떤 날에는 미즈키는 혈액은행의 직원이었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 더 큰 권력을 쥐기 위해, 허리를 숙였고 아첨을 했고 거짓 웃음을 흘렸다. 어떤 날에는 미즈키는 깊은 산속에 있었다. 하염없이 헤매고 뛰어다녔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던 것이었을까? 어떤 날에는 미즈키는 흉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주위는 온통 묘지. 비를 흠뻑 맞으며 뭔가를 찾아 헤맸다. 그 어떤 날 중에 일부는 혼자였고, 일부는 혼자가 아니었다. 동행은 작은 소녀이기도, 소년이기도, 전우이기도, 어떤 남자이기도 했다. 누굴까. 곁눈질로 훔쳐보는 것처럼 윤곽이 보이는 듯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남자.

너무나 선명해서 꿈이 아닌 기억 같았다. 미즈키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꿈의 내용은 매번 달랐지만 결과는 매번 같았다. 공허. 꿈은 미즈키에게 빈 곳이 있음을 계속해서 알리고 있었다. 미즈키는 뭔가가 없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그리웠다. 그리움. 이 허전함을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미즈키는 꿈에서 깰 때마다 목적 없는 그리움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미즈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애초에 감히 채워도 되는 것인가. 꿈속이 미즈키는 계속 달아나고 있었다. 죗값을 치르고 있는 게 아닐까. 이건 어떤 속죄가 아닐까.


게게로의 마음에는 빈 틈이라는 것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마음이 가득 차서 다른 것이 들어갈 공간이 없어 보였다. 게게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세 명이었다. 하나는 게게로가 연애상담을 하던 잊지 못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을 만나기 전 사랑했던 아내였으며, 마지막은 아들이었다. 그 사람은 아내와 헤어지고 만난 것 같았다. 게게로는 아내를 향한 사랑은 그대로라고 했다. 사랑은 자리 싸움이 아니라네. 사랑의 용량은 한 사람 분만 있는 게 아니야. 또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 전의 사랑이 제로가 되는 것은 아니지. 사랑은 총량이 그렇게 정해진 게 아니라 계속 늘어나는 것일세. 나는 그렇다네. 아내를 사랑하고, 아들을 사랑하고, 그 사람을 사랑하네. 다른 하나를 알게 됨으로써 그 전에 알던 사람을 덜 사랑하게 되지 않았네. 오히려 더 사랑하게 됐어.

“부럽군.” 미즈키는 저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가 게게로가 “무엇이?”라고 묻자 자신이 무심결에 무엇을 말했나조차 생각이 안 나 얼떨떨해졌다.

“무엇이 부러운고, 미즈키?”

“그냥.”

미즈키는 뺨을 긁적거렸다. 어쩐지 감정 얘기를 하기가 쑥스러웠다. 백발의 남자와는 여태 했던 얘기가 사랑 얘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즈키는 남의 얘기를 듣는 것은 면역이 있었지만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미즈키?”

“글쎄.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이번 생에선 그뿐입니다.”

“그렇군.”

게게로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나이 먹은 아저씨가 사랑을 해본 적 없다는 게 퍽도 재밌는 모양이었다. 미즈키는 눈을 흘겼다. 부러운 건 맞았다. 예전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미즈키는 언제나 사랑을 단념하고 살았다. 어릴 때부터 사랑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딱히 마음이 가는 사람도 없었다. 사랑도 체질인가 보다 싶었다. 누군가는 알레르기가 있고 누군가는 달리기를 잘하는 것처럼 자신은 사랑에 소질이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단지 사랑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일까. 게게로가 그렇게나 사랑하는 사람은 누굴까. 그렇게나 사랑하던 아내와 헤어졌다면 다시 사랑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쉽지 않았던 만큼 게게로는 열렬히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호리호리하고 조용한 이 남자는 아주 적은 수의 사람만을 깊이, 오래 사랑하는 그런 남자인 것이다. 아내를 향한 그의 거대한 사랑, 미즈키는 남의 감정에 짓눌릴 것 같았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랑.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사랑이라면 얼마나 큰 사랑인가. 게게로는 두 번째 사랑 다음에도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사랑은 늘어나는 것이라고 해도, 총량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해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게게로만큼이나 많은 사랑을 준다면, 그 양이 한정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게게로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걸로 끝이 아닐까? 한 사람 분량의 사랑을 더 만들어내기란, 어렵지 않을까?

약하게 쨍한 소리가 났다. 게게로가 미즈키가 손에 든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친 것이다. 가득 차 있던 미즈키의 잔이 넘쳤다. 술이 손을 적셨다. 역시 부러웠다. 사랑을 하는 게게로가. 게게로의 사랑을 받는 그 사람이. 낭패였다.


달라질 것은 없었다. 게게로는 이삼 일마다 가게를 찾았고, 미즈키는 그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주며 술을 마셨다. 그뿐이었다. 미즈키는 게게로에게 자신의 몫의 사랑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이기적인 일이었다. 미즈키는 이기적인 사람을 싫어했다. 사랑이 이렇게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드는 것이라서, 본능적으로 사랑을 피해 왔던 것일까? 이런 게 사랑이라면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은 그 자체도 이기적이어서 미즈키가 안 하겠다고 해서 사라지지는 않았다.

게게로가 가게를 찾지 않는 날에는 생쥐같이 생긴 남자가 종종 찾아왔다. 그 남자 말고도 신기한 손님들이 제법 늘었다. 매출에 유의미한 변화를 줄 정도는 아니지만, 낯선 손님이 한 번 찾아오기도 했고 다시 방문하기도 했다. 생쥐남처럼 제법 귀엽게 봐줄 만한 신기한 부류가 있는 한편, 어쩐지 음침한 느낌의 손님들도 있었지만, 주로 심야에 손님을 받는 가게인지라 미즈키로서는 이런 수상한 주정뱅이 손님이 오히려 이제서야 오는구나 싶기도 했다.

이 손님은 주정뱅이라기엔 점잖다고 생각했다. 주문한 것은 맥주 한 잔뿐. 그마저도 마시지 않았다. 그저 뚫어져라 술잔을 쳐다만 보고는 일어섰다. “또 오십쇼.” 외치고 손님이 앉았던 자리를 정리하러 간 미즈키는 맥주잔에 가득 찬 물에 의아해졌다. 마신 걸 못 봤는데… 언제 물로 채워놓았을까? 분명 저 손님이 있던 사이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누가 지나가며 물을 쏟았는지 자리가 물바다였다. 물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닦았다. 미즈키는 왠지 찜찜해지는 기분을 털어낼 수 없었다. 바닥의 물을 머금은 물걸레가 지나갈 때마다 바닥에 물길을 만들었다. 살갗이 눅눅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제 게게로가 와서 오늘은 안 올 줄 알았는데 게게로가 폐점 시간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왔다. 찜찜한 손님이 왔던 자리에 앉았다. 앉은 사람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마음 한켠의 눅눅함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늘 마시던 걸로?”

“오늘은 다른 일이 있어 왔다네.”

전할 말이 있어 왔다는 게게로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뭔지는 몰라도 좋은 일 같은데 그럼 축하를 해야지.”

미즈키는 자신이 쏘는 것이라며 게게로가 늘 마시던 술을 가져왔다. 게게로는 사양하지 않고 잔을 받았다.

“미즈키, 그대를 만난 지도 석 달이 지났구려.”

“그래요, 이제 바람이 제법 차가워졌어요.”

“이제 말을 편하게 해줄 때도 되지 않았나.”

“그래도 손님인데 말을 놓을 수가 있나요.”

“처음 만났을 땐 보자마자 말을 놨으면서….”

“언제요?”

“서운하네.”

“아니 그러니까 언제?”

“이렇게 앞으로도 말을 놓아주길 바라네.”

게게로가 싱긋 웃었다. 당했군. 미즈키는 이마를 짚었다가 따라서 웃었다.

“그래서 할 말이란 게 뭡니까?”

게게로가 얼굴을 찌푸렸다. 어째서 또 존대로 돌아갔냐는 듯한 표정이 훤히 읽혔다.

“내 아내에 대해선 익히 들었겠지.”

“이와코 씨 말이죠.” 미즈키가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넘겼다.

“이와코가 왔네.”

그리고 미즈키는 사레가 들렸다. 사별한 게 아니었어? 하다못해 헤어진 거 아니었어?!

“이와코가 세계 일주를 마치고 드디어 돌아왔다네. 자네에 대해서는 편지로 종종 소식을 전했는데, 이와코가 자네를 만나고 싶다고 하지 않는가.”

“잠깐만.”

미즈키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와코 씨가 살아 있다고?”

“그렇다네.”

“그럼 그 사람은?”

“그 사람도 살아 있다네.”

“이와코 씨랑은 그럼 별거한 겁니까?”

“아니라네. 우린 부부라네.”

“그럼 그 사람은요?”

“그 사람은 그 사람이라네.”

“아니 내 말은, 사랑하냐고.”

“물론. 석 달 동안 그걸 말하지 않았나.”

“아내가 있는데? 아내를 사랑하는데?”

미즈키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 새끼 뭐야? 멀뚱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게게로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아니, 테이블을 내리치고 싶었다. 주먹으로, 아니 발로, 아니 뭐든… 도끼라든지. 다 때려부수고 싶었다.

“미즈키여, 눈빛이 무섭네….”

“못 합니다.”

“응?”

“못 한다고.”

“무엇을 말인가?”

“난 당신 아내 못 만나.”

“어째서?”

“어째서라니. 그야…. 못 만난다면 못 만나는 거지.”

미즈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건 아니었다.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야. 게게로의 팔을 잡아서 일으켰다. 그리고 문 밖으로 등을 떠밀었다. 게게로의 등근육이 미즈키의 손바닥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져 다들 외투를 걸치는데도 게게로는 언제나 기모노 차림이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살아 있고 당신 곁에서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한눈을 팔아? 그러고도 사랑을 논할 자격이 있어?”

“미즈키, 오해일세.”

“이건 뭐야? 협박이라도 하는 건가? 아내가 없는 사이 딴 사람과 불륜한 얘기를 실컷 늘어놓고는 그 사람을 아내와 만나게 하려는 건 무슨 수작이지? 목적이 뭐야? 아내 앞에서 입조심하는지 보겠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

마른 몸일지라도 체격이 더 크니 버티려면 버틸 수 있을 텐데 게게로는 순순히 떠밀렸다. 그게 왠지 또 짜증이 나서 미즈키는 게게로를 더 힘주어 밀었다.

“게게로, 나는 너를 그렇게 보지 않았다. 당신이 이럴 수 있는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미즈키. 진정하고 일단 내 말을…”

그리고 동그랗게 뜬 사백안 앞에 대고 문을 쾅 닫았다. 문전박대는 좀 심했나 싶지만. 당황스러웠다. 잠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창 밖을 내다보니 게게로는 기척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허탈했다. 내쫓아놓고 나도 참 웃기는 새끼야. 미즈키는 비틀비틀 게게로가 앉았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팔꿈치로 잔 하나를 쳤는지 테이블에서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났다. 치워야 하는데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미즈키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동안 게게로가 했던 사랑에 총량이 없니 어쩌니 했던 소리가 불륜 미화였단 말인가?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너무 흥분했다. 일단 감정을 가라앉혀야 했다. 어차피 남의 일인데, 이렇게까지 화내 봤자 뭐가 달라진다고…. 하지만 남의 일이 아니었다. 이제 게게로는 미즈키에게 남이 아니었다. 그게 문제였다. 기분이 바닥으로 끌어내려졌다. 우울감이 삽시간에 미즈키를 휘감았다. 다혈질일 때가 있긴 해도 우울한 적은 잘 없었던 미즈키는 낯선 감정에 금세 젖어들었다. 살갗의 눅눅함이 짙어졌다. 건조한 늦가을에 한여름의 습기가 감돌았다. 공기가 무거웠다.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물속에 있는 기분. 발치의 술잔 파편. 그 사이 흘러버린 술. 고작 몇 모금 분량일 텐데 발을 흥건하게 적시는 기분이었다. 다리가 붕 뜨는 것 같으면서도 누가 바짓깃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다. 왼쪽 눈이 욱신거렸다. 미즈키가 한 손으로 한쪽 눈을 가렸다. 퍼런 신기루 같은 것들이 떠다니다가 사라진 것 같기도 했다. 미즈키는 고개를 들었다. 가게는 물에 잠겨 있었다.

“뭐야?”

수면이 빠르게 불어났다. 흐르는 물이 아닐 텐데 계속 물결이 쳤다. 미즈키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얼굴이 결국 가라앉았다. 발이 땅바닥에 닿지도, 얼굴이 수면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헤엄을 쳐 창문으로 겨우 갔지만 아무리 창틀을 잡고 발로 차도 창문은 깨지지 않았다. 문으로 헤엄을 쳐 문고리를 돌려도 열리지 않았다. 밖으로 열리는 문인데 어째서? 갑작스러운 상황에 호흡을 마실 겨를도 없었다. 미즈키의 폐에 담긴 숨은 금세 바닥이 났다. 숨을 참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산소가 차단되자 의식이 빠르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헛되이 숨을 마시려고 한 시도는 산소 대신 정체불명의 물만 기도로 잘못 들어가는 결과를 낳았다. 미즈키는 질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물이 빠져나갔다. 빠져나가는 물살을 따라 미즈키도 휩쓸렸다. 물속에 둥둥 떠다니던 식칼이 미즈키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대로 칼날에 찍힌다. 미즈키가 눈을 질끈 감는데 갑자기 몸이 허공으로 떴다. 눈을 다시 뜨니 밧줄이 몸을 감고 있었다. 아니, 머리카락이었다. 익숙한 백발. 그 하얀 타래를 따라가니 그 끝에는 기모노를 입은 남자. 눈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미즈키는 의식을 잃었다.


“수신이 끝내지 못했던 일을 끝내려고…”

“하지만 다른 생인데…”

“…영혼은 같으니…”

미즈키는 두런두런 들리는 말소리에 의식을 차렸다. 딱딱한 곳에 누운 듯 허리가 불편했다. 하지만 베개를 받쳤는지 고개는 편안했다. 미즈키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려고 애썼다. 어떤 기척이 느껴졌는지 말소리가 멎었다.

“미즈키.”

나긋한 목소리. 발원지가 가까웠다. 미즈키는 자신이 벤 것이 베개가 아니라 화자의 무릎이라는 것을 보지 않고도 깨달았다. 차가운 손가락이 이마를 스쳤다. 미즈키. 다시 부르는 소리에 미즈키는 힘겹게 눈을 떴다.

과연 게게로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문이 여닫히는 소리에 그쪽을 보니 창문 밖으로 생쥐남이 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게 무슨….”

미즈키는 말을 잇지 못하고 기침을 토했다. 몸을 옆으로 돌리고 한참 기침을 하는 그의 등을 게게로가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다시 눕게나. 게게로가 미즈키의 어깨를 잡아 눕혔다. 물속에서 용을 썼더니 온몸의 힘이 쭉 빠져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 미즈키는 순순히 게게로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감긴 눈두덩이 위로 차가운 손이 덮였다. 불쾌하지는 않았다.

“이 세상에는 인간 외의 존재가 있다네.”

게게로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미즈키를 공격한 것은 물을 다루는 요괴. 그 요괴를 게게로가 막을 수 있었던 것은 게게로가 유령족이기 때문이었다. 과학문명이 발달하며 인간이 영역을 끝없이 넓혀가는 현대, 요괴와 유령족의 세계는 빠른 속도로 좁아지고 있고, 그 수도 줄어들고 있다. 좁아지는 영역을 지키고 넓히기 위해 요괴들은 서로를 공격하고 견제한다. 게게로 역시 견제당하고 있다. 그가 자주 만나는 인간의 위치가 노출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자네가 다친 건 나 때문이네. 미안하네, 미즈키.”

자네를 또다시 잃을 뻔했네. 미즈키의 뺨에 물이 떨어졌다. 미즈키는 게게로의 손을 쳐냈다.

“그만 울어. 물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해. 당신이 공격한 것도 아닌데 당신이 왜 사과해.”

“미안하네. 그쳐 보도록 하겠네.”

하지만 게게로는 쉽게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미즈키는 게게로의 무릎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기운이 없었다. 화를 낼 기운조차 빠져버렸다. 얼굴을 보기 싫어 차라리 그냥 한숨만 푹 쉬고 눈을 감아버렸다. 정신없는 하루였다. 게게로에게 화를 냈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했고 기절까지 했다. 눈을 감았다는 것만으로 잠이 올 법했다. 미즈키의 젖은 앞머리를 넘겨주는 게게로의 조심스러운 손길은 잠을 쫓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즈키여, 유령족은 인간과 다른 존재라네. 인간은 죽지만 요괴는 육신이 사라질지언정 죽지 않는다네. 우린 아주 오랜 생을 사는 거지. 그러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된다네. 그러면 사랑하기도 하고 잃기도 하고…. 이렇게 긴 생에서 살아가다 보면 한 사람 이상을 사랑하게 되기도 한다네. 그게 우리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자 생존이라네. 나는 미련하게 여태 한 사람만을 사랑했을 뿐이지. 그리고 육신이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는 일을 한참을 반복하다가 더는 육신이 다시 만들어질 기력이 남지 않은 날까지… 어쩌면 영혼마저 완전히 파괴되어 존재 자체가 이 지구상에서 소멸되는 날까지 나는 오직 한 사람만, 이와코만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네. 그런 이와코를 잃었고… 그 남자를 만났네. 그 남자는 이와코를 찾아주었어. 우린 친구가 되었지. 하지만 어떠한 일 때문에 그 친구는 나에 대한 기억을 잃었네. 그래도 운이 좋아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네. 나와 이와코의 아들을 사랑하고 키워주는 그 친구를 지켜보기도 하고 지켜줄 수도 있었다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아들을 사랑하는 친구를 보며 그 역시 사랑하게 되었다네. 자네도 아는 이야기지. 이제 내가 연인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 되었고 이 마음은 결코 부끄럽지도 죄스럽지도 않은 마음이라네. 나는 그렇게 내 아내를 사랑하듯 그 친구 역시 사랑하고 있다네. 그리고 이 사랑을 자네에게 부정당하지 않는 것이 내게는 정말 중요한 일이라네. 그러니 친애하는 벗이여, 미즈키여. 부디….

미즈키는 그만 좀 울라고 타박할 기운도 없었다. 가물가물한 정신을 붙잡기도 힘들었다. 미워하지 않아. 겨우겨우 말했던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 남자, 누굴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했다.


미즈키는 가게 문을 닫았다. 도저히 게게로를 볼 자신이 없었다. 원래도 가게 문을 닫으려고 했었으니까라고는 하지만 그냥 게게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단골들에겐 이런 실례도 없었다. 개인 사정으로 무기한 쉬게 되었다고 종이 한 장 붙여놨는데 이대로 아예 문을 닫을지는 결심이 서지 않았다. 다짜고짜 일주일을 쉬었는데도 마음이 잡히질 않았다. 확 문 닫고 도쿄로 떠날까 그렇게 많이 생각했으면서 막상 장사를 접으려니 미련이 남았다. 가게를 이어받을 사람을 찾아야 하나. 하지만 장사도 잘 안 되는 이런 시골 마을 가게를 이어받을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도쿄로 가면 또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다시 영업 일을 해? 미즈키는 이제 비위 맞추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게게로의 무지막지한 러브 스토리를 들은 이후로는 권력이니 뭐니 그런 허영이 다 부질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고작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을 뿐인데. 미즈키는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기나긴 일생의 바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게게로 앞에서 고작 내비친 미워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마음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 초라한 마음만큼의 사랑을 나눠달라고 은근히 구걸을 한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게게로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도, 자신이 그런 의도로 말하지 않았다고 해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다. 미즈키의 이기심은 갈수록 커질 것이다. 그러니 끊어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게 회피인 것 역시 부끄럽긴 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효과가 좋은 수이기도 했다. 참 쉬웠다. 게게로가 찾아오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사이. 미즈키가 찾아갈 수 없는 사이. 게게로의 이름과 사랑하는 사람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 전화번호고 뭐고 연락처 하나 없었다. 게게로에겐 미즈키의 명함이 있겠지만 미즈키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가게를 쉬겠다는 얘기, 게게로도 봤겠지. 그 뒤로도 한 번 더 왔을까. 아니면 그 뒤로 영영 오지 않았을까. 앞으로도 안 올까. 이와코 씨는 만났을까. 이와코 씨에겐 뭐라고 했을까.

아무튼 일주일이다.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났다. 미즈키는 나갈 채비를 했다. 얼마나 더 쉬게 될지는 몰라도 식재료 정리를 해야 했다. 도망치듯 떠난 후 한 번도 안 갔으니 상한 재료도 있을 것이다. 미즈키가 밖을 나섰을 때는 화창했다. 정오도 안 된 시각. 오전에 가게로 향한 것은 가게를 물려받은 후 처음이었다. 게게로는 언제나 한밤중에 오는 것을 의식한 것도 있었다. 아니, 그래서였다.

가게 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밝은 갈색의 머리. 멀리서 보니 영감님 같아 보이기도 했는데, 얼굴이 보일 정도로 다가가니 청년이었다. 어떻게 보면 학생 같기도 했다. 나이를 종잡을 수 없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다. 게게로보다도 키가 클 것 같았다.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화창한 하늘 아래서도 그늘져 보였다. 미즈키가 다가오자 그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분명 처음 보는데 왠지 익숙한 얼굴이었다. 보고 있을수록 어려 보이는 것 같아 미즈키는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원래도 이 시간에는 문을 안 열고 이제 장사 접을 거니까 앞으로 오지 마라….

미즈키가 주변을 청소하며 주절주절거리는 내내 말 없이 그를 지켜보기만 하던 청년이 미즈키가 하던 일을 멈추자 불쑥 내뱉었다.

“배고파.”

아니 장사 접을 거라니까? 미즈키는 당황스러워서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시커먼 남자였다. 그런데 왠지 작은 동물을 상대하듯 마음이 약해져서 거부할 수 없었다. 나도 나이를 먹나. 연하에게 약해지는군. 미즈키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가게 문을 열었다.

“먹을 만한 건 없을 것 같지만 뭐라도 해줄 테니 그래도 괜찮으면 들어와.”

도피하듯 떠나서 모든 게 그대로 있었다. 채소가 시들고 마르긴 했지만 다행히 상한 건 많이 없었다. 쓸만한 재료를 확인하고 가늠하며 일단 손부터 씻는데 미즈키의 뒤를 따라 들어온 청년이 구석에 털썩 앉더니 메뉴판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팬케이크.”

“팬케이크?”

“팬케이크가 먹고 싶어.”

“팬케이크는 만들어 본 적 없는데.”

미즈키는 일식 전문이었다. 디저트 이런 거 만들어본 적도 없고 즐겨 먹은 적도 없었다. 무더운 여름이면 정 못 이겨서 동네 슈퍼에서 하드 바를 사 먹는 정도였다. 미즈키는 달콤한 음식보다는 짭짤한 안주파였다. 그런데 팬케이크라니. 어머니가 가끔 들여다본 요리책이라도 뒤져봐야 할 성 싶었다.

“그러면 만드는 방법 좀 찾아볼게.”

“그냥 지금 만들어.”

“어떻게 만드는지 모른다니까?”

“밀가루, 달걀, 버터, 우유만 있으면 되지. 그냥 대충 섞어서 구우면 되잖아.”

왠지 모를 박력에 압도된 미즈키는 “이상한 게 만들어져도 모른다.” 하면서 책임을 떠넘기고 머릿속의 어떤 팬케이크라는 허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뭐가 들어가는지는 말해줬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미즈키는 살면서 한 번도 팬케이크를 만들어 본 적 없고 어머니가 만들어 준 적도 없었다. 누가 만드는 걸 본 적도 없었는데 어쩐지 익숙하게 팬케이크를 만들게 되는 자신이 신기했다. 처음 한 장은 불 조절을 잘못해서 가장자리가 타고 모양도 찌그러졌지만 두 번째부터는 성공이었다. 세 장을 부쳐 차곡차곡 접시에 쌓아 청년에게 내밀었다. 맛이 궁금해 가장자리를 태운 걸 젓가락으로 끝을 조금 찢어서 먹어봤는데 역시 달콤한 건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도 먹을 만은 했다. 미즈키가 시식하는 동안에도 청년은 멀뚱멀뚱 팬케이크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당장 내놓으라고 할 때는 언제고?“

“식기 전에 먹어. 따뜻할 때.”

그제야 청년이 포크를 들었다. 미즈키는 피식 웃었다. 역시 키만 깡뚱하니 크고 보기보다 어렸나. 포크를 주먹 쥐듯 쥔 모습이 어린아이 같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먹는 모습을 왠지 빤히 쳐다보게 됐다. 실례인 걸 아는데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잘 먹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나이가 어린 손님을 별로 받은 적이 없어서 이러는 건가. 내가 정말 늙은 건가. 미즈키는 애써 청년에게서 눈길을 돌리려다가 멈췄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던 청년이 처음으로 웃었다.

“맛있어.”

웃으니 인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살짝 끝이 올라간 코. 뾰족한 입술. 가지런한 치아. 미즈키 씨, 맛있어. 이보다 좀 더 앳된 목소리. 포크를 쥔 좀 더 작은 손. 평생 미즈키 씨가 해준 팬케이크 먹고 싶어. 그래, 해줄게. 자네에게도 언젠가 자신보다 소중한 사람이 생길 걸세. 그런 날이 올까? 물론. 척박한 묘지. 생이 존재하지 않는 죽음의 공간에서 귀를 찢던 울음소리. 그 울음소리에 요동치던 가슴. 손안에 쥐었을 때 따뜻하던 온기. 품에 끌어안았을 때 느껴지던 맥박. 처음 말을 하고, 처음 걷고, 처음 웃고, 처음 이가 빠지고, 처음 친구가 생기고, 처음 아이와 싸우고. 그래도 사랑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 느리게 자라는 유령족의 아이. 빠르게 쇠하는 인간의 육체. 마지막 싸움. 화해는 언제나 팬케이크. 반찬 투정을 할 때도 팬케이크는 잘 먹었으니까. 감정 표현에 서툰 두 남자는 늘 그렇게 풀었으니까. 두 사람만의 전통이었다. 팬케이크를 해두고 기다렸다. 마을에 재앙이 닥쳤다. 물이 모든 것을 휩쓸었다. 뒤덮었다. 아이가 오히려 지금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팬케이크 못 먹게 되었네. 그렇게 생각했던가. 마지막 기억이…

“키타로….”

눈이 마주치고, 미즈키는 기절했다.


꿈을 꿨다. 혈액은행에 다니던 자신. 역겨운 사람들에게 굽신거리다가 마을로 떠나던 자신. 감옥 같은 마을을 벗어나고파 하던 아가씨를 만나던 자신. 한 남자를 만나고 군인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답지 않게 참견을 하고, 그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그를 속이고, 따라가고, 위험해지고,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담배 한 대를 나누어 피우고, 거대한 벚나무와 짙은 피, 피 냄새, 무수한 원혼과 살육과 착취, 탈출했고 달아났고 남자는 아내와 아들과 미래를 맡긴다. 그의 아내에게 조끼를 벗어주고 달린다. 계속, 계속… 그리고 미즈키는 눈을 뜬다. 낯선 공간. 눕혀져 있다.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무의식적으로 입을 벌리니 목이 건조해 기침이 터진다. 그러자 인기척이 희미하게 느껴진다. 새하얀 백발. 키타로와 닮았지만 조금 다른 얼굴. 기억보다 좀 더 나이가 든 얼굴. 물컵이 입술에 닿는다. 미즈키는 천천히 물을 마신다. 건조한 목구멍에 물기가 스민다. 미즈키는 말할 수 있는 상태가 되자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어린 아들을 홀로 남겨두고 죽어버린 것? 이와코를 무사히 데리고 탈출하지 못한 것? 기억을 잃어버린 것? 이와코와 게게로를 보고 달아난 것? 너무 늦게서야 돌아온 것? 키타로를 괴물의 아이라며 죽이려고 했던 것? 지은 죄가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속죄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미즈키를 도로 눕힌 후 게게로는 잠시 말이 없었다. 미즈키는 재촉하지 않았다. 괜찮네. 게게로가 운을 뗐다.

“갑작스러웠을 게야. 내가 조바심을 냈어. 몇십 년을 기다렸는데 며칠을 더 못 참아서.”

미즈키는 대화가 엇나간 것을 알아차렸다. 뭔가가 꼬였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뭐가 꼬인 거지. 미즈키는 머리를 굴리려고 했지만 복잡했다. 여러 기억이 뒤죽박죽이었다. 지금 생의 기억이 과거 같고 이전 생의 기억이 현재 같았다. 마지막으로 게게로를 봤을 때는 흉가도 아니었다. 벚나무 아래도 아니었다. 미즈키는 시간 순서대로 기억을 더듬어갔다. 붕 떠 있던 것 같은 느낌이 중력이 작동하듯 서서히 무게를 찾고 땅 위로 가라앉는 듯했다. 가장 최근은 미즈키의 가게였다. 미즈키의 어머니가 하던 가게. 미즈키가 물려받은 그 가게. 물을 다루는 요괴가 와서 게게로가 구해주기 전, 그 전에 게게로가 미즈키에게 와서 무슨 말을 했더랬다. 그걸 말하는 거군. 머리가 지끈거렸다. 미즈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것도… 미안하게 됐어.” 미즈키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멀미를 하는 것처럼 어지러워졌다. 크게 호흡하며 구토감을 억눌렀다. 천장을 올려다봤다.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지금 해야 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줄곧… 많았다. 미즈키는 게게로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네가 바라고 내가 희망하던 그런 미래는 아니게 됐지만…”

“…….”

“그래도 잘 자랐어. 이런 세상인데도. 역시 너와 이와코 씨의 아들이라 그렇겠지.”

“미즈키.”

“미안하다.” 미즈키는 다시 한번 사과했다.

“미안하다, 게게로.”

미즈키의 시선이 더 아래로 내려갔다. 가지런히 가슴 위에 얹어진 자신의 투박한 손이 보였다. 이전 생에서는 칼과 총을 잡았던 손. 도끼를 휘둘렀던 손. 이번 생에서도 칼을 들기는 했다. 식칼이었지만. 어떤 것은 달라지고 어떤 것은 변하지 않는다. 두 번째의 짧은 생을 사는 인간의 손 위로 기나긴 일생을 사는 이의 하얗고 길쭉한 손이 얹어진다.

“나도 줄곧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네.”

게게로의 손이 천천히 미즈키의 손을 감싸쥐었다. 눈을 마주하지 않아도 맞닿은 손으로 한 명의 인간과 한 명의 유령족은 연결됐다.

“고맙네, 미즈키.”

“우리 아들이 미래를 가질 수 있게 해줘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그 말을 꼭 하고 싶었네.”

미즈키는 고개를 들었다. 마침내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웃었다.

“하여간 울보라니까.”

미즈키는 눈을 감는다. 요새 나 너무 자주 기절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가 흩어진다. 한숨 더 자두게. 정신적으로 지쳤을 테니… 어깨인지 가슴 부근을 토닥이는 손길에 미즈키는 다시 수마에 빠진다.


그리고 눈을 뜨면 얼굴이 있다. 사진 속에서, 그림 속에서 봤던 얼굴. 품에 안고 달렸던, 흉가에 다시 찾아갔을 때 봤던, 혹사당했던, 생기를 빨렸던 그때의 얼굴이 아닌 생기가 넘치는, 생명력이 있는, 살아 있는 얼굴. 치렁치렁 늘어졌던 머리카락은 짧아졌다. 발랄한 숏컷과 반짝이는 눈.

“이와코 씨.”

“미즈키 씨.”

감히 상상도 못 해본 재회였다. 어색할 것만 같았는데, 이와코가 미소를 짓는 순간 불편함이 사라진다. 사람이 타고난 분위기 때문일까. 이와코가 겪은 일을 생각한다면 평생 인간을 증오할 법한데도 이와코는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마음이 느껴졌다. 적의가 송곳처럼 뚫고 나오듯이 선의 또한 햇살이 내리쬐듯 사람을 감싸는 것이다.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이와코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다. 미닫이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간다. 둘씩 마주보는 식탁에 게게로와 키타로가 대각선으로 마주보고 앉아 있다. 게게로의 옆자리에 이와코가 앉고, 미즈키는 키타로의 옆에 앉는다. 이와코와 키타로가 마주보고 게게로와 미즈키가 마주본다. 식탁 위에 올려진 미즈키의 손을 게게로가 잡는다. 고개를 숙인다. 입술이 스치자 미즈키의 몸이 긴장한다. 이와코로, 그다음은 키타로로 향하는 미즈키의 시선.

“기다렸네, 미즈키. 우리 모두 말이야.”

미즈키의 시선이 다시 게게로에게 향한다. 게게로는 고개를 돌린다. 이와코와 입을 맞춘다. 미즈키의 손을 맞잡은 채로.

사랑은 총량이 그렇게 정해진 게 아니라 계속 늘어나는 것일세. 나는 그렇다네. 아내를 사랑하고, 아들을 사랑하고, 그 사람을 사랑하네. 다른 하나를 알게 됨으로써 그 전에 알던 사람을 덜 사랑하게 되지 않았네. 오히려 더 사랑하게 됐어. 나는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아들을 사랑하는 친구를 보며 그 역시 사랑하게 되었다네. 이제 내가 연인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 되었고 이 마음은 결코 부끄럽지도 죄스럽지도 않은 마음이라네. 나는 그렇게 내 아내를 사랑하듯 그 친구 역시 사랑하고 있다네.

게게로의 아주 크고도 아주 좁은 마음에 자리잡은 제3의 사랑. 아내와 아들과 함께 자리잡은 사랑. 그 사랑의 대상이 누군지 미즈키는 더는 모를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미즈키는 이전에도 지금에도 인간으로 태어났고 인간으로 자랐다. 인간이 아닌 존재의 사랑은커녕 같은 인간의 사랑조차 기대하지 않고 살았다. 이래도 괜찮은 것인가? 미즈키는 키타로를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불편해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옆에서 손을 잡고 있는 두 남자보다는 앞에서 입을 맞추는 부모를 흘겨 보고 있다. 사랑이 넘치는 부부와 둘의 애정 행각을 불편해하면서도 익숙해하는 아들. 그래. 미즈키는 인정했다. 이걸 원했노라고. 게게로와 이와코가 있는 키타로. 모자라지 않는 사랑을 받는 키타로. 이와코를 만난 게게로와 건강하고 속박되지 않은 이와코. 미즈키는 게게로의 손을 마주 잡았다. 힘을 실었다. 게게로가 미즈키를 바라보았다. 일단은 오케이다. 미즈키는 생각했다. 지금은 이거면 됐다고, 이거로 괜찮다고. 모두 살아 있다. 살아서 만났다. 미즈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다렸어,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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