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타로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 감상 -1-

저는 왜 이리 미즈키와 게게로를 좋아할까요? 오타쿠의 흔한 주접입니다.

※ 지병의 증상이 재발한 후 빌빌거리면서 아무것도 못 하다가 다행히 약효가 잘 들어서 좀 괜찮아졌습니다. 진생판 개봉에 앞서 저의 덕심을 언어로 표현해보고 싶은 나머지 대학교 레포트 쓴다는 심정으로 리뷰를 써 봅니다.

유난이라고요? 본래 오타쿠란 새끼들은 덕질 대상을 굳이 굳이 숭고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려니 해 주십시오.


대중은 교지(狡知)를 지녔다고 확신하게 될 때가 있다. 사실은 전혀 관심이 없는 주제를 때로는 천박하게 때로는 숭고하게 덧칠하며 그 시대에 맞는 최적의 상으로 바꾼다. 대중이 만들어낸 상은 어디까지나 가상에 속하지만, 현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힘없는 물결이 바위를 깎아나가듯 현실을 새롭게 주조한다. 사람들은 감정을 무시하지만 결국 열망과 동경은 현실에 존재하는 법. 대중의 무시무시한 힘은 그런 점에서 언제나 개인을 압도한다.

파시즘이 사악한 체제라는 문장에는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파시즘이 매혹적이라는 문장에는 다른 사람—특히 ‘대중’이라고 불리는 압도적인 힘—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다. 혹자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마치 ‘파시즘’과 ‘매혹’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이……. 그러나 그들은 틀렸다. 모든 체제는 그 안에 사람을 매혹하는 요소를 지니기 마련이다. 어떤 체제도 내부 구성원의 적극적인 협조와 수긍이 없으면 더는 유지될 수 없다. 그래서 파시즘은 아름다움과 올바름의 가면을 쓰고 온다. 대중의 눈을 기만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대중이 파시즘에 열광할 수 있도록.

오오누키 에미코의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는 일본의 군국주의 체제가 어떻게 아름다움을 이용했는지 말한다. 사쿠라(여기서는 벚꽃으로 순화하지 않겠다)는 일본에서 계속 귀중한 의미를 지닌 꽃이었다. 그러나 오오누키 에미코는 사쿠라의 아름다움을 추적하다가 그 아름다움이 어떻게 전쟁에 병사들을 동원하고 옥쇄를 강요하는 데 동원되었는지 알아차리고야 만다. 완독한 때가 오래되어 자세한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나를 압도했던 단 하나의 감정이 있다면 단연 ‘공포’였다. 거대한 체제가 어떻게 개인을 억압했는지, 그리하여 일본 군인으로 복무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은 모두 다름에도 왜 결국 같은 미래—카미카제의 일원이 되어 공중에서 부서지는 미래—를 향해 나아갔는지, 그리고 그 비극을 체제는 어떤 식으로 아름답게 치장했는지, 오오누키 에미코는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대중은—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아름다움에 열광한다. 올바름을 추구한다. 체제에 고분고분 순종하고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딱히 적극적이지 않더라도 자신을 매혹시키는 체제에 그런 방식으로 가담한다. 거대한 무언가가 약속하는 빛나는 미래, 반짝이는 영광, 집단의 결속은 결국 개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평등이 없다면 한낱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법인데도 그렇다. 어차피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고 무리를 지어 행동하는 동물인 법이다. 그러니 체제를 선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빼어난 프로파간다를 만드는 것이다.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매혹시켜서 결코 체제를 의심하지 않도록 길들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질 수 있겠다.

‘대중’, 즉 거대한 무리를 이룬 군중이라는 하나의 집합체에 개인은 아무런 균열을 낼 수 없다는 말인가?

나는 여기서 ‘그렇지 않다’라고 선언하겠다.

대중이라는 존재는 사실 수많은 개인의 집합체이다. 그들은 단일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분열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강제할 수 없기 때문에, 대중이라는 무리에는 언제나 균열이 일어난다. 어떤 종류의 파시즘적 체제, 전체주의적 시스템이 형성될 때 ‘건전한 문화’와 ‘나쁜 문화’를 나누고 끊임없이 검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름다움에 인간이 끌린다는 말은, 더 아름다운 것이 나타났을 때 인간은 순간적으로 그것에 사로잡혀 버린다는 뜻이다.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은 결속에 균열을 내고 사색하는 시간을 만들고 더 나아가 의심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다는 뜻이다. 그러니 개인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의심을 통제해야 하고, 의심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사상을 통제해야 한다. 거대한 집단과 다른 이질적인 생각 자체를 말려죽여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균열이란 개인의 아주 사소한 체험에서도 피어난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직접 몸에 부딪치고 겪어낸 경험들이 쌓여서 균열과 의심을 만들고 이질적인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개인은 모두 서로 다르고, 누군가는 그 다름 때문에 차별과 편견을 겪는다. 그런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서 주류와는 다른 생각을 형성한다. 개인의 적나라한 체험은 체제의 프로파간다에 포섭되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다. 고백과 표현, 그것이야말로 체제의 결함을 폭로해 그것을 받아들이는 누군가가 체제를 의심하게 만든다. 결국 아름다움에는 더 정교하게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우리는 ‘미즈키’라는 사내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간략하게 ‘게나조 재밌었어용~ 감독 인터뷰 따위는 보지 않았지만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용? 미즈키가 게게로에게 박는 모습을 보고 싶어용 에헤헤헤’라고 줄여도 되지 않았을까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숭고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오타쿠의 못된 습성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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